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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러시아 클래식계의 이단아: 알렉산드르 스크랴빈
분류음악
국가 러시아
날짜2022-04-18
조회수125
첨부파일


알렉산드르 스크랴빈(А.Н. Скрябин, 1871-1915)은 여타 러시아 음악가들 차이코프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 쇼스타코비치, 라흐마니노프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우리에게 덜 알려져 있는 작곡가이다. 스크랴빈은 후기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작곡가중 한 명으로 모스크바 컨서바토리 재학 당시 라흐마니노프와 동문수학하며 그의 강력한 라이벌이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연주자들에게 스크랴빈의 곡은 자주 연주되는 레퍼토리가 아니어서, 그의 곡을 연주한 피아니스트는 손에 꼽을 정도이다. 2015년 ‘건반 위의 수도자’로 불리는 피아니스트 백건우가 스크랴빈 서거 100주년을 기념하여 스크랴빈의 ‘24개의 전주곡’을 연주하여 러시아 레퍼토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2021년 2월 18-19일 피아니스트 임동혁이 서울시향과의 협연에서 스크랴빈의 첫 번째 관현악 작품이며 그의 유일한 협주곡인 피아노 협주곡(Piano Concerto in F# minor, Op. 20)을 선보여, 우리나라 관객들에게 스크랴빈의 피아노 협주곡을 소개했다. 스크랴빈은 음악을 통해서 인류를 통합하고 보편적 본질을 이해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의 음악적 이상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43세의 나이에 그의 삶은 불타는 혜성처럼 막을 내렸다. 그는 대담하고 참신한 발상으로 그의 추종자들 사이에서 천재라 불렸던 남다른 성격의 러시아 작곡가이며 러시아 클래식계의 이단아였다. 그는 상징주의의 대표자이자 소리에서 색을 연상시키는 “색조 청력(цвето-тональный слух)”이라는 남다른 능력으로 "빛의 음악"이라는 개념을 처음 시도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그의 생일은 양력으로 1871년 12월 25일이지만, 그레고리력으로는 1872년 1월 6일이기에 모스크바시 문화부 후원으로 모스크바 스크랴빈 박물관을 비롯한 모스크바 곳곳에서 그의 150번째 생일인 2022년 1월 6일부터 6월 4일까지 “150 лет/Скрябин/150 дней”라는 제목으로 150일간 200개 이상의 스크랴빈 탄생 150주년 기념행사가 개최되고 있다. 

 

<스크랴빈 탄생 150주년 기념 사업 홈페이지 메인화면>
(출처: https://150scriabin.ru/) 

 

스크랴빈의 생애

알렉산드르 스크랴빈은 당시 모스크바 국립대 학생으로 졸업 후에 외교관이 된 아버지 니콜라이 스크랴빈(Н.А. Скраябин, 1849-1915)과 상크페테르부르크 컨서바토리에서 테오도르 레세티츠키(Т. Лешетицкий 또는 표도르 오시포비치(Ф. Осипович), 1830-1915)를 사사하여 촉망받는 작곡가이며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 류보프 페트로브나(Л.П. Щетинина, 1848-1873) 사이에서 1871년 12월 25일(그레고리력 1872년 1월 6일)에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그가 한 살 때 그의 어머니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 그는 일찍이 어머니와 작별해야 했으나 그녀의 음악적 재능은 스크랴빈의 유전자 속에 남아있었다. 10세에 모스크바 육균사관학교에 보내졌을 때에도 피아노 레슨과 음악 이론을 공부를 포기하지 않을 정도로 음악 공부에 열정을 쏟았다. 그 결과 그는 작곡과 피아노 전공으로 모스크바 컨서바토리에 입학했다. 그러나 작곡 선생님과의 불화로 그는 피아노 전공으로만 컨서바토리를 졸업할 수 있었다. 당시 작곡가이며 음악학자인 세르게이 타네예프(С.И. Танеев, 1856-1915)는 스크랴빈의 재능을 일찍이 알아보고 그의 음악활동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만약 타네예프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스크랴빈의 음악을 지금 들을 수 없었을 지도 모르겠다. 스크랴빈은 졸업 후에 오른손을 못 쓰게 될 정도로 연습에 열중하였는데, 타네예프는 그가 독일과 스위스에서 오른 손을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왔고, 완쾌 후에 그는 피아니스트로서 무사히 데뷔할 수 있었다. 타네예프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당시 예술가를 후원했던 메세나 기업인 미트로판 벨라예프(М.П. Белаев, 1836-1903)에게 스크랴빈을 소개하였다. 벨라예프는 스크랴빈의 예술세계에 매료되어 그의 절대적 팬이자 후원자가 되었고, 스크랴빈이 안정적으로 작품 활동을 이어갈 수 있도록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스크랴빈과 타네예프>
(출처:https://muzobozrenie.ru/andrej-ustinov-provel-kontsert-v-kamernom-zale-moskovskoj-filarmonii/)


스크랴빈은 1897년 피아니스트 베라 이사코비치와 결혼하여, 1898년에 첫 딸 림마를 시작으로 4남매(1남 3녀)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리고 1902년부터 그는 모스크바 컨서바토리 교수로 재직하였다. 그러나 그는 얼마되지 않아 타티야나 슬료체르(Т.Ф. Шлёцер, 1883-1922) 비공식적인 사실혼 생활을 이어나갔다. 그는 모스크바 컨서바토리 교수를 그만두고 1903-1909년까지 그는 두번째 부인 타티야나와 3남매(1남 2녀) 아리아드나(1905), 율리안(1908), 마리나(1911)와 함께 이탈리아와 스위스에서 거주했다. 실제로 스크랴빈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타티야나와 함께 생활했지만, 그의 첫 번째 부인 베라는 공식적으로 이혼해 주지 않았기에 타티야나의 아이들은 스크랴빈의 성을 쓸 수 없어, 타티야나의 성 슬료체르를 사용해야 했다. 1915년 그는 모스크바에 돌아왔으나 불행하게도 종기에 혈액 중독으로 1915년 4월 14일에 사망했다.

 

<1909년 스크랴빈과 타티야나 슬료체르>
(출처: https://ru.wikipedia.org/wiki/Скрябин_Александр_Николаевич)


빛의 신비를 악보에 담아내다: 스크랴빈의 작품세계

음악가이자 철학자였던 스크랴빈은 당대 바그너 음악의 거대한 현상에 영향은 받았지만 그 어떤 작품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지 않았다. 그의 예술은 백만 개의 실로 우주와 연결되어 있으며, 그 자체로 우주적이다. 유럽의 음악사에서 삶과 음악적 창의성 그리고 종교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음악가는 바그너와 스크랴빈뿐이다. 그는 후에 신지학(神智學, Theosophy)에 영향을 받아 종교, 종교로서의 예술 그리고 예술의 개념을 작품으로 구현하는 것이 스크랴빈의 창작의 원천이며 핵심이 되었다. 이러한 경향이 발전되어 그는 ‘신비주의 작곡가’로도 불린다. 이러한 성향은 “예술에 대한 찬가”를 부르고 있는 첫 번째 교향곡에서 시작하여 미래의 신비에 대한 스케치인 교향곡 5번 ‘프로메테우스(불의 시)’ Op. 60에 이르기까지 그의 모든 작품에서 나타난다. 그의 수많은 작품들은 이러한 아이디어들이 발전된 결과물이다. 특히 1908-1910년에 작곡된 교향시라 불리는 교향곡 5번 ‘프로메테우스’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메테우스에 대한 신화에 대한 작품이 아니라 스크랴빈의 추상적인 철학을 담고 있는 “빛의 교향곡”이다. 스크랴빈은 조명 효과와 함께 교향곡의 연주를 계획했다. 이는 1915년 5월 20일 뉴욕 카네기홀에서 흐로몰라(Хромола)라고 하는 조명 기계와 함께 “프로메테우스”를 초연될 수 있었고, 안나 파블로바, 이사도라 덩컨 등 몇 명의 진보적인 예술가들만 그의 예술 세계를 이해할 수 있었고, 그를 지지했다. 그는 특정 병렬 색상을 음악 이미지로 표현하는 음악의 시각화를 구상하여, “빛의 선(световая строка)”을 발명했다. “Luce”라고 하는 색조지표를 만들어 “프로메테우스”(12마디와 606마디 제외)의 색과 악보에 나타난 하모니의 주요 음은 일치한다. 이러한 “프로메테우스”의 아이디어는 후에 그의 신비주의 음악의 이정표 역할을 했다. 그의 색조지표에 의하면 도(C)는 빨강, 레(D)는 노랑, 미(E)는 연한 하늘색, 파(F)는 자주, 솔(G)는 주황, 라(A)는 초록, 시(B)는 파랑으로 표시된다. 소리와 색을 연관시킨 예술가들은 그가 처음은 아니었지만 그의 작품은 당시에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스크랴빈의 교향곡 5번 ‘프로메테우스’ Op. 60에 사용된 색조>
(출처: https://ru.wikipedia.org/wiki/Скрябин_Александр_Николаевич)


세기의 라이벌: 스크랴빈 VS 라흐마니노프

스크랴빈과 라흐마니노프(С.В. Рахманинов, 1873-1943)는 모두 니콜라이 즈베레프(Н.С. Зверев, 1833-1893)에게 피아노를 배웠고, 모스크바 컨서바토리에서 함께 공부하고, 졸업하며 자연스럽게 라이벌 관계로 성장했다. 사실 둘의 음악의 스타일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둘이 라이벌 관계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피아니스트 서혜경은 2015년 스크랴빈 서거 100주년을 맞아 세기의 라이벌인 스크랴빈과 라흐마니노프를 주제로 음악회 “스크랴빈과 라흐마니노프 사이에서”를 개최하면서, 스크랴빈의 음악은 쇼팽, 리스트, 바그너의 음악적 전통을 그대로 이어 받아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창의적이고 진취적”이며, 후기낭만주의를 대표하는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은 차이코스프키의 계보를 이어 “러시아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선이 굵고 긴 멜로디”를 그 특징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대중적인 측면에서 스크랴빈에 비해 라흐마니노프의 팬 층이 훨씬 두꺼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스크랴빈의 음악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라흐마니노프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지는 않지만 골수 팬들이 훨씬 많다.

스크라빈은 평생 10곡의 소나타, 100곡 이상의 피아노 프렐류드, 녹턴, 시곡(poème) 5곡의 교향곡들을 작곡하였다. 피아니스트 서혜경은 스크랴빈의 작품의 특징을 변화무쌍한 화음으로 설명하고 있다. 특히 그가 초기 작에서 사용한 4도 화음은 그만이 사용한 시그니쳐 화음이 되었고, 후기 작에서는 ‘신비 화음(мистический аккорд)’이라 불리는 6개의 음(C, F#, Bb, E, A, D)으로 구성된 화음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그의 작품 성향은 같은 작곡가의 작품이라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시대별로 그 성격이 급격하게 바뀌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생소한 화음으로 인해 스크랴빈의 곡은 연주자에게는 신선한 분위기와 도전하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키지만, 청중들에게 다가가기에는 쉽지 않은 어려운 곡으로 다가오는 것이 사실이다. 

 

<스크랴빈과 라흐마니노프>
(출처: https://pl.pinterest.com/pin/77687162306123413/)


1990년대부터 스크랴빈과 라흐마니노프의 작품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피아니스트 백건우는 스크랴빈은 작품에서 선과 악을 동시에 표현하며 동양철학에서 볼 수 있는 구도자적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고 평가한다. 이는 예술과 종교를 연결하는 그의 세계관이 그의 음악에 반영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21세기에 들어도 그의 작품은 매우 미래지향적이고 신비주의적이며 진보적이다. 이러한 그의 예술세계가 당대 예술계와 대중들에게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지만 그의 작품세계를 추종하는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현재까지 그 맥이 이어져 오고 있다. 그가 21세기에 태어나 오래 살았더라면 그가 현대음악사에 미친 영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을 것이다. 스크랴빈은 시대를 잘못 타고난 비운의 천재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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