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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문화로(文化路)
제목바실리 안드레예프와 발랄라이카 앙상블
분류음악
국가 러시아
날짜2022-02-03
조회수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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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예프 오케스트라의 전체 역사는 지금까지 일반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러시아 민속 음악과 민속 악기가 에스트라다 무대에서 확산되고 통합된 역사이다.” - <레닌그라드스카야 프라브다>, 1958년 3월 21일

19세기 후반 귀족 출신 음악가 바실리 안드레예프(В.В. Андреев)는 당시 러시아 시골마을에서나 볼 수 있는 ‘저급한 악기’, ‘소박한 악기’로 간주되었던 발랄라이카를 콘서트 무대에서 최초로 선보인 인물이다. 유럽식 고급문화에 보다 익숙했을 법한 귀족 청년 안드레예프가 발랄라이카 연주자이자 지도자로서 명성을 떨쳤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발랄라이카의 잠재력을 발견했으며, 왜 오늘날 러시아에서 발랄라이카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을까? 


<발랄라이카의 아버지, 바실리 안드레예프>
(출처: https://www.smolnews.ru) 


바실리 안드레예프는 1861년 1월 3일, 트베리 지역 베제츠크 마을의 귀족 출신 상인 바실리 안드레예프(В.А. Андреев)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매료되어 독학으로 많은 악기를 연주했다. 김나지움 3학년이 되던 즈음부터는 페테르부르크 콘서바토리의 니콜라이 갈킨(Н.В. Галкин) 교수에게서 바이올린 연주를 전문적으로 배웠다.(1880년부터 페테르부르크 콘서바토리에서 활동한 바이올리니스트 갈킨은 1875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전신인 ‘빌제 카펠레(Bilsesche Kapelle)’에서 악장을 역임했던 인물이다. 그의 가르침 속에서 성장한 유명 음악가로는 풀베르(Л.М. Пульвер), 림스키-코르사코프(В.Н. Римский-Корсаков) 등이 있다.)

김나지움을 졸업한 이후인 1883년 여름 어느 날, 트베리 지방의 가족 소유지 마리노에서 산책을 하던 중 안드레예프는 농부 안티프(Антип)의 발랄라이카 연주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민속 악기의 아름다운 선율과 음색에 놀란 안드레예프는 안티프에게서 발랄라이카 연주를 배웠고, 바이올린 연주법을 응용한 기법들을 발랄라이카 연주에 적용시켰다. 그렇게 발랄라이카에 매료된 그는 이 악기를 러시아 문화의 중심지 페테르부르크 콘서트 무대에 올리는 꿈을 꾸게 되었고, 이를 위해 더욱 풍부한 선율을 표현할 수 있도록 개조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그가 발랄라이카에 심취했던 1880년대 초반은 유럽에서 건너온 바이올린이 러시아 사회에 이미 널리 확산된 시기였으며, 발랄라이카는 아직 유럽문화가 침투하지 않은 러시아의 시골 마을에서나 접할 수 있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듬해, 바실리 안드레예프는 사마라에서 열린 자선 콘서트에 발랄라이카 솔리스트로 참여했다. 이 무대를 통해 그는 발랄라이카가 서민들의 여흥거리로서 존재하는 ‘흔하디흔한’ 악기일 뿐 아니라, 격식 있는 공연을 위한 악기로도 손색이 없다는 사실을 널리 보여주었다. 그 후로 발랄라이카에 대한 그의 열정은 더욱 커져만 갔다. 처음 이 악기를 경험했던 당시 그가 했던 생각, 즉 공연에 적합한 악기로 개량하겠다는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이 직접 고안한 새로운 악기 디자인을 들고 페테르부르크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는 새로운 발랄라이카의 기능을 제대로 구현해낼 수 있는 악기 제작자를 수소문했고, 마침내 프란츠 파세르브스키(Ф.С. Пасербский)라는 인물을 찾아 향상된 버전의 악기를 손에 넣게 되었다. 그리고 1886년 12월 23일, 그는 개량된 새로운 형태의 발랄라이카로 페테르부르크 사교 무대에 데뷔할 수 있었다. 

“페테르부르크 살롱에 매우 화려하게 등장하여 순식간에 ‘상류 사회의 사자(великосветский лев)’라는 칭호를 얻게 된 바실리 안드레예프는 노래, 춤, 악기 연주를 비롯한 민속 예술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민속 문화에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경험했고, 이 경험은 그로 하여금 집착의 수준에 다다를 정도로 푹 빠져들게 했다. 비록 그의 부모는 소년에게 귀족적 교육 제도 안에서 그를 양육한 한편, 피아노와 바이올린과 같은 클래식 악기들을 연주하도록 했지만, 안드레예프는 소년 시절부터 죽는 날까지 민속 음악 예술에 충실했다.” - 콘노프(А.П. Коннов), 프레오브라젠스키(Г.Н. Преображенский). <안드레예프 오케스트라(Оркестр имени В.В. Андреева)>, 1987, p. 6. 

안드레예프의 연주를 듣기 전까지 페테르부르크 청중들은 발랄라이카 연주에 대해 매우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공연을 거듭할수록 발랄라이카에 대한 대중의 열정은 불타올랐고, 안드레예프의 인기 역시 높아져 갔다. 어느덧 그는 페테르부르크 사교계에서 ‘발랄라이카의 아버지’라 불리게 되었으며, 러시아인들의 민족적 성격을 명쾌하게 표현해내는 이 민속 악기의 연주법을 전수해달라는 요청이 그에게 쏟아졌다. 그러나 악기 연주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을 그가 직접 지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에 그는 그만의 악기 연주법을 담아낸 교재를 출간하고자 기획한다. 

 

<안드레예프와 셀리뵤르스토프의 발랄라이카 연주를 위한 교재>
(출처: https://infourok.ru)


“<발랄라이카를 위한 학교(Школа для балалайки)>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민속 악기에 대한 인식을 바꾸게 만드는 것 같다. 안드레예프의 훌륭한 연주와 함께 이 작은 책은 우리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 발랄라이카를 다시금 부활시켰다.” - <프라브다>, 1888년 2월 7일. 

안드레예프가 페테르부르크의 저명 음악가 표트르 셀리뵤르스토프(П.К. Селиверстов)와 함께 구성한 최초의 발랄라이카 악보집 <발랄라이카 학교>는 1887년 6월에 출간되었다. 그러나 그에게 직접 배우기를 열망하는 사람들의 수는 줄어들지 않았고, 그는 곧 페테르부르크 폰탄카 강변에 위치한 ‘솔랴노이 고로독(Соляной городок)’에서 발랄라이카 연주 클래스를 개설했다. 그런데 교육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또 하나의 새로운 아이디어가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 아이디어는 바로 민속악기의 ‘집단 연주’에 관한 것이었다. 당시 안드레예프는 중세 러시아 광대들의 시대에도 둘 또는 셋, 심지어 그 이상의 다양한 악기들의 앙상블이 존재했다는 점을 생각해냈는데, 이는 곧 ‘발랄라이카 협주’라는 새로운 장르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그는 자신의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러시아 민속 음악의 단순한 변주곡을 연주하도록 했고, 또 이를 돌림노래의 형식으로 반복하도록 지시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안드레예프는 발랄라이카 앙상블의 가능성을 발견했으며, 앙상블 연주를 위한 지속적인 기초교육과 연습을 실시했다.

그러나 동일한 크기의 발랄라이카는 모두 동일한 음역대만을 표현할 수 있었기에, 각기 다른 음색의 악기들이 하모니를 만들어내는 데서 비롯되는 ‘앙상블’ 연주의 의미는 강조되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동일한 크기, 동일한 음역대, 동일한 음색의 악기들의 조합은 오케스트라 연주에 적합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안드레예프는 악기 제작자 파세르브스키에게 4중주를 위한 다양한 크기의 발랄라이카 제작을 다시금 주문했다. 그렇게 각기 다른 음역대를 표현하는 네 가지 크기의 발랄라이카가 탄생하게 되었다. 
 

<바실리 안드레예프가 제작한 발랄라이카들>
(출처: http://sovietguitars.com, https://ppt-online.org)


1888년 3월 20일에 열린 안드레예프의 첫 번째 콘서트는 민속 악기 앙상블의 무궁한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비로소 언론과 대중의 큰 관심을 받게 되었다. <노보예 브레먀(Новое время)> 신문은 이들의 연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어제 우리는 발랄라이카 연주를 들을 수 있었다. 안드레예프와 그의 몇몇 학생들이 연주했다. 그가 연주하는 발랄라이카는 작은 사이즈(피콜로), 보통 사이즈(프리모), 알토-발랄라이카, 첼로-발랄라이카, 이렇게 네 가지 형태로 구성되었다. 안드레예프와 일곱 명의 연주자들의 발랄라이카의 소리는 너무 독창적이어서 앙상블의 성공을 의심하지 않는다.”

1889년 <발랄라이카 연주 애호가 그룹(Кружок любителей игры на балалайках)>은 파리에서 콘서트를 가지기도 했는데, 이 공연의 주요 성과는 그때까지 발랄라이카 앙상블 연주에 회의적 입장을 보였던 저명 음악가들의 관심과 반응을 이끌어냈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음악계의 관심은 프로음악가들의 합류로 이어졌다. 러시아 민속음악 전문가 니콜라이 포민(Н.П. Фомин)을 비롯한 전문음악가들이 안드레예프와 함께 작업하기 시작했으며, 이로써 악단의 레퍼토리는 다양화되었다. 또한 음악원에서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젊은 음악가들이 안드레예프 연주단에 합류했다. 이 모든 요소들은 발랄라이카 연주단의 전문성 강화로 이어졌고, 앙상블이 자신만의 음악적 예술성을 향상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892년, <발랄라이카 연주 애호가 그룹>의 두 번째 투어가 프랑스에서 열렸다. 안드레예프는 당시 5명의 인원을 선발했는데, 과거와 달리 그들은 모두 아마추어가 아닌 전문 음악인들이었다. 당시 안드레예프는 프랑스 시민들의 반응을 걱정했으나. 그들의 공연은 5개월 동안이나 이어졌고, 파리 이외의 다른 도시에서도 콘서트를 개최할 수 있었다. 이 투어의 성공으로 안드레예프는 유럽 음악계에 새로운 음악을 선보인 공로를 인정받아 프랑스 예술 아카데미의 명예 회원 칭호를 받기도 했다.  


<바실리 안드레예프의 ‘발랄라이카 연주 애호가 그룹’>
(출처: https://tverigrad.ru)


이처럼 러시아와 유럽에서 안드레예프의 명성은 절정에 이르렀지만, 정작 그는 발랄라이카 그룹의 미래를 걱정하고 있었다. 물론 발랄라이카는 서정적인 음악의 부드러운 속삭임부터 오케스트라의 강력한 사운드를 연상시키는 강력한 포르티시모에 이르기까지 역동적인 색조의 음악을 충분히 재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음색들은 발랄라이카라는 하나의 악기에서 나오는 비슷한 성격의 소리로 구성된 것이었다. 더욱이 1895년 말경부터는 악단의 상황이 매우 어려워졌다. 콘서트 수는 급격히 감소했고, 자연히 재정적 여건 역시 악화되었다. 그러자 안드레예프는 앙상블의 악기 구성을 확장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새로운 음악적 색채, 즉 다양한 음색을 들려주는 악기들을 도입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악단의 예술적 성장을 이루기 어렵다는 판단을 하게 된 것이었다.

1896년 가을, 안드레예프가 풍부한 음색을 만들어내기 위해 들여온 민속 악기는 러시아인들의 삶 속에서 이미 오랫동안 존재해 온 악기들, 즉 다양한 크기의 돔라(Домра)와 구슬리(Гусли)였다. 그리고 악기 도입과 함께 ‘발랄라이카 연주 애호가 그룹’이라는 명칭은 ‘러시아 민속악기 오케스트라(русский оркестр народных инструментов им. В.В. Андреева)’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1897년 1월 11일, 관현악단의 첫 공개 콘서트가 열렸다. 새로운 음색이 더해진 오케스트라 음악은 더욱 풍부했고 선명했다. 관객들의 반응도 폭발적이었다. 이와 같은 첫 공연의 성공적인 발걸음은 안드레예프로 하여금 그의 음악적 지향성이 올바른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확신을 갖도록 했다.

그 후로 민속관악기 잘레이카(Жалейка)와 스비렐(Свирель)와 민속타악기 나크릐(Накры), 로즈키(Ложки), 부벤(Бубен)과 같은 새로운 악기들이 오케스트라에 도입되었고, 안드레예프는 민속음악 전문가들과의 문헌 연구를 통해 오케스트라의 음악적 색채를 풍부하게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모색했다. 이처럼 확장된 오케스트라는 러시아 민속 음악뿐만 아니라 러시아 및 해외 작곡가의 클래식 음악 연주도 선보일 수 있는 기량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발랄라이카 연주단체’라는 타이틀로 활동했던 안드레예프 오케스트라가 그만의 고유성을 상실하고 클래식 음악을 연주한다는 대중의 비난이 있기도 했다. 그러나 1900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의 연주는 이러한 상황을 역전시켰고, 러시아 내 비판의 시선은 응원의 시선으로 바뀌었다. 파리 박람회에서 안드레예프가 금메달을 수상함과 동시에 프랑스 최고 권위의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Legion d'Honneur) 훈장을 수여받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에 걸쳐 안드레예프가 보여준 발랄라이카에 대한 열정, 러시아 민속 음악 분야에서 그가 이루어낸 혁신과 공헌은 러시아 내외부에서 널리 인정을 받았다.  


<바실리 안드레예프의 ‘러시아 민속악기 오케스트라’>
(출처: https://infourok.ru)


러시아 민속음악의 아버지로 군림하던 안드레예프는 1918년 12월 24일 밤 스페인독감으로 사망했다. 그러나 그가 평생을 바쳐 완성한 발랄라이카 연주법은 오늘날까지 후대 예술가들에 의해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다. 그의 이름을 내건 국제콩쿠르는 1967년부터 지금까지 역사를 이어가고 있으며, 러시아 사회는 이 국제대회를 통해 러시아 민속 음악의 대중화, 민속 악기 레퍼토리 개발, 유능한 연주자 발굴을 꾸준히 도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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