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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살아있는 소비에트의 숨결, 모이세예프 발레
분류공연예술
국가 러시아
날짜2020-01-16
조회수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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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발레마스터 이고르 모이세예프(И. Моисеев)가 설립한 이후, 소비에트 시대를 거쳐 오늘날까지 80여 년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는 모이세예프 국립 민속 무용단은 세계 최초 민속 무용 앙상블로서 민속춤의 예술적 형상화와 대중화, 현대화에 크게 기여한 단체다. 화려한 미사여구를 동원하지 않더라도, 모이세예프가 사망했던 2007년 11월까지 세계 각국의 정부가 그에게 각종 예술가상을 수여한 횟수가 총 46회에 이른다는 사실은 세계 무용사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치와 위상을 증명한다. 그렇디면 모이세예프의 발레는 왜 살아있는 소비에트의 숨결이라 불릴 만한가?

소비에트 발레마스터 모이세예프

모이세예프는 1906년에 태어나 그의 부모가 첫 만남을 이루었던 곳, 파리와 고국 우크라이나 폴타바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1910년대 말경 가족과 함께 모스크바로 이주했다. 1920년, 14살이 된 이고르는 아버지의 권유로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베라 모솔로바(В. Мосолова)의 발레 스튜디오를 찾았다. 이고르의 재능을 알아본 선생님은 레슨을 시작한 지 두 달 만에 그를 볼쇼이 발레단 산하 발레 학교로 전학시켰다. 발레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가 깐깐하기로 유명한 볼쇼이 발레학교의 시험을 단번에 통과해낸 것을 보면, 그가 타고난 신체적 조건과 재능이 평범한 수준은 아니었던 듯하다. 그곳에서 이반 스몰쪼프(И. Смольцов)와 알렉산드르 고르스키(А. Горский)의 지도하에 어엿한 무용수로 성장한 모이세예프는 18세에 학업을 마쳤고, 곧 볼쇼이 발레단에 입단해 인민예술가 겔쩨르(Е. Гельцер)의 파트너로서 춤을 췄다. 그는 1939년까지 총 15년간 볼쇼이 극장 무대에 섰는데, 그 시절 무용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활동을 이어가며 그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해 갔다. 그는 19세부터 인민교육위원회 초대 의장 루나차르스키(А. Луначарский)가 만든 모스크바 인텔리겐치야들의 모임 ‘목요일(Четверги)’에 참여해 메이예르홀드(В. Мейерхольд), 타이로프(А. Таиров), 마야코프스키(В. Маяковский), 우트킨(И. Уткин) 등과 교제하며 문화예술계의 인맥을 넓혔는가 하면, 이듬해에는 루벤 시모노프(Р. Симонов)와 함께 연극 연출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24세부터는 안무가로 변신해 러시아 발레계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져갔다. 라쉴린(Л. Лащилин), 주코프(Л. Жуков)와 함께 창작한 <축구선수футболист, 1930>와 <살람보Саламбо, 1932>, <세 명의 뚱보Три толстяка, 1935> 등은 그가 아직 20대였던 젊은 시절에 탄생시킨 작품들이다. 그의 예술세계는 발레 분야에서만 빛을 발한 것은 아니다. 볼쇼이 극장 안무가로서 <카르멘Кармен>,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Любовь к трём апельсинам>, <투란도트Турандот> 등의 오페라에서 안무를 담당했으며, 당시 소비에트 정부가 추진했던 스포츠나 무용 관련 국가 행사에서 연출을 맡기도 했다. 그의 손을 거친 행사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붉은 광장에서 개최된 ‘체육인 퍼레이드(Парад физкультурников)’이다. 그뿐 아니라, 30년대 중반 이후로는 민속무용단을 창립해 고전주의 발레와는 다른 독특한 양식의 민속 발레(Народный балет)를 만들어 일생동안 러시아 발레의 다양화와 대중화에 기여했다. 이처럼 여러 분야와 장르를 오가며 활약했던 그의 창작세계는 크게 세 가지 방향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고르 모이세예프>

볼쇼이 발레단의 체육주의 발레

그가 안무가로서 발레 창작에 가담한 첫 작품이 <축구선수>이고, 그의 활동 목록에서 이색적으로 우리 눈길을 끄는 것이 ‘체육인 퍼레이드’이며, 현재 <축구춤Футбол>과 <스케이트장에서На катке>가 모이세예프 발레단의 주요 공연목록을 장식하고 있다는 점은 그의 창작세계에서 스포츠가 차지하는 비중이 작지 않음을 시사한다. 사실 ‘체육에 대한 강조’는 초기 소비에트 사회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하나의 현상이었다. ‘체육인 퍼레이드’가 1919년 군사훈련 기념일에 시작되어 1954년 강철의 스탈린 시대가 막을 내린 직후까지 그 역사를 이어가며 수만 혹은 수십만의 대중들을 광장에 집결시킨 행사였다는 사실은 당시 소비에트 정부가 체육이 가지는 사회적 기능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음을 말해준다. 이와 같은 체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소비에트 정부의 정책과 방침은 대중의 일상생활이나 국가의 특정 행사에서뿐만 아니라, 순수한 창작의 영역인 예술 활동에까지 침투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격동의 소비에트 시대를 살았던, 그리고 소비에트를 대표하는 볼쇼이의 발레마스터로 활동했던 모이세예프에게 체육에 대한 관심과 열정은 선택 가능한 영역이 아니었을 것이며, 이와 같은 사회적 요구에 따라 탄생한 작품이 바로 <축구춤>이나 <스케이트장에서>와 같은 작품들이다.

실제로 모이세예프가 스포츠 주제의 작품을 창작했던 이유는 당시 정부가 추진했던 ‘스포츠 대중화’ 전략과 무관하지 않다. 실제로 1920-30년대 소비에트 정부가 돌파구를 마련해야 할 최우선적 과제는 처참히 망가진 국가 경제를 되살리는 것이었다. 이러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당시 무기력하기만 했던 대중들을 강한 신체와 강한 정신력으로 무장시켜야만 했고, 대중의 저하된 사기를 고취시키는 일은 정부가 당면한 매우 현실적 과제였다. 이는 결국 국가의 경제 부흥이 소비에트인의 체력과 정신력에 달려있다는 말일 것이며, 이를 위해 국가는 국민들에게 자기희생적 의지와 정신력, 생산과 노동에 대한 높은 도덕 관념을 요구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소비에트 사상과 지식, 건강한 체력은 소비에트를 살아가는 모든 인간이 갖추어야 할 하나의 조건이었으고, 체육교육은 올바른 소비에트적 인간상을 구현하고 대중들의 사상을 단련시키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론이었다. 독립적 개개인을 집단적, 조직적으로 응집시키는 체육의 주된 사회적 기능은 소비에트 사회를 안정화하는 데 필수적인 것으로 인식되었으며, 스포츠 경기 장면을 무대 위에 선보인 모이세예프의 작품은 대중들의 교육을 위한 훌륭한 교과서로서 기능했다.

<축구선수, 1930>


볼쇼이 발레단의 혁명 발레

1905년 이후 예술이 일반 대중을 위한 봉사가 되어야 한다는 볼셰비키의 호소는 러시아 문화예술계 전반에 걸쳐 수용되었다. 새로이 수립된 소련 정부는 예술을 대중들에게 유용한 것으로 탈바꿈시키고자 다양한 정책과 지원을 마련했다. 당시 소련 예술가들에게 혁명운동은 최고의 관심사가 되었으며, 다수는 전체주의의 몰락과 짜르 권력에 대항한 투쟁을 그리는 창작 활동에 참여했다. 이와 같은 사회 분위기 속에서 모이세예프 역시 대중에의 봉사를 위한 혁명정신과 이데올로기를 담아낸 작품을 창작하며 소비에트 안무가로서 이름을 알렸다.

특히 고르스키가 1910년에 초연했으나 1914년부터는 상연목록에서 자취를 감추었던 <살람보>의 개작은 그가 초기 소비에트 시기에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입각해 재탄생시킨 작품이다. 기원전 3세기경 로마와 카르타고의 1차 포에니 전쟁 직후 카르타고에서 발발한 용병들의 반란을 배경으로 하는 이 작품은 부르주아적 인습에 대한 분노와 불신, 증오를 그린다는 점에서 볼셰비키 혁명의 명분과 분리되지 않는다. 사실 주요 스토리는 카르타고에 침입한 용병이 전쟁 중 보여주는 야만성과 윤리적 타락에 저항하는 어느 민족의 투쟁으로 읽히기도 한다. 그러나 그 안에는 전제정치와 식민지 착취에 기반한 부유국 카르타고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으며, 이에 대항하는 용병반란은 카르타고의 불합리한 지배구조에 항거하는, 억압받는 군중들의 봉기가 된다. 그리고 관객들은 무대 위 용병들의 반란과 그 진압의 과정에서 볼셰비키 혁명 당시 노동자들의 봉기와 그 참혹한 진압을, 이기적인 카르타고 부자들의 모습에서 제정 러시아 시대 황실과 귀족들의 부조리한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다. 즉 1935년 초연 당시 관객들이 마주한 카르타고와 용병반란 사건 속 야만성과 폭력성은 불과 얼마 전 그들이 실제로 경험하고 목격한 볼셰비키 혁명 당시의 참혹한 모습이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스파르타쿠스> 역시 이와 맥을 같이 한다. 로마 제국의 노예 반란을 바탕으로 하는 이 작품도 로마의 폭군 크라수스에 대항하여 로마 보병대를 지휘하는 노예 검투사 스파르타쿠스의 영웅성을 형상화하기 때문이다. 자유를 갈망하며 쇠사슬을 부수고 박탈된 권리를 회복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스파르타쿠스의 암울한 운명에서 노예들의 반란으로 이어지는 스토리의 흐름은 그가 벌인 반란에 정당성을 부여하는데, 이는 전제정치 속에서 억압받아왔던 러시아인들의 고된 삶과 혁명이 발발했던 무렵 그들이 품고 있던 새로운 시대에의 희망과 갈망 등을 떠올리게 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모이세예프의 혁명 발레는 역사적 사건을 차용해 당대의 사고방식을 적용한 '소비에트식 발레'였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소비에트 작가 유리 올레샤(Ю. Олеша)의 아동문학 <세 명의 뚱보>의 경우는 <살람보>나 <스파르타쿠스>에서처럼 직접적인 혁명 묘사나 프롤레타리아와 짜르로 구분되는 계급 관계는 묘사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는 부유하고 악한 세 명의 뚱보와 온정 넘치는 세 명의 주인공들 간 대립을 그려냄으로써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적 대립 관계를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이 세 작품의 공통된 특징은 발레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환상성이 배제되었다는 점이다. 보편적인 클래식 발레에는 언제나 요정이나 유령처럼 그야말로 존재 자체가 환상일 수밖에 없는 인물들이 등장했다면, 소비에트 시기에 창작된 모이세예프의 발레에는 노동자나 노예, 병사들이 등장해 혼란스러운 인간 세상의 모습을 형상화해 나갔다고 볼 수 있다.


모이세예프 발레단의 민속 발레

모이세예프 발레단은 1937년 최초 설립된 이래로 유럽 전통의 클래식 발레와는 또 다른 유형의 발레, ‘민속 발레’라는 장르를 탄생시켰다. 그가 훗날의 기나긴 창작세계를 수놓은 민속춤에 관심을 두게 된 시기는 1930년경의 일이었다. 모이세예프는 타지키스탄에서 민속 무용을 접하고 강한 호기심을 갖게 되었는데, 이는 그의 예술적 삶의 전환점이 된 역사적 사건이었다. 민속 무용과의 이 우연한 만남은 그가 일종의 창작적 틈새시장을 발견한 것에 다름 아니었으며, 이는 그에게 언제나 변함없는 클래식 발레의 진부성에 대한 도전의식을 해소할 수 있는 해방구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그는 각 지역의 민속춤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파미르, 벨로루시, 우크라이나, 코카서스 전역을 여행했고, 이렇게 얻은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1936년 민속 예술극장의 안무 책임자가 되어 곧 제1회 민속 무용 축제를 개최했다. 이 사업의 성공은 발레단의 창립으로 이어졌다. 1937년, 그는 스탈린의 지지자이자 인민위원회 의장을 역임했던 뱌체슬라프 몰로토프(В. Молотов)로부터 전폭적인 후원을 받아 최초의 전문 민속 발레단을 창립했다. 이렇게 설립된 단체의 첫 번째 공연은 1937년 2월 10일 개최되었고, 모이세예프는 그 이후로 60여 년간 모이세예프 발레단의 안무가이자 예술 감독으로 활동했다. 자신의 이름을 내건 발레 단체를 창단한 뒤, 그는 과거에 단 한 번도 시도된 바 없는 민속 발레, 즉 소비에트 연방 소수민족들의 음악, 문화, 전통, 관습 등이 하나로 어우러진 실험적인 무용 작품들을 차례로 선보였다. 러시아를 시작으로 우즈베키스탄, 아제르바이잔 등 다양한 민족 문화는 모이세예프의 손을 거쳐 공연에 적합한 예술작품으로 탄생되었고, 곧 이는 국가 단위로 확장되어 세계 각국의 민속 발레가 출현하기에 이르렀다. 그리스 춤 <시르타키Сиртаки>, 베네수엘라 춤 <호로포Хоропо>, 아르헨티나의 춤 <카우보이Гаучо> 등이 유명하며, 한국 춤으로는 김정일 집권 시절 북한 안무가로부터 직접 전수받은 <트리오Трио>와 <산천가Санчонга>가 있다.

물론 모이세예프 발레가 처음부터 모두에게 박수갈채를 받았던 것은 아니다. 활동 초기, 소비에트 발레비평가 빅토르 이빈그(В.П. Ивинг)의 경우는 3분여짜리 짤막한 형식에 경쾌한 리듬, 현란한 안무의 러시아 춤을 ‘민속 무용에 대한 왜곡이며 단순한 캐리커처’라며 모이세예프 민속 발레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모이세예프가 민속춤을 ‘민족의 정신에 내재하는 무언의 시, 시각적 노래’라고 말했듯이, 한 민족의 역사와 정신, 삶이 총체적으로 결합된 민속 발레 무대는 곧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뿐만 아니라 이 단체는 1930년대, 소비에트 내 다양한 민족의 단결과 통합을 위해 민속 예술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소비에트 정부로부터 ‘내용적으로는 소비에트적이고 형식적으로는 국제적인’ 공연이라는 극찬을 받았고, 급기야 정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소비에트 간판 공연단으로 급부상했다. 실제로 이 단체는 볼쇼이 발레단보다도 더욱 이른 시기에 해외 활동을 시작했는데, 해외 공연을 처음 시작한 1930년대 말부터 지금까지 한국과 북한을 포함, 70개국 이상을 여행하며 러시아 발레의 새로운 한 축을 세계 무대에 소개해 왔다. 특히 역사적으로 오랜 시간 동안 폐쇄국가로 존재해 왔던 러시아가 서방과의 냉전 체제를 고수하고 있던 무렵에는 러시아-외부 간 인식적 간극을 메우고 정서적 이해를 돕는 ‘문화외교단체’로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그리고 모이세예프가 사망하고 난 오늘날에는 그의 예술 정신과 창작세계를 사랑하는 후대 예술가들이 그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아, 그가 남긴 3백여 개의 작품들을 세계 각지에서 여전히 선보이고 있다. 이처럼 모이세예프 발레단이 소비에트 시대를 관통하며 오늘날까지도 러시아를 대표하는 무용 단체로서 세계 공연계를 누비고 있다는 사실은 세계 발레 역사에서 모이세예프 발레단이 중요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모이세예프 발레단의 '러시아 춤'>


모이세예프 발레단의 내한을 기다리며

얼마 전, 오는 3월 모이세예프 발레단이 26년 만에 내한한다는 소식을 언론 기사를 통해 접한 바 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발레와 민속, 인간의 삶과 영혼, 역사성과 현재성을 두루 포괄하는 모이세예프 발레단의 무대가 한국 관객들을 만나 소통하는 일은 한-러 교류 30주년을 맞이하는 오늘날 매우 시의적절한 문화이벤트가 아닐까 한다. 아울러 이는 모이세예프가 다양한 민족들의 색채와 정취, 어제와 오늘을 하나의 무대 위에 올리며 끊임없이 고민해야 했던 ‘소통과 화합’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진정한 교류의 무대가 되지 않을까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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