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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러시아 현대 음악가 바딤 레핀에 대하여
분류음악
국가 러시아
날짜2019-11-01
조회수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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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바이올리니스트 바딤 레핀

바딤 레핀(В.В. Репин)은 현재 세계 음악 시장에서 가장 높은 몸값을 자랑하는 러시아 바이올리니스트 TOP-5 안에 손꼽힐 만큼 대중적 인지도와 국제적 위상을 확고히 다진 음악가다. 1989년, 그는 국제무대에 등장하자마자 현대음악의 감성을 가장 잘 표현하는 바이올리니스트라는 극찬을 받으며 일약 스타덤에 올랐고, 로스트로포비치(М. Ростропович)를 비롯해 네빌 마리너(Neville Marriner), 리카르도 무티(Riccardo Muti), 발레리 게르기예프(В. Гергиев)와 같은 각국의 지휘 거장들과 세계무대를 누비며 협연 무대를 개최했다. 뿐만 아니라, 제임스 맥밀란(James MacMillan), 벤자민 유수포프(Б. Юсупов)와 같은 저명 작곡가들은 그에게 헌정곡을 선사하기도 했는데, 이는 세계 음악 시장에서 그가 자리하는 현재의 위치와 미래의 가능성을 말해주는 일례라고 볼 수 있다. 해외 비평계 역시 그를 주목했다. 독일 일간지 <타게스피에겔(Tagesspiegel)>은 그를 ‘현존하는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라고 규정했는가 하면, 미국 출신 바이올린 연주자 겸 지휘자 예후디 메뉴인(Yehudi Menuhin)은 자신에게 듣는 기쁨을 선사한 ‘가장 완벽한 바이올리니스트’로 레핀을 지목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명성에도 불구하고 바이올리니스트 레핀이 음악 거장으로 성장하게 된 배경과 그 과정에 대해서는 지금껏 일반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널리 알려진 몇 가지 사실은, 5세 무렵 바이올린을 전혀 배운 적 없던 그가 단 6개월 만에 첫 연주를 선보일 만큼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다는 것과 그의 스승 자하르 브론(З. Брон)의 후원하에 어린 시절부터 주요 콩쿠르에서 금메달을 수상하기 시작했다는 것, 18세에는 세계 유수 국제음악콩쿠르에서 우승을 거머쥐어 해당 대회 역사상 가장 젊은 수상자가 되었다는 것 등 그에 대한 전설과도 같은 성공신화 스토리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대중들은 레핀의 초고속 성장과 성공을 볼 때, 그가 다른 많은 유명 예술가들이 그랬듯이, 음악가 집안에서 나고 자라 예술적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을 것이며, 그의 모든 재능과 성취는 다른 무엇보다 유전자의 힘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라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 레핀은 음악과 무관한, 지극히 평범한 가정에서 나고 자란 자수성가형 천재였다.


                                                                        <13세의 바딤 레핀, 1984>

1971년 8월 31일, ‘새로운 시베리아의 도시’,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바딤 레핀이 탄생했다. 그의 아버지는 이름 없는 화가였고 어머니는 간호사였다. 레핀은 여러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특히 어머니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드러내는데, 어머니는 그의 음악적 재능을 처음으로 발견한 가족이었고, 깊은 모성애로 그의 학업과 성공을 위해 헌신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증언에 따르면, 레핀은 어린 시절 언제나 장난감 악기에 큰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하모니카, 피리, 어린이용 실로폰이 그의 친구가 되었고, 집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멜로디는 단 몇 시간 만에 그 장난감 악기들을 통해 연주되곤 했다. 그가 5세 되던 해인 1976년, 그의 재능을 알아본 어머니는 아들을 음악학교로 데려갔다. 처음 입학했을 당시 그는 바얀(баян)에 관심을 보였으나, 소질이 다소 부족했던 까닭에 바이올린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를 가르쳤던 스승의 말대로, ‘바이올린 분야에서 두각을 보였던 실패한 바얀 연주자’ 레핀은 곧 그의 ‘손이 바이올린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증명했고, 급기야 교내에서 바이올린 신동으로 이름을 알렸다. 2년이 지난 후, 그는 나탈리야 가티아툴리나(Н. Гатиатулина)의 지도하에 공부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레핀의 재능을 높이 평가해 보다 체계적인 학습이 가능한 노보시비르스크 음악원으로 옮길 것을 권유했다. 선생님의 의견에 따라 레핀은 노보시비르스크 음악원에 재입학했고, 1970년대 소련과 독일을 무대로 활동해 소련 명예 예술가 훈장과 독일연방공화국 공로 훈장을 받은 바 있는 바이올린 거장 자하르 브론의 제자가 되었다. 당시 브론은 레핀의 연주 기술을 향상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음악가가 지녀야 할 모든 요소들을 학습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처음부터 그는 과하다시피 할 정도의 높은 학습 목표를 설정했다. 고난도의 다양한 연주 기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던 19세기 이탈리아 천재 니콜로 파가니니(Niccolo Paganini)의 연주 기술을 어린 레핀에게 가르쳤던 것이다. 강도 높은 수업 방식에 레핀이 지쳐갈 때쯤이면, 브론은 매일 반복되는 수업이 필요한 이유를 레핀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인식, 그에게 가능한 한 많은 연주회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레핀은 나름대로 브론의 학습법을 잘 소화해냈다. 그에게 주어진 학습 내용과 분량은 어린 소년이 감당하기에 버거운 것들이었음에도, 레핀은 책임감과 성실함으로 그 시간들을 헤쳐나갔다. 그러나 분명 만족감도 느끼고 있었던 듯하다. 다른 학생들이 학교 정원에서 모여 여유를 만끽하거나 평화롭게 낮잠을 즐기며 자유 시간을 보낼 때면 바딤은 혼자 솔페지오(solfeggio) 레슨실로 향했고, 그토록 노력하는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했다니 말이다.

레핀은 몇 년간 노력의 결과를 우승으로 보상받았다. 11세에 그는 비냡스키 콩쿠르에서 우승해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에서 첫 개인 콘서트를 개최했고, 14세부터는 일본, 독일, 필란드, 미국 등으로 연주 여행을 시작했다. 급기야 1989년에는 벨기에의 엘리자베스 여왕 콩쿠르에서 최연소 우승자가 되어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기도 했다. 그러나 브뤼셀에서 승리를 거둔 그해, 그의 음악적·정신적 스승 자하르 브론은 러시아를 떠날 채비를 마친 상황이었다. 레핀을 비롯한 막심 벤게로프(М. Венгеров), 니콜라이 마도예프(Н. Мадоев), 나탈리야 프리셰펜코(Н. Прищепенко) 등 브론의 제자들은 스승과 함께 독일 뤼베크로 이주했다.


                                                                        <바딤 레핀과 자하르 브론>

고향에서: 시베리아횡단예술제

레핀은 여러 인터뷰를 통해, 자신이 비교적 젊은 나이에 러시아를 떠났음에도 러시아를 ‘집’으로, 그가 오랜 기간 동안 체류했던 해외 도시들을 ‘예술적 거점’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힌 바 있다. 그만큼 고국은, 예술을 위해 세계 각지를 여행하며 삶을 살아왔던 그에서 그립고 소중한 안식처이자 휴식처였던 것 같다. 빼곡한 해외 일정 중에도 아직까지 매 시즌마다 2-3회의 연주회를 반드시 모스크바에서 개최할 만큼 러시아와 러시아 팬들은 그에게 소중한 존재다. 그의 고향인 노보시비르스크에 대한 애정 역시 각별하다. 레핀은 노보시비르스크에서 매년 마스터 클래스를 정기적으로 운영하고 있는가 하면, 재능있는 학생들을 위해 레핀 장학금을 지급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고향에 대한 그의 애정을 잘 보여주는 예는 그가 2014년부터 매년 봄마다 노보시비르스크에서 개최하고 있는 ‘트랜스시베리아 아트 페스티벌(Транссибирский Арт-Фестиваль)’일 것이다. 유럽에서 활동할 당시 레핀은 노보시비르스크가 현대식 콘서트홀, 최신식 음악교육 시설들을 갖추고 있음에도, 아직까지 서구 음악계에는 음악, 예술의 볼모지로 알려져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그는 이와 같은 외부의 왜곡된 인식을 개선하고, 나아가서는 노보시비르스크를 러시아 대표 ‘예술의 도시’로 확립시키기 위해 대규모 예술 행사를 기획했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 시베리아 지역의 최대 국제 행사로 자리 잡은 ‘트랜스시베리아 아트 페스티벌’, 즉 ‘시베리아횡단예술제’이다.



                                                                      <시베리아횡단예술제 포스터>

이 행사는 그 이름에 걸맞게 러시아 전역과 나아가서는 동서양의 문화를 통합하려는 레핀의 아이디어를 반영한다. 축제의 설립자이자 예술 감독으로서 레핀은 시베리아 지역의 뛰어난 예술가들을 섭외할 뿐만 아니라, 동양권 예술가들을 초청하기도 한다. 올해만 하더라도 프랑스 국립 릴 필하모니아 관현악단 지휘자 장-클로드 카사드쉬(Jean - Claude Casadesus), 스위스계 색소폰 연주자이자 작곡가 다니엘 슈나이더(Daniel Schnyder), 라트비아 출신 독일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Gidon Kremer)와 같은 유럽 저명 음악가들로부터 바이올리니스트 안나 타나카(Anna Tanaka), 피아니스트 마리 코다마(Marie Kodama)와 유키오 요코야마(Yukio Yokoyama) 등 일본 음악가들이 축제의 게스트로 초청되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지난 7월, 세종솔로이스츠가 바이올리니스트 클라라 주미 강, 레핀과 함께 ‘2019 힉엣눙크! 갈라 콘서트’를 시베리아횡단예술제의 한국 무대에서 선보이기도 했다.

예술제의 결과를 보면, 제1회 예술제가 개최된 지 6년이 지난 오늘날 그가 생각한 애초의 의도와 취지는 잘 실현되어가고 있다고 보여진다. 2014년 첫 예술제 이래로 2018년까지 총 5년 동안 노보시비르스크를 찾은 관객의 수는 5만여 명에 달했고, 올해 개최된 제6회 페스티벌에는 약 1만3천여 명의 음악팬들이 참여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이렇게 보면 이 예술제가 명실공히 국제 축제로서의 규모와 시설을 갖춘 러시아 대표 예술제라 불릴 만한 것도 사실이다.

    

거장의 악기: 스트라디바리우스 vs 과르니에리

음악가가 사용하는 악기는 그 음악가가 추구하는 음악의 경향성을 말해준다. 레핀의 첫 번째 악기는 노보시비르스크의 장인 미하일 데플레르(М. Дефлер)가 만든 것으로, 레핀은 소년 시절부터 그의 악기를 너무도 좋아했으며, 오늘날까지 여전히 그에 대한 고마움을 간직하고 있다.

큰 음량과 깊고 섬세한 음색을 지닌, 바이올리니스트라면 누구나 소장하길 꿈꾸는 스트라디바리우스(stradivarius)를 연주할 기회가 그에게 찾아온 시기는 11세가 되던 해였다. 이는 이탈리아 바이올린 명장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Antonio Stradivari)가 17-18세기 무렵 만든 것으로, 스트라디바리우스를 연주하는 연주자에게 주어지는 임무 중 하나는 후대에 좋은 음악을 계승할 수 있도록 바이올린을 잘 길들이는 것이라고 하니, 악기의 이름이 주는 무게와 그 상징성은 매우 대단하다. 당시 음악 신동으로 러시아를 떠들썩하게 만든 레핀에게 문화부 장관은 국가 소장품에 해당하는 스트라디바리우스를 선물했다. 그가 받은 스트라디바리우스는 어른용 악기의 것과 다르지 않은 소리를 내는 바이올린이었지만, 작은 체구의 소년에게 알맞은 소형 악기였고, 레핀이 온전한 성인용 스트라디바리우스를 연주할 수 있게 된 것은 3년이 흐른 뒤인 14세가 되던 해였다.

그러나 현재 레핀은 과르니에리(Guarneri) 바이올린을 연주한다고 한다. 레핀은 자신의 음악 경향을 말하면서 스트라디바리우스와 과르니에리의 섬세한 차이를 설명한 바 있는데,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은 지극히 이상적인 소리와 초월적이고 환상적인 음색을 드러내, 바이올린 자체가 연주의 규칙을 만들어낸다고 한다. 반면 과르니에리는 마치 절단된 조각의 나무들을 붙여놓은 것처럼 바이올린을 제작하는 것으로 유명하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에 그 모양새가 볼품없고 거친 듯하지만, 실제로는 이상적인 비율을 자랑한다. 또한 이는 세속적인 소리나 거친 소리를 포함한 광범위한 음색의 표현이 가능하므로 현대음악을 연주하기에 적합하다. 레핀이 말한 ‘과르니에리로 연주하기에 적합한 곡’들로는 각각 미국과 러시아 음악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구축하고 있는 현대음악 작곡가 존 아담스(John Adams)와 소피야 구바이둘리나(С.А. Губайдулина)의 작품들이 있으며, 이는 레핀의 주요 레퍼토리이기도 하다. 이처럼 현대음악의 감성을 추구하는 레핀을 위해 일부 현대 작곡가들은 바이올린 곡을 창작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제임스 맥밀란은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을 레핀에게 헌정했는데, 이 곡은 발레리 게르기예프의 지휘로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런던에서 초연되었다. 또 다른 현대 작곡가 벤자민 유수포프 역시 그를 위해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 2번 “바이올린의 목소리(Голос скрипки)”를 작곡했고, 이는 2014년 노보시비르스크 무대에서 처음 공연되었다.


                                                                    <바딤 레핀과 발레리 게르기예프>

이처럼 저명 작곡가들이 주목하는 바이올리니스트, 현대음악의 감성을 가장 잘 표현하는 바이올리니스트로 평가받는 레핀의 스케줄 표에는 2-3년 간 그가 작업해야 할 일들이 빽빽이 차 있다. 통상적으로 세계적 수준의 콘서트들은 수년 전에 미리 기획되므로 레핀의 투어 일정은 2-3년 전에 계획, 확정되기 때문이다. 그는 바이올리니스트의 공연 일정을 잡는 일은 매우 복잡한 문제인데, 여기에서 그가 반드시 지키는 원칙이 있다고 말한다. 우선 그는 자신이 출연할 콘서트를 결정할 때 ‘출연료’, ‘행사의 명성’, ‘동료와의 우정’이라는 세 가지 요소를 염두에 두고 결정한다. 둘째, 그의 최우선적 목표는 연주의 질이므로 무리한 일정을 계획하지 않으며, 매년 100회 이상의 콘서트를 열지 않는다. 셋째, 레핀은 하나의 콘서트가 끝난 뒤에는 다음 연주를 위해 컨디션 회복에 가장 신경 쓴다고 한다. 그에게 있어 무한한 영감, 행복, 에너지의 원천은 바로 고향, 그리고 가족이다.
    

현재적 삶과 사랑, 그리고 예술:

현대 러시아음악을 대표하는 바이올리니스트 레핀, 시베리아횡단예술제의 예술 감독 레핀. 그렇다면 현재 그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성인이 된 바딤 레핀의 삶에 대한 정보는 학창 시절에 대해 알려진 것보다도 오히려 적다. 대중에 노출된 것이라고는 그가 두 차례 이혼 후 스베틀라나 자하로바(С.Ю. Захарова)와 세 번째 결혼식을 올렸다는 사실 정도이다. 사실 레핀은 스스로 음악가로서만 대중들 앞에 서고 싶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왔다. 그는 수차례 개인적인 삶이 공공의 영역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사실을 밝히며, 언론의 관심으로부터 자신과 가족들을 철저히 보호해왔다. 이처럼 레핀은 사생활 노출에 무척이나 예민한 편이지만, 다양한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아내에 대한 깊은 신뢰와 사랑을 고백하는 것에는 적극적이었다. 그는 아내 자하로바와의 관계를 정신적으로, 그리고 정서적으로 분리될 수 없을 만큼 견고히 결합된 관계이며, 그는 각자의 예술 활동으로 세계 여러 지역을 여행하느라 함께 지낼 수 없을 때 극심한 심리적 무력감을 느낀다고 말한 바 있다. 한편 볼쇼이 발레를 대표하는 세계적 프리마 발레리나 자하로바는 행복한 결혼 생활의 핵심 요소를 하나의 사안을 바라보는 견해의 일치와 예술에 대한 끝없는 사랑이라고 답변했다. 이들은 종종 극장과 전시회를 방문하는데, 여기에서 보고 들은 것을 열정적으로 토론하며 서로의 감정과 생각을 공유한다고 전했다. 이와 같은 인터뷰는 많은 음악팬들과 발레팬들을 통해 알려졌고, 레핀과 자하로바는 ‘깊이 있는 예술 인생’과 ‘바람직한 결혼 생활’을 성공적으로 이어가고 있는, ‘러시아가 낳은 세기의 예술가 커플’로 인정받고 있다.

 
                                             


그리고 이 부부는 시베리아횡단예술제를 통해 새로운 도전을 꾸준히 시도하고 있다. 바이올리니스트와 발레리나 부부이기에 가능한, 음악과 춤의 새로운 콜라보레이션을 탄생시킨 것이다. 레핀의 바이올린 소리에 맞춰 자하로바는 발레를 선보이고, 레핀이 빚어내는 바이올린의 울림은 자하로바의 섬세한 동작들과 결합되어 아름다운 하모니를 만들어낸다. 누구보다 자하로바의 몸짓을 섬세히 읽어내는 남편 레핀, 누구보다 레핀의 예술적 감성을 풍부하게 표현해내는 아내 자하로바가 함께 무대에 서는 것이다. 그리고 이 부부는 현재 국내 무대를 비롯한 세계 전역을 함께 순회하며 ‘사랑이 깃든 예술’, ‘예술을 통한 사랑’을 세계 관객들에게 선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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