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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우즈베키스탄의 전설적인 한인 축구형제: 안 미하일과 안 드미트리
분류기타
국가 러시아
날짜2022-01-17
조회수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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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영화 ‘미나리’(2021)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미국으로 이주한 한인들의 이야기로 깊은 감동을 전했다. 특히 ‘미나리’의 내용은 콜로라도 주 덴버의 한국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아칸소주에서 유년기를 보낸 정이삭(Lee Isaac Chung, 1978~)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로 실제에서 나오는 스토리의 진솔함과 무게감이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 아닌가 한다. 최근 재외 한인 감독들이 한인 디아스포라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영화들이 개봉하면서 재외 한인들의 삶을 재조명하는 기회가 되고 있다. 지난 12월 7일 영국 옥스퍼드 국제 영화제(The Oxford International Film Festival)에서 재미한인 영화감독 송 브라이언 (Song Bryan)이 메가폰을 잡고 비행기 사고로 26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우즈베키스탄의 전설적인 한인 축구선수 안 미하일(Ан М.И., 1952~1979)에 대한 다큐멘터리 ‘미샤(Misha)’(2020)가 최고의 다큐멘터리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미국에서 거주하던 브라이언 송은 어린 시절 벨라루스에서 일하는 부모님을 만나기 위해 벨라루스를 방문했다가 그곳에서 러시아로 이주한 한인들을 만나게 되어, 벨라루스에도 “또 다른 한인들”이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러시아 한인들의 이주과정과 삶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한다. 꾸준히 러시아 한인들에 대해 공부했으며, 2015년부터 우즈베키스탄 한인 1세대들의 인터뷰 작업을 이어오던 중 안 미하일에 대해 알게 되었다. 러시아 한인들에 대해서는 주로 연해주와 카자흐스탄의 한인들 또는 중앙아시아의 한인들로 통틀어 이야기하기에 우즈베키스탄의 한인들에 대한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러시아 한인 스포츠인들도 카자흐스탄 출신으로 올림픽 5관왕인 체조여왕 넬리 김(Н.В. Ким, 1957~), 복싱 트레이너로 우리나라 국가대표 코치를 역임한 유리 채(Ю.А. Цхай, 1948~)를 제외하고는 자주 회자되지 않았었고, 안 미하일은 우리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었다. 이번 브라이언 송이 옥스퍼드 국제 영화제에서 올린 쾌거는 우즈베키스탄의 한인들과 전설의 축구선수 안 미하일과 함께 우즈베키스탄 한인 스포츠인들에 대해 주목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2021 옥스퍼드 국제 영화제에서 최고의 다큐멘터리로 선정된 ‘미샤’ 포스터>
(출처: https://www.facebook.com/mishathedoc/)


우즈베키스탄의 전설적인 한인 축구 선수: 안 미하일

안 미하일(Ан М.И., 1952~1979)은 1952년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주 베르흐네친스키 지역 스베르들로프 콜호즈(Колхоз им. Свердлова)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김 니콜라이(Ким Н.А.)와 양 알렉산드르(Лян А.С.)코치를 만나 축구에 입문했다. 그 후로 소련 유소년 축구 국가대표팀을 거쳐 소련 축구 국가대표로 활동하며, 1976년 소비에트 세계 스포츠 마스터(Мастер спорта СССР международного класса, МСМК) 칭호를 받았다. 그가 이렇게 세계적인 축구선수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형 드미트리의 공이 크다. 그보다 13살 위인 그의 큰 형 드미트리는 스베르들로프 콜호즈의 어린이 축구팀 출신으로 재능 있는 축구선수였다. 미하일이 스포츠 기숙학교에서의 혹독한 훈련을 견디지 못하고 집으로 도망갔을 때 그의 형 드미트리는 미하일을 심하게 꾸짖어 다시 학교로 돌려보내는 일도 있을 정도로 형 드미트리는 동생 미하일의 재능을 알아보고 조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피나는 노력과 형의 도움으로 그는 소련 유소년 국가대표팀의 주장이 되어 소련 유소년팀을 유럽챔피언으로 이끌었고, 시니어 국가대표팀에 합류하며, 양발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훌륭한 미드필더로 성장했다. 안 미하일은 1971년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를 기반으로 한 소련 1부 리그 FC 파흐타코르(Пахтакор)에 입단하여 스타 플레이어 대열에 합류했다. 유럽의 유명 축구클럽으로부터 매력적인 스카웃 제의도 받았다고 한다. 그와 한 팀에서 동료로 함께 훈련했던 바실릭 하파나기스(В.К. Хадзипанагис, 1954~)는 전 주장인 미하일을 팀 내에서는 “교수”로 경기장 밖에서는 세심하게 팀원들을 챙기는 친구이자 멘토로 기억한다. 그리고 바실릭은 미하일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다면 거구의 슬라브 선수들이 지배하는 소련의 리그에서 그들과 지치지 않고 대적할 수 있는 체력이었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안 미하일은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 같이 “경기의 흐름을 읽어낼 수 있는” 그리고“30~40m의 장거리 패스가 가능한” 강력한 플레이메이커였다. 1977년 우크라이나 FC 크리브바사를 맞아 2개의 코너킥을 성공시키며 팀의 우승을 이끈 것은 팀의 전설로 전한다. 그는 우즈베키스탄의 펠레(Pele, Edson Arantes do Nascimento, 1940~)로 불리며 우즈베키스탄 한인들의 영웅으로 등극할 수 있었다.

 

<소련 유소년 국가대표팀 주장으로 유럽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안 미하일>
(출처: https://kloop.kg/blog/2020/12/26/) 

 
1979년 8월 11일 우크라이나의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주 드네프로제르진스키(현, 카멘스코예)에서 소련의 비행기 TU-134 두 대가 충돌하면서 두 비행기에 탑승했던 탑승객 178명 전원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망자 중에는 민스크에서 개최되는 챔피언십 경기 참가를 위해 탑승한 FC 파흐타코르의 관리자, 부코치, 의사와 14명의 선수까지 총 17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선수들 중에는 부상으로 이번 경기 출전에 하지 않아도 되었고 항상 비행 공포증이 있었던 안 미하일은 주장으로서 선수들의 사기를 북돋기 위해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가 비극을 맞이했다. 1979년 FC 파흐타코르는 소련 축구 1부 리그에서 민스크 FC 디나모와 2차전을 펼치기 위해 민스크로 향하던 길에 사고를 당한 것이다. 소련 축구 연맹은 이 사건으로 FC 파흐타코르가 다른 축구팀으로부터 여러 가지 보강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고, 3년 동안 1부 리그 팀으로 보장해 주었다.

 

<1979년 8월 11일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떠난 파흐타코르-79 기념비>
(출처: https://football-pitch.ru/aviakatastrofyi-v-futbole.html)


우즈베키스탄 펠레 형제: 안 드미트리

우즈베키스탄의 펠레라고 불릴 정도로 안 미하일의 실력이 출중했기에 우즈베키스탄의 대표 한인 축구선수 하면 안 미하일을 먼저 떠올리지만, 이러한 안 미하일이 세계적인 축구선수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재능 있는 축구선수였던 그의 큰 형 안 드미트리 이바노비치(Ан Д.И., 1939~2018)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1960년 안 드미트리는 FC 파스타코르 산하 유소년 축구학교를 우즈베키스탄 한인 남자 최초로 졸업했다. 그는 베라도르 아브두라이모프 (Б.Х. Абдураимов, 1943~), 하미드 라흐마둘라에프 (Х.Т. Рахматуллаев, 1942~1978), 블라디미르 슈테른(В.А. Штерн, 1942~) 등 향후 우즈베키스탄과 소련의 축구 스타들과 함께 훈련하며 성장했다. 1960년대에 안 드미트리는 구소련 메이저리그에 출전한 최초이자 유일한 한인으로 1966년에 스포츠 마스터 칭호를 받은 축구선수이다. 

 

<1960년대 콜호즈 FC 폴리토젤에서 축구경기 중 안 드미트리>
(출처: https://mytashkent.uz/2014/03/02/dmitrij-an/)  


1950년대의 집단농장은 생산성뿐만 아니라 목화와 옥수수 재배, 아마추어 예술단 대회 참가, 스포츠 활동 등 삶의 모든 영역에서 암묵적으로 경쟁을 벌여야 했다. 특히 이러한 경쟁은 당시 가장 인기 있었던 스포츠인 축구경기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났다. 우즈베키스탄의 집단 농장 ‘스베르들로프’, ‘폴리토젤(Политотдел)’, ‘프라브다’ 등은 가장 우수한 집단농장으로 각각 축구팀을 가지고 있었다. 드미트리는 FC 폴리토젤에서 선수로 활동했고, 당시 FC 폴리토젤은 FC 스베르들로프와 강력한 라이벌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드미트리의 증언에 의하면 FC 스베르들로프는 우즈베키스탄에 거주하는 한인, 우즈벡인, 러시아인 등 지역 축구 선수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실제로 센터의 편향된 정책과 구소련의 스포츠 위원회의 불공정한 경기 운영이 아니었다면 FC 스베르들로프는 FC 폴리토젤보다 더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드미트리는 이 집단농장 축구팀의 공격수로 활약하여 구소련 선수권대회 2부 리그에서 활동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그 이후 그는 FC 스베르들로프에서 활동하며 FC 파흐타코르와의 경기에서 그가 넣은 유일한 골이 승점으로 작용하며 1대 0의 점수로 팀을 승리로 이끌어 마침내 그는 1부 리그 FC 파흐타코르로 이적하게 된다. 이로써 그는 구소련 1부 리그에서 활동한 우즈베키스탄의 최초의 한인 선수가 되었다.
  
 

<1966년 콜호즈 FC폴리토젤의 코치와 선수들>
(세 째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안 드미트리로 추정됨)
(출처: https://mytashkent.uz/2014/03/02/dmitrij-an/) 


이번 브라이언 송의 영화 ‘미샤’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우선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우즈베키스탄의 축구형제 안 미하일과 드미트리를 재조명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 영화가 러시아 한인과 미국 한인 즉 재외 한인들의 협업에 의해 제작되었다는 것이다. 감독은 재미 한인 브라이언 송이었지만 현지 우즈베키스탄 한인들의 협조가 없었더라면 이 영화는 제작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세계 한인들의 협력의 가능성을 보여준 단적인 예가 바로 영화 ‘미샤“일 것이다. 그리고 영화 ‘미샤’가 만들어지기까지 미하일의 형 안 드미트리의 증언이 매우 큰 역할을 했으며, 비행 공포증이 있던 미하일과 함께 비행을 할 때면 항상 카드게임을 했다는 FC 파흐타코르의 수석코치 이그다이 타제지노프(Игдай Тазетдинов, 1933~1979)의 부인 알라 슐레피나-타제지노바(А.С. Шулепина-Тазетдинова)도 우즈베키스탄의 저명한 영화인으로 미하일과 파흐타코르에 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영화 전문가로서 다큐멘터리 제작에 많은 아이디어와 조언을 주었다고 한다. 이 영화는 단순한 축구영웅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당시 보이지 않는 차별이 심했던 소련사회에서 차별과 역경을 이겨내고 축구영웅으로 거듭난 안 미하일로 대표되는 우즈베키스탄 한인의 인생역전 드라마라고 한다. 그러나 영화의 막바지 작업 중인 2018년에 안 드미트리가, 2020년에는 알라 슐레피나-타제지노바도 세상을 떠났다. 안 미하일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씩 세상을 떠나고 있다. 안 미하일 뿐만 아니라 재능 있는 세계의 한인들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조명할 수 있는 작업들이 하루빨리 이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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