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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문화로(文化路)
제목표트르 대제 시기의 쿤스트카메라
분류역사
국가 러시아
날짜2022-03-02
조회수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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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인류 사회의 변천과 흥망의 자취를 고스란히 담아낸 기록이다. 그렇기에 역사 공부는 언제나 흥미로우며, 우리는 과거의 생생한 역사적 현장을 박물관에서 체험할 수 있다. 그곳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전시물들을 통해 우리는 과거 우리 조상들이 보다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 고안해낸 독특한 아이디어들을 만날 수 있다. 또한 전시물들은 그 아이디어들이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어내고 실제 삶에 적용되기까지의 지난했던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주기도 한다. 이는 박물관이 들려주는 옛날이야기들이 21세기 최첨단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흥미진진하게 와닿을 수밖에 없는 이유일 것이다.

이처럼 선조들의 발자취를 엿볼 수 있는 박물관의 수는 우리나라의 경우, 국립, 공립, 사립, 대학 내 박물관을 모두 합해 400여 개에 이른다고 알려져 있는 한편, 러시아에는 오늘날 약 2,700여 개의 박물관이 국가의 지원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게다가 러시아에는 기업, 대학, 공공단체가 운영하는 박물관을 포함한 통계가 아직까지 존재하지 않으며, 이 같은 상황을 고려할 때 추정되는 전체 박물관 수는 총 5,000여 개에 달할 것이라고 언론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이렇듯 러시아 내에서 박물관을 중심으로 하는 문화산업은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는 자국의 역사와 문화를 보존하고자 하는 러시아인들의 열망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러시아에 박물관이 처음으로 설립된 시기는 언제이며, 초기 러시아 박물관은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

 

<표트르 대제 시기, 러시아 최초의 박물관 ‘쿤스트카메라’>
(출처: https://bibliobel.wixsite.com)


러시아 최초의 박물관, 쿤스트카메라의 설립
 

러시아 내 박물관의 출현은 표트르 대제의 서구화 정책에 의해 이루어지게 된다. 표트르 대제의 집권기는 러시아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급진적인 개혁의 바람이 불어 닥치던 시기였으며, 이 시대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급속한 서구화 혹은 유럽화였다. 당시 변방의 국가로 머물고 있던 러시아는 유럽사회에 주요 정치세력으로 진출하기 위해, 그리고 중세 수준의 후진적 문화를 극복하기 위해 여러 서유럽 국가들과 무역, 외교, 문화적 유대 관계를 구축했고, 유럽식의 선진문화를 급속히 받아들였다. 이와 같은 격변기, 박물관은, 계몽된 러시아의 모습과 러시아의 위상을 외부에 증명하기 위해 온전한 문화 기관을 만들고자 했던 표트르 대제의 열망에 의해 등장하게 된다.

표트르 대제가 유럽 ​​문화의 핵심 요소로서 박물관의 중요성을 인식한 시기는 1697-1698년 유럽을 여행하던 때였다. 그는 1697년 3월 서구의 선진 문물을 직접 체험하기 위해 250여 명의 사절단을 이끌고 유럽으로 출발했다. 그는 그곳에서 베를린 과학 아카데미 회장 고트프리드 레이브니츠(Г.В. Лейбниц), 암스테르담 고전학자 반 데르 벨데(Ван дер Вельде) 등 각 지역 박물관 업무에 가담하고 있던 주요 전문가들을 만났고, 유럽의 주요 문화 기관, 도서관, 해부학 연구소, 예술 보관소, 미술관 등을 차례로 방문했다. 그와 동시에 표트르 대제는 다양한 컬렉션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특히 여행기간 동안 있었던 프레데릭 류이쉬(Фредерик Рюйш)와의 만남은 그가 박물관 설립을 위한 자료를 수집하는 데 있어 꽤나 큰 소득을 얻은 사례로 기록되어 있다. 표트르 대제는 당시 네덜란드의 저명 해부학자 류이쉬의 연구실을 방문했는데, 그 자리에서 그는 류이쉬와 박제된 새, 물고기, 곤충 등 해부학 표본을 구입하기 위한 협상에 돌입했고, 수년에 걸친 협상과 거래는 1716년에 이르러 끝을 맺었다. (표본을 얻기 위해 표트르 대제는 네덜란드 화폐단위로 3만 길더라는 엄청난 금액을 지불했으며, 그렇게 구입한 컬렉션을 러시아로 들여오는 데만 1년 이상이 소비되었다고 한다.) 이는 훗날 러시아 최초의 박물관, 쿤스트카메라(Кунсткамера)의 전시목록을 구성하는 데 기초가 되었다. 

 

<쿤스트카메라의 전시품들>
(출처: https://bibliobel.wixsite.com, https://volga-kostroma.ru, https://spb-gid.ru)


표트르 대제는 유럽에서 직접 구입한 물품들이 러시아로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박물관 건립에 필요한 전시품 수집에 더욱 열중했다. 그는 주로 유럽으로 외교관들을 파견해 희귀한 물건을 수집했다. 1717년 러시아 제국 최초의 의과대학 총장을 역임한 로베르트 아렌스킨(Р. Арескин)은 독일산 광물 수집을 도왔고, 표트르 대제의 고문으로 알려진 세르비아 정치인 사바 라구진스키 블라디슬라비치(С. Рагузинский-Владиславич)는 이탈리아 미술품 수집을 도왔다. 특히 라구진스키의 당시 일화는 유럽 전시품 수입에 대한 표트르 대제의 열정을 잘 보여준다. 라구진스키는 당시 로마에서 오늘날 ‘타우리데의 비너스(Венера Таврическая)’로 불리는 고대 대리석 조각상을 구입하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를 러시아로 들여오는 데서 발생했다. 이탈리아에서 골동품 및 조각상의 수출은 교황령에 의해 철저히 금지되고 있던 상황이었던 터라, 이 조각상을 로마에서 반출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이에 표트르 대제는 바티칸 측에 ‘성녀 브리짓타(св. Биргитта)’의 유골과 비너스 조각상을 교환하자는 제안을 했다. 당시 가톨릭 성녀였던 브리짓타는 정교회에서 신성시하지 않았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러시아 종교계로부터 반발을 사지 않을 수 있었다. 이 사실은 당시 유럽 언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으며, 유명세를 탔던 만큼 교환 과정 역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렇게 러시아로 들어오게 된 비너스 조각상은 페테르부르크 여름 궁전에 설치되었으나, 나체의 조각상에 익숙하지 않았던 러시아인들은 매우 당황스런 시선으로 비너스상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차르의 수집품은 막대한 국고의 투입으로 지속적으로 추가되었으며, 그 품목도 더욱 다양해져 갔다. 1715년, 사업가였던 아킨피 데미도프(А.Н. Демидов)는 표트르 대제에게 시베리아 무덤에서 발굴된 황금 컬렉션을 선물했고, 이는 황제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1718년, 그는 유물 관련 법령을 발표해 러시아 내에서 수집된 역사 유물 및 희귀품은 모두 페테르부르크로 옮겨오도록 했고, 1719년에는 독일 출신 의사이자 식물학자 메세르쉬미트(Д.Г. Мессершмидт)를 필두로 한 최초의 탐험대를 시베리아로 파견해 고대 유적지 발굴을 명했다.(메세르쉬미트는 시베리아에서 바위나 동굴 벽에 여러 가지 문양을 새겨놓은 ‘암각화’를 발견한 인물로 유명하다.) 그즈음 문화, 역사 유물 보호에 관한 법령이 매우 빈번히 발표되었는데(1718년 이래로 총 7개의 법령이 발표됨), 이는 기념물 보호에 관한 러시아 법률의 기초가 되기도 했다.

이처럼 다양한 경로를 통해 수집된 표트르 대제의 컬렉션은 1719년에 최초의 러시아 박물관, ‘쿤스트카메라’의 설립으로 이어졌으며, 그곳에는 그가 모은 동전, 그림, 조각, 과학 도구를 비롯한 온갖 유럽 물품들이 전시되었다. 더욱 놀라운 점은 당시 박물관에 ‘살아있는 전시물’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이다. 1m 26cm 신장의 소인 포마(карлик Фома)와 2m 27cm 신장의 거인 부르주아(великан-гайдук Буржуа)가 전시물품들과 함께 관람객들을 맞이했다.(사망 이후에도 그들의 유골은 전시품으로 남겨졌다...) 1722년에는 프레오브라젠스키(현재 바실롑스키) 섬에 쿤스트카메라 이전을 위한 건물을 짓기 시작했으나, 1728년 11월 25일 표트르 대제의 사망 후 독일 건축가 게오르그 마타르노비(Г. Маттарнови)의 설계 하에 지어진 새로운 건물로 이전했다. 

 

<니콜라이 부르주아(左) / 부르주아의 유골(中) / 부르주아와 표트르 대제(右)>
(출처: https://zen.yandex.ru, https://homsk.com)


최초의 러시아 박물관에는 유럽 박물관과 구별되는 특징이 있었다. 바로 박물관이 모든 대중에게 조건 없이 공개되었다는 점이다. 표트르 대제는 관람을 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입장을 허용했으며, 시민들의 박물관 관람을 장려하기 위해 연간 400루블을 지원해 무료로 운영될 수 있도록 했다. 설립 초기에는 방문자들에게 간식도 제공되었다. 이때 박물관 측에서 제공한 식음료는 커피와 네덜란드식 설탕빵(цукерброды), 그야말로 ‘유럽식 간식’이었다. 1724년, 과학아카데미가 설립되자 쿤스트카메라는 해당 기관의 일부가 되었다. 박물관에는 전시실 외에도 도서관, 전망대, 실험실이 마련되었고, 박제 동물, 인간 모형을 제작하기 위한 이즈바가 별도로 설치되기도 했다.
 

표트르 대제 이후의 <쿤스트카메라>

표트르 대제의 사망 이후 집권한 황제들 역시 박물관의 성장을 위한 지원을 지속적으로 이어나갔다. 시간이 갈수록 더욱 다양한 전시물들이 수집되었고, 1741-45년에는 최초의 박물관 컬렉션 카탈로그가 제작되기도 했다. 여기에는 다양한 삽화와 독일어 기사들이 포함되었으며, 이렇게 만들어진 2권의 카탈로그는 라는 제목으로 발행되었다. 나름의 체계 속에서 성장해가던 박물관은 1747년 엘리자베타 황후 집권 당시 대형 화재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러시아 황실은 박물관 건물 복원과 손상된 컬렉션의 복원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했고, 1766년 새로이 재건된 건물로 이전되었다.

1830년대, 박물관 내 전시물의 폭발적인 증가로 양적 포화상태에 이르렀고, 박물관 시스템 재정비가 불가피한 상황을 맞았다. 이 작업은 쿤스트카메라에 보존 중인 자료를 분야별로 카테고리화 해 분리 전시하기로 결정된 1837년에 완료되었다. 이때 민족 박물관, 아시아 박물관, 이집트 박물관, 해부학 박물관, 동물학 박물관, 식물학 박물관, 광물학 박물관 등 쿤스트카메라를 기반으로 한 여러 박물관들이 새로이 탄생되었다. 민족 박물관, 아시아 박물관, 이집트 박물관은 기존 쿤스트카메라 건물에 남겨졌고, 나머지 분야의 박물관들은 네바 강변에 위치한 두 개의 다른 건물로 이전되었다. 박물관을 담당했던 유명인들로는 민속박물관의 초대 대표로 임명된 역사학자이자 민족학자 안드레이 쇼르겐(А.М. Шегрен)과, 동일 기관 관장으로 임명된 민족학자 레오폴트 라들로프(Л.Ф. Радлов), 그리고 해부학 박물관 수장을 맡았던 자연과학자 카를 베르(К.М. Бэр) 등이 있으며, 그 후로도 동양학자, 역사학자, 언어학자, 동물학자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박물관들을 이끌어왔다. 


<오늘날의 ‘러시아 인류학 및 민족지학 박물관’>
(출처: https://regnum.ru)


또한 박물관은 소비에트 정권이 들어선 1933년 소련 과학 아카데미 상임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미클루호-마클라야 민족지학 및 인류학 연구소(ИЭА АН СССР)’로 변경되었고, 페레스트로이카 이후인 1992년 다시금 인류학 및 민족지학 박물관이라는 명칭으로 변경되어 오늘날까지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МАЭ РАН)의 독립적인 기관으로 기능하고 있다. 이렇듯 1719년 표트르 대제가 설립한 쿤스트카메라는 러시아 인류학 및 민족지학 박물관의 전신이다. 그리고 오늘날 120만 점 이상의 전시품을 소장하고 있는 이 박물관은 세계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민족지학 박물관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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