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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유스포프 궁전과 괴승 라스푸틴의 살해 (2)
분류역사
국가 러시아
날짜2022-03-02
조회수153
첨부파일


106년 전 페트로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의 옛 이름)의 모이카 강변의 유스포프 궁전의 지하실에서 시베리아 출신 괴승 그리고리 라스푸틴이 총을 맞았다. 총을 쏜 자는 제정러시아의 대귀족 집안의 펠릭스 유스포프 왕자였다. 펠릭스 유스포프뿐만 아니라 군주주의자 푸리슈케비치, 드미트리 파블로비치 대공, 의사 라조베르트 및 스코틴 장교 등 라스푸틴의 살해에 참여한 러시아 귀족 엘리트들은 라스푸틴의 죽음에서 러시아 구원의 길을 보려고 하였다. 왜냐하면 1차 세계 대전 과정에서 라스푸틴의 국가 정책의 개입, 그로 인한 니콜라이 2세의 실정은 러시아를 혼돈상태로 몰아넣었다고 살해 공모자들은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들은 서방국가를 대상으로 하는 스파이 선정부터 장관 임명에 이르기까지 정부의 일에 시베리아의 괴승의 입김이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펠릭스 유스포프는 다른 4명의 공범자와 함께 왕가의 명예를 지키고 러시아를 구원하기 위해 라스푸틴을 죽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라스푸틴의 비극적 죽음이 러시아 제국의 위기를 막지는 못했다.

 

<라스푸틴과 니콜라이 2세 가족>
(출처: https://yandex.ru/)


사건의 재구성: 푸리슈케비치의 자서전을 중심으로

흥미 있는 것은 1916년 12월 17일 밤 유스포프 궁전에서 일어난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살인 사건으로 인하여 펠릭스 유스포프와 공범자 중 그 누구도 처벌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니콜라이 2세와 황후 알렉산드라는 가까운 친구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매우 화가 났지만, 그들은 그 누구도 살인죄로 기소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물론 이것은 라스푸틴이 살해 된 이후, 라스푸틴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다는 것을 즉시 알아차린 황후에게 보낸 편지가 큰 역할을 했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시베리아 괴승으로부터 부당하게 모욕 받은 피해자’로 자신들을 프레임한 것이 편지의 주요내용이었다. 불기소된 살인 공모자들 중 펠릭스 유스포프는 드미트리 대공과 함께 크림반도로 갔고(이후 유스포프 왕자는 살인 음모에 가담한 것이 인정되어 그의 영지로 추방되는 아주 작은 처벌을 받았다) 푸리슈케비치는 전선으로 떠났다. 이러한 결과는 라스푸틴의 살해사건에 대한 많은 신화를 만들었고 살해 과정에 대한 증명되지 않는 수많은 에피소드를 양산했다.  


<블라지미르 푸리슈케비치>
(출처: https://yandex.ru/)


라스푸틴의 살인에 가담한 공범중의 한 명인 군주주의자 블라지미르 미트로파노비치 푸리슈케비치(В.М. Пуришкевич)가 작성한 <내가 어떻게 라스푸틴을 죽였나>(Как я убил Распутина)라는 책을 기반으로 그날의 사건에 대한 세부 사항을 살펴보는 것은 그 동안 세상에 떠돈 라스푸틴의 살해과정에 대한 여러 가지 버전에 대한 진실성을 판단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이 회고록은 1916-1917년을 다루고 있으며, 저자가 사망한 후 리가에서 출판되었다.
 

사건의 재구성: ‘1916년 12월 17일 밤’을 위한 사전계획

1916년 11월 21일 아침, 펠릭스 유스포프는 푸리슈케비치를 찾아가 ‘라스푸틴 제거’를 제안했고, 같은 날 저녁 공모자들은 유스포프 궁전에 모여서 괴승 살해에 대한 서로의 의지를 확인했다. 유스포프 궁전 앞에 경찰서가 있었기 때문에 공모자들은 라스푸틴을 총으로 살해하지 않고 독살하기로 결정했다. 11월 24일 펠릭스 유스포프는 부사관 생도 마클라코프가 전달한 시안화칼륨(청산가리)을 공모자들에게 보여주었다. 공모자들은 제정러시아의 비밀경찰들이 라스푸틴을 보호 및 감시하고 있다는 것을 사전에 알았기 때문에 경찰들의 주의를 산만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여기에다가 유스포프 궁전과 지근거리에 경찰서가 위치하여 경찰들이 라스푸틴의 동선을 언제든지 파악할 수가 있었기 때문에 라스푸틴과 키와 체격이 비슷한 스코틴 중위가 라스푸틴 대역을 하는 것에 대하여 모든 공모자들이 공감했다. 이러한 것은 공모자들이 라스푸틴 살해 이후 시신을 외부로 옮길 때 경찰병력에 혼란을 가져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었다.

11월 28일 푸리슈케비치는 궁전에 들러 살인이 이루어질 장소를 사전 답사했는데, 그날 공모자들은 청산가리를 준비한 사관생도 마클라코프를 역사적인 거사에 동참시키기로 결정했다. 그의 설득작업은 푸리슈케비치가 맡기로 했다. 그러나 사관생도는 필요하다면 법정에서 공모자들의 변호인은 꼭 되겠다는 말을 한 후 그들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푸리슈케비치는 마클라코프를 ‘전형적인 소심한 생도’라고 평가했다. 11월 29일 아침 푸리슈케비치는 라스푸틴 살해 이후, 그의 시체를 페트로그라드 시내를 흐르는 네바 강 바닥에 영원히 수장 시킬 목적으로 무거운 추와 쇠사슬을 시장에서 구입했다. 그 이후, 푸리슈케비치와 라조베르트는 겨울이라 꽁꽁 얼어있는 네바강 표면에 구멍을 낼 적절한 지점을 확인했다.  

 

<푸리슈케비치(左) / 유스포프(中) / 드미트리 파블로비치(右)>
(출처: https://yandex.ru/)


12월 1일 공모자들은 푸리슈케비치의 마차에 모여서 세부적인 살인 계획을 마련했다. 펠릭스 유스포프는 라스푸틴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서 라스푸틴을 살해하기 위해 그를 자신의 집으로 초청하는 것에 대하여 시베리아의 괴승은 전혀 의심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들은 라스푸틴이 오랫동안 관심을 갖고 있던 백작부인과의 만남이라는 미끼로 라스푸틴을 유인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이러한 방법이 라스푸틴의 마음을 움직일 것으로 확신했다. 왜냐하면 라스푸틴은 병적일정도로 여성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탕아였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이미 역사적으로 판명된 사실로서, 라스푸틴은 황태자 알렉세이의 혈우병을 호전시켜 황후의 총애는 크게 받고 지냈지만, 사실 궁 밖에서는 호색한이었다. 자신과 육체적으로 접촉하면 정화와 치료의 효과를 볼 수 있다고 설교하며 수많은 정부들을 얻었고 그 과정에서 많은 귀족 여성들을 유혹했다.
 

사건의 재구성: 1916년 12월 17일에 도대체 무슨 일이 발생한 것일까?

살해 당일 라스푸틴과 펠릭스 유스포프는 백작 부인을 기다리기 위해 지하실로 내려갔는데, 괴승은 그녀가 그 장소로 바로 올 것이라고 들었다. 사전에 펠릭스 유스포프 백작은 포도주와 디저트를 준비하면서 독을 넣었다. 함께 살해에 참여한 공모자들은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에 서 대기하고 있었다. 라스푸틴은 음식을 먹으라는 유스포프의 제안을 ‘백작 부인을 기다리는 동안’ 먹거나 마시고 싶지 않다며, 왕자의 제안을 한동안 거절했다. 라스푸틴이 너무 오랫동안 저항(?)했기 때문에 유스포프는 동료들에게 달려가 도움을 요청했는데, 공모자들은 괴승이 굶주림을 참을 수 없어서 음식을 먹을 것을 알았기 때문에 조금만 더 시간을 보낼 것을 조언했다. 실제로 라스푸틴은 여러 차례 음식 먹기를 거절 하였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배가 고파서 독이든 음식과 포도주를 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펠릭스 유스포프 눈앞에 펼쳐진 상황은 전혀 예상 밖의 것이었는데, 독이 라스푸틴에게 전혀 효과가 없었던 것이었다. 펠릭스 유스포프와 긴 대화를 하면서 독약 성분이 몸속에서 사그라들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워낙 육체적으로 강한 몸을 가진 라스푸틴의 신체적 조건도 독으로부터 그를 방어한 요인이기도 하였다. 유스포프는 당연히 혼란스러워했고, 이때 다른 공모자들은 새로운 살인 계획을 급하게 생각해 냈다. 바로 권총으로 라스푸틴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독살에 실패하면서 잠시 공모자들 사이에 이견이 발생했는데, 특히 드미트리 대공은 더 이상의 살인 행위를 거부했다. 그러나 푸리슈케비치는 이런 기회가 두 번 다 시 없을 것이라고 강하게 주장하며 드미트리 대공을 설득했다. 

 

<네바강에서 발견된 라스푸틴>
(출처: https://yandex.ru/)


펠릭스 유스포프는 권총 살해에 동의하고 자신의 손으로 라스푸틴을 처형하기로 결정했다. 펠릭스 유스포프는 지하실에서 괴승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고, 총알은 정확하게 라스푸틴의 몸속에 박혔다. 이러한 치명적인 총상에도 불구하고 라스푸틴은 죽지 않고 여전히 ​​숨을 쉬고 있었고 심지어 비틀거리면서 지하실에서 거리로 나와서 도망치기까지 하였다. 펠릭스 유스포프는 푸리슈케비치에게 라스푸틴을 죽이도록 요청했는데, 그 시각 푸리슈케비치는 사무실에서 가지고 온 리볼버 권총을 들고 이미 거리에 있었다. 푸리슈케비치는 유스포프 궁전의 정문을 향하고 있는 해 괴승을 향해 두 번이나 총을 발사했지만 빗나갔다. 초집중해야 했던 푸리슈케비치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잠시 멈춰 서서 자신의 손을 깨물었다. 이후 푸리슈케비치는 라스푸틴의 머리를 향해 세 번째 총알을 발사했다. 그제야 쓰러진 라스푸틴을 향해 푸리슈케비치는 온 힘을 실어 발로 차기 시작했는데, 펠릭스 유스포프도 엄청난 분노로 쓰러져 있던 라스푸틴을 구타하기 시작했다. 이 같은 행위는 지하실에서 펠릭스 유스포프가 발사한 총탄으로부터 부상당한 라스푸틴이 왕자에게 심리적으로 아주 큰 상처를 준 모멸적인 말에 대한 보복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그 세세한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다. 이번에는 라스푸틴이 죽었다고 확신한 살해 공모자들은 이미 지정해 놓은 얼음 구멍으로 가서 시체를 수장하였다. 이 때 원래 계획에서 불에 태우기로 했던 괴승의 모피 코트와 부츠도 함께 얼음 구멍 속으로 밀어 넣었다. 이후 네바강에 떠오른 라스푸틴의 시신을 수습해서 부검했을 때 폐에 물이 있는 것으로 밝혀지면서 총상으로 인한 사망을 확신했던 공모자들을 잠시나마 혼란에 빠뜨렸다. 이 같은 사실은 니콜라이 2세를 대신하여 황후의 개인 고문이 되어 제정러시아의 국정을 크게 농단한 시베리아의 괴승 라스푸틴이 몇 번의 총격을 받고도 살아있었다는 것을 증명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유스포프 궁전 내부>
(출처: https://yandex.ru/)


유스포프 궁전의 역사: 라스푸틴 살해 이후부터 현재까지

‘라스푸틴의 살해 사건’의 범행 현장인 유스포프 궁전은 ‘어떻게 이 장소에서 비극적인 역사적 사건이 발생할 수 있었나?’라는 의구심이 강하게 들 정도로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이 유스포프 궁전은 유명 건축가 발렌 데라모트가 설계한 후 오랜 시간에 걸쳐 건축 및 재건축이 단행되었다. 마지막 재건축은 살인사건이 일어나기 2년 전에 실시되었는데, 대규모 거실, 그레이트 홀, 다이닝 룸이 새롭게 만들어졌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에 의한 도시 봉쇄 동안 유스포프 궁전 안에는 야전병원이 설치되었고, 소비에트시기에 유스포프 궁전에는 스웨덴 및 독일 영사관, 전쟁 포로 교환 위원회가 자리 잡았다.

1918년에 유스포프 궁전은 국유화되면서 박물관으로서 개관 되었다. 이 박물관은 1925년에 궁전이 교육공간으로 활용되면서 문을 닫았는데, 박물관에 전시된 대부분의 그림과 귀중한 예술품은 에르미타주와 러시아 박물관에 기증되었다. 1935년에 유스포프 궁전은 전 러시아 중앙 집행 위원회의 법령에 의해 국가의 후원을 받는 역사-예술적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그 이후 유스포프 궁전의 모든 홀은 과거의 모습을 유지하는 소규모의 복원 작업이 이루어졌다. 현재 유스포프 궁전의 모든 역사적 공간들은 관람객들을 위해 항상 개방되어 있다. 그리고 유스포프 궁전은 관람객뿐만 아니라 결혼식, 무도회 등의 행사를 원하는 일반 국민들도 연회장 기능의 임대 공간으로 유스포프 궁전을 이용하고 있다. 당연히 각종 유명 콘서트와 공연도 유스포프 궁전에서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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