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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러시아 자연을 노래한 미하일 쁘리쉬빈에 대하여
분류문학
국가 러시아
날짜2022-03-30
조회수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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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 쁘리쉬빈(М.Пришвин/l873∼1954) 1920년대에 어린이를 위한 글을 쓰면서 명성을 얻었다. 그렇다고 쁘리쉬빈이 창작한 동화류의 창작품이 성인들이 멀리한 것도 아니었다. 그의 작품은 성인과 어린이 모두를 똑같이 매료시켰는데, 그것은 쁘리쉬빈이 항상 자신의 창작 공식을 준수하였기 때문이었다. 그의 창작 공식은 ‘어른을 위해 글을 쓰면서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리고 ‘아이들을 위해 어른들이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이었다. 쁘리쉬빈은 제1차 세계대전 중에 간호사이자 전선에서 종군기자로 일했고, 혁명 후에는 모스크바 근처의 스몰렌스크 지방, 페레야슬라블-잘레스키, 자고르스크 등에서 살면서 교사로 일하면서도 창작을 한 작가이다.

그런데 러시아 문학사에서 쁘리쉬빈은 러시아 자연을 가장 잘 표현한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작품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태도는 삶 자체에 대한 태도를 결정하고, 자연을 돌보는 것은 세상과 영혼의 조화를 보존하는 것’으로 보는 자연에 대한 철학적 이해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러시아 작가 빠우스톱스키(К.Г.Паустовский)는 ‘자연이 그녀의 삶에 침투하여 노래 한 사람에게 감사를 느낄 수 있다면 우선 이 감사는 미하일 쁘리쉬빈에게 향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막심 고리끼(М.Горький)도 ‘자연에 대한 지식과 사랑을 그처럼 조화 있게 융합시킨 러시아 작가를 나는 알지 못 한다’고 쁘리쉬빈의 문학 세계를 높이 평가하였다. ‘근본적으로 쁘리쉬빈은 철학적 통찰력과 자연에 대한 서정적 감성을 지닌 도덕주의자였다. 자연의 표면적인 현상 너머에 있는 조화와 미의 추상적 세계를 쁘리쉬빈은 작품 속에서 현존하는 것처럼 구체적으로 형상화해 낼 수 있는 문학적 상상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러시아의 자연을 묘사할 때, 많은 작가들이 쁘리쉬빈에게서 물려받은 자연관의 전통을 이어 나갔다.’ 그의 대표작은 <사냥꾼 미하일 미하일리치의 이야기>, <할아버지 마자이 땅에서>, <황금초원>, <할아버지의 부츠>,<나의 조국>, <곰>, <고슴도치>, <까시체이의 쇠사슬>, <베렌제이의 생> 등이 있다.

 

<미하일 쁘리쉬빈>
(출처: https://yandex.ru/) 


러시아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작가

상기했듯이 쁘리쉬빈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러시아 자연에 관한 것이었다. ‘쁘리쉬빈에게 있어 자연은 작품의 배경이나 구조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주제가 되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인간의 삶은 자연의 보편적 질서와 완전히 일치할 수 있어야 하며, 자연과 인간의 친교는 인간에게 지혜를 가져다주는’ 존재였다. 이러한 러시아 자연을 섬세하게 표현한 쁘리쉬빈의 문학 형식은 동화 및 에세이였다. 특히 그의 에세이는 암시적인 줄거리와 상세한 설명이 있는 작은 산문인데, 이 형식을 통해 쁘리쉬빈은 관찰의 정확성, 높은 도덕 감각, 신선하고 비유적인 언어의 내용으로 창작물을 내놓으면서 독자의 관심을 얻었다. 쁘리쉬빈은 동화와 에세이를 통해 ‘자연과 교감하는 자신의 창작 세계를 외롭게 지켜 나갔다. 그는 항상 인간의 이상주의적 동경을 추구하며, 자신이 삶의 본질적인 것이라 말한, 인간 내면에 깃들어 있는 창조적 성향을 작품 속에 형상화시키려 했다.’ 예를 들어 짧은 에세이 <나의 조국>에서 쁘리쉬빈은 감정적 기억에 기반을 두면서 조국에 대한 감동적인 사랑을 이야기 한다. 이 작품은 지나친 파토스 없이 간결한 말로 쓰였지만, 작품을 읽으면 따뜻한 우유와 함께 차의 향기를 느끼고 어머니의 목소리, 숲과 새들의 소리가 들린다. 

 

<러시아 자연에 대한 쁘리쉬빈의 작품>
(출처: https://yandex.ru/)


쁘리쉬빈의 자연에 대한 글이 독자들에게 흥미를 가져다 준 요인 중의 하나는 사진에 대한 작가의 열정이었다. 쁘리쉬빈에게 사진은 1920년대부터 자연과 동물에 대한 글을 쓰는 것과 같은 중요성을 지녔다. 작가는 항상 자연을 ‘생명 자체의 얼굴’로 대했고, 그 자연을 더 자세히 관찰하고 사진으로 찍었는데, 모든 각도에서 자연을 사진에 담았다. 쁘리쉬빈은 자연을 사진과 함께 글로 상세하게 묘사했다. 그의 작품에서 ‘자연의 실제 그림과 풍경에 대한 독특하고 낭만적인 비전이 결합되고 있는데, 저자의 시선 아래 자연은 사진과 글을 통해 생동감 있게 놀라운 색상으로 빛나고 자연의 모든 소리 및 향기는 영혼의 기억과 특이한 연관성’을 창출했다. 특히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쁘리쉬빈은 모스크바 근처의 두리노(Дунино)마을에 집을 구입하여 1953년까지 매년 여름 그곳에서 살았는데, 이 곳의 그의 집에는 사진 연구실을 위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쁘리쉬빈은 1954년 1월 6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는데, 사망 당시 그의 나이 81세였다. 쁘리쉬빈 사망 후, 두니노 마을의 그의 집은 박물관이 되었다. 그리고 코카서스 보호구역의 산봉우리와 호수, 쿠릴열도의 곶, 1982년에 발견된 소행성이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미하일 쁘리쉬빈의 묘지>
(출처: https://yandex.ru/)


소신 있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쁘리쉬빈은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거대한 저택은 옐레츠의 성공한 상인이었던 할아버지가 만든 자산의 일부였다. 그러나 이러한 부는 얼마가지 못했는데, 열렬한 사냥꾼, 경마 선수이자 모험가인 아버지 미하일 드미트리예비치는 집안을 파산으로 몰아넣었다. 쁘리쉬빈을 포함한 다섯 명의 아이들은 그 전과 아주 다른 삶을 살기 시작하였는데, 다행히도 어머니덕분에 상황은 최악의 수준까지 가지는 않았다. 한때 다섯 자녀를 키우는 조용한 전업 주부였던 어머니 마리야 이바노브나는 자신이 어린 아이들에게 물질적으로 풍족하게 지원하지는 못했지만, 삶의 건설적 동기를 부여해주었고 좋은 교육을 제공해 주었다.

초등학교 1년 동안 꼬마 쁘리쉬빈은 평범한 마을 학교에서 공부했고, 그 이후 1883년에 김나지움에 등록했다. 불행히도 쁘리쉬빈은 그 시기에 공부에 취미와 관심이 없었다. 그는 처음 2년 동안 김나지움에 다니면서 자신의 교사들과 자주 충돌했다. 당연히 학업진도는 저조하게 진행되어 우리의 미래작가는 6년 동안 4개의 클래스만 졸업했다. 즉 2년이 유급되었다. 결국은 1889년 지리 교사와의 마지막 충돌 이후, 쁘리쉬빈은 퇴학당했는데, 그의 ‘자유로운 영혼, 자유사상’이 문제를 크게 만든 것이었다. 쁘리쉬빈의 가족 중에 그가 유일하게 체제에 순응하지 못한 아이였는데, 다른 쁘리쉬빈의 형제들은 공부가 쉬었던 것 같다. 큰 형은 재정 관리사, 나머지 두 명은 의사가 되었다.

김나지움에서 퇴출된 어린 쁘리쉬빈은 튜멘에 있는 어머니의 친척 상인 이그나토프에게 보내졌는데, 다행히 여기에서 삼촌의 성실한 지도하에 쁘리쉬빈은 마음을 굳게 먹고 결국 튜멘 알렉산더 레알 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자녀가 없는 이 삼촌은 사업을 조카에게 양도하기를 희망했지만 쁘리쉬빈은 다른 목표가 있었다. 미래의 작가는 리가의 폴리테크닉 대학교에 입학했다. 그런데도 여기서도 체제에 적응하기 싫어하는 ‘소신 있는 자유로운 영혼’이 문제가 되었다. 대학교 마르크스주의 동아리에 가담한 혐의로 쁘리쉬빈은 체포, 투옥되어 옐레츠로 유배되었다.

1900년에 쁘리쉬빈은 해외로 가서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공부하여 농학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고국으로 돌아와 농업경제학자로 일했다. 1906년부터 그는 저널리즘에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저명한 신문 등에 기고했다. 기자로 일하면서 ‘자유로운 영혼’의 작가는 민족지 탐험을 시작했다. 쁘리쉬빈은 러시아 중심지역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고 거의 연구되지 않은 변방으로 떠났다. 그리고 이러한 여행의 결과, 즉 러시아의 외딴 지역에 대한 연구를 책으로 저술하였다. 쁘리쉬빈이 러시아 변방 지역의 자연에 대한 가장 위대한 감정가이자 가장 감성적인 창작자가 된 것이다.

쁘리쉬빈은 볼셰비키 혁명을 즉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사회혁명당의 견해를 고수하면서 이념적 글을 발표하였고, 소비에트 정부의 편을 든 알렉산더 블록과 논쟁을 벌이고 감옥에 갔다.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쁘리쉬빈은 여행 이야기와 동화를 쓰는 데 주의를 기울였다. 종군기자 된 프리슈빈은 전선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에세이도 발표했다.
 

여행을 통한 창작활동

1898년 쁘리쉬빈은 미타프(Митав)감옥에서 1년 동안 투옥된 후 석방 된 이후, 독일 라이프치히로 떠났다. 그 도시에서 토지 측량사의 전문 분야를 교육 받고 대학 농학부에서 2개의 과정을 마쳤다. 쁘리쉬빈은 러시아로 돌아와 1905년까지 농경학자로 일하면서 과학 서적을 저술했고 기사도 작성했다. 책 작업을 하는 동안 쁘리쉬빈은 그의 작업의 범위가 너무 협소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관심분야의 폭을 넓혔다. 농경학자로 일하면서 농업경영 활동은 당연한 것이었고, 동시에 농업에 관한 기사도 썼다. 또한 지역 역사를 연구하면서 사냥, 여행도 즐겼다. 특히 여행을 자주 하면서 창작을 위한 민속자료를 수집했다. 그의 첫 번째 책 <두려운 새들의 땅에서>는 유럽과 러시아 북부(카렐리야, 노르웨이, 올로네츠)에 대한 여행 노트였다. 이 여행 이후 몇 년 동안 러시아와 다른 국가로의 여행은 작가의 창조적 영감에 큰 도움을 주었다. 예를 들어 민족지학에 대한 열정으로 수행한 6개월간의 북방 여행의 결과로 <북방 이야기>를 출판했다. 이 책에는 38개의 민속 이야기가 들어있다. 쁘리쉬빈은 3개월 동안 백해 연안, 콜라 반도, 솔로베츠키 제도를 방문하고 아르한겔스크로 돌아오는 여행 경로를 완주한 이후, 다시 아르한겔스크에서 배를 타고 북극해 여행을 떠나 노르웨이를 방문하고 스칸디나비아를 한 바퀴 돌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여정은 그가 얼마나 여행을 좋아하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쁘리쉬빈과 러시아 자연>
(출처: https://yandex.ru/)


북방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쁘리쉬빈의 문학은 획기적으로 발전한다. 이 시기에 창작된 작품의 인상을 바탕으로 러시아 지리 학회가 쁘리쉬빈에게 메달을 수여하였다. 특히 지리학회는 쁘리쉬빈의 에세이 작품 <공포 없는 새들의 땅에서>를 높게 평가했다. 자연의 태고적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공포 없는 새들의 땅에서>는 대단히 서정적이고 시적인 작품으로, 쁘리쉬빈은 이 창작품으로 작가로서 뿐만 아니라 과학자로서도 인정을 받아 러시아 지리 학회의 정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이 작품에 이어서 출판된 쁘리쉬빈의 여행 에세이 <마법의 빵 뒤에서>는 러시아 북부 주민들의 인생 및 삶의 방식을 다루고 있다. 이 작품으로 쁘리쉬빈은 동료작가에게 인정받게 되어, 알렉세이 레미조프, 드미트리 메레쥐콥스키, 막심 고리끼와 친구가 된다. 특히 고리끼는 쁘리쉬빈의 첫 번째 작품집의 출판에 많은 도움을 주게 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1930년대에 쁘리쉬빈이 ‘마쉔카’라는 이름의 밴을 구입한 사실이다. 작가는 이 자동차로 러시아 전역을 여행했는데, 나중에 이 밴은 ‘모스크비치’로 대체되었다. 이 시기 동안 쁘리쉬빈은 극동 지역을 방문했는데, 이 여행의 결과 중편 <사랑하는 동물들>과 <인삼>이 출판되었다. 그리고 1930년대에 쁘리쉬빈은 잡지 <나의 성과>와 신문사 <이즈베스티야>에서 특파원으로 일하면서 역시 러시아 전역을 여행하였다. 특히 작가는 취재를 위해 우랄, 극동, 북부 및 코카서스를 방문했는데, 이것은 그에게 엄청난 양의 자료를 제공했으며 나중에 자연, 사냥 기록, 철학적 메모, 일기 형식의 작품 속에서 아름다운 러시아의 자연으로 구현되었다. 특히 쁘리쉬빈의 일기는 전체 8권으로 출판되었는데, 그 속에는 인생, 자연, 그리고 인간과 작가의 역할에 대한 쁘리쉬빈의 견해가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전에 검열의 이유로 인쇄가 허용되지 않았던 작가의 일기는 1980년대에 출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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