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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문화로(文化路)
제목러시아 피아니즘의 로열 패밀리: 겐리흐 네이가우스
분류음악
국가 러시아
날짜2022-02-15
조회수165
첨부파일


러시아 피아니즘은 서양 클래식 음악계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세계적인 명곡들을 만들어낸 작곡가들뿐만 아니라 거장 연주자들을 배출한 그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대한 그들의 자긍심과 자존심은 대단하다. 이러한 결과가 나오기까지 모스크바 차이코프스키 국립 콘서바토리에서 활동한 거장 겐리흐 네이가우스(Г.Г. Нейгауз, 1888~1964)의 역할을 간과할 수 없다. 겐리흐 네이가우스는 소비에트 시기 세계 3대 음악 콩쿠르로 꼽히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1938년 우승을 거머쥔 에밀 길렐스(Э.Г. Гилельс, 1916~1985) 그리고 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С.Т. Рихтер, 1915~1997) 등 수많은 걸출한 피아니스트를 배출하며 전 세계의 무대에서 러시아 피아니즘의 위대함을 천명하고, 현재의 러시아 피아니즘의 계보를 잇는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사실 겐리흐 네이가우스는 대대로 음악가문에서 태어나 우월한 음악적인 유전자를 타고나 훌륭한 음악가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인물이며 그의 음악적 유전자는 대대로 그의 아들 스타니슬라프 네이가우스(С.Г. Нейгауз, 1927~1980)에 이어 1985년 19세의 나이로 쇼팽콩쿠르에서 최연소 우승을 거머쥔 손자 스타니슬라프 부닌(С.С. Бунин, 1966~)까지 4대째 대물림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음악적 영향력은 모스크바 차이코프스키 국립 콘서바토리(Московская государственная консерватория им. П.И. Чайковского)에서 그의 제자들을 통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1938년 모스크바 차이코프스키 국립 콘서바토리에서 겐리흐 네이가우스 수업 모습>
(출처: https://nashaucheba.ru/v49588/?cc=1)

러시아 클래식계의 엄친아: 겐리흐 네이가우스(Г.Г. Нейгауз, 1888~1964)

겐리흐 네이가우스는 1888년 우크라이나 엘리사벳그라드(현 키로보그라드)의 독일계 음악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구스타프 네이가우스(Г.В. Нейгауз, 1847~1938)는 독일의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에 위치한 칼카르(Kalkar)출신으로, 1870년 쾰른 콘서바토리에서 루돌프 에른스트(F. K. R. Ernst, 1840~1916)와 콘서바토리 원장 페르디난드 힐러(F. Hiller, 1811~1885)에게 사사한 피아니스트였다. 그는 졸업과 동시에 우크라이나 엘리사벳그라드로 이주하여 음악교사로 활동하던 중 림스키-코르사코프(Н.А. Римский-Корсаков, 1844~1908), 글라주노프(А.К. Глазунов, 1865~1936), 펠릭스 블루멘펠드(Ф.М. Бдуменфельд, 1863~1931)로부터 지지와 추천을 받아 음악학교 설립하고, 교장으로 재직하였다. 그의 어머니 올가 네이가우스(О.М. Нейгауз(Блуменфельд), 1859~1936) 또한 실제로 음악가 집안인 블루멘펠드(Блуменфельд) 집안사람으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В.С. Горовиц, 1903~1989)의 스승으로 알려져 있는 펠릭스 블루멘펠드의 누나이다. 요즘 유행어로 표현한다면 겐리흐는 태생부터 러시아 클래식계의 넘사벽 엄친아 금수저였던 것이다.

그는 아버지의 음악학교에서 음악공부를 시작했으며, 어릴 적부터 그의 재능을 알아본 외삼촌 펠릭스 블루멘펠드는 그의 음악세계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그는 1897년 엘리사벳그라드에서의 첫 독주회를 시작으로, 1902년 11세의 바이올린 연주자 미하일 엘만(М.С. Эльман, 1891~1967)과 합동 연주회, 1904년 누나 나탈리아 네이가우스와 도르드문트, 본, 쾰른, 베를린에서도 연주회를 가졌다. 블루멘펠드의 추천으로 그는 베를린과 비엔나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음악공부를 하기도 했다. 1914년에 러시아로 돌아와 1915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 콘서바토리를 특별전형으로 졸업하였고, 조지아 트빌리시 콘서바토리, 1919~1922년 키예프 콘서바토리, 1922년부터 모스크바 콘서바토리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935~37년까지 모스크바 콘서바토리 원장을 역임했다. 그리고 1938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개최된 제2회 국제 이자이 콩쿠르(현 퀸 엘리자베스 음악 콩쿠르)에서 제자 에밀 길렐스가 우승을 차지하며 소련의 예술적 위상을 전 세계에 떨치자 그의 스승 겐리흐도 함께 주목 받았다. 모스크바 콘서바토리의 그의 반에는 항상 재능 있는 피아니스트들이 줄을 이었으며, 가장 많았을 때는 32명까지 공부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의 제자 리흐테르는 재능 없는 학생들에게 모두 성심을 다해 수업을 하는 겐리흐에게 항상 불평했을 정도로 그는 각각의 학생들의 개성과 성격에 맞게 수업할 수 있을 것인가를 항상 고민했다고 한다. 1958년에 출판된 그의 피아노 교육 철학과 노하우를 집대성한 저서 ‘피아노 연주예술에 대하여(Об искусстве фортепьянной игры)’ 현재까지도 피아니스트가 되기를 희망하는 이들에게 필독도서로 꼽힌다. 


<저서 ‘피아노 연주예술에 대하여(Об искусстве фортепьянной игры)’ 첫 페이지>
(출처: http://auction.ru)

사랑과 불행의 시작: 겐리흐 네이가우스의 사랑과 인생

겐리흐 네이가우스는 소비에트 음악사에 한 획을 그으며 소비에트 시기를 풍미한 훌륭한 음악가였고, 교육자였음에는 분명하나 그의 개인적인 삶은 그렇게 평탄해 보이지만은 않았다. 1917년 여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엘리사벳그라드로 이주한 피아니스트 지나이다(З.Н. Нейгауз(Пастернак), 1897~1966)는 겐리흐의 연주를 듣고 반해 겐리흐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곧 그들은 연인으로 발전하였고, 2년 후, 겐리흐가 키예프 콘서바토리로 자리를 옮기게 되자 그들은 결혼을 결심한다. 그들은 키예프에서 행복한 결혼생활을 영위하던 중, 1922년 겐리흐가 모스크바 콘서바토리 교수로 채용되어 수도로 오게 되고, 1925년 큰 아들 아드리안, 1927년 둘째 아들 스타니슬라프를 얻는다. 그러나 그들의 행복한 결혼 생활도 잠시 우리에게 소설 ‘닥터 지바고(Доктор Живаго)’로 잘 알려진 보리스 파스테르나크(Б.Л. Пастернак, 1890~1960)의 등장으로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겐리흐는 연주회 취소까지 감행하며 가족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혼하게 되고,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자살소동으로 결국 1932년 지나이다는 파스테르나크와 결혼하며 지나이다 파스테르나크(З.Н. Пастернак)로 살게 된다. 사실 겐리흐는 파스테르나크와 매우 가까운 친구로, 그의 예술세계를 동경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아내를 빼앗긴 것이다.

그러나 나쁜 일은 연달아 일어난다고 했던가. 이혼 이후, 그는 오랜 시련의 시간들을 감내해야 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그는 장티푸스에 걸려 한동안 연주를 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른손 새끼손가락은 마지막까지도 회복하지 못해 제대로 연주할 수 없어 심리적으로 스트레스가 심했다. 병이 완쾌되어갈 무렵에는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어 그가 독일인 후손이라는 이유로 소련 정부는 귀환명령을 내렸다. 이에 불복하자, 그는 1941년 8개월 반 동안 루뱐카 감옥에 투옥되었다. 그러나 그의 제자 에밀 길렐스의 청원으로 그는 감옥에서 풀려날 수 있었지만, 곧바로 우랄로 강제 송환되었고, 다행히 스베르들로브스크 콘서바토리에서 가르치는 것으로 우랄행은 피할 수 있었다. 예술가들이 합심하여 제출한 공동 청원서가 받아들여져 1944년 7월이 되어서야 그는 모스크바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1945년 20세가 된 그의 큰 아들 아드리안이 결핵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둘째아들은 스타니슬라프는 부인 지나이다와 파스테르나크 사이에서 성장하지만, 모스크바 콘서바토리에서 겐리흐에게 박사과정까지 피아노 공부를 하며 피아니스트로 자리잡아간다.


<겐리흐와 부인 지나이다(左), 아들 스타니슬라프와 수업하는 겐리흐(右)>
(출처: https://notkinastya.ru/fotogalereya/fotogalereya-nejgauz/)

예술은 영원하다: 다큐멘터리 ‘거장 겐리흐(Мастер Генрих)’

2008년 겐리흐 네이가우스 탄생 120주년을 기념하며 그의 업적을 재조명하는 다큐멘터리 ‘거장 겐리흐(Мастер Генрих)’가 제작되었다. 이 다큐멘터리에서는 겐리흐 네이가우스의 딸 밀리차 네이가우스(М.Г. Нейгауз), 손녀 마리나 네이가우스(М.С. Нейгауз, 1952~) 등을 통해 그동안 언급되지 않았던 그의 인간적인 면모에 대해 들어볼 수 있었다. 그리고 제자이며 모스크바 국립 콘서바토리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베라 고르노스타예바(В.В. Горностаева, 1929~2015), 엘리소 비르살라드제(Э.К. Вирсаладзе, 1942~), 알렉세이 나세드킨(А.А Наседкин, 1942~2014)등을 통해 콘서바토리에서 수업시간에 그와 있었던 다양한 에피소드들과 제자 에밀 길레스과의 불화설도 사실이 아님을 확인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겐리흐가 작곡가 알렉산드르 스크랴빈(А.Н. Скрябин, 1872~1915)의 박물관에서 다양한 레퍼토리로 연주회를 자주 개최하였고, 그의 연주를 듣기 위해 항상 많은 청중들이 방문했다는 사실도 새롭게 밝혀졌다.

다큐멘터리 감독 니키타 티호노프(Н.С. Тихонов, 1952~)는 20세기 러시아의 위대한 예술가들의 다큐멘터리 시리즈를 제작하여 러시아 쿨투라 채널(Россия-К)에서 방영하였다. 여기에는 볼쇼이 극장의 무용수들(마리나 세묘노바, 마이야 플리세츠카야, 갈리나 울라노바, 올가 레페신스카야, 아사프 메세레르, 니콜라이 치스카리제 등), 발레마스터(레오니드 라브로브스키, 로스티스라브 자하로프), 성악가(세르게이, 레메세프, 주라브 안자파리제, 이리나 아르히포바 등), 위대한 음악가들(다비드 오이스트라흐, 야코프 플리에르 등), 러시아 예술관련 인사들(아그리피나 바가노바, 세르게이 디아길레프 등) 20세기를 주름잡는 러시아의 예술가들을 총망라하는 거대한 프로젝트였다. ‘거장 겐리흐’도 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제작되어 여러 어려움을 극복하고 거장으로 우뚝 선 겐리흐를 조명했다.


<Россия-К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 ‘거장 겐리흐’의 첫 장면>
(출처: https://youtu.be/I6X-0VcA_Ow)

세계사의 흐름을 보면 제2차 세계대전 같은 전쟁 등의 인류가 위기에 직면한 시기에 걸출한 예술가들의 명작들이 나와 예술이 더욱 발전한다고 한다. 그의 예술적인 성취 또한 세계사적으로 두 차례의 전쟁과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격동의 시기를 겪으며 그의 삶에 투영된 고통들이 예술혼으로 승화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삶이 힘들어지고, 어려워질수록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 그는 더욱 제자들을 열심히 가르쳤고, 연주에 몰두했을 것이다. 그의 인생의 시련이 러시아의 피아니즘을 또 한 단계 발전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된 것이다. 전 인류가 3년째 코로나 19라는 보이지 않는 적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지금도 전쟁과 다름이 없는 전 지구적 위기상황이다. 이 시기를 지나고 나면 우리의 예술은 어떠한 모습으로 변화되고, 발전되어 있을지 자못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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