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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문화로(文化路)
제목사랑의 실험, 러시아 은세기의 ‘러브 트라이앵글’ (1)
분류문학
국가 러시아
날짜2022-05-17
조회수111
첨부파일


<발레 <페트루시카>의 무대>
(출처: https://www.belcanto.ru)


“러시아 소도시 떠들썩한 장터,,, 마술사는 인형들을 데리고 나타난다. 피에로와 발레리나, 무어인 등이 등장하는 인형극… 극이 끝나고 피에로는 마술사에 대한 공포로 괴로워하지만, 사랑하는 발레리나를 보고 기뻐한다. 그러나 수줍은 피에로의 어색한 행동에 발레리나는 나가버린다. 발레리나는 저돌적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무어인에게 마음을 주고, 피에로는 연인을 돌려받으려 하지만 무어인은 그를 쫓아내고 결국 죽여버린다. 움직이지 못해 쓸모없어진 피에로 인형을 들고 가는 마술사… 그러나 극장 지붕 위에 고뇌에 몸부림치는 인형 피에로의 영혼이...”

이 절망적이고 비극적인 사랑의 이야기는 러시아 은세기, 즉 19세기 말~20세기 초 러시아 예술이 절정을 구가한 시기 세계적인 명성을 누렸던 세르게이 댜길레프의 발레뤼스의 대표작들 중 하나인 <페트루시카>의 내용이다. 이 작품은 러시아 민속의 소재를 성공적으로 무대화했으며 인형의 배역을 통해 뛰어난 발레 테크닉을 선보임으로 인해 주목을 받았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세기말 예술가의 초상을 형상화한 작품이라 평가되며 또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것은 주역 ‘페트루슈카’를 맡았던 러시아의 불세출의 발레리노 바츨라프 니진스키의 비극적인 운명을 예견한 것으로 해석되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니진스키의 비극을 형상화한 중요한 모티브가 바로 삼각관계의 사랑, 즉 ‘러브 트라이앵글’이다. 러브 트라이앵글은 시대와 장소에 상관없이 갈등이나 위기에 빠진 사랑의 진정성이나 연인의 충실성을 형상화하는 보편적인 모티브로 나타나지만, 특히 러시아 은세기에 러브 트라이앵글은 사랑의 갈등이라는 좁은 의미를 넘어서서 하나의 문화적 현상으로 창작적 주제이자 삶의 방식으로 확장되면서 시대적 화두를 사유하는 문화 콘텍스트로 확장된다. 

                                       <프란츠 클라인이 그린 ‘페트루시카로 분한 니진스키’>
                                             (출처: https://nash-dvor.livejournal.com)

러시아 은세기 문화적 현상으로서 러브 트라이앵글은 두 가지의 원형을 가진다. 그 하나는 코메디아 델 아르테의 러시아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민속광대극 발라간에서 찾아볼 수 있다. 피에로와 아를레킨, 콜롬비나 사이에서 벌어지는 러브 트라이앵글은 발라간과 코메디아 델 아르테의 중심 플롯을 이룬다. 은세기 상징주의 회화의 대표적 화가 콘스탄틴 소모프는 이러한 발라간 혹은 코메디아 델 아르테의 러브 트라이앵글의 등장인물들을 즐겨 그렸다. 이 시기 광대극의 러브 트라이앵글의 모티브는 다만 러시아에서만 유행하지 않았다.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 세잔 역시 코메디아 델 아르테를 자신의 작품 소재로 삼았다.

러시아 은세기 러브 트라이앵글의 또 하나의 원형은 러시아의 셰익스피어로 불리는 알렉산드르 푸시킨과 관련되어 있다. 러브 트라이앵글은 푸시킨의 삶과 그의 창작 모두에서 나타남으로써 푸시킨은 러시아의 시대적 화두로서의 러브 트라이앵글의 진정한 원형이 되었다. 많은 연인을 두었던 푸시킨의 삶에서 러브 트라이앵글은 수없이 교차되었을 것이다. 또한 러브 트라이앵글은 결국 천재 시인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일리야 레핀이 그린 오네긴과 렌스키의 결투>
                                                  (출처: https://ru.wikipedia.org)

그는 아내 나탈리야 곤차로바를 사이에 두고 프랑스인 장교와 벌인 결투에서 입은 심각한 부상으로 죽는다. 또한 푸시킨의 작품 <예브게니 오네긴>에서 렌스키는 연인을 빼앗기고 결투에서 죽는다. 렌스키와 오네긴, 올가가 이루는 러브 트라이앵글과 오네긴과 렌스키의 결투가 마치 푸시킨의 운명을 예언한 장면이 됨으로써 푸시킨은 삶과 창작에서 모두 러브 트라이앵글을 실현하였던 것이다.

19세기 말~20세기 초 러시아 은세기는 예술문화의 주제를 삶의 방식으로 가져오는 ‘생예술’이라는 독특한 예술세계관을 구가한 시대였다. 그러므로 러브 트라이앵글 역시 수많은 시인과 예술가들에게 창작적 주제였을 뿐 아니라 몸소 살아내는 삶과 현실이 되었다.

시인 마야콥스키, 그리고 형식주의 시인이자 이론가, 비평가인 오시프 브리크와 릴랴 브리크 부부 사이에서 일어난 러브 트라이앵글은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브리크 부부는 학생 시절 만나서 결혼했는데, 결혼 7년 후 1912년 브리크 부부는 당대 모스크바의 보헤미안들과 넓게 교류하며 자유롭고 격동적인 삶을 살았다. 지식인 계층이자 부르주아 출신이었던 이들은 빠르게 변화하는 세계를 경험하며 기술적 진보를 통해 이루어질 미래의 삶을 믿었다. 이들은 진정한 미래는 낡은 질서를 거부하고 자유와 평등을 기치로 한 새로운 사회를 통해 도래할 것이라 전망했고, 사회개혁이 무엇보다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공동체, 즉 가족과 결혼제도의 혁신에서 시작될 것이라 생각했다. 이들은 낡고 억압적인 과거의 가족 및 결혼제도를 거절하고 새로운 가족 모델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마야콥스키와 브리크 부부>
                                             (출처: https://biography.wikireading.ru)

새로운 공동체 구성이라는 문제의식은 당시 유럽 전반에 널리 확산된 철학적이고 사상적인 경향이었다. 사실 “새로운 여성”, “새로운 가족”이라는 화두는 이미 19세기 중반부터 떠올랐다. 이 시기에 서구 문명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 가부장제에 기반한 가족 및 결혼 제도에 대한 비판이 이루어졌고 19세기 후반~20세기 초는 가부장적 가족 및 결혼제도가 붕괴하기 시작하는 전조를 보이던 시기였다. 엄격한 빅토리아조의 보수적 가치관에 기반한 가부장적 질서와 남녀 간의 독점적 결합을 전제하고 있는 일부일처제(monogamy)는 자발적인 사랑과 신뢰에 기초한 남녀 간의 결합을 의미하지 못했고 사회적 기득권에 봉사하는 제도로 전락해버린지 오래였다. 사회의 변혁을 꿈꾸는 이들에게 일부일처제는 이미 개인의 인격과 정신적 자유를 억압하는 기성제도의 하나로 간주되었다. 시인 마야콥스키가 매우 사랑했던 체르니솁스키의 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는 이처럼 젊은이들이 제도적인 남녀 결합인 일부일처제를 거부하고 자발적 동기에 의한 공동체를 이루고 자유 의사와 신뢰에 기반한 남녀 관계를 실험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새로운 남녀 관계를 실험하는 공동체 내에서는 무엇보다 기존의 모노가미에 기반한 배제적 태도가 비판된다. 자발적 의사 및 자유에 기반한 사랑이라는 개념에 기반하여 무엇보다 질투라는 감정은 거부되고 다수에 대한 사랑이 허용된다. 남성뿐 아니라 여성 역시 누구를 사랑할지 선택할 자유와 권리가 강조되고 이에 따라 여성의 성적 자유가 인정되었다.

당시에 이러한 생각은 가히 혁명사상을 가진 이들에게도 예외적으로 급진적인 것이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경우 여성을 억압하는 형태의 가족을 옹호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랑의 자유 및 성적 해방을 옹호하며 스캔들을 일으키는 문학 작품들이 출간되며 매춘, 피임, 심지어 낙태의 문제를 제기하는 등 사랑과 성의 해방에 관한 사상은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빅토르 시클롭스키는 “전전(戰前) 시기 불안정한 새로운 도덕과 구 도덕에 대한 부정은 매우 전형적인 현상이었다”고 회상한다. 이른바 자유로운 해방된 사랑이 남녀 관계를 넘어 인간관계 전반의 새로운 이상으로 이해되던 시기였다.

브리크 부부는 빠르게 새로운 모럴을 체득한다. 릴랴 브리크의 회고록에 따르면, 결혼식 직후 남편은 아내에게 자신의 아카이브를 맡겼다. 릴랴 브리크는 남편 오시프와 그의 동료 간에 주고받은 편지, 여성들의 편지, 시 및 철학적 해석 등이 쓰여진 노트 등을 모두 넘겨받았고. 이를 열광하며 읽었다고 회상하고 있다. 이처럼 거짓 없고 서로를 구속하지 않는 동반자 관계를 자처하던 이들의 삶에 시인 마야콥스키가 나타난다.

마야콥스키가 브리크 부부 앞에서 처음 자신의 시를 낭독하자, 부부는 그가 천재임을 바로 알아차렸다. 이들은 곧바로 러브 트라이앵글의 관계로 들어간다. 이러한 러브 트라이앵글은 창작과 삶 모두에서 깊숙이 발전한다. 릴랴의 여동생 엘자 트리올레는 “오시프는 마야콥스키의 시와 사랑에 빠졌고, 마야콥스키는 릴랴와 사랑에 빠졌다”고 회상한다. 릴랴와 마야콥스키의 애정 관계가 시작되었고 러시아 미래주의와 오시프의 관계가 시작되면서 이들의 러브 트라이앵글은 예술창작과 삶 모두를 개입시키며 이들이 쉽게 헤어나오지 못할 운명이 되었다.

문제는 이들 세 사람에게 러브 트라이앵글은 이론상 전제되었던 것처럼 자발적 선택과 자유의지에 기초한 사랑도 성적 해방도 가져오지 못했다는 사실에 있었다. 현실에서 러브 트라이앵글은 브리크 부부 사이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오히려 왜곡시키는 도피처 혹은 회피 수단으로 변질되었고 이들에게 끼어든 제3자 마야콥스키에게는 사랑의 자유를 박탈하는 구속이 되었다.

주목할 점은, 1915년 마야콥스키가 브리크 부부와 관계를 시작할 시점에 브리크 부부는 사실상 이미 진정한 의미에서의 가족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릴랴는 회고록에서 그들이 실제로 더이상 남편과 아내가 아니라 법적으로만, 그리고 정신적으로만 부부로 남아 있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서로에 대한 열정이 식었지만, 이들은 헤어질 계획이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야콥스키가 나타난 것이었다. 마야콥스키에게 매료된 릴랴는 오시프에게 이를 고백하며 그가 원한다면 마야콥스키를 포기하겠다고 했지만, 이상하게도 오시프는 두 사람의 관계에 반대하지 않고 동시에 여전히 이전처럼 함께 살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고 이에 릴랴는 동의했다.

브리크 부부의 친구 갈리나 카타냔은 이 이상한 이야기를 회상하며, “마야콥스키가 ‘트라이앵글’이라 불렀던 이 기묘한 가족의 비극은 릴랴가 오시프 막시모비치를 사랑했다는 것”이라 말한다. 하지만 오시프는 아내를 사랑하지 않았고, 마야콥스키는 오시프 외에는 아무도 사랑할 수 없는 릴랴를 사랑했던 것이다. 릴랴는 평소 자기에게 인생의 남자는 훌륭한 시인 마야콥스키가 아니라 남편이었다고 거듭 강조했다고 한다. 이들의 지인들은 릴랴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남자를 사랑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귀띔한다.

특히 마야콥스키에게 사랑의 자유와 해방이라기보다는 삶과 창작 모두를 비틀고 구속했던 이 기묘한 러브 트라이앵글에서 사실상의 원인이었던 오시프 브리크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동시대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매우 비범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는 “논리는 비대했으나 평범한 인성의 정서적 측면이 미발달한” 특이한 개성을 가졌고, 시인이나 예술가, 혹은 정서가 풍부한 사람에게 보이는 냉소주의는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감정적 무심함으로 인해 그는 마야콥스키와 릴랴가 그토록 열심히 나누었던 질투, 열정, 저주 등에 이끌리지 않았을 것일까. 

                                                             <마야콥스키>
                                                   (출처: https://www.culture.ru)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는 릴랴의 연인이 되었고, 오시프는 남편으로 남았다. 물론 이러한 상황은 많은 이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알렉산드르 그린은 이들의 러브 트라이앵글을 “사랑에 있어 순수하지 않은, 오히려 삐걱거리는 셋의 결혼”이라고 비판했다.

이들의 러브 트라이앵글을 지탱했던 것은 각각 두 사람이 이룬 운명적인 유대관계였다. 세 사람 모두 각각 다른 두 구성원들과 자신만의 관계가 존재했던 것이다. 릴랴 브리크는 마야콥스키와 열정적인 육체적 사랑으로, 오시프와 마야콥스키는 시와 미래주의에 대한 지적인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릴랴는 각자 방 하나씩을 차지하고 살던 세 개의 방이 있던 집을 회상하며 오시프와 마야콥스키가 금방 친해졌다고 강조한 바 있다. 브리크와 마야콥스키의 우정과 유대관계에 관해, 그리고 그 관계의 성격에 관해 많은 증언이 있다. 마야콥스키의 친구였던 나탈리아 랴보바는 마야콥스키가 오시프 브리크에게 상당히 정신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오시프가 없으면 마야콥스키는 전전긍긍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오샤가 있었어야 하는데, 오샤가 있었으면 우리는 시를 썼을 텐데, 오샤가 있었으면 우리는 그 일을 결정했을 텐데..” 등등. 젊은 마야콥스키는 언제나 보호자 오시프의 인정과 승인이 필요했던 것이다. 발라간과 코메디아 델 아르테의 피에로와 아를레킨의 분신 관계가 바로 이러한 모습인 것이다. 여기서 피에로는 아내를 내어준(?) 오시프 브리크가 아니라 마야콥스키였다.

1929년 경 릴랴와 마야콥스키는 이미 수년전 헤어진 사이였고, 릴랴는 브리크와도 이미 이혼한 상태였다. 그러나 마야콥스키의 주변인들은 그가 여전히 이들과의 트라이앵글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이야기했다. 마야콥스키의 연인들은 마야콥스키의 삶에 릴랴 브리크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고 염려했다. 지인들은 “어두운 금발 머리”, “빛나는, 따뜻한 갈색의 눈”을 가진 릴랴가 지적이고 매력적이었음을 인정했지만, 동시에, 그녀에 관해 좋은 기억을 떠올리지 못했다. 릴랴에게 중요한 것이 마야콥스키에 영향력을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고 한다. 마야콥스키의 마지막 사랑 시인 베로니카 폴론스카야에 따르면, 마야콥스키의 자살 직후 릴랴는 시인의 ‘미망인’이라는 이름을 위해 싸우기 시작했다. 그녀는 폴론스카야에게 장례식에 가지 말라고 했고, 나중에 시인의 옆자리를 두고 베로니카와의 경쟁에서는 그녀가 가지 않은 것을 이용했다. 브리크 역시 죽기 전까지 마야콥스키에 대한 비평가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마야콥스키의 자살은 항상 릴랴 브리크의 이름과 함께 언급된다. 1930년 릴랴는 일기에 다음과 같이 쓴다. “어제 누군가 다시 전화를 했다. 릴랴 브리크씨 바꿔주세요. 하하하, 당신은 왜 마야콥스키를 죽였습니까?... 그리고 쾅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니콜라이 아세예프는 다음과 같은 시구절로 그녀를 비난하기도 했다. “그녀,/ 그가/ 모든 것을 바쳤던,/ 시와/ 열정의 눈사태, 웃음과/ 분노,/ 자부심과/ 열정을 바쳤던 그녀는,/ 그를 절반만 사랑했다.”

릴랴는 마야콥스키의 죽음에 관해 오래 슬퍼했지만, 다른 여자와 결혼한 채로 1945년에 심장마비로 사망한 오시프 브리크에 관해서는 훨씬 더 슬퍼했다고 한다. 릴랴는 파리에 있는 여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쓴다. “이건 단지 사랑하는 가까운 사람이 죽은 것이 아니야, 난 오샤와 함께 죽은 셈이야.”

릴랴 브리크의 삶에서 주인공은 오시프 브리크였지 천재 시인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가 아니었다. 이들의 러브 트라이앵글은 과연 억압되지 않는 자유로운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관계의 형식이었는가... 그것은 “새로운 사회도덕의 최전방에 있던 가족의 아방가르드’가 아니라, 다만 두 개의 불행한 사랑 이야기였던 것은 아닐까.

러시아 데카당스의 대표작가 드미트리 메레지콥스키와 지나이다 기피우스의 결합 또한 은세기 당시 러시아의 새로운 예술조류였던 상징주의 예술가들에게서 널리 퍼진 러브 트라이앵글의 실험을 보여준다. 이들은 처음부터 단순한 가족 그 이상이었다. 1889년에 결혼한 이들은 예술가, 작가로서 자신들의 삶을 통해 인간관계 일반에 있어 기존의 틀을 확대하려는 웅대한 희망을 품고 있었다.

                                                  <메레지콥스키 부부와 필로소포프>
                                                     (출처: https://biographe.ru)

메레지콥스키는 미래 사회의 기초에는 새로운 형태의 가족 관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기독교의 삼위일체 개념에 영향을 받은 ‘세계의 삼중 구조’의 특정한 형식이었다. 이러한 메레지콥스키의 생각은 은세기 당시 널리 나타났던 종말론적 세계관의 한 양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구약과 신약 이후에 올 이른바 제3의 언약의 왕국이 곧 기존의 기독교 세계를 대체할 것이라는 사상이다.

이러한 미래를 위해 삶에서 부부는 일종의 지적 미니 공동체를 만들어야 하고, 여기서 참여자들은 사적 관계와 공동 세계관을 결합해야 할 것이었다. 아마도 이들은 체르니솁스키가 형상화했던 공동체의 세기말 데카당스적 버전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메레지콥스키 부부의 실제 현실은 데카당스의 음영으로 채색된 이들의 종교철학적 세계관이 사회에 대한 노골적인 도전으로서 이 부부의 철학적 실천일 뿐 아니라 개인적 취향의 결과였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메레지콥스키는 많은 사람들에게 무성애적인 사람으로 보였지만, 그는 다른 많은 여성들, 혹은 아마도 남성들에게도 관심을 가졌다고 알려져 있다. 그가 부부 관계를 이처럼 제3자에게 열린 공동체로 제안한 것이 실상 아내에게 육체적 열정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아내 기피우스 역시 역시 성적 편력이 못지 않았다. 그녀는 결혼 첫해부터 다른 남성들과, 그리고 간혹 여성들과도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그녀에게서 열정의 주요 목적은 오히려 동성애 남성, 따라서 관계를 맺기 불가능한 대상들을 향한 것이라 이야기된다. 당시 메레지콥스키는 유명한 예술저널 <예술세계>의 문학 부문 편집자이자 평론가였던 드미트리 필로소포프와 깊은 관계에 있었는데, 필로소포프는 자신의 동성애 성향을 위대한 ‘성(性)의 비극’으로 인식했다고 한다. 그와의 관계는 세계관적 결합과 이성애를 넘어선 내밀한 사적 관계를 결합하려는 메레지콥스키의 취향에 상당히 부합했을 것이다.

                                                         <지나이다 기피우스>
                                                   (출처: https://stuki-druki.com)


메레지콥스키 부부는 자신들의 결합을 개인적 결혼을 넘어서 당대 세계관의 상징적 사건으로 자리매김하려 했다. 메레지콥스키와 기피우스는 1901년 3월 29일 목요일(부활절 전의 성[聖]목요일 혹은 세족[洗足]목요일) 밤 메레지스키가 살았던 무루지의 집에서 결혼식을 행했다. 식은 성상 앞에서 기도문을 읽고 교회잔으로 포도주를 마시고 그리스도의 피와 같이 포도주에 적신 빵을 먹고 서로에게 성호를 그으며 입맞춤을 하고 복음서를 읽는 절차를 세 번 반복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이들은 자신의 추종자들과 함께 이 기묘한 결합의식을 16년 이상 거의 매년 반복해서 거행했다고 한다. 메레지콥스키의 러브 트라이앵글은 이들의 이념적 포교를 위한 일종의 밀교(密敎) 공동체를 염두에 둔 것이라 보인다. 이러한 공동체가 사랑의 자유와 해방을 기대할 수 있는 열린 인간관계로 이루어진 공동체라고 보기는 힘들지 않을까. 이상적 인간관계라 신봉된 트라이앵글이 오히려 메레지콥스키의 사상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면서 가부장제보다 더 억압적인 강요된 삶의 모델이 되지 않았을까...

1920년 메레쥬콥스키 부부가 이민을 떠나면서 이들과 필로소포프의 길은 갈라지게 되었지만, 그의 자리를 기피우스의 비서 즐로빈이 대체하는 등 트라이앵글을 위한 제3자는 계속해서 교체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상징주의 시인 안드레이 벨리와 니나 페트롭스카야, 그리고 역시 상징주의 이론가이자 작가 발레리 브류소프의 러브 트라이앵글 역시 유명하다. 1904년 젊은 안드레이 벨리와 시인 니나 페트롭스카야는 창작적 영감을 교류하며 연애를 시작한다. 니나 페트롭스카야의 사랑은 은세기 미학의 대표자인 벨리에 대한 신비와 열광이 결합된 숭배가 되었고, 젊고 아직 미숙한 벨리는 부담을 느끼고 그녀를 거절한다. 하지만 러브 트라이앵글은 은세기 작가에게 마치 당위적 삶의 모델로서 내면화되어 있었고, 벨리 역시 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벨리의 열광이 동료 상징주의 시인 알렉산드르 블로크의 아내 류보프 멘델레예바에게 옮겨갔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니나 페트롭스카야는 연인을 되찾고 싶어했다. 그녀가 연인의 마음을 되돌리는 수단으로 선택한 것 역시 러브 트라이앵글이었다. 따라서 페트롭스카야는 발레리 브류소프가 제안한 결합을 수락한다. 당시 브류소프는 기혼이었고, 이 결합은 또한 열정적인 사랑으로 발전하게 된다. 솔로비요프주의자인 벨리와 달리 악마적인 것에 마음이 끌렸던 데카당 브류소프는 페트롭스카야의 사랑의 갈망을 주의 깊게 지켜보며 벨리에 대한 열정을 지지했다. 다른 한편 브류소프는 페트롭스카야의 주술 능력에 대한 자신감을 심어주었고 페트롭스카야는 어느덧 이 새 연인의 지도하에 벨리를 자신의 손아귀에 넣어줄 신비주의 주술에 몰두하게 되었다. 

                                                 <니나 페트롭스카야와 벨리, 브류소프>
                                                     (출처: https://kulturologia.ru)

하지만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주술 실험 결과는 실망스러웠고, 페트롭스카야는 극심한 절망에 휩싸여 결국 벨리를 죽이려고 시도하게 된다. 사건의 내막은 블라디슬라프 호다세비치가 다음과 같은 보고로 전달하고 있다. “1905년 봄, 종합기술박물관의 소강당에서 벨르이가 강의. 휴식 시간에 니나 페트롭스카야가 그에게 다가가 브라우닝을 발사. 그러나 실패.” 놀랍게도 이 무기는 브류소프의 선물이었다. 더 경악스러운 것은 이로부터 8년 후 브류소프의 새로운 연인이자 젊은 시인 나데지다 르보바가 이 총으로 자살했다는 사실이다. 안타깝게도 러브 트라이앵글은 보다 나은 미래가 아니라 파국을 가져왔다.

브류소프의 소설 <불의 천사>는 서로 얽힌 두 개의 러브 트라이앵글로 이루어진 사건들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소설을 마친 후, 브류소프는 히스테리 발작, 알콜 중독, 모르핀에 빠진 니나와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치료를 구실삼아 그녀를 러시아에서 내보냈고, 그녀는 해외에서 불행한 생활을 이어간다. 그러나 러브 트라이앵글을 창작적 영감으로만 이용하고 연인을 버리다시피 한 브류소프에게 인과응보였을까, 같이 있던 때 이미 브류소프는 페트롭스카야로부터 약물중독을 옮겨받게 되었고, 이는 그의 사망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하지만 페트롭스카야는 브류소프보다 4년 더 살았고, 벨리는 페트롭스카야보다 6년 더 생존했다는 사실은 다만 우연일까...

삶을 예술에 반영하기보다 예술적 모델을 따라 삶을 산다는 생각은 근본적으로는 현실과 삶을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높고 아름다운 예술적 이상을 그대로 삶으로 가져옴으로써 불완전하고 저열한 현실을 높고 아름다운 것으로 바꾸어놓는다는 구상이었다. 러브 트라이앵글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 있는 것으로, 당대 현실의 가부장제와 모노가미의 구속에 의해 왜곡된 남녀 관계를 자유와 자발성에 기초한 진실한 사랑의 공동체 관계로 변화시키려는 예술가들의 열망을 담고 있었다. 이들은 자유롭고 이상적 사랑의 관계를 기독교 삼위일체 개념에 근거한 트라이앵글의 구도를 통해 이루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은세기 예술가들의 러브 트라이앵글 실험은 사랑에 있어 자유와 해방, 진정성을 가져왔다고 보기 어렵다. 아이러니하게도 러브 트라이앵글에서 두 사람의 관계에 개입하는 제3자는 (그가 부부 중 한 사람이든 부부 이와의 다른 사람이든 상관없이) 언제나 다른 두 사람의 관계를 위한 수단이 되었다. 그는 메레지콥스키 부부의 경우에서처럼 이들이 정신과 육체 양면에서 충만한 관계를 이루어야 하는 사랑의 의무를 회피하고 자신의 불완전성을 기만하거나, 혹은 브류소프의 경우에서처럼 창작적 영감을 위해 이용하는 수단으로 전락해 버렸다. 또한 마야콥스키의 파국이 보여주듯이 러브 트라이앵글은 사랑을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으로 양분시킴으로써 그를 분열시키는 억압적 기제로 작동했던 것이다.

신성의 삼위일체 개념이 암시하는 육체와 정신 모두에서 충만한 완전한 사랑을 목표했던 러브 트라이앵글의 이상이 삶이 되어버린 순간 사랑의 지옥(地獄)으로 얼굴을 바꾸어버린 것은 무엇 때문일까... 과연 유토피아는 현실이 되는 순간 디스토피아로 뒤집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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