HK(인문한국) 사업단 홈페이지

HK(인문한국) 사업단

웹진 문화로(文化路) 내용 시작

웹진 문화로(文化路)
제목쿠치키스트 퀴이의 음악적 유산에 대하여
분류음악
국가 러시아
날짜2022-05-03
조회수114
첨부파일


러시아 고전 음악의 시작은 피터 대제가 주도한 서구화 이후부터지만 진정한 고전 음악의 시작은 ‘국민주의 음악’에서 시작되었다. 국민 음악은 현대 러시아 문화 역사상 가장 역동적이고 활성적인 시기였던 1860년대에 명확한 형태를 갖추었다. 이 국민음악의 중심에 국민악파 5인조(쿠치키스트)가 있다, 민족주의 성향의 비평가 블라지미르 스타소프와 발라키레프의 적극적인 노력이 결실을 이루면서, 무소륵스키, 보로딘, 림스키-코르사코프, 퀴이 등이 합류해서 만들어진 쿠치키스트는 1860년대 벨린스키, 체르니셉스키와 같은 진보적인 사상가의 영향을 받아 예술의 사실주의적인 원칙을 수용하였으며 슬라브주의자들처럼 러시아 민중들에 대한 신뢰와 애정을 바탕으로 러시아의 전통적인 민족적 정서를 예술적 차원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다.
 
 

<체자르 퀴이>
(출처: https://yandex.ru/)


쿠치키스트 5명의 음악가의 공통적인 부분은 많다. 특히 그들의 출생 신분을 보면, 쿠치키스트는 대체적으로 지방의 소귀족 출신들이다. 따라서 그들의 집단적 정신은 고전적인 아카데미보다 타고난 대지에 더 밀접하다는 의미에서 어느 정도 자신들이 직접 창조한 ‘진정한 러시아적’ 운동이라는 신화에 의존하고 있다. 그런데 음악의 창작의 거시적 목적과 사회적 계급의 공통성에도 불구하고 쿠치키스트 음악가 5명의 개인적인 명성과 대중성은 그들이 살았던 19세기 후반에도 그렇고 현재 21세기에도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쿠치키스트 중에서 클래식 마니아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들에게 비교적 잘 알려진 작곡가는 이고리 스트라빈스키의 스승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Н.А. Римский-Корсаков)이다. 이와 반대로 쿠치키스트중에서 가장 지명도가 낮은 음악가는 체자르 퀴이(Ц.А. Кюи)일 것이다. 그러면 퀴이의 음악적 활동과 성취가 다른 쿠치키스트에 비해서 현저히 떨어지는 것일까? 음악비평가들은 5명의 쿠치키스트 중에서 퀴이의 음악의 질적 완성도가 다른 작곡가에 비해서 부족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올바른 평가일 수도 있지만, 꼭 그렇게 퀴이를 음악적 완성도라는 좁은 시야로 평가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퀴이는 음악적 활동분야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그가 평생 업으로 선택한 여러 분야(작곡, 비평, 군사 교육, 과학 및 사회 활동)에서 많은 일을 하면서, 정말로 한 번의 삶 동안 여러 생애를 살았다고 평가될 정도로 다양한 부분에서 놀라운 성과를 낸 팔방미인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군사 전문가로서 소위 말하는 ‘별’을 달았던 퀴이는 쿠치키스트로서 뛰어난 창의적 재능을 발휘해서 러시아 고전 음악 문화를 풍성하게 하였다. 퀴이의 음악 유산은 14편의 오페라(그 중 4편은 어린이용), 수백 편의 로맨스, 관현악, 합창, 앙상블 작품, 피아노 작곡 등 매우 광범위하고 다양하다. 그리고 퀴이는 700편이 넘는 음악 비평 작품의 뛰어난 저자이기도 하다.
 
 

<러시아 국민악파 5인조>
(출처: https://yandex.ru/)


뛰어난 고전음악 비평가 퀴이

퀴이는 1864년부터 거의 죽을 때까지 음악 작곡과 비평 작업을 계속했다. 신문에 기고한 그의 칼럼의 주제는 매우 다양하였는데, 제정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콘서트와 오페라 공연에 대한 비평이 많았다. 특히 퀴이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대한 일종의 음악 연대기를 작성하여 러시아 및 외국 작곡가의 작품, 연주자의 예술을 분석했다. 퀴이는 쿠치키스트의 음악의 이념적 기반, 발라키레프를 포함한 동아리 동료들의 음악과 그들이 지닌 철학에 대한 글을 1860년대에 많이 작성했다. 이 시기에 작성한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첫 번째 러시아 교향곡’에 대한 비평이 유명한데, 이 비평은 ‘밀리이 발라키레프(М.А. Балакирев)가 카프카스에서 필사한 러시아 민속과 동양적 멜로디가 사용된 림스키-코르사코프의 교향곡에 대한 감상이 들어있는 림스키에게 발송된 편지에 들어있다. 그 편지에서 퀴이는 ‘이 곡은 정말로 러시아적이다. 러시아인만이 이 같은 곡을 작곡할 수 있다. 이 곡은 그 어떤 정체적이며 독일적인 사소한 흔적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라고 언급하고 있다. 퀴이는 또한 이 편지에서 쿠치키스트들이 이 훌륭한 교향곡을 발라키레프의 집에서 연주한 일화와 교향곡에 대한 국민주의 이론가 스타소프의 반응에 대해서도 적고 있다.

퀴이는 외국 언론을 이용하여 러시아 음악을 정기적으로 홍보하기 시작한 음악비평가 중 한명이었다. 파리에서 프랑스어로 출판된 <러시아의 음악>에서 퀴이는 글린카를 ‘모든 국가와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음악 천재 중 한 명’으로 소개하면서 러시아 음악의 세계적인 중요성을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국민악파의 음악적 경향을 지속적으로 홍보한 비평가 퀴이도 시간이 흐르면서 쿠치키스트와 관련이 없는 예술적 움직임에 대해 관대해졌다. 1888년에 퀴이가 발라키레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미 53세에 접어든 저는 매년 음악에 대한 영향력과 개인적 감정을 점차적으로 포기하는 방법과 나의 음악적 판단이 틀릴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도덕적으로 완전한 자유에 대한 만족스러운 감정의 발로이다’라고 언급하면서 국민주의 음악이외의 다른 음악적 경향에 대한 포용성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있다.
 

육군 장군 퀴이, 그리고 음악

1862년 당시 쿠치키스트 작곡가들 중에서 퀴이는 27살로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았다. 이 음악 그룹의 리더 역할을 한 발라키레프는 25살, 반항아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М.П. Мусоргский)는 23살, 림스키-코르사코프는 18살, 알렉산드르 보로딘(А.П. Бородин)이 가장 나이가 많은 28살이었다. 쿠치키스트는 모두 자신의 일을 가지고 있으면서 음악을 독학한 아마추어들이었다. 림스키-코르사코프는 해군 장교, 보로딘은 화학자로서의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 교수였다. 그리고 무소르그스키는 근위대를 거쳐 음악을 하기 전에는 공무원이었으며, 음악을 시작한 후 성공의 절정기에 달했던 1870년대에 음주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국가 산림부의 정직원으로도 일을 했다. 퀴이는 미하일 포병 아카데미와 합참 본부 아카데미에서 교수로 생도들을 가르쳤는데, 군대에서의 계급은 장군(현재의 계급체계에서는 대령)까지 도달했다.

퀴이는 러시아의 대문호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가 졸업한 중앙기술학교(포병군사학교)에서 1851-55년까지 4년 동안 수학했다. 군사-지형학분야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이면서 학교 졸업 후, 퀴이는 중앙기술학교에서 중위 계급으로 지형학 교사로 일하게 되었다. 퀴이는 교육 경력 초기 20년 동안 엄청난 노동과 노력을 집중했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연적으로 진급한 것 이외에는 큰 성과는 얻지 못했다. 그러나 <기술 저널>에 실린 <엔지니어 장교의 여행 노트>가 유명세를 타면서, 퀴이는 군사지형 분야에서 탁월한 전문가로 인정받게 되었고 군 아카데미의 교수가 되었다.  


<스타니슬라브 모뉴스코>
(출처: https://yandex.ru/)


그런데 퀴이가 교육경력의 초기에 혼신의 노력으로 자신의 분야에서 뛰어난 결과를 양산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에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 것(예를 들어, 퀴이의 수업이 저학년에 국한 된 점)은 퀴이가 직업과 음악 활동을 병행하였기 때문이었다. 퀴이에게는 음악은 어린 시절부터 떨어질 수 없는 삶의 동반자였다, 리투아니아의 빌리노에서 프랑스 태생인 지역 김나지움 교사의 가정에서 태어난 퀴이는 음악에 일찍 관심을 보였는데, 그는 누나에게 처음으로 피아노 레슨을 받았다. 14세에 퀴이는 그의 첫 번째 작품인 마주르카를 작곡한 후 야상곡, 노래, 마주르카, 가사 없는 로맨스, 심지어 서곡까지 작곡했다. 불완전하고 유치할 정도로 순진한 이 시기의 작품들에 대하여 퀴이를 가르쳤던 개인 교사 중 한 사람이 관심을 가졌는데, 그는 이 음악을 뛰어난 폴란드 작곡가 스타니슬라브 모뉴스코(1819-1872)에게 보여주었다. 당시 빌리노에 살았던 모뉴스코는 어린 소년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을 뿐만 아니라, 퀴이 가족의 열악한 재정 상황을 알고 무료로 퀴이에게 음악 이론과 작곡, 대위법을 가르쳤다. 이 수업은 퀴이가 군사 교육 기관에 입학하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떠나면서 중단되었지만, 7개월간의 모뉴스코와의 음악공부는 퀴이에게 위대한 예술가로서의 삶을 향한 강력한 동기부여로 작용했을 정도로 평생 기억에 남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군사관련 일을 하면서도 음악에 대한 열정은 숨길 수가 없어서, 퀴이는 매주 오페라 극장을 방문하고 다양한 음악가들과 교류했다. 특히 퀴이는 1856년에 발라키레프를 만나 러시아의 국민 음악의 창작적 토대를 마련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르고미슈스키(А.С. Даргомыжский)와 가까워졌는데, 이 같은 경험은 퀴이가 작곡가이자 비평가로 성장하는 데 풍부한 자양분이 되었다. 글린카의 오페라 형식을 국민악파 5인조에게 전달하는 가교 역할을 한 다르고미슈스키는 푸시킨의 드라마 슈제트의 영향을 받아 러시아 음악 역사에서 ‘풍속극형 오페라’로서 높은 평가를 받는 <루살카>를 작곡했다.
 

퀴이의 오페라 

국민악파 작곡가들은 19세기 러시아를 휩쓴 민족주의 운동의 선봉에 서서 국민적 자부심과 일체감을 표현하고 당시 유럽 음악을 모방하느라 여념이 없던 러시아 음악계에 참신한 바람을 일으켰다. 러시아 전통에 뿌리박고 러시아 사람들의 정서를 오페라로 표현해낸 국민주의 성향의 음악가들에 의해 러시아 음악은 국제적인 수준으로 발돋움했다. 이러한 성과는 쿠치키스트에 의해서 가능했는데, 그들은 글린카로부터 시작된 러시아의 오페라에 전성기를 가져다 준 주역이었다.  


<<윌리엄 라트클리프>의 등장인물과 악보>
(출처: https://yandex.ru/)

 
퀴이도 다른 쿠치키스트처럼 오페라 작곡에 많은 힘을 쏟았다. 그는 14편의 오페라를 작곡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윌리엄 라트클리프>와 <안젤로>(Анджело)이다. 하이네의 동명의 시를 원작으로 하는 <윌리엄 라트클리프>에서 퀴이는 작가가 만든 캐릭터를 음악극을 통해서 기괴하고 낭만적인 인물이면서 동시에 살아있는 현실적인 인물로 재창조 하였다. <윌리엄 라트클리프>는 1869년 마린스키 극장 무대에서 처음으로 선을 보였다. 음악뿐만 아니라 문학의 창조적인 작업도 즐긴 퀴이는 하이네의 작품에서 창조된 환상적이고 열정적인 주인공의 캐릭터에 매료되어 오페라 작업에 착수 한다. 실제로 퀴이는 ‘하이네의 아름다운 운문은 항상 나를 감동시켰고, 하이네의 시는 나의 음악에 부인할 수 없는 영향을 미쳤다.’라고 자주 언급했다고 한다. 무소르크스키는 <윌리엄 라트클리프>를 최상의 작품으로 인정하면서 ‘<윌리엄 라트클리프>는 당신의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것이기도 하다. 이 오페라는 우리 눈앞에서 당신의 예술적 자궁에서 기어 나왔고 결코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라고 퀴이의 오페라를 평가했다. 빅토르 위고의 <파두아의 폭군, 안젤로>를 바탕으로 빅토르 부레닌이 대본을 작성한 <안젤로>는 1876년에 마린스키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프랑스의 위대한 문호 위고의 작품을 기반으로 하였지만, 원작과 오페라의 시·공간적 배경은 16세기 이탈리아로 설정되어 있다. <안젤로>를 작곡할 때 이미 퀴이는 완숙한 작곡가였지만, 이 작품을 통해 그의 창조적 재능은 더욱더 발전되고 강화되었다. <안젤로>에서 퀴이는 표현이 풍부하고 스토리 전개가 명확하게 드러나는 레치타티보를 능숙하게 사용하여 등장인물의 캐릭터를 생동감 있게 표현하였다. 



목록

웹진 문화로(文化路) 내용 끝

TOP

저작권 표시 및 연락처

06974 서울특별시 동작구 흑석로 84 법학관(303관) 1420호 / E-mail: fsicau@cau.ac.kr / TEL: 02-820-6355 / FAX: 02-822-00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