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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문화로(文化路)
제목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핀란드역에 대하여
분류역사
국가 러시아
날짜2022-01-04
조회수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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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대 제정러시아의 수도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주택 가격은 싼 편이 아니었다. 재정적으로 넉넉한 귀족계층을 제외하고는 당연히 이 주택가격의 비용을 회피(?)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고 있었다. 그 방법 중의 하나가 도시근교에 위치한 마을에 다차를 만들어서, 그곳을 주거지로 활용하는 것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다차에서 거주하면서 직장이 있는 도시로 매일 출근하면, 도시 내부에 가격이 비싼 집을 구입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 시기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헬싱키까지 철도가 건설 된 후, 이 철로를 따라 다차가 형성되었다. 그래서 매일 약 5,000명의 사람들이 다차에서 도시로 출·퇴근을 하고 있었다. 당연히 이 기차의 출발역인 ‘핀란드역’은 기차를 이용하려는 승객으로 많이 혼잡하였다. 세월이 한 참 지난 오늘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핀란드역’의 하루 이용 승객이 30,000명 수준이라고 하니, 130여 년 전의 역 이용객 5,000명은 적지 않는 숫자인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물론 이 숫자를 온전히 믿을 수는 없지만 1890년 당시 집값으로 고통 받는 사람이 많았다고 해석을 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아마도 페테르부르크 시민들이 무리해서 주택구입을 하지 않게 해준 것은 그 당시 적절한 시기에 건설된 ‘핀란드 역’ 덕분이었다는 해석이 가능할 수도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핀란드역>
(출처: https://yandex.ru/)


핀란드역의 역사

‘핀란드 철도’는 당시 핀란드 대공국의 수도인 헬싱포르스(지금의 헬싱키)와 러시아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연결하는 철로였는데, 상트페테르부르크 북쪽을 달리는 최초의 철도였다. 그런데 엄격하게 이야기 하면 ‘핀란드 철도’는 1866-1868년의 기근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은 핀란드에 물자를 보급하고 러시아와의 무역을 늘리고, 필요한 경우 군대의 신속한 이동을 위해 핀란드 정부(핀란드 철도 이사회)가 건설하고 운영한 철도였다. 핀란드 철도는 1862-1870년에 건설되었는데, 세부적으로 보면 ‘헬싱포로스-타라스트구스’ 구간이 제일 먼저 공사를 시작한 철로로 1862년부터 건설되었다. 그리고 ‘상트페테르부르크-뷔브로크’(러시아 내에 있는 핀란드와의 국경마을)구간이 제일 마지막에 건설된 철로로 1870년 9월 11일에 완전히 개통되었다. 중요한 것은 철로를 따라 생긴 작은 다차 마을(슈발로보, 란스카야, 파르고로보 등)로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이 시골마을들이 매우 빠르게 발전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핀란드 역은 바로 이 ‘핀란드 철도’의 관문으로서 건설되었다.

핀란드역이 들어선 지역은 과거에는 ‘늑대의 들판’으로 불렸다. 근대화 이후 유럽식 도시가 페테르부르크에 만들어지고 있었지만, 핀란드역이 들어선 공간은 과거에는 유럽풍 도시가 주는 정리된 이미지 보다는 무질서적인 ‘야생’의 성격이 포함되었는데, 이 지역은 소들의 방목지, 가축 오물처리 장소였다. 이후 도시정비 차원에서 매립을 통해 이 지역의 일부는 훈련장과 군사기지로 활용되었다. 바로 도심에서부터 한참 벗어난 이 변두리 지역에 건축가 표트르 쿠핀스키가 핀란드역을 건설한 시기는 1870년이었다. 


<1870년대의 핀란드역>
(출처: https://yandex.ru/)


준공 당시 핀란드 역 건물은 아주 단순하고 소박한 창조물로 평가 받았다. 그 당시 국제적 건물의 표준 규격의 조건을 모두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핀란드 역에 대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야박한 평가는 아마 단층 건물로 만들어진 영향이 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역 건물에 대한 낮은 평가에도 불구하고 ‘핀란드 철도’의 거점지역에 만들어진 기차역 중에서 유일하게 나무로 만들지 않고 정성스럽게 돌로 만든 건물이었다. 그만큼 핀란드 역 건설은 제정러시아 황실에서 관심을 보여 재정적인 면에서 예산이 많이 투입된 프로젝트였다. 그래서 건축가 표트르 쿠핀스키는 나름 최선을 다해 건물을 창조 했는데, 차가운 평가에 대해서 약간 서운함을 토로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핀란드 역의 실내 장식은 핀란드 건축가인 베스틀링과 뎨게녈이 담당했는데, 평범한 1층 건물에 맞게 편안하지만 소박한 공간에 맞는 특색 없는 장식으로 처리되었다. 이 핀란드 역은 건설 이후에 매년 8월에는 호화롭게 꾸민 객차로 연결된 열차가 드나들었는데, 카페용 객차, 식당용 객차, 주방용 객차 및 침실용 객차로 꾸민 러시아의 황제와 황후를 위해서 만든 열차였다.

‘핀란드 철도’와 관련해서 특이한 사실은 철도역의 증설과 철로의 연장과 관련하여 19세기와 20세기의 전환기에 핀란드와 러시아 사이의 갈등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 당시 당연히 힘의 균형에서 약자인 핀란드는 철로연장과 철도역 증설을 원하지 않았지만, 그러한 의도를 드러내놓고 보여주기에는 상당한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핀란드의 새로운 열차와 러시아의 열차 차량의 크기와 무게의 상이점을 이유로 노선 연장 및 러시아의 여러 요구들을 완곡히 거절했다. 그러나 러시아 측은 강력한 추진력을 발휘하여 철로 증설 및 연결을 시도했고 결과적으로 철로 확장은 물론 러시아의 증기 기관차 및 낮은 높이의 화물열차가 핀란드의 모든 철도에서 자유롭게 순환할 수 있게 되었다.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당시 레닌그라드는 독일군에 의해 도시봉쇄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 봉쇄는 1941년 6월부터 1944년 1월 까지 900일 동안 계속 되었고, 봉쇄기간 동안 100만 여명이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그런데 비극적인 봉쇄기간동안 핀란드 철도의 ‘핀란드 역’ 기지가 유일하게 운영되고 있었다. 그래서 핀란드 역을 중심으로 하여 만들어진 '생명의 길'을 따라 굶주린 시민들에게 음식이 배달되었다. 그러나 핀란드 역도 전쟁의 포화는 피해갈 수는 없었던지 전쟁 중에 역 건물이 심하게 손상되었다. 전쟁 이후 1950년대에 핀란드 역은 보수되면서, 첨탑과 시계가 있는 현대적인 건물로 새롭게 단장이 되었다.
 

핀란드역과 열차 <시벨리우스>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소련과 핀란드 간 국제 여객 열차의 정기 순환은 1953년에야 재개되었다. 그 당시 운행된 열차는 ‘모스크바-헬싱키’ 및 ‘레닌그라드-헬싱키’ 노선의 소련 야간 열차였다. 그리고 1978년에 ‘레닌그라드-헬싱키’노선은 매일 운행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이 열차의 브랜드는 러시아의 대표적인 사실주의 화가 일리야 레핀의 이름을 딴 ‘레핀’이었다. 그런데 사실 러시아 측에서 운영한 <레핀>열차 보다는 핀란드 측에서 운행한 <시벨리우스> 열차가 핀란드역의 추억의 여객열차로 많은 시민들과 관광객의 사랑을 받았다. 왜냐하면 1992년에 운행을 시작한 <시벨리우스>는 러시아 철도 네트워크의 첫 번째 외국 여객 열차였는데, 그 당시 운행된 열차로는 보기 드물게 혁신적인 서비스와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열차 안에는 전화, 팩스, 노트북 및 당시 세계최초로 개발된 자동휴대전화 시스템 연결이 가능한 사무실 공간을 포함하여 비즈니스 출장 손님을 위한 많은 편의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관광객이 많이 오는 여름을 제외하고는 <시벨리우스>의 주요 손님들은 사업가나 직장인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기차가 오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해서 회의 및 사업관련 일을 보고, 몇 시간 후에 다시 기차를 타고 헬싱키에 가면 저녁 10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당연히 <시벨리우스>와 짝을 이룬 러시아 열차 <레핀>도 이 일정으로 운행되었는데, 그래서 운행도중에 <레핀>은 반대 방향으로 달리는 <시벨리우스>와 아주 찰나의 시간이지만 매일 조우했다. 헬싱키로 가는 러시아 손님들은 <시벨리우스>의 식당 객차를 너무 좋아했는데, 이 식당 객차에는 전통적인 요리를 제공하는 전통 식당 공간과 셀프 서비스 뷔페 두 공간으로 분리되어있었다. 식당 메뉴에는 아침 식사, 샌드위치, 따뜻한 요리 및 간단한 패스트푸드 등 다양한 음식이 포함되어 있었다. 식당 객차의 레스토랑에서 가장 인기 있는 요리는 으깬 감자를 곁들인 ‘미트볼’이었다.

 

<핀란드역의 시벨리우스>
(출처: https://yandex.ru/)


핀란드 태생 유명 작곡가 ‘시벨리우스’의 이름을 붙인 <시벨리우스>는 2010년 12월에 <알레그로> 고속 전기 열차로 대체되었다. 핀란드 역에서 18여 년 동안 러시아인들과 관광객들을 헬싱키로 실어 나른 ‘시벨리우스’가 아쉽게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이다.
 

핀란드역과 레닌동상

러시아의 근대화를 이끈 표트르 대제는 서유럽을 향한 창의 역할을 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지리적 위치의 중요성을 알았기 때문에 당시 모스크바에 있던 수도를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전하였다. 제정러시아 통치 기간 동안 로마노프 황실은 교통의 요충지로서 자신의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게 도시 내에 모스크바, 서유럽, 동유럽, 발트 3국, 북유럽 등으로 갈 수 있는 기차를 이용할 수 있는 철도역을 건설하였는데, 모스크바역, 핀란드역, 비쳅스키역, 발찌스키역 등이다. 이 역들 중에서 러시아의 격동기 시절 혁명가 레닌의 역사적 흔적 및 에피소드가 존재하는 공간이 핀란드 역이다.

핀란드 역과 1917년 사회주의 혁명을 주도한 블라지미르 레닌과의 인연은 이 역의 탄생부터 시작되었는데, 이 역은 1870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심브리스카야 거리에 세워졌는데 레닌이 태어난 도시 심비르스크와 이름이 같다. 그리고 스위스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었던 레닌이 핀란드 헬싱키에서 열차를 타고 페트로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들어오면서 혁명가와 핀란드 역과의 좀 더 깊은 인연이 만들어 졌다.

 

<핀란드역에 도착하는 레닌(1917년)>
(출처: https://yandex.ru/)


이미 역사를 통해 알려졌듯이, 레닌은 제1차 세계 대전 중 스위스에서 망명 생활을 했고, 1917년 2월 혁명 이후 독일 당국은 레닌이 독일을 통과하는 밀폐된 기차를 타고 헬싱키로 가서, 그 곳에서 기차를 타고 페트로그라드까지 가는 것을 허용했다. 핀란드 역에 도착한 레닌은 볼셰비키에 동조하는 군중의 환영을 받았고 장갑차 위에 올라가서 ‘사회주의 혁명 만세’를 열창하면서 대중들에게 연설했다. 그 이후 레닌은 자동차를 타고 크셰신스카야 저택에 있는 볼셰비키 본부로 가서 볼셰비키를 지지하는 연설을 하고 온건한 멘셰비키와 사회주의 혁명당을 규탄했다. 현재 핀란드 역의 유명한 기념물인 ‘장갑차를 탄 레닌’동상은 핀란드 역에 도착한 직후 장갑차 위에서 연설하는 레닌의 모습이 형상화 되어 있는데, 동상의 주조에 약 10톤의 청동이 사용되었다.

 

<핀란드역의 레닌동상>
(출처: https://yandex.ru/)


핀란드역의 레닌 동상은 10월 혁명 9주년 기념일인 1926년 11월 7일에 일반인들에게 선보였다. 이 동상은 처음에는 만남의 장소인 기차역 앞 작은 광장에 설치되었지만, 2차 세계대전이후 역 복원과정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레닌 광장의 중심으로 이전되었다. 이 레닌 기념비는 레닌이 사망한 지 3년 만에 완성된 최초의 대규모 레닌 기념비 중 하나이다. 옥스퍼드대 교수 페네로페 큐리티스에 의해 레닌의 ‘최초의 중요한 기념물’로 평가되면서 핀란드 역의 레닌 동상은 레닌 이미지의 전형이 되었다.

현대에 와서 핀란드 역의 레닌 동상은 시련을 겪었다. 2009년 4월1일 폭탄 테러로 손상되었는데, 동상의 뒷부분이 훼손되면서 직경 80~100cm의 구멍이 생겼다. 다행히 1년 간의 복원기간을 거쳐 2010년 4월 다시 핀란드 역의 레닌 광장의 중심에 설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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