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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응답하라, 모스크바 1994! (1)
분류지역문화
국가 러시아
날짜2020-02-17
조회수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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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응답하라> 시리즈로 한때 귀갓길이 즐거웠던 시절이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다양한 <응답하라> 시리즈 중에서도 특별히 <응답하라 1994>가 마음에 와닿고 정감이 간다. 아마도 드라마 속에 나오던 시대적 배경과 에피소드들이 내가 실제로 대학 생활하던 시절과 시간적으로 가장 가까운 시기에 일어난 것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드라마의 배경이 되는 1994년 당시 나는 한국에 없었다. 그때 나는 다름 아닌 모스크바에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한국의 모습과 러시아의 모습은 나름 닮은 구석이 있었다. 한국은 오랜 시간 정치적 민주화의 진통을 앓고 난 뒤, 소위 ‘X’ 세대로 대표되는 풍요의 시대가 열리고 있었고, 동시에 사회의 모든 것들이 정말이지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어제와 또 다른 모습의 오늘이 펼쳐지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었다. 당시 거리의 풍경을 찍은 사진이나 잡지 인터뷰 기사를 보면, 오히려 지금보다 훨씬 더 자유분방하고 세련된 젊은이들의 옷차림이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한쪽에서는 혼성 그룹 ‘룰라’가 소위 엉덩이 두드림 춤으로 전에 없던 세련된 무대 매너와 가창력으로 관객을 사로잡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서태지와 아이들’, ‘DJ DOC’와 같은 그룹들이 랩이 들어간 새로운 스타일의 음악을 선보였다. ‘마지막 승부’ 속 주인공들은 손지창, 장동건, 이종원과 같은 말 그대로 ‘만찢남(만화를 찢고 나온 남자)’ 주인공들을 대거 앞세워 소녀팬들의 돌고래 비명 소리를 드높였으며, 소위 ‘귀가 시계’로 불리던 ‘모래 시계’는 기존에 방영될 수 없었던 정치적 소재를 안방극장 드라마 속에 담아내는 과감함을 보이며 시청자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러시아 역시 조금은 다른 차원이긴 하지만, 1993년 최악의 경제 상황이라는 위기를 넘어서서 1994년에 접어들며 조금씩 뭔가 태동의 분위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훌쩍 뛰는 환율을 지켜보며 불안한 마음도 많이 들었다. 하지만 1994년 러시아는 아직까지 소비에트적인 분위기에서 완전히 헤어나오진 못했지만 뭔가 계속 변화되려는 시도르르 반복하고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아있는 소비에트적 잔재가 아련함과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나름 ‘낭만’이 존재하던 곳이었다. 그리고 그 낭만의 한 가운데, 가끔씩 나를 깜짝 놀라게 하는 것들이 있었으니, 바로 1994년 한참 풍요의 시대를 살아가던 우리에겐 아직 없었지만, 러시아인들은 ‘이미’ 갖고 있던 것들이었다.

1991년 12월 25일.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날은 그냥 평범한 크리스마스가 아니라, 소비에트 연방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그야말로 ‘역사적인’ 날이다. 날짜도 참 인상적이다. 마치 새로 태어나는 것을 기념이라도 하듯이 하필이면 날짜가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크리스마스이다. 그것도 러시아식이 아닌 유럽식 크리스마스. 마치 자본주의 세계 속 새로운 메시아를 기다려왔던 것처럼, 그렇게 소비에트 연방을 뒤로하고 새로운 러시아가 등장하게 되었다.

소비에트인에서 러시아인으로 새롭게 태어난 러시아 국민은 하나같이 모두 장밋빛 미래를 꿈꿨다. 몰래 숨어서 듣던 재즈와 로큰롤을 맘껏 들으며 리듬에 맞춰 몸도 흔들고, 펩시콜라와 코카콜라로 대변되는 ‘미쿡’ 문화에 빠르게 젖어 들며, 스스로 아메리칸 드림의 주인공이 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와 환상 속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물건으로 차고 넘칠 줄 알았던 가판대 위의 물자는 계속 사라져갔고, 어느 순간 갑자기 환율이 천정부지로 뛰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화폐개혁에 이르렀다. 주변국들은 러시아를 소위 ‘망한 나라’로 대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대한민국과 수교를 맺자마자, 소위 ‘소련’이라고 불리며 베일에 싸여있던 나라에 대한 관심은 최고조에 이르렀고, 국내 대학 여기저기에 러시아 관련 학과들이 앞다투어 문을 열기 시작했으며, 90년대 중반부터는 어느새 모스크바 대학 내 한국인 유학생회가 생길 정도로, 러시아 학과를 졸업한 학문 후속세대들은 더 이상 미국이나 유럽이 아닌 러시아로 연수와 유학을 떠나기 시작했다. 이렇듯 한편으로는 개방과 수교의 붐에 힘입어 ‘러시아’에 대한 기대가 한껏 높아져 있었지만, 나이 드신 일반 어르신들의 눈에 비친 러시아는 여전히 ‘빨간’ 공산주의 나라 ‘소련’이었고, 그나마 이젠 망해서 힘도 제대로 못 쓰는 나라에 불과했다.

나 역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1994년 1월 처음으로 러시아 모스크바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의 러시아 입성은 부모님에 의한 ‘타의’가 더 많이 작동했던 것 같다. 당시 공항에 마중 나온 친구들과 부모님을 뒤로하고 출국장 안으로 들어가면서, 마치 어디 못 돌아올 곳으로 유배라도 떠나는 사람처럼 뺨을 타고 또르르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내던 장면이 여전히 또렷하게 떠오른다. 그 정도로 여전히 과거의 소련, 현재의 러시아는 설렘보다는 낯설고 두려운 마음을 더 많이 불러일으키는 존재였던 것 같다.

모스크바에 도착한 첫날, 공항에 마중 나온 동기와 함께 처음 간 곳은 바로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본관 앞이었다. 나와 또 다른 친구가 갈 최종 목적지는 본관이 아니라, 전철로 한 정거장 더 떨어진 곳에 위치한 외국인 기숙사였는데, 당시 같은 날 같은 비행기를 타고 모스크바로 온 또 다른 일행이 본관 기숙사로 거처를 정해서, 그 일행을 내려주기 위해 잠시 들른 곳이었다. 때는 1월 말이었고, 모스크바국립대 본관은 그야말로 하얀 설경 위에 우뚝 선 거대한 성처럼 내게 다가왔다. 고개를 한참 뒤로 젖히고 본관 건물을 찬찬히 훑어보니 아래서부터 잔잔하게 건물을 비추는 조명이 눈에 들어왔다. 하얀 눈밭을 배경으로 은은하게 올라오는 하부 조명이 본관 건물을 감싸고 돌며 더욱 고즈넉한 분위기를 입혀주는 듯 느껴졌다. 당시 우리나라는 소위 ‘조명 공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서로 잘 구별도 안 될 정도로 사방이 조명과 간판으로 번쩍대던 터라 러시아식 하부 조명은 내게 더욱 특별하게 다가왔다. 물론 프랑스나 이태리 등 다른 유럽에서도 하부 조명을 많이 사용하긴 하지만, 러시아에 세워진 압도적 규모의 건물을 잔잔하게 감싸는 조명은 유럽의 그것과는 다른 뭔가 특별한 존재처럼 비춰졌다. 그런 조명 탓이었을까. 무섭고 낯설게만 여겨지던 러시아란 나라가 어쩐지 좋아질 것 같다는 느낌도 살짝 들었던 것 같다. 1994년, 모스크바 국립대 본관을 비추던 멋진 야간 조명은 우리에겐 아직 없었지만, 그들에게 이미 있었던 것 중 내가 가장 처음 접한 대상이었다.

<모스크바 국립대 본관 야경>

다음 날, 친구와 함께 기숙사 앞 본격 탐방에 나섰다. 어제부터 계속 눈이 내리면서 세상은 온통 하얗고 하얗고 또 하얗게 변해 있었다. 모스크바에서 지내게 될 기숙사가 전철역 근처에 있어서 교통편을 파악할 겸 먼저 전철역까지 걸어보기로 했다. 제법 알이 굵은 눈을 맞으면서 앞으로 계속 걸어갔다. 눈이 꽤 내리는 와중에도 사람들이 다니는 길에는 눈이 쌓여있지 않았고, 도로 위의 눈도 대부분 치워져 있거나 녹아서 질척대는 회색빛 흙탕으로 변해 있었다. 요 몇 년 사이 계속되는 이상기후로 인해 러시아 추위도 예전 같지 않고, 눈도 그만큼 내리지 않는다. 하지만 1994년만 해도 아직 눈이 제법 많이 내리던 시기였다. 밤새 소복소복 쌓인 눈이 꽤 될 듯 싶은데도, 아침만 되면 사람이 다니는 인도는 귀신같이 말끔하게 정돈되어 있는 상황이 항상 나의 궁금증과 호기심을 자극했다. 새벽에 누군가 쓸어내는 걸 거야. 그런데 한 사람이 쓸기엔 좀 많은 것 같은데... 게다가 도보 양편으로는 항상 어김없이 작은 눈산(!)이 만들어져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인도에서 쓸어낸 눈을 길 양옆으로 쌓아놓는 것이었다. 눈을 치우는 큰 차를 가져와서 쓸어낸 눈을 담아가기도 하지만, 작은 동네는 그냥 인도 양옆으로 쌓아놓는 경우도 많았다. 처음엔 멋도 모르고 그 눈 탑에 기어 올라갔다가 허벅지까지 빠지는 통에, 본의 아니게 눈밭에 빠져 허우적대면서 근처를 오가는 행인들을 즐겁게 해 주기도 했다.


<러시아 제설차(왼), 제설작업반(오)>

요즘엔 우리나라에서도 눈이 오면 바로 염화칼슘을 뿌리면서 제설 작업을 시작하지만, 당시만 해도 큰 눈이 한 번 내리면 우리나라 길거리에 뿌려졌던 것은 상당히 ‘고전적인’ 제설 재료인 ‘연탄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눈이 내리면 뉴스마다 비탈길에 나와 연탄재를 뿌리는 모습을 마치 캠페인 광고하도 하듯이 반복해서 보여줬고, 인도는 물론 도로조차 제대로 제설이 되지 않아 자동차 바퀴에 급하게 채워 물린 스노우 체인을 달고도 엉금엉금 꼬리를 물며 기어가던 차들의 행렬이 기억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비할 바 아니게 눈이 많이 내리던 러시아에서는 차들이 스노우 체인 없이도 도로 위를 씽씽 잘 달렸고, 한겨울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뾰족구두에 미니스커트를 차려입은 멋쟁이 아가씨들은 총총걸음으로 출근길을 재촉했다. 모두 적극적인 제설 작업과 무자비할 정도로 살포하는 염화칼슘 덕분이었다. 1994년 당시 우리나라에 아직 일반적으로 보급되지 않았던 염화칼슘이 러시아에서는 일상적인 제설제로 사용되고 있었다.

어린 마음에 마냥 부럽기만 했던 염화칼슘의 해로움을 알게 된 것은 겨울이 다 지나갈 즈음이었다. 어느 날 문득 등굣길에 신발을 내려다보니, 앞코 부분에 허연 물 자국 같은 것이 올라와 있었다. 이게 뭐지?? 처음엔 재미 삼아 눈이 쌓인 곳을 골라서 밟고 다닌 탓에 물때가 올라왔나보다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염화칼슘이 신발로 스며들어 생긴 얼룩이었다. 이 염화칼슘 얼룩이 상당히 고약한데, 한 번 생기면 서서히 가죽을 딱딱하게 만들고 갈라지게 해서 종국엔 신발을 못 쓰게 만들어 버린다. 그때 알았다. 아, 눈이 많은 겨울에 러시아에 갈 때는 한 번 신고 버릴 신발을 가져가야 하는군! 물론 이미 20여년도 더 지난 지금엔 이 고약한 염화칼슘을 막아낼 또 다른 비법의 장비가 등장했는데, 이건 좀 더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겠다.

여차저차 전철역에 도착할 즈음이 되니 역 주변으로 노점상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대부분 과일이나 야채를 파는 아주머니들이 노점상이라는 말이 무색하리만큼, 최소한의 좌판도 없이 임시로 만든 상자 위에 비닐을 깔고 그 위에 과일을 쌓아놓고 파는 형태였다. 어떤 이는 그냥 가방에 물건을 담아놓은 채 팔기도 했다. 역 주변 키오스크를 먼저 하나씩 둘러보며 무슨 물건이 있는지 점검을 하고, 이내 과일을 파는 아주머니들 근처로 다가갔다. 요즘엔 흔하디 흔한 과일이 됐지만, 1994년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는 아직 ‘귀한’ 과일축에 속해 높은 몸값을 자랑했던 ‘오렌지’를 러시아에서는 1달러에서 1.5달러만 주면 5-6개씩 가져올 수 있던 시절이었다. 신나게 6개짜리 한 묶음을 달라고 하니까, 돈을 건네받은 아주머니가 내게 오렌지를 하나씩 건네주기 시작했다. 이건 무슨 상황이지? 왜 봉투에 안 담아주는 거야?

요즘엔 우리나라도 환경 문제로 별도의 금액을 지불하고 포장용 비닐봉지를 사야 되지만, 1994년만 해도 봉지는 물건을 사면 으레 ‘거저’ 주는 물건이었다. 그런데 러시아에서 봉지는 ‘사야 하는’ 물건이었던 것이다. 아직 실전 대화가 익숙하지 않았던 나는 순간 당황해서 잠시 어찌할 줄을 몰라하다가, 이내 봉지는 주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이란 사실을 알고, 내가 굳이 별도의 비용을 지불하면서까지 이 봉지를 사는 건 뭔가 부당하다는(?) 생각에, 입고 있던 파카의 양쪽 주머니 가득 오렌지 6개를 꾸역꾸역 쑤셔 넣고 기숙사로 돌아왔던 생각이 난다. 지금 생각하면 피식 웃음이 나오는 장면이다. 얼마 하지도 않는 비닐봉지를 그냥 사도 그만인 것을, 당시엔 그저 익숙하지 않은 문화에 대한 낯설음, 그리고 아직은 ‘음흉’하게만 여겨지던 러시아인들이 이제 막 모스크바에 떨어진 풋내기 외국인 어학 연수생을 상대로 저런 봉지도 거저 주는 물건이 아니라 마치 파는 물건인 양 사기를 치고 있는것 같다는 엉뚱한 오해와 망상이 불러일으킨 결과였다.

 

<90년대 초반 인기를 끌었던 ‘말보로 비닐봉지’ 시리즈>

 

<90년대 초반 생산된 다양한 ‘비닐봉지>

 
나중에 알게 됐지만, 러시아에서 ‘비닐봉지’는 나름 대단한 위상을 점유하고 있는 물건이었다. ‘비닐봉지’는 봉지 그 이상이었다. 물론 과일가게나 야채 가게에서 주는 검은색, 혹은 하얀색 비닐봉지는 말 그대로 일회용 비닐봉지에 불과했고, ‘특별한’ 위상을 점하는 봉지들은 좀 더 웃돈을(?) 얹어서 구입해야 했다.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남녀노소는 물론, 학생들도, 선생님도 다들 나름 개성있는 ‘봉다리’를 구해 저마다 하나씩 손에 들고 다녔다. 그리고 그 ‘봉다리’는 1회용으로 쓰고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닳고 닳을 때까지 계속 사용되고 재활용되었다. 처음에는 어째서 견고한 보조 가방 같은 것을 사용하지 않고 소위 ‘봉다리’로 불리는 비닐을 저렇게 소중하게 들고다니나 싶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이 ‘봉다리’는 소위 자신의 개성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나름의 상징물이었던 것이다. 어떤 이는 화사한 꽃무늬를 선호했고, 또 어떤 이는 상당히 모던한 문양을, 또 어떤 이는 대문짝만하게 큰 글씨로 유명 상표 로고가 프린트 된 봉지를 좋아했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흔하게 널린 ‘봉다리’에 불과했지만, 소비에트 시절 ‘폴리에틸렌’을 가공하여 만든 일회용 비닐봉지는 한 마디로 귀한 물건이었고, 비닐봉지를 든 사람은 최첨단 문화를 향유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2차대전 시절까지 비닐봉지의 원료인 ‘폴리에틸렌’은 비닐봉지 주원료가 아니라 레이더 케이블 절연물질로 사용되면서, 한 때 군사용 비밀물자에 속했던 귀한 물건이었다. 그러다 전쟁이 끝나고 비로소 상업용으로 사용이 가능해졌지만, 오늘날 우리가 들고다니는 손잡이가 달린 비닐봉지는 1965년에 되어서야, 그것도 독일에서 특허를 받고 출시되었고, 소비의 천국 미국에서조차 비닐봉지가 대량 생산되며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에 들어와서였다. 상황이 이러하니 소비에트 시절에 비닐봉지가 얼마나 귀한 물건이었을지 미루어 짐작할만 하다. 소비에트 대중, 이어서 포스트 소비에트 시대 대중에게 특히나 인기를 끌었던 비닐봉지는 오색창연한 색깔로 다양한 글자가 새겨진 봉지였다. 말보로, 코카콜라, 나이키, 보스, 리바이스 등등 소위 ‘미쿡’을 대표하는 상표가 새겨진 색색 비닐봉지를 손에 쥐고 흔들면 그것에 바로 유행의 첨단을 걷는 이의 상징이 되었고, 그 중엔 소비에트 시대부터 계속 국민 여가수로 군림해 온 알라 푸가쵸바와 미국 팝그룹 보니엠 사진이 프린트 된 봉지도 눈에 띄었다.

개인적으로는 조만간 1990년대 러시아 거리를 장식했던 ‘핫한’ 아이템 중 하나인 프린트 비닐봉지 수집 붐이 일어나지 않을까 생각될 정도로, 러시아인들의 비닐봉지 사랑은 물질적으로 상당히 풍요로워진 지금도 일정 부분 유지되고 있는 듯 하다. 그들은 이 비닐봉지를 한 번 쓰고 버리는 일회용품이 아닌 빨라서 말려서 쓰고 또 쓰는 다회용품으로 애용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러시아인들이 그토록 애정하던 프린트 비닐봉지는 마치 우리가 고등학생 시절 연애인 사진을 코팅해서 책받침으로 사용하면서 자랑하고, 미국 농구팀이나 야구팀 이름이 새겨진 후드티와 모자를 쓰고 다니던 것과 동이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던 물건이 아니었나 싶다. 하지만 그 당시엔 러시아어 선생님이 수업시간마다 가방 속에서 꺼내들곤 하던 빛바랜 비닐봉지가 때론 그렇게 서글퍼 보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것도 나름 꽤 낭만적이라고 생각되면서, 어느새 나도 ‘비닐봉지’ 문화에 동참하며, 키오스크를 기웃대며 신상 비닐봉지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실제로 러시아처럼 눈비가 잦은 나라에서 천이나 가죽으로 된 가방보다는 비닐로 된 봉지가 이것저것 담아 나르기엔 더 실용적이고 편한 측면도 있었다. 1994년만 해도 아직 ‘줄서기’ 문화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상태라, 길을 걷다 보면 여전히 길게 늘어선 줄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었다. 뭔지도 모르고 일단 함께 줄서기에 동참했다가 뒷사람에게 잠시 자리를 맡아달라 부탁해놓고 앞쪽으로 가서 물건의 실체(!)를 확인한 뒤에, 마침 필요한 물건이다 싶으면 잽싸게 가방 한 켠에 구겨 넣어놨던 비닐봉지를 펼치고 우연히 발견한 보물(!)을 담아오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얼마 후 우리나라에서도 ‘비닐봉지’를 더이상 거저 주지 않고 러시아처럼 판매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1994년 당시 기준으로 유상 비닐봉지 문화는 우리보다 한발 앞서 러시아 내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찾아보면 1994년 당시, 우리에게 아직 없었지만, 러시아에 ‘이미’ 있던 것들이 꽤 있다. 모스크바를 어학연수 시절을 중심으로 그것들에 대한 추억 여행을 좀 더 이어나가보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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