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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문화로(文化路)
제목화폭 속에 담아낸 크렘린 변천사
분류회화
국가 러시아
날짜2021-11-16
조회수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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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러시아 회화에 대해 언급할 때, 빅토르 바스네초프(В.М. Васнецов)의 이름은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그는 특히 러시아 문화를 관통하는 역사적 장면과 신화적 형상을 화폭에 담아낸 대표적인 화가로 거론되곤 한다. 설령 빅토르 바스네초프라는 이름을 모르더라도, <루시의 세례 (Крещение Руси)>부터 시작하여 <영웅들 (Богатыри)>, <회색 늑대에 올라탄 이반 왕자 (Иван-Царевич на Сером Волке)> 등 그의 대표작을 마주하는 순간 “아, 이거 나 알아!” 하는 탄성이 자연스럽게 튀어나올 정도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의 명성에 가려서 잘 알려지지 또 한 명의 바스네초프가 있었으니, 바로 그의 아우 아폴리나리 바스네초프(А.М. Васнецов)이다. 


<빅토르 바스네초프 (左, 1848~1926) / 아폴리나리 바스네초프 (右, 1856~1933)>
(출처: https://kulturologia.ru/blogs/200618/39369/)


바스네초프 형제는 모두 러시아 역사에 큰 관심이 있었고, 이러한 관심을 자신들의 화폭을 통해 자연스럽게 풀어냈다. 다만 형이었던 빅토르의 경우, 그의 역사에 대한 관심이 신화적, 종교적 양상 및 구비문학적 요소와 결합하여 발전되어 나갔다면, 아폴리나리 바스네초프는 러시아의 공간 속에서, 특별히 시간의 흐름에 따라 러시아의 북방과 크림, 캅카스와 모스크바라는 다양한 지역에서 각각의 공간이 변화해나가는 양상을 화폭에 담아냈다. 그중에서도 아폴리나리가 특별히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을 기울인 공간은 다름 아닌 모스크바였다. 그가 생전에 그린 모스크바 풍경화가 약 120점 이상에 달하는 점 역시 모스크바에 대한 그의 사랑이 얼마나 깊었는지 말해준다.

아폴리나리 바스네초프가 모스크바에 발을 들인 시점은 1870년대 말 무렵이었다. 그전까지 아폴리나리는 현재 ‘키로프’에 위치한 ‘뱌트카’ 지역의 한 신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그러다 형 빅토르 바스네초프의 요청으로 페테르부르크로 넘어와서 약 4년간 생활하며 형에게 그림 수업을 받다가, 이후 폴레노프(В.Д. поленов), 레핀(И.Е. Репин)을 사사했다. 그러던 중 잠시 민중 계몽운동에 전념하다가, 이상과 현실 간의 괴리에 잔뜩 실망감을 안은 채 마침내 형 빅토르가 있는 모스크바로 와서 그림에 전념하게 된다. 그는 이미 1900년도에 페테르부르크 예술아카데미의 정회원이 되었으며, 1901년에서 1918년까지 ‘모스크바 회화, 조각, 건축학교’에서 풍경화 클래스를 담당하여 학생들을 지도하기에 이른다.

이 수업을 위해서였는지 혹은 그가 원래부터 공간에 관심이 많았기에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1900년도에 아폴리나리는 그 당시에 꽤 위험할 수도 있는 모험을 하게 된다. 모스크바를 상공에서 관찰하면서 오래된 모스크바시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을 매치시켜보기 위해 열기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 것이다. 위험도 마다하지 않는 이런 노력과 더불어, 수많은 문헌을 훑어보면서 그 속에 간직된 모스크바시 풍경의 파편을 마치 퍼즐 조각을 맞춰가듯이 하나하나 차분히 전체의 모습을 완성해 나가는 가운데, 아폴리나리는 마침내 모스크바시 곳곳에 있는 다양한 역사적 건축물의 외형을 재현해낼 수 있었다. 수도의 형상을 작업하면서, 아폴리나리는 역사가와 고고학자들과 친분을 쌓아나갔으며, 어느 순간 모스크바 고고학회의 회원이 되는가 싶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모스크바 구시가지 연구위원회의 명예회장으로 추대되기에 이를 정도로, 그는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화가 이상으로 구 모스크바 시에 대한 고증에 남다른 열정과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폴리나리가 자신의 화폭에 담아낸 모스크바의 풍경은 상당히 다채롭다. 그의 모스크바 시리즈는 마치 ‘모스크바는 하루아침에 세워지지 않았다’라는 속담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각 시대별로 변화하는 모스크바의 모습을 다채로운 필치의 향연 속에 펼쳐낸다. 그중에서도 특히 크렘린의 변화양상은 그의 꼼꼼한 역사적 고증에 예술가적 상상력이 더해져서 보는 재미를 더하여 준다.

19세기 말 무렵 아폴리나리 바스네초프가 처음으로 선보인 모스크바 풍경은 소위 ‘역사적 고증화’로 불릴만한 특수한 장르에 속한다고 보기 힘들었다. 그가 아직 모스크바에 완전히 정착하기 이전에 그린 <모스크바 크렘린. 사원들>이라는 작품은 얼핏 초기 인상주의 화가들의 화풍을 연상시키지만, 전반적으로 보이는 그대로의 모습을 충실히 재현해 낸 무난한 그림으로 다가온다. 아마도 지금으로부터 약 125여 년이 조금 넘은 시점에 그려진 작품이라서 그런지, 아폴리나리의 붓끝에서 탄생한 모스크바 크렘린 성벽과 사원의 모습은 그 모습과 구도까지도 현재의 크렘린과 상당히 많이 닮아있다. 


<모스크바 크렘린. 사원들> (А. 바스네초프, 1894)
(출처: https://gallerix.ru/album/Vasnecov/pic/glrx-399981689)


<모스크바 크렘린 성벽과 사원들의 현재 모습>
(출처: https://wallbox.ru/wallpapers/main/201548/f66296165537f2c.jpg)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역사상 최초로 모스크바의 크렘린을 쌓아올린 사람은 12세기 중반 수즈달의 공후로 있던 유리 돌고루키(Ю. Долгорукий)이다. 그래서 돌고루키는 종종 모스크바의 건설자이자 창시자로 불리곤 한다. 하지만 돌고루키 시대의 크렘린은 그야말로 아주 작은 성벽으로 경계를 친 작은 구역에 불과했으며, 크렘린 성벽 역시 지금과 같은 붉은 벽돌이 아니라 소나무로 얼기설기 쌓아 올린 목재 벽에 지나지 않았다. 심지어 당시에는 ‘크렘린’이라는 명칭이 통용되지 않았으며, 성벽과 그 안쪽을 도시, 성벽을 둘러싼 주변을 상공업지구로 명명하는 것에 쳤다. 그러다 크렘린 주변에 ‘키타이-고로드’ 지역이 생겨나면서 이 작은 요새는 ‘구도심’으로 불리기 시작했고, 1331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도심 중앙에 있는 요새’라는 의미를 지닌 ‘크렘린’이라는 정식 명칭을 가지게 된다. 아폴리나리가 본격적으로 ‘모스크바의 역사적 고증화’에 공을 들이기 시작한 것은 1900년대 초부터이다. 이 시기에 그려진 <크렘린의 목재 성벽 구축>이라는 작품은 바로 이러한 모스크바의 탄생 역사를 작가적 상상력과 고증에 입각하여 충실히 재현해내고 있다. 


<크렘린의 목재 성벽 구축. 12세기.> (А. 바스네초프, 1903) 

그로부터 약 15여 년이 지난 후 그린 <이반 칼리타 시대의 모스크바 크렘린>이라는 작품은 촘촘한 스케치와 더불어 역사적 고증이 잘 결합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반 칼리타 시대에 크렘린 성벽은 목재로 만들었지만, 성벽 안쪽의 건물은 석재로 쌓아 올렸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겨난다. 보통 성벽이라는 것은 적으로부터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세우는 것인데, 이반 칼리타는 오히려 반대로 성벽은 목재로 쌓아 올리고 안쪽에 있는 사원은 돌로 쌓아 올리는 다소 아이러니한 건축술을 구사한 점이다. 게다가 당시는 러시아 전역이 한창 몽골의 말발굽 아래 짓이겨지던 때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당시 모스크바 크렘린의 목조 성벽은 바로 소위 ‘깍쟁이 공후’ 혹은 ‘꾀돌이 공후’로도 불리던 이반 칼리타의 놀라운 처세술이 발휘된 결과물이었다. 앞서 언급한 바처럼, 당시엔 한창 몽골군이 러시아 전역을 휩쓸고 다녔고, 대부분은 가능한 큰 피해를 보지 않기 위해 몽골군의 요구에 따라 조공을 바치는 것으로 몽골의 칼을 피해갔다. 혹은 정말 죽기살기로 맞서는 공국도 간혹 존재했지만, 그런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이반 칼리타는 잘 알려진 대로 소위 ‘조공찬성, 평화유지’ 파에 속했다. 심지어 이웃 공국의 조공까지 스스로 발 벗고 나서서 거둬들인 탓에 소위 ‘매국노’라는 소리를 듣는 수준에 달했다. 하지만 덕분에 그는 몽골 칸으로부터 ‘전 러시아 대공’이라는 칭호까지 수여받기에 이르렀고, 모스크바 공국은 몽골 칸의 감시와 간섭으로부터 자유롭게 지낼 수 있었다. 이러저러한 경로로 주변 공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경제적 능력을 갖추게 된 모스크바 공국은 머지 않은 훗날 러시아에서 몽골군을 몰아낸 이후, 통일 러시아의 주역으로 우뚝 설 기반을 마련하게 된다. 이반 칼리타는 이에 그치지 않고, 미래를 대비한 성벽 건설에 몰두하게 된다. 당시 이반 칼리타는 몽골 칸으로부터 쓸데없는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크렘린 성벽을 돌이 아닌 목재로 건축했는데, 정작 성벽 가장 안쪽에 있는 사원은 석조로 쌓아 올리면서 미래에 대한 대비를 차곡차곡 해 나가고 있었다. 아폴리나리 바스네초프는 바로 이러한 이반 칼리타의 슬기로운 처세술을 예리한 눈길로 통찰해내고 있다. 심지어 그의 그림에서 크렘린 성벽은 성벽이라기보다 거의 울타리에 가까운 수준의 낮은 담벼락처럼 묘사되어 있으며, 1900년대 초에 작업한 <크렘린의 목재 성벽 구축>이라는 그림 속 성벽보다도 더 낮아 보인다. 여기서 이반 칼리타의 의도를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치밀하게 보태진 아폴리나리의 작가적 상상력이 돋보인다. 


<이반 칼리타 시대의 모스크바 크렘린> (А. 바스네초프, 1921)
(출처: https://art.mirtesen.ru/blog/43570916247/KARTINYI-APOLLINARIYA-VASNETSOVA)
 

한편 이반 칼리타는 1322년경에 당시 몽골군을 피해 블라디미르에 머물고 있었던 키예프 및 전 루시의 대주교 표트르를 모스크바로 초청하여 머물기를 권한다. 당시 나날이 피폐해져 가는 블라디미르에서 나름 생활고를 겪고 있던 대주교는 이반 칼리타의 청을 마다하지 않고 한달음에 모스크바로 달려와 모스크바를 향후 자신의 주요 근거지로 선포함은 물론,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어 준 이반 칼리타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기에 이른다. 이에 보답하기 위해 이반 칼리타는 대주교를 위한 석조 사원을 짓기 시작했으니, 그것이 바로 모스크바에 세워진 최초의 석조 사원이자 훗날 러시아 황제들의 대관식을 올리게 되는 ‘우스펜스키 사원’이다. 아폴리나리의 그림에서 목재 성벽의 안쪽으로 가장 높이 솟아오른 곳의 정중앙에 하얀색 돌로 쌓아 올린 우스펜스키 사원이 눈에 들어온다. 대주교의 모스크바 초빙과 더불어 그의 처소와도 같은 우스펜스키 사원을 크렘린 내부에 쌓아 올린 것을 계기로 모스크바의 종교적 입지는 물론 정치적 입지까지 강화된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러시아 특유의 종교와 정치의 밀월관계가 이때부터 그 싹을 틔웠다고 할 수 있다. 


<드미트리 돈스코이 시대의 하얀 돌로 세워진 크렘린. 14세기 말.> (А. 바스네초프, 1922)
(출처: https://art.mirtesen.ru/blog/43570916247/KARTINYI-APOLLINARIYA-VASNETSOVA) 


드미트리 돈스코이 시대의 크렘린은 소위 ‘하얀 돌로 세워진 크렘린’이라는 수식어로 대변된다. 이반 칼리타 시대의 크렘린을 재현해 낸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폴리나리는 또 다른 시대의 크렘린, 다름 아닌 돈스코이 시대의 크렘린을 재현하는 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당시 크렘린의 모습을 화폭에 담아내는 과정에서 아폴리나리는 다시 한번 자신의 작가적 상상력을 발휘하게 된다. 그의 그림 속에서 크렘린 성벽은 예전과 확연히 구분되는 하얀색 돌로 꽤 높은 높이로 차곡차곡 쌓아 올려져 있다. 하지만 크렘린 관련 발굴 자료에 따르자면, 당시 크렘린 건축물 중에 돌이 사용된 곳은 첨탑과 성벽 중 가장 취약한 부분 일부에 지나지 않았으며, 대부분은 예전과 다름없는 목재가 쓰였다고 한다. 

<이반 3세 시대의 모스크바 크렘린> (А. 바스네초프, 1921)
(출처: https://art.mirtesen.ru/blog/43570916247/KARTINYI-APOLLINARIYA-VASNETSOVA)


15세기 말엽에 이르러서야 모스크바의 크렘린은 현재와 같이 붉은 벽돌로 쌓아 올린 성벽을 갖추게 된다. 당시 크렘린 성벽 안팎은 그간에 일어난 지진과 화재로 인하여 상당 부분 소실되어 있었으며, 이반 3세가 재건에 착수하여 현재의 위용을 갖추게 된 것이다. 물론 크렘린 재건에는 이러한 자연재해로 인한 불가피성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으니, 바로 동로마 제국을 계승하는 제3 로마로서 모스크바의 모습을 정비하고, 그 위용을 만방에 알리는 것이었다.

이반 칼리타 시대에 최초로 건축된 우스펜스키 사원은 이반 3세 시대에 완전히 새로 지어졌으며, 아폴리넬의 화폭의 중앙에 그 당당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우스펜스키 사원 왼편으로 성모수태고지 사원(Благовещенский собор)이 올라가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 옆쪽에 있는 아르항겔스키 사원에는 쿠폴이 아직 하나밖에 올려지지 않은 상태인 것으로 확인된다. 하지만 성벽과 요새의 재건이 이반 3세가 마음먹은 것처럼 처음부터 쉽게 진행되지는 않았다. 당시 프스코프에서 초빙된 기술자들이 크렘린 재건에 참여했는데, 어찌된 일인지 예전보다 더 높이 증축된 우스펜스키 사원의 벽이 무너져내리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에 이반 3세는 이태리 건축가들을 초대해서 다시 크렘린 재건을 시작하게 된다. 러시아 역사상 건축물에 벽돌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 역시 이때부터이다. 전작인 <이반 칼리타 시대의 모스크바 크렘린>, <드미트리 돈스코이 시대의 하얀 돌로 세워진 크렘린>에서 건설 중이던 모스크바강과 크렘린을 연결하는 다리도 <이반 3세 시대의 모스크바 크렘린> 화폭에 이르러 모두 완성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아폴리나리 바스네초프는 크렘린 외에도 모스크바의 다양한 풍경을 자신의 화폭에 담아내어, 그동안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모스크바 구석구석의 풍경을 엿볼 수 있도록 길잡이 역할을 해주고 있다. 아마도 그런 이유로 인하여 아폴리나리 바스네초프를 일컬어 단순히 풍경 화가로 지칭하지 않고, 구 모스크바 시가지의 모습을 충실하게 고증해 낸 역사가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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