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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유스포프 궁전과 괴승 라스푸틴의 살해 (1)
분류역사
국가 러시아
날짜2022-02-03
조회수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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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정러시아의 수도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에서 서구화를 단행한 표트르 대제에 의해서 계획적으로 건설된 도시이다. 야심차게 실행한 서구화 프로젝트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동한 ‘서구식 도시 페테르부르크 건설’을 위해 도시 곳곳에 돌로 만든 화려한 건물들이 들어섰다.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장식하는 최대 5층 높이의 이 건물들은 너무나 다양한 외관을 가지고 있었다. 짧은 도시건축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건물의 다양성은 넵스키 거리를 포함한 도심 내부에서 옆에 나란히 서 있는 건축물조차 비슷한 외형을 가진 건물을 찾아 볼 수가 없을 정도로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축의 트렌드를 형성했다. 이 창조적이고 아름다운 건물들 가운데 제정러시아의 대귀족이 소유한 저택(혹은 소규모 궁전)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건축 다양성의 역사에서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었다. 

 

<유스포프 궁전>
(출처: https://yandex.ru/)


모이카 운하의 유스포프 궁전

북방의 베니스로 알려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건축된 대귀족의 궁전 중에서 유스포프 궁전 (юсуповский дворец)은 모이카 운하 제방에 위치한 아주 아름다운 정원이 있는 저택이다. 이 유스포프 궁전은 건축 및 재건축 당시에 동시대인들에게 제정러시아 수도의 랜드마크로 인정받을 정도로 아름다운 건축물이었다. 약간 과장해서 이야기 하면, 유스포프 궁전 건축과 재건축의 시기에 페테르부르크 소규모 궁전의 건축은 ‘유스 포프 이전’ 시대와 ‘유스 포프 시대’로 나눌 수 있다고 할 정도로 유스포프 궁전은 대귀족 소유의 저택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중의 하나였다. 동시대인 알렉산드르 베노이스는 유스포프 궁전의 장엄한 앙상블을 ‘최상에 가까운 왕실의 화려함 속에서의 귀족 생활의 한 전형’으로 불렀다. 유스포프 궁전은 건축물자체 뿐만 아니라 궁전의 각 홀을 장식하고 있는 회화, 조각 및 기타 예술품의 컬렉션의 풍부함으로도 유명하다. 제정러시아 예술 아카데미 회장의 딸 마리아 카멘스카야는 ‘유명한 유스포프 저택의 건축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도 건축물 자체뿐만이 아니라 궁전이 소유하고 있는 컬렉션의 화려함, 부, 경이로움에 대해 상세하게 소개하는 것은 나의 펜이 아니다’라고 언급하면서 궁전의 럭셔리한 소장품에 대하여 놀라움을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유스포프 궁전은 유명 건축가 발렌 데라모트가 설계한 후, 또 다른 건축가 미하일로프, 스테파노등에 의해 재건되었다. 궁전의 고급스러운 인테리어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유지하고 있는데, 특히 유스포프 궁전의 극장 홀은 특별한 화려함과 우아함으로 유명하다. 

 

<유스포프 궁전의 극장>
(출처: https://yandex.ru/)


괴승 라스푸틴이 살해당한 장소

유스포프 궁전은 아름다운 건축물과 풍부한 장식물로서 유명세를 치르면서 제정러시아 시기의 대표적인 저택으로 역사에 남아있다. 그런데 유스포프 궁전은 제정러시아 건축사의 주요 건축물로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것 보다는 20세기 니콜라이 2세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영적 멘토 였던 시베리아 출신의 괴승 그리고리 라스푸틴(Г.Е.Распутин)이 살해 된 장소로 더 유명하다. 살해 당시 라스푸틴의 나이는 47세였다.

 

<그리고리 라스푸틴>
(출처: https://yandex.ru/)


제정러시아 로마노프 황가 마지막 황제이면서 가택연금 기간 중 예카테린부르크에서 비극적으로 가족과 함께 살해당한 니콜라이 2세는 상당히 ‘소심했고 태도나 행동 면에서 특이하리만치 기계적인 사람이었다. <러시아의 역사>에서 니콜라스 랴자노프스키는 니콜라이 2세를 불운한 인물로 묘사하면서 ’자신의 태도와 행동을 스스로 결정할 능력이 없고 시야가 매우 좁은 인물로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역사가 랴쟈노프스키는 니콜라이 2세의 몰락을 더 빨리 가져온 여러 가지 원인 중의 하나로 황후 알렉산드라와 라스푸틴을 거론하고 있다. ‘반동적이고 신경질적이며 고집이 센 독일의 공주 알렉산드라가 황제 배후의 실력자가 되어 제정러시아 국정을 농단하고, 그녀와 함께 심지어는 라스푸틴과 같은 믿을 수 없는 인물도 국가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미치는 위치에 까지 오르게 되어’ 제정러시아의 몰락을 가속화 했다는 것이다. 사실 황후 알렉산드라와 라스푸틴은 황세자의 혈우병의 치료로 인하여 급속하게 가까운 인물이 되었으며, 둘 사이의 추문도 그 당시 러시아 내에서 떠돌고 있었다.

상기했듯이 라스푸틴은 제정러시아 말기의 파계 성직자이자 예언자로서 니콜라이 2세의 실정에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라스푸틴은 니콜라이 2세의 유일한 아들인 황태자가 그 당시 앓고 있던 혈우병을 잠시 동안 완화시켜서 황후의 전적인 신임을 얻고 이후 러시아 정치의 숨은 조력자로서 세도를 부렸다(이것은 러시아 역사를 통해 이미 세상에 다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의 잔혹하고 무분별한 정책은 귀족, 인텔리겐치아와 대중의 분노를 샀다. 그래서 러시아를 사랑하는 국민이면 라스푸틴을 제거하고 싶어 했다. 그 가운데 한 명이 바로 펠릭스 유스포프(Ф.Ф.Юсупов) 왕자였다. 

 

<펠릭스 유스포프>
(출처: https://yandex.ru/)


러시아 역사를 통해 드러난 라스푸틴의 살해사건은 1916년 12월 17일 밤 유스포프 궁전에서 일어났다. 펠릭스 유스포프는 다른 4명의 공범자와 함께 왕가의 명예를 지키고 러시아를 구원하기 위해 니콜라이 2세와 황후가 총애하는 라스푸틴을 죽이기로 결정했다. 펠릭스 유스포프는 포도주와 시안화칼륨(청산가리)으로 중독 된 케이크를 라스푸틴에게 제공했다. 그러나 육체적으로 매우 강한 몸을 가진 라스푸틴에게는 이 청산가리의 독성은 알 수없는 이유로 작동하지 않았다. 오히려 라스푸틴은 청산가리를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기타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고 한다. 원초 계획에 유스포프 궁전 주위에 경찰서가 가까이 있어서 총으로 라스푸틴을 살해하는 방안을 고려하지 않았던 펠릭스 유스포프는 할 수 없이 권총으로 라스푸틴을 쏜 뒤 강철 지팡이로 머리를 마구 때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상을 당해 부상당한 라스푸틴은 지하실에서 거리로 도망쳤다. 그러나 공범자들이 라스푸틴을 쫓아가서 다시 총으로 쏜 다음에, 그제야 쓰러진 라스푸틴을 양탄자에 둘둘 말아서 얼어붙은 네바강변의 페트롭스키다리에서 물에 던졌다. 라스푸틴의 살해에 관련된 불가사의한 에피소드는 여기서 끝이 아닌데, 오싹하는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중에 라스푸틴의 시신이 네바강에 떠올라, 그의 시신을 수습할 당시 ‘네바강 표면의 얼어붙은 얼음에서 라스푸틴의 손톱자국이 발견되어서 사람들을 경악시켰다.’ 그리고 라스푸틴의 시신을 부검했을 때 폐에 물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는데, 이것은 니콜라이 2세의 가족이 가장 아끼던 사람이 물에 빠졌을 때 아직 살아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이 사건 이후 펠릭스 유스포프 왕자는 살인 음모에 가담한 것이 인정되어, 그의 영지로 추방되었고 궁전은 대리인에게 양도되었다.

역사적 현장: 유스포프 궁전의 지하실

라스푸틴의 살해에 관련된 사건은 러시아 역사의 가장 신비한 서프라이즈로 남아있다. 그래서 라스푸틴의 살인이 이루어진 첫 번째 공간인 유스포프 궁전의 지하실은 역사적 현장으로서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당연히 지하실 견학은 유스포프 궁전의 견학의 인기 프로그램이다. 궁전 관람객들은 이 지하실에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아 있는 펠릭스 유스포프와 라스푸틴을 만날 수 있다. 현재 보존되고 있는 역사적 현장을 보면, 살해가 일어난 그 날, 거사를 같이 한 의사 라조베르트, 군주주의자 푸리스케비치, 드미트리 파블로비치 대공 및 스코틴 장교의 밀랍 인형이 자리를 잡고 있다. 지하에 인접한 방에서는 다양한 사진, 역사적 문서와 라스푸틴의 메모의 원본이 전시되어 있다. 

 

<유스포프와 라스푸틴(밀랍인형)>
(출처: https://yandex.ru/)

 
유스포프 궁전의 역사: 18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유스포프 궁전 앙상블의 역사는 18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모이카로 알려진 네바 강변에 표트르 대제의 조카 프라스코바 공주의 살았던 작은 거주지가 세워졌는데, 이 장소에 바로 이후 유스포프 궁전이 들어서게 된다. 실제 유스포프 궁전 건축의 시작은 1770년대이다. 건축가 발렌 데라모트(Валлен-Деламот)가 안드레이 슈발로프(А.Шувалов)백작을 위해 설계한 현대적인 궁전 건물에 건설이 시작되었다. 이 궁전의 모양은 현대 궁전과 크게 달랐는데, 측면 돌출부에 2개의 층이 있었고 모이카 측면에서 안뜰로 이어지는 입구 아치가 있었다. 슈발로프가 사망한 후 이 저택은 1789년 그의 딸 알렉산드라와 아들 파벨에게 넘어갔다. 그리고 1795년 예카테리나 2세는 이 저택을 국고로 사들여 당시 그녀의 애인이었던 포템킨의 조카딸 브라니스카야에게 선물했다. 예카테리나 2세의 가장 유명한 정부였던 포템킨은 러시아군 총사령관으로 제정러시아의 궁정대신이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브라니스카야에 대한 여러 가지 소문이다. 그녀는 귀족출신이 아니고 포템킨의 정부였다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카테리나 2세는 그녀를 매우 호의적으로 대했다. 아마도 이것은 예카테리나 2세의 정부 관리차원에서 나온 행위일수도 있는데, ‘예카테리나 2세는 죽기 전까지 많은 정부를 두었는데, 애인을 갈아치운 뒤에도 옛 정부들의 처우를 소홀히 하는 법이 없었다. 심지어는 애인인 상태에서 정부가 다른 여자가 생겼다고 고백하면, 관대하게 재물을 내렸다고 한다.’ 그래서 여제는 브라니스카야에게 대저택을 선물했다는 상당히 근거 있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1830년에 보리스 니콜라예비치 유스포프가 궁전의 작은 액세서리 까지 포함된 인수 조건으로 고령의 이전 안주인에게서 현찰로 25만 루블에 궁전을 인수했다. 그 이후 1917년까지 궁전은 유스포프 가문 후손의 5대에 의해 소유되었는데, 그때부터 이 궁전은 유스포프 궁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유스포프 가문은 당시 아주 돈이 많은 대귀족이었는데, 유스포프 궁전 건물은 유스포프 가족의 유일한 재산이 아니었다. 이들 가족 집단들이 소유한 건물은 러시아 전역에 57개가 있었고, 유스포프 궁전은 그 중 하나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만 4개의 궁전이 더 있었다. 제정러시아 시기 가장 인기 있는 오페라 공연이 유스포프 가문 저택에서 자주 상연되었는데, 그 중에서 러시아 음악의 아버지 글린카의 유명 오페라 <황제에게 바친 목숨>의 초연도 유스포프 궁전에서 진행되었다.

유스포프 가문을 주인으로 맞이하면서 궁전 앙상블은 지난 2세기 동안 여러 번 재건되었다. 특히 저택 구입 직후 1832-1834년에 건축가 미하일로프에 이루어진 건축으로 궁전 앙상블에 5개의 홀과 극장이 추가되었다. 1881년, 1890-1916년에 이루어진 2번의 재건축에 의해서 새로운 정원, 온실 및 정자가 세워졌다. 궁전 내부 객실은 사교계 손님을 위해 호화로운 실내 장식으로 꾸며졌는데, 저택을 방문하는 귀족뿐 아니라 황족까지도 궁전의 아름다움과 부를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과거로부터 변화된 유스포프 궁전의 사진을 보면 신고전주의, 러시아 제국 양식, 네오 로코코 양식의 흔적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건축 양식이 너무 빨리 변화되어 따라잡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만큼 시대에 맞는 스타일로 변화를 많이 시도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19세기 말에 궁전에 전기, 온수, 하수도, 상수도가 설치되면서 건물의 근대화가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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