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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문화로(文化路)
제목일본 천황과 일본의 종교성
분류철학과 사상
국가 일본
날짜2017-05-10
조회수1,5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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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일본 헌법에서 천황은 "국가와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 되어 있으나, 일본천황은 단순히 상징적인 국가와 국민통합의 모습보다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복잡한 성격을 가진다. 만세일계(萬世一系)라고 하여 일본인들은 일본의 황실의 계보가 끊어지지 않고 존속되었고, 지금의 천황인 아키히토(明仁)는 125대 천황으로 특수한 계층으로 여겨진다. 그는 일본의 창조 신화 아마테라스로부터 거울, 검, 옥구술이라는 삼종의 신기(三種神器)를 하사받은 신적인 존재로, 그들은 성(姓)씨도 없고, 국화문양을 가진 번호판도 없는 차를 타고 다니며 단순한 상징적인 존재일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국정의 총괄자’로의 지위를 가진 ‘신성불가침’의 종교적인 성격도 가지고 있다. 일본사회와 종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본 천황에 대해 이해해야만 한다.

 

천황제의 기원

천황제의 시작은 기원전 66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신도의 가르침에 따르면,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天照大御神)의 후손 인 진무 천황이 초대 천황으로 역사의 맥락에서 제사장 적인 성격과 원시종교적인 성격을 가졌다. 다이카 개신 이후에 천황은 300여년 동안 일본의 중심체제였다. 하지만 9세기 중반부터 호족과 막부에 의한 무사정권을 거치면서 천황의 권력은 쇠퇴하게 되고 결국 그 존재는 이름만 남은 상징뿐이었다. 천황이 역사에 재등장하게 된 것은, 1851년 일본 우라가에 미국의 흑선이 나타나 통상조약을 요구하면서 그에 대한 대안으로 천황 중심의 국가를 만들어 외세를 물리치자는 ‘존왕양이’ 사상을 내세우며 새로운 세력이 힘을 얻게 되면서 부터다. 그들은 막부를 타도하고 천황에 정치권력을 돌리는 메이지 유신을 단행했고, 근대화와 부국강병을 향한 이와 같은 개혁은 성공을 이룬다. 메이지 유신과 더불어 새 지도자들은 (메이지) 천황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제의 구축을 목표로 한다. 일본에서 1889년 제정된 근대적 성격의 헌법인 “대일본제국헌법”에 의해 천황은 신격화 되고, 절대적인 통치자이고 군(軍)의 통수권자 이며 국가 원수의 지위를 갖게 된다. 이후 메이지 정부는 천황의 절대적 권위를 빌려서 반대파를 누르고 근대화를 추진하였고, 정책적으로 천황에 대한 충성심을 국민들에게 요구하는 정책을 펼친다. 결국 국가와 종교가 하나가 되는 모양이 되었고, 이는 극단적인 민족주의 혹은 국수주의를 낳아 정치 선전으로도 활용되고 카미카제 특공대에도 이용되는 등 일본의 제국주의적인 확장에 기여한다. 다시 말하면, 천황에 대한 믿음은 단순한 국가의 대표라는 것이라기 보다는 신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과 잇닿아 있다. 태평양 전쟁당시 감리교 해외 선교부 총무 디펜도르프는 “신사참배가 조상신과 천황, 전설의 인물들까지를 신적 존재로 숭배하는 철저한 종교 체계“라고 인식하기도 했다.

 

 

패전과 천황

1945년 세계 2차 대전에서 일본의 패망을 알리는 일본 천황의 라디오 메시지에 천황은 신의 화신이 아닌 인간이라고 공개적으로 발표 했다. 다시 말하면 일본은 태평양 전쟁에서 패전한 후 1947년에 시행된 “일본국헌법”에 의해 천황의 지위를 실질적 권한은 없는 상징적 존재로 만들었다. 천황은 일본의 항복 이유를 “앞으로 태어날 수천 세대의 인류에게 위대한 평화의 길을 열어 주기 위한 것”이라고 천명했고, 군국주의의 상징이었던 천황은 평화의 상징으로 변화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일본군의 지휘관들은 천황에 대한 충성심과 숭배의식을 이용하여 시민들과 군인들에게 참혹한 전쟁의 참화를 감내해 내도록 종용했고,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천황을 위해 죽자”고 호소했었다는 사실이다. 패전 이후 천황이 평화의 상징으로 재등장한다. 이는 신의 자리에 있으면서 일본 육해공군의 대원수를 겸임 도쿄전범재판이 범죄대상으로 지목하여 처형될 것을 두려워하여 책임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진 1 미국대사관 맥아더와 히로히토 천황 (1945)

 

히로히토 천황은 1931년 만주사변부터 1945년까지 이어진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중심에 있었음에도 미군정 특히 맥아더의 비호 아래 전쟁에 대한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았고, 오히려 전후 재건의 핵심이 되었다. 이에 대한 확정을 위해 히로히토는 일본 주둔 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 부임한 맥아더를 찾았다. 1946년 1월 1일의 조서에는 히로히토(裕仁, 昭和天皇) 천황은 천황을 현세신(現御神) 로하는 것은 가상의 관념이라고 말했다 이 히로히토의 '종전 조서'는 일본 아사히신문(朝日新聞)에 전문이 게재되기도 했다. 이 조서에서 천황은 자신의 신성을 부인했다. 이것은 나중에 황제의 지위에 근본적인 변화가 초래되는 포석이기도 했다.

 

사진 2 1946년 1월 1일의 조서를 포함한 관보

 

이날 맥아더는 이 조서에 대한 성명을 발표하고 천황이 일본 국민의 민주화에 지도적 역할을 했다고 높이 평가했다. 이렇게 천황은 전쟁책임에서 자유로워졌고, 역사속에서 일본 군국주의와 파시즘의 상징에서 평화의 상징으로 재등장하게 되었다.

 

나가며

천황은 일본이 급격한 근대화를 성공시키는 중심으로 국가의 상징이자 국민 통합의 구심점인 국체(國體)로서 역할을 하면서 군국주의와 파시즘의 상징으로 역사 속에 등장했으나, 패전후 천황은 아무런 전쟁의 책임없이 역사속에서 퇴장하는 듯했다. 하지만, 잃어버린 20년을 지나면서 일본 경제의 암흑기를 지나는 동안 일본 극우주의자들 사이에서 아시아와 세계를 전쟁의 소용돌이에 몰아넣은 천황을 ‘국민단합과 국체보존'을 위해 국가원수로 다시 세우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그리고 일본의 아베정부가  “국권의 발동에 의한 전쟁 및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를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 영구히 포기한다.”고 천명한 일본 평화헌법의 9조를 폐기하고 전쟁 할 수 있는 나라로 탈바꿈하려는 움직임을 보고 있다. 일본정부의 이러한 모습에서 주변국들이 군국주의적인 천황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지나친 기우(杞憂)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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