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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문화로(文化路)
제목<백조의 호수>가 모든 발레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분류전통문화
국가 러시아
날짜2017-08-19
조회수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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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 내게 러시아를 대표하는 발레 공연 중 <백조의 호수>와 <지젤>에 버금가는 공연을 추천해달라면, 나는 주저없이 <라 바야데르(Баядерка)>를 권할 것이다. 이 작품은 마리우스 프티파가 안무를 맡고, 류드비히 민쿠스가 작곡에 참여하여 완성되었다. 이 발레의 원전은 괴테의 <신과 무희(Der Gott und die Bajadere)>, 인도의 칼리다사가 지은 희곡 <샤쿤탈라>이다. 또한 마리우스 프티파의 <라 바야데르>는 1858년 프티파의 형인 루시엥 프티파가 이미 <샤쿤탈라>를 모티프로 삼아 프랑스 무대에 올린 발레에서도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차용해왔다.
발레 <라 바야데르>가 초연된 날짜가 1877년 1월 23일이니, 올해로 정확히 140년을 맞이하였다. 러시아 페테르부르크에 위치한 ‘볼쇼이 극장’*(모스크바에 있는 볼쇼이와 다른 페테르부르크 볼쇼이 극장이다!)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라 바야데르>는 자국민들에게 이미 오래전부터 ‘발레의 고전’으로 사랑받고 있다. <라 바야데르>는 러시아 발레의 고전주의와 낭만주의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해 줬으며, 프티파의 마지막 비극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또한 러시아를 대표하는 유명한 발레리나 안나 파블로바 역시 <라 바야데르>의 여주인공인 무희 ‘니키야’의 역할을 맡아 공연하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하지만 세계무대에서 이 공연이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속의 미녀>와 같은 작품에 버금가는 명성을 얻기까지는 거의 10년에 달하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라 바야데르’ 2막 中>                                    <‘라 바야데르 3막 中>

 

물론 관객과 비평가들은 이 ‘특이한’ 발레가 초연된 이래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동시에 ‘독창성’이란 부문에는 인색한 점수를 매겼다. 그도 그럴 것이 <라 바야데르>를 보고 있자면, 처음에는 <돈 키호테>나 <잠자는 숲속의 공주>처럼 전통적인 ‘우아한’ 발레가 나오다가, 중간에는 마치 <호두까기 인형>에서 나오는 다양한 각국의 춤향연이 펼쳐지고, 마지막 부분에 이르면 다시 <지젤>이나 <백조의 호수>에서 나오는 잠잠한 ‘대군무’의 향연이 겹쳐지기 때문이다. 나 역시 처음에 <라 바야데르>를 관람하면서 ‘으응? 이거 완전히 유명한 발레의 명장면만 골라골라 다 섞어놨네!’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라 바야데르>가 공연되는 내내 펼쳐지는 이국적인 의상과 동양적인 무대 배경, 예쁘고 정적인 선을 벗어난 역동적이고 격렬한 춤사위와 고전적 발레가 지닌 우아함의 조화, 다채롭고 아기자기한 구성은 독창성에 대한 논란을 종식시키고 관객들의 시선을 지속적으로 무대에 고정시키기에 충분했으며, 오늘날 <라 바야데르>가 발레의 고전으로 우뚝 서게 해주었다.

 

내가 <라 바야데르>를 접하게 된 것은 1994년 봄이라고 하기엔 아직 여전히 매서운 바람에 옷깃을 여미게 되는 추운 4월이었다. 러시아어 연수 차 모스크바에 머물던 당시 러시아어를 가르쳐 주시던 선생님께서 수업 시간 도중 갑자기 “너희들, 발레 공연 보러가고 싶지 않니?”라는 뜻밖의 제안을 해 주셨다. 같이 수업을 듣던 학생들은 너도 나도 “가고 싶어요!”라는 소리로 화답했고, 우리는 주말에 선생님과 함께 ‘볼쇼이 극장’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지금은 볼쇼이 극장을 비롯하여 러시아에 있는 많은 유명 극장들이 온라인 예매 시스템을 갖추고 합리적인 가격으로 관객들에게 표를 공급하고 있지만, 9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일반 ‘키오스크’ 매표소에서 볼쇼이 극장에서 상연되는 볼만한 공연의 표를 구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표는 이미 암표상들이 휩쓸어 갔고, 남아있는 표는 이름도 잘 모르는 지루한 오페라 공연표 뿐이었다. 그래서 원하는 공연을 보기 위해서는 공연 시작 30분 전쯤에 극장 앞으로 가서 암표상들과 함께 소위 ‘딜’을 시작하여 표값을 흥정한 뒤에 적정한 선에서 표를 구입하여 입장해야만 했다. 공연이 시작된 이후에는 표값이 떨어지기 때문에, 이미 몇 번의 ‘딜’을 거쳐 요령을 터득한 사람들은 일부러 공연이 시작하길 기다렸다가 홀연히 나타나 ‘좋은 가격’에 ‘좋은 좌석’의 표를 구해서 들어가기도 했다.

 

 

    

<볼쇼이 극장 야경>                  <볼쇼이 극장 내부>

 

당시 새내기 연수생으로 있던 나는 그런 요령이 없었던 터에, 무작정 ‘키오스크’ 주변만 맴돌며 ‘왜 표가 없는 걸까?’ 라는 의문과 더불어 “표 언제 오면 살 수 있어요?”라는 순진한 질문만 던져댔고 “나도 몰라”라는 무뚝뚝한 대답에 매번 러시아인들의 무심함만 탓하며 집으로 발길을 돌리곤 했다. 그러던 내게 선생님의 제안은 정말 감사하고도 가슴을 설레게 했다.

드디어 공연 당일, 볼쇼이 극장 앞에서 만난 우리는 선생님께서 나눠주시는 표를 한 손에 꼭 쥔 채 드디어 볼쇼이 극장 안으로 입성하게 됐다. 볼쇼이 극장은 바깥도 화려했지만 안은 더 화려했다. 사방이 다 붉은 카펫과 대리석, 황금빛 장식으로 둘러져있었고, 공연장 안으로 들어서면 그 규모와 화려함에 한 번 더 놀랐다.

당시 1등석이 ‘파르테르(Партер)’라는 것만 알고 있던 차에 입장권에 새겨진 ‘벨에타쉬(Бельэтаж)’라는 글자는 약간의 우려와 함께 호기심과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실제로 자리를 찾아 앉아보니 걱정과는 달리 이 자리야말로 공연을 관람하기에 최적화 된 자리였다. 게다가 선생님께서 구해주신 자리는 ‘벨에타쉬’ 중에서도 무대에 두 번째로 가까운 좌석이라서 약간의 과장을 보태서 무대 위 발레리나와 발레리노의 표정까지도 별도의 망원경 없이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지금도 나는 러시아에서 공연을 볼 기회가 있으면 좌석을 구할 때 ‘파르테르’보다는 ‘벨에타쉬’를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편이다. 앞 사람의 머리에 가려 무대가 잘려 보일 염려도 없고, 목을 한껏 뒤로 젖히거나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는 불편한 자세로 공연을 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벨에타쉬’는 보통 5~6명을 수용하도록 설계되었고, 칸막이와 별도의 출입문을 달아놓아서 좀 더 느긋하게 공연을 즐길 수 있다. 처음에 이 자리에 들어온 나와 친구들은 “우리 부채 하나씩 들고 부쳐야 되는거 아니야?”라는 농담을 서로 주고받았는데, 그도 그럴것이 보통 유럽 영화에서 귀족들이 앉아서 부채로 얼굴을 반 쯤 가리고 담소를 나누며 공연을 보던 자리가 바로 이 ‘벨에타쉬’였고, ‘벨에타쉬’가 위치한 열의 가장 정 중앙에는 과거에 러시아 황제가 앉아서 관람하던 자리가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볼쇼이 극장 좌석배치도>                 <볼쇼이 극장 ‘벨에타쉬’ 모습>

 

공연이 시작된 뒤에 기존의 발레와 크게 다르지 않은 장면에서 점점 남성적이면서도 현대무용에서 자주 나오는 역동적이고 선이 굵은 발레 장면이 이어져 나갔다. 뭔가 기존 발레와 스토리와 구성은 비슷한 것 같은데, 춤선이 완전히 다른 것에 놀라고 있던 중에, 2막에서 등장한 ‘황금 거인상의 춤’은 그 웅장한 스케일과 묵직함에 잠시 동안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발레 ‘라 바야데르’ 2막 중 황금 거인상의 춤>

 

볼쇼이 극장에서 ‘라 바야데르’를 보게될 기회가 있다면, 개인적으로는 겐나디 야신(Геннадий Ясин)이 황금거인상을 연기하는 공연을 찾아보길 권한다. 수많은 황금거인상 버전 중 가장 최근에 눈에 띄는 연기를 펼치는 발레리노로는 노로 자카랸(Норо Закарян)을 꼽을 수 있다. 노로 자카랸의 경우, 볼쇼이 전속은 아니지만 겐나디 야신에 비해 훨씬 더 도약의 높이와 공중에 머무는(!) 시간이 길다. 실제로 유투브에 올라온 두 발레리노의 황금 거인상 연기 장면을 비교해보더라도, 야신이 연기하는 공연의 반주가 자카랸이 연기하는 공연보다 미세하게 빠른 속도로 연주되고 있으며, 실제로도 자카랸이 좀 더 앞선 기술과 연기력을 보여주는 것을 알아챌 수 있다. 하지만 두 발레리노 모두 다른 황금거인상 연기와 비교해 볼 때, 남다른 역량을 보여주고 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어쨌든 <백조의 호수>와 <호두까기 인형>과 같은 발레에 익숙해 있던 내게 <라 바야데르>는 한 마디로 충격 그 자체였고, 그 후에도 종종 <라 바야데르>를 보러 볼쇼이를 찾곤 했다.

 

<라 바야데르>는 러시아 황실발레가 본격적으로 ‘동양적 이국성’에 주목하며 이를 작품화 했다는 점에서도 눈길을 끈다. 인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작품은 원래 4막 구성의 공연이었지만, 초연 당시 3막 구성 공연으로 편집되어 무대에 올려졌다.

본디 4막으로 구성되었던 작품이 갑자기 3막으로 올려지게 된 이유는 다름 아닌 악보의 분실 때문이었다. 이 작품의 작곡을 맡았던 민쿠스가 1900년도에 본인이 미리 작곡해놓았던 4막 구성의 원본 악보를 분실하는 바람에 부득이 3막으로 발레가 구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본래의 의도와 달리 계속 3막으로 구성된 <라 바야데르>가 무대에 오르던 중에, 2000년대 초에 이르러서야 ‘마린스키 극장’ 고문서 보관실에서 당시 민쿠스가 작곡했던 4막짜리 악보 원본이 발견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물론 원본 악보가 발견된 이후 <라 바야데르>는 지체없이 4막 구성으로 수정되어 무대에 올려졌다. 하지만 모든 극장이 다 원본에 따른 4막 구성 공연을 올리린 것은 아니며, 현재도 3막 구성의 <라 바야데르>가 종종 공연되고 있다. 그러니 혹시라도 러시아에서 또는 다른 나라, 심지어 우리나라 유니버설 발레단이 올리는 <라 바야데르>를 큰 맘 먹고 보러갔다가 공연이 3막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더라도 혹시 내가 고가의 금액을 지불하고 ‘유사 공연’을 보는 것이 아닐까라는 의심과 불안의 눈초리를 거두고, ‘여기서는 2000년도 이전 버전으로 공연을 올리는구나’라고 생각하며 편안히 공연을 끝까지 감상하면 된다.

 

 

* 사족: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위치한 ‘볼쇼이 극장’은 ‘카멘느이 극장’이라고도 불렸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내에 세워진 최초의 대규모 건물이자, 18세기 유럽 내에 존재하던 대규모 극장 중 하나였다. 간혹 페테르부르크의 ‘볼쇼이 극장’이 ‘마린스키 극장’의 전신이라고 표기된 책자가 있으나, 이는 잘못된 정보이다. 1784년에서 1886년까지 ‘볼쇼이 극장’ 혹은 ‘카멘느이 극장’으로 불리며 공연을 상연했으며, 1886년 해체되어 페테르부르크 음악원 건물로 재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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