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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파벨 트레티야코프: 상인으로 태어나 러시아 예술수호자로 삶을 마감하다
분류회화
국가 러시아
날짜2020-01-01
조회수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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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트페테르부르크에 ‘에르미타주(Эрмитаж)’와 ‘러시아 미술관(Русский музей)’이 있다면, 모스크바에는 ‘트레티야코프 갤러리(Третьяковская галерея)’와 ‘국립 푸시킨 미술관(또는 국립 푸시킨 조형예술 박물관)’이 있다”라는 문구는 러시아 관련 전공자들 사이에서 흔히 오가는 말 중 하나이다. 그만큼 위의 4개 미술관은 러시아를 대표하는 예술적 상징물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미 잘 알려져 있다시피,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에르미타주’와 ‘푸쉬킨 미술관’은 러시아 미술품이 아닌 서구의 미술품을 모아놓은 곳이고, 러시아 화가들의 작품은 ‘트레티야코프 갤러리’와 ‘러시아 미술관’에 모여있다.

그럼 여기서 질문 하나. ‘러시아 미술관’과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중 어느 곳이 좀 더 ‘러시아적’인 색채를 지닌 곳일까?

개인적으로는 ‘트레티야코프 갤러리’가 좀 더 러시아적인 박물관에 가깝지 않나 생각된다. 물론 소장품 규모로만 따지지만 ‘러시아 미술관’이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을 훨씬 능가한다. ‘러시아 미술관’은 개관 당시에 이미 445점의 회화작품, 그리고 111점의 조각품, 981점의 음영화, 그리고 무려 5000점에 이르는 성상화 및 고대 러시아 공예품을 소장하고 있었으며, 니콜라이 2세의 칙령으로 책정된 특별 예산으로 더 많은 작품을 구입하여 개관 후 10년 만에 이미 소장품이 무려 2배 이상 늘어나게 되었고, 2019년 현재 러시아 미술관의 소장품은 40만여 점에 이른다 (참고로 ‘트레티야코프 갤러리’의 현재 소장품 규모는 약 17만 점에 달하는 것으로 확인된다). 하지만 ‘러시아 미술관’은 일반인이 아닌 러시아 ‘황실’에 의해 세워진 미술관이였다. 알렉산드르 3세의 구상과 이를 실행에 옮긴 니콜라이 2세의 황제령에 힘입어 ‘러시아 미술관’은 소장품 규모 면에서도 월등히 우월할뿐더러, 소장품 역시 저 멀리 키예프 루시 시대부터 21세기에 이르기까지 무려 1000년에 달하는 시대를 아우르는 것들로 가득하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초기 ‘러시아 미술관’의 소장품들은 모두 기존의 다른 미술관 소장품들을 옮겨온 것들이었다. 에르미타주를 비롯하여 알렉산드르 궁전 내 소장품, 미술 아카데미는 물론 개인 소장자들로부터 ‘차출’한 다양한 시대의 다양한 소장품이 빠르게 ‘러시아 미술관’으로 집결했다.

이에 비해 ‘트레티야코프 갤러리’는 순수하게 파벨 트레티야코프라는 개인의 취향과 안목, 그리고 개인의 자산을 들여 세워진 미술관이란 점에서 ‘러시아 미술관’과 그 출발점이 다르다 할 수 있다. 미술관 설립 시점 역시 엄격하게 말하자면 ‘트레티야코프 갤러리’가 ‘러시아 미술관’을 앞선다. 하지만 ‘러시아 미술관’은 러시아 최초로 러시아 예술품을 전문적으로 소장, 전시한 국립미술관이란 점에서 역시 그 의의가 남다르다 할 수 있다.

 


파벨 트레티야코프는 매우 내성적이고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당대 유명한 화가들이 그려놓은 그의 초상화를 비롯하여 몇 점 남아있지 않는 그의 사진 속에서 ‘말 없음’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그의 표정과 시선을 발견할 수 있다. 오죽하면 가족들 사이에서도 그를 일컬어 ‘웃을 줄 모르는 무뚝뚝쟁이’라고 했을까. 하지만 이렇게 말 없고 무뚝뚝한 파벨을 수다스럽게 만드는 유일한 대상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그림’ 이었다.

평소 표정 변화도, 말도 없기로 유명했던 ‘조용한’ 청년 파벨은 1852년 가을, 페테르부르크를 방문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에르미타주’와 ‘루먄체프 박물관’을 다녀온 뒤 달뜬 기분으로 곧장 어머니에게 편지를 쓰게 된다.

“어머니, 수천 점에 달하는 그림을 봤어요! 위대한 화가들의 그림을요…. 라파엘, 루벤스, 푸생, 반 데르 베르프의 그림을 봤어요! 수많은 입상과 흉상을 봤어요! 예전에 제가 미처 이해조차 할 수 없었던 수백 점의 탁자와 화병, 석조 조각품도 봤어요!”

편지 속에서 평소와 다른 파벨의 다소 흥분되고 다소 톤이 올라간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하다. 그리고 바로 이 페테르부르크 여행 뒤에 파벨 트레티야코프는 상인이라는 천직 외에 ‘컬렉터’라는 또 하나의 은밀한 직업을 가지게 된다.

컬렉터로서의 파벨 트레티야코프의 면모는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부터 시장과 상점을 누비며 판화와 석판화를 사 모으던 꼬맹이는 1852년 가을 페테르부르크 여행을 다녀온 지 약 3년 반 가량의 시간이 흐른 1856년에 비로소 제대로 된 러시아 화가의 작품을 처음으로 소장하게 된다. 이 때 그의 나이 불과 24살에 지나지 않았다. 미술품을 투자 목적으로 사들였던(!) 세르게이 슈킨(С. Шукин)이나 직접적인 미술품 컬렉터로 나서지 않고, 그 미술품을 창작하는 화가들을 지원했던 마몬토프(С. Мамонтов)와 다른 점이 바로 이 부분이다. 게다가 트레티야코프는 당시 전 세계 화단에서 유행의 선두에 있던 서구 인상주의가 아닌 순수한 러시아 화가의 작품에 이끌려 자신만의 독보적인 컬렉션을 만들어 나가게 된다.

파벨 트레티야코프가 처음으로 구입한 그림은 바로 바실리 후댜코프(В. худяков)의 <핀란드 밀수업자들과의 한 판 (Стычка с финляндскими контрабандистами)>, 그리고 니콜라이 쉴데르(Н. Шильдер)의 <유혹(Искушение)>이라는 그림이었다. 이후 그가 구입한 그림을 살펴보면 러시아 역사의 한 장면, 또는 러시아 민중의 일상과 풍속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작품이 대다수를 이루고 있다는 점을 금세 알아챌 수 있다. 그중에서도 파벨 트레티야코프가 특별히 아끼고 사랑했던 화가는 <트로이카(Тройка)>라는 작품으로 잘 알려진 바실리 페로프(В. Перов)였다.

 

파벨 트레티야코프의 컬렉션을 살펴보면, 그의 대표작으로 잘 알려진 <트로이카>나 <고인의 배웅(Проводы покойника)>과 같이 당시 러시아 현실의 우울한 단면을 담아낸 그림도 있지만, 의외로 이것은 혹시 파벨 페도토프(П. Федотов)의 그림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 필치와 분위기가 흡사한 유쾌한 풍자화와 농민들의 일상을 화폭으로 옮긴 그림도 많이 포함되어 있다. <농촌의 부활절 십자가 행렬(Сельский крестный ход на Пасхе)>, <철도역 근처에서의 한 장면(Сцена у железной дороги)>, <풋내기(Дилетент)> 등의 작품이 바로 그것이다.

 


파벨 트레티야코프에게 민중의 일상은 곧 러시아의 역사를 이루는 단면이었고, 화폭에 담긴 그 단면들을 모아 갤러리라는 거대한 역사의 보고를 만드는 것이 그의 목표였던 것이다. 이렇듯 역사적 사실에 대한 깊은 관심과 러시아 현실의 긍정적 혹은 부정적인 면을 그려낸 작품들을 가리지 않고 수집한 그의 예술적 신념은 이후 ‘이동파’ 화가들의 작품을 중심으로 러시아 ‘비판적 리얼리즘’ 컬렉션을 완성하기 위한 기반이 된다. 사브라소프(А. Сабрасов), 수리코프(В. Суриков), 크람스코이(И. Крамской), 베레샤긴(В. Верщагин), 폴레노프(В. Поленов) 등 19세기 거장의 손에서 탄생한 그림들이 속속 1851년에 파벨 트레티야코프가 자신과 가족들의 보금자리이자 동시에 자신의 컬렉션을 보관하기 위한 장소로 택한 라브루쉰 골목(Лаврушинский переулок) 10번지에 위치한 집의 벽면을 채워나갔고, 이러한 이동파 화가들의 그림은 트레티야코프 컬렉션의 가치를 더욱 빛나게 하는데 일조하게 된다.

사람들은 그의 거실에 과연 어떤 그림이 걸려있는지 궁금해하면서 매일같이 라브루쉰 골목으로 몰려들었다. 결국 파벨은 자신 개인의 만족이 아닌 러시아 민중을 위한 공간으로써 갤러리를 건축하기로 하고, 자신의 집 옆에 오로지 전시를 위한 공간을 새로 증축하기에 이른다.

1892년 8월 31일, 전시관을 위한 건물을 모두 완성한 파벨 트레티야코프는 마침내 모스크바 시의회에 자신의 컬렉션과 자신의 동생 세르게이 트레티야코프의 컬렉션을 기증하겠다는 청원서를 제출하게 된다. 시의회는 공식적으로 그의 청원을 받아들이고, 감사의 표시로 미술관 명칭에 ‘트레티야코프’라는 성을 올렸으며, 1893년 역사적인 개관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트레티야코프 갤러리 개관 당일에, 갤러리 개관에 있어서 가장 큰 공헌자나 다름없는 파벨 트레티야코프는 가족과 함께 멀리 해외여행을 떠나버린다. 당시 갤러리 개관식에 참석했던 황제 알렉산드르 3세는 심지어 파벨 트레티야코프에게 귀족 작위를 수여하고 싶어 했지만, 그 소식을 전해 들은 파벨은 “나는 상인으로 태어났고, 상인으로 삶을 마감할 것입니다”라는 말로 황제의 제안을 정중하게 거절한다. 참으로 파벨다운 결정이고, 그의 성정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게 해 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누군가에게 과시하기 위해, 혹은 금전적 투자를 목적으로 미술품을 구입한 것이 아니라, 미술을 사랑하는 순수한 열정과 그 열정을 민중과 나누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미술품을 수집해왔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누군가에게 나설 필요도, 그것을 통해 어깨를 으쓱댈 필요도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파벨 트레티야코프가 단순한 미적 취향의 일환으로 미술품을 수집한 것이 아니라는 점은 그가 종종 해외를 드나들며 독일과 프랑스, 이태리, 영국 등 미술 선진국에 있는 다양한 전시장과 박물관을 방문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회화 기법과 기술을 스스로 습득하고, 더 나아가 복원 기술까지 익힌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림을 감상함에 있어서 단순히 그림을 보는 것, 그림에 이론적 분석을 가하는 것을 뛰어넘는 방식이 바로 그림이 그려진 기법과 방식을 이해한 상태에서 작품을 감상하는 방법이다. 어느덧 파벨은 스스로 작품에 바니시를 칠하고, 복원가의 도움 없이도 손상된 화폭을 스스로 복구할 수 있을 정도의 재능을 갖추게 되었고, 이로써 ‘컬렉터-감상자’에서 ‘컬렉터-실천가’, 더 나아가 ‘실천가-예술가’의 위상을 갖춘 특별한 컬렉터로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렇듯 예술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 차원이 아닌 진정으로 작품을 이해하고 아끼는 그의 마음은 고스란히 당대 예술가들에게도 전해져서 그를 후원가 혹은 컬렉터 그 이상의 존재로 여기게 만들어 줬다.

1896년 12월, 모스크바 시의회는 “고대의 수도 모스크바에 자신의 귀중한 러시아 예술품 컬렉션을 기증하고, 모스크바를 러시아 예술 계몽을 위한 중심지로 만들어 준” 파벨 트레티야코프에게 깊은 감사를 표하며 그를 모스크바 명예시민으로 위촉했다. 이후 파벨은 자신의 남은 삶을 모스크바 시민으로서, 또한 트레티야코프 갤러리의 수호자이자 후원자로서 살아가게 된다. 이미 자신의 컬렉션을 모두 넘기고 더 이상 그것에 대한 의무나 책임이 없었지만, 파벨은 여전히 수많은 화가들과 연락을 취하며 트레티야코프 갤러리가 소장한 작품의 ‘카탈로그 레존네(catalogue raisonné)’를 작성하는 것에 열중했다. 트레티야코프 갤러리의 영원한 수호자인 파벨 트레티야코프는 1898년 12월 4일 마침내 영면에 들게 된다. 사바 마몬토프의 사촌 여동생이었던 그의 부인 베라 역시 남편이 세상을 떠난 지 불과 3달 만에 남편의 곁으로 떠나게 된다.

 

<트레티야코프 갤러리 입구에 세워진 파벨 트레티야코프의 동상>

“이따금 갤러리에 키가 크고 마른 사람이 나타나곤 했다. 그는 프록코트에서 손수건을 꺼내 들고 ‘덩어리’처럼 돌돌 말아 이 그림, 저 그림 앞을 서성대면서 그림 위에서 발견된 먼지를 조심스레 닦아내며 주의 깊게 작품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그가 파벨 미하일로비치 트레티야코프라는 것을 알았다.”

이렇게 자신의 남은 생애를 트레티야코프 갤러리 속 ‘예술수호자’의 삶에 바쳤던 파벨 트레티야코프의 모습은 현재 갤러리 앞에 전시된 그의 동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굳이 갤러리 내부가 아닌 갤러리 바깥에, 그것도 입구로부터 다소 멀찍이 떨어진 곳에 세워진 그의 동상에서 “나를 보시오, 내가 이 갤러리의 설립자나 다름없소!”라는 외침은 전혀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생전과 다름없이 ‘말 없고 무뚝뚝한’ 표정으로,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듬직한 예술수호자이자 자신의 등 뒤에 위치한 갤러리 파수꾼의 역할을 자처하며 서 있는 듯 하다. 파벨 트레티야코프 자신은 “상인으로 태어나 상인으로 죽겠다”라고 선언했지만, 그가 몸소 보여준 실천적 모습은 “상인으로 태어났지만 진정한 러시아 예술 파수꾼으로 삶을 마감하다”라는 말로 그의 생애를 설명하는 것이 결코 어색하지 않으며, 그렇게 오늘날까지도 모스크바의 라브루쉰 거리는 그 수호자를 닮은 고즈넉한 분위기를 한껏 품은 채 러시아 예술을 감상하려는 사람들을 조용히 맞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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