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K(인문한국) 사업단 홈페이지

HK(인문한국) 사업단

웹진 문화로(文化路) 내용 시작

웹진 문화로(文化路)
제목레프 쿨레쇼프의 영화 이론과 적용
분류영화
국가 러시아
날짜2020-11-02
조회수549
첨부파일


"우리에게 영화는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있다. 그 시작은 쿨레쇼프이다."


<레프 쿨레쇼프, 1899-1970>

1929년 발간된 예술 관련 매거진 "영화예술"의 서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초기 영화사에서 쿨레쇼프의 업적은 소비에트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높게 평가 받고 있다. 그는 영화의 정체성이 분명치 않았던 20세기 초, 영화만의 미학적 특성에 대한 이론을 정립하고 실천한 소련 최초의 영화인이다. 당시 영화는 용어와 접근에 있어서 대부분 인접 예술의 도움을 받고 있었고, 고전 예술의 우월주의, 초기 영화적 실험들에 나타난 모순과 오류들이 난무했다. 쿨레쇼프의 실험과 결론에도 여러 실수들이 발견되기는 하지만, 초기 영화 발전에 있어서 쿨레쇼프는 당시 가장 실용적인 이론과 방법론을 제시한 사람 중 하나로 평가된다. 쿨레쇼프의 실험과 활동을 종합하면 영화만이 갖는 특성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질 수 있다. 하나는 몽타주를 이용한 영화의 표현 수단이고, 다른 하나는 영화 속 배우에 대한 이해이다. 또한, 그가 추구했던 영화의 프로페셔널리즘은 이론적, 실천적인 부분과 더불어 제작적 측면에서도 커다란 공적으로 여겨진다.

레프 쿨레쇼프는 영화 첫 커리어를 모스필름의 전신인 한조코프에서 시작했다. 당시 그는 연출, 영화 미술, 영화 표현에 대해 집중하며 그리피스 작품들에 관심을 보였는데, 그리피스 영화에 담긴 서사보다는 몽타주 예술, 배우들의 스포티한 움직임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1918년 쿨레쇼프는 <기능공 프라이트 프로젝트>라는 영화를 처음으로 독자 연출했고, 다음해에 세계 첫 영화교육기관인 모스크바 국립영화대학(VGIK)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쿨레쇼프의 제자이자 초기 소비에트 영화의 거장 중 하나인 프세볼로프 푸도프킨은 "당시 모스크바 국립영화대학은 교육기관이라고 부르기 어려웠다. 전문가가 부재했고, 정형화되지 않았던 정보들을 카메라 앞에서 실험하는 젊은이들의 집단이었다"고 전한다. 이렇게 혼돈스러운 상황에서 쿨레쇼프는 다른 예술에는 없는 영화만의 표현수단으로 몽타주의 중요성에 대해 주장했고, 영화필름 조각들의 결합으로 새로운 의미를 창출할 수 있다고 여기며 다음과 같은 다양한 실험을 해 나아갔다.

  • 몽타주 조작을 통해 서로 다른 곳에 위치한 두 명의 배우를 스크린에서 만나게 하고, 서로 손을 잡고, 워싱턴의 백악관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사실 두 사람은 미국에 간 적이 없다)
  • 필름 조각의 조합을 이용하여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여성을 창조하는 것이다. 스크린에는 거울 앞에 앉아 있는 한 여성이 보인다. 그녀는 눈 화장을 하고, 입술을 칠하고, 신발을 신는다. 이 여성의 등, 눈과 눈썹, 입술, 다리는 네 명의 서로 다른 여성으로 이루어진 필름조각의 조합이었다.
  • 초기 영화사에서 몽타주 이론의 첫 단추로 평가 받고 있는 "이반 모주힌 실험"이 당시에 진행되었다. 이 실험은 이반 모주힌이라는 배우의 얼굴을 클로즈업하여 촬영한 필름 뒤에 각기 다른 상황의 세 가지 이미지를 배치하여, 관객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알아보는 것이다. 세 이미지 앞에 배치된 모주힌의 영상이 동일한 필름이라는 것을 모르는 관객들은 첫 번째 배치에서는 식욕을, 두 번째에서는 아이의 죽음을 슬퍼하는 표정이라고 했으며, 세 번째 배치에서는 모주힌이 여성에게 매료된 표정이라는 상이한 반응을 보였다. 이 실험을 바탕으로 쿨레쇼프는 "다음 장면의 내용에 따라 이전 장면의 내용을 완전히 바꿀 수 있다"는 결론을 내었다. 이를 현재에는 "쿨레쇼프 효과"로 불리고 있으며, 스릴러 영화의 거장 알프레드 히치콕도 이 효과를 자신의 작품에서 자주 사용했다.

<이반 모주힌 실험 화면 캡처>

위와 같은 실험들을 수행하면서 쿨레쇼프는 몽타주의 힘에 대해 더욱 강하게 주장했다.

"영화의 본질은 촬영된 조각들의 조합과 변화에 있다. 영상을 통한 감명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촬영된 조각 자체가 아니라 그것들이 어떤 식으로 설계하는지에 달려있다. 즉, 영화의 시작은 촬영된 범위 내에서가 아니라 조각들의 변화에서 찾아야 한다."

또한, 쿨레쇼프는 모든 이미지들은 기호와 문자처럼 작동되어 관객이 해당 장면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즉시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영화의 궁극적인 목적을 제시했다.

20세기 중반에 들면서 쿨레쇼프와 다른 소비에트 영화인들이 주창했던 영화적 특성으로써 몽타주의 중요성은 영화적 시류에 따라 점차 낮아졌다. 또한, 쿨레쇼프의 실험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이반 모주힌 실험"은 관객이 앞에 배치된 모주힌 영상에 대해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인 것은 몽타주 현상이라기 보다는 모주힌의 표정에 담긴 모호성 때문이라며 비판 받기도 했다. 그러나 영화에 대한 용어조차 제대로 자리 잡히지 않았던 20세기 초 영화의 이론적 정립의 시도에서 이미 쿨레쇼프의 업적은 인정 받을 만 하며, 실험의 결론들에 다소간 오류가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영화 개념을 확립하는 데 있어서 상당한 공헌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영화 배우의 개념 – "나뚜르쉭"

쿨레쇼프는 영화가 독립적인 예술 장르로 인정받기 위한 최우선 과제로 영화를 연극의 품으로부터 떼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영화 제작에 있어서 기술과 테크닉은 연극의 그것들과는 다르기 때문에 배우의 연기 역시 연극과는 다른 원칙이 세워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연극은 극장 맨 뒷줄 관객에게까지 잘 보일 수 있도록 과장된 몸 동작과 분장이 필요하지만, 영화에서는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영화의 클로즈업은 아주 작은 표정의 움직임을 전달할 수 있고, 연극적 관습이 카메라에서 발견될 경우 스크린에서는 혐오스럽게 비춰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연극적 분장, 가발, 캔버스에 그린 무대장식, 조잡한 무대소품은 영화의 스크린에서는 똑같이 허용되지 않으며, 실제의 재료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쿨레쇼프는 영화 제작에 있어서 스크린에 진정성과 사실성을 부여하는 방법들을 정리하면서 영화적 배우인 "나뚜르쉭"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나뚜르쉭"은 부모에 의해 아이가 길러지듯 영화의 배우 역시 연출의 필요성과 작품의 사실성 부여를 위해 육성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나뚜르쉭"에게는 연극에서보다 더 풍부하고 정확한 외적 표현과 전방위적인 육체적 훈련을 통한 명확하고 리드미컬한 움직임이 요구되었다. 쿨레쇼프는 이들이 연극 배우보다 광범위하고 고차원적인 아파라투스를 갖도록 하기 위해 델사르트 시스템을 적용했으며, 그렇게 훈련 받은 "나뚜르쉭"은 자신의 몸을 잘 관리 했으며, 감독의 지시에 빠르게 반응했다.

영화제작의 프로페셔널리즘

쿨레쇼프는 영화제작의 합리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며 당시 제작기술의 미숙함, 무질서, 아마추어적 사고방식을 비판했다. 그러면서 초기 소비에트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정확히 계산된 연출용 시나리오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그는 제작의 기한 준수와 계획적인 지출을 위해 현장에 임하는 촬영팀 구성원들에게 강력한 훈련을 통한 철저한 사전 준비를 요구했다. 쿨레쇼프가 사전 준비에 대해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는 <법에 따라, 1926> 촬영 당시 자신의 아내이자 작품의 주인공이었던 알렉산드라 호흘로바에게 준비 미숙을 탓하며 눈밭에서 가혹행위에 가까운 동작을 반복해서 지시했다는 일화에서 잘 알 수 있다.


<<법에 따라, 1926> 알렉산드르 호흘로바(左) / 포로피리 포도베드(右)>

영화제작에 있어서 최대한의 질서확립을 위한 쿨레쇼프의 투쟁은 당시 영화의 국유화를 실현했던 정부에게도 중요한 과제였으며, 영화제작의 계획적인 업무를 확립하는 데에도 도움을 주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볼셰비키 국가에서 미스터 웨스트의 이상한 모험, 1924>은 소비에트 영화에서 세심하게 계획된 작업 과정과 연출시나리오, 미리 정해진 마감기한과, 제작비용의 산정 등이 갖춰진 최초의 프로페셔널리즘 영화가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쿨레쇼프가 영화 역사에 남을 업적을 쌓는 동안 정부와 언론은 현대 사회에 대한 문제와 이데올로기에 대한 내용을 영화에 포함하라며 그를 더욱 압박했다. 이로 인해 그는 가장 완성도가 높다고 평가되는 <법의 따라> 이후에는 작품의 형식적이고 실험적인 비중을 줄이고 주위의 요청에 수긍하는 십 여 편의 영화를 더 제작했으나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1941년에는 <연출의 기본서>를 출판했고, 이후 쿨레쇼프는 교단으로 몸을 옮겨 제자 육성에 전념했다. 쿨레쇼프는 자신의 제자이자 작품의 뮤즈인 알렉산드라 호흘로바와 여생을 함께 보냈으며, 71세에 생을 마감했다.



목록

웹진 문화로(文化路) 내용 끝

TOP

저작권 표시 및 연락처

06974 서울특별시 동작구 흑석로 84 법학관(303관) 1420호 / E-mail: fsicau@cau.ac.kr / TEL: 02-820-6355 / FAX: 02-822-00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