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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농촌파 작가 빅토르 아스따피예프에 대하여 (1)
분류문학
국가 러시아
날짜2021-10-18
조회수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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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에 사망한 러시아 작가 빅토르 아스따피예프(В.Астафьев, 1924∼2001)는 자신의 작품을 대부분을 소비에트시기에 썼다. 그는 왕성한 창작 활동을 한 그 시기에 많은 유명한 소비에트 작가들과 깊은 우정을 쌓았다. 아스따피예프와 유명 문인들 간의 친교의 계기는 다양했는데, 주로 문학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1970년에 아스따피예프는 모스크바에서 북동쪽으로 400㎞ 정도 떨어져 있는 전원도시 볼로그다(Вологда)로 이사했는데, 그 도시에는 당시 유명한 소련 작가들인 니콜라이 루초프(Н.Рубцов), 알렉산드르 야신(А.Яшин), 바실리 벨로프(В.Белов)등이 거주했다. 이들과 아스따피예프는 문학 작업을 매개로 빠르게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아스따피예프와 문학인들 사이의 친교의 매개가 문학잡지가 된 적도 있었는데, 1960년대 중반부터 콘스탄틴 바로븨요프(К.Воробьев)와 우정을 나누었는데, 잡지 <청년 근위대>(Молодая гвардия)가 큰 역할을 하였다. 이들의 친교는 1963년 잡지 <청년 근위대>에 실린 바로븨요프의 중편 <알렉세이의 아들, 알렉세이>(Алексей, сын Алексея)로 시작되었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이 너무 마음에 들었던 아스따피예프가 ‘작가에게 개인적으로 전달’이라는 메모와 함께 편집자에게 편지를 썼는데, 바로븨요프가 그에게 답장을 보내면서 이 두 문인은 가깝게 지내기 시작했다. 이들의 우정은 1975년 바로븨요프가가 사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전원도시 볼로그다>
(출처: https://yandex.ru/)


아스따피예프와 문학을 통해서 우정을 다진 문인들은 그의 문학적 성과를 높이 평가했다. 특히 ‘소비에트 작가 대회’를 통하여 친구가 된 바실리 븨코프(В.Быков)는 1988년 아스따피예프에게 보낸 서신을 통해 “내가 읽은 당신의 모든 작품은 마침내 당신이 러시아 문학의 위대한 작가이며, 아마도 당신이 21세기에 들어서 위대한 작가의 첫 번째 사람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한다”고 아스따피예프를 극찬했다.
 

‘농촌파 작가’ 빅토르 아스따피예프

러시아 문학에서 농촌을 소재로 하는 작품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니콜라이 까람진, 드미뜨리 그리고로비치, 세르게이 쩨르삐고레프, 예브게니 마르꼬프, 이반 뚜르게네프, 레프 톨스토이, 이반 부닌 등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들이 농촌을 소재로 하는 작품을 창작 했다. 특히 이반 투르게네프는 <사냥꾼의 일기>를 통해 중부 러시아 농촌의 생활을 묘사하면서 경향적 요소를 과장하지 않고 드러내면서 당시 유행한 사조인 리얼리즘 특징을 작품에서 보여주고 있다. 러시아 문학에 조예가 깊은 문학 비평가 드미뜨리 미르스끼(Д.Мирский)는 직접 저술한 <러시아문학사>에서 뚜르게네프의 작품보다 농촌에 대한 현실적이고 진실한 정신이 구현된 작품으로 예브게니 마르꼬프(Е.Марков)의 농촌소설을 거론하고 있다. 또한 미르스끼는 농촌을 다룬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작품으로 농촌소설가 세르게이 쩨르삐고레프(С.Терпигорев)의 <빈궁>(Оскудение, 1880)을 꼽고 있다. 드미뜨리 미르스끼는 이 작품을 통하여 작가는 ‘농노제도 폐지 이후 중앙 러시아 중류 귀족층의 사회적 붕괴의 방대한 모습을 그리고 있다’고 <러시아문학사>를 통하여 주장하고 있다.

 

<빅토르 아스따피예프>
(출처: https://yandex.ru/)


농촌을 소재로 하는 작품 창작의 전통을 이어받아 러시아 현대 문학에서 블라지미르 벨로프, 발렌찐 라스뿌찐, 표도르 아브라모프, 바실리 슉쉰, 빅토르 아스따피예프 등의 소설가들은 소비에트 시기인 1950년대부터 과거로부터 보존되어 온 농촌의 훌륭한 전통에 대한 공감뿐만 아니라 상실감이나 향수 같은 것이 뒤섞여 있는 작품을 발표한다. 이들의 작품들이 대중적 인기를 모으면서 농촌을 소재로 하는 작품들(деревенская проза)이 1980년대까지 대거 발표되었다. 이들을 러시아 문학에서 ‘농촌파’로 불렀다.

‘농촌에 대한 산문’을 주로 창작한 작가들은 공통적인 특성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보통 변경출신, 빈농의 아들, 무교육 등으로 요약 할 수 있다. 좀 더 상세하게 기술하면, ‘농촌파 작가들은 주로 북러시아와 시베리아 등의 변경을 고향으로 두고 있는 빈농 출신’이다. 그래서 영락한 가정에서 태어난 작가들은 ‘거의 대부분이 학교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하였다. 또한 이들은 2차세계전 기간과 전후에 궁핍한 생활을 체험했다.’ 이러한 ‘농촌파’ 작가들의 특징에 가장 잘 부합하는 인물이 바로 시베리아 크라스노야르스크 출신의 빅토르 아스따피예프이다. 


<농촌파 작가들>
(출처: https://yandex.ru/)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농촌파 작가

빅토르 아스따피예프는 말 그대로 ‘농촌파’의 작가적 특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데, 그의 인생과 작가적 삶의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아스따피예프가 인생의 경로에서 아주 많은 혹독한 시련과 마주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그는 아주 불우하고 처참한 어린 시절을 겪었다. 아스따피예프는 시베리아의 시골마을 아프샨카(Овсянка)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부모는 가난한 농민이었고 빅토르는 가족의 유일한 자녀였다. 아스따피예프의 두 동생과 어머니가 사망하면서, 어린 시절부터 그의 옆에는 항상 죽음이 달라붙어 있었다. 특히 어머니는 그가 7살 때 예니세이 강에서 익사하였다. 이런 피붙이 가족의 죽음은 인생의 말년까지 아스따피예프를 참담한 고통을 주었는데, 결혼 직후 첫째 딸을 잃었고 노년 시기에는 둘째 딸이 자신보다 먼저 사망했다.

어린 시절 가장 가깝고 소중한 이들의 죽음은 그 당시 스스로 자각 할 수는 없었지만 아스따피예프에게 큰 정신적인 충격을 주었던 것 같다. 어머니와 동생의 부재로 인하여 자주 발생하는 그들에 대한 실존적 그리움은 아스따피예프를 평생 따라다녔다. 그는 자서전에서 ‘나는 평생 동안 누이와 내가 사랑하고 사랑하는 모든 여성들에 대한 그리움’을 느꼈고 ‘항상 그들을 오빠의 눈을 통해 바라보고 있다’고 그 비통함을 토로하고 있다.

가난한 빈농 집안이었지만, 아스따피예프 가족은 입에 풀칠은 하고 살았다. 가계 경제에 어느 정도 도움을 준 제분소를 소유하고 있어서 가능했다. 그러나 소비에트 정권은 그 제분소를 국유화해버렸고 그의 아버지는 ‘인민의 적’으로 분류되어 5년 형을 선고받고 사회주의 운하 건설을 위해 카렐리야로 보내졌다. 어머니의 죽음과 아버지의 투옥으로 인해 소년은 할머니의 보살핌 속에 남아 있었는데, 10살이 채 되기 전에 겪은 시련이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또 다른 불운의 시작이라고 해야 하나? 1934년 가을 아스따피예프의 아버지는 예정보다 일찍 석방됐는데, 5개년 계획의 건설현장에서 저돌적인 작업능력을 인정받았던 것이다. 그는 고향으로 귀환 후, 두 번째 결혼을 했고 새 아내와 어린 빅토르와 함께 작은 촌락 이가르크(Игарк)로 이사해서 새 가정을 꾸렸다. 문제는 이 시기에 발생했다. 아스따피예프는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가정폭력의 희생자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의 아버지와 계모는 빅토르에게 거의 관심을 애정과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결국 거리로 내 몰린 아스따피예프는 고아원으로 들어갔다. 아스따피예프는 ‘노숙자. 고아 신세. 고아원 기숙학교, 이 모든 것을 이가르크에서 경험하였다“라고 자주 회상했다.

역설적이게도 아주 어린 시절부터 불행으로 점철된 아스따피예프의 인생에 한 줄기 가느다란 빛이 들기 시작한 것은 고아원에서 머문 시기였다. 그곳에서 따뜻한 인간성과 품성이 훌륭한 인생도움이 두 명을 만났는데, 러시아어와 문학을 가르친 교사 이그나티 로줴스트벤스키와 고아원 원장 바실리 사쿠로프였다. 이들 두 명의 멘토는 문학과 러시아어에 소년이 보여준 재능을 간파하고, 아스따피예프에게 작가의 길로 들어설 것을 조언했다. 17세가 되면 고아원에서 퇴소해야 한다는 러시아의 법률에 따라, 고아원을 나오게 된 아스따피예프는 처음으로 독립적인 삶을 시작해야만 했다. 그는 스스로 노동을 하면서 돈을 벌어야했기 때문에 말 운반선 공장 등에서 일을 했다.

어린 시절 고통스러운 삶에 대한 이야기는 아스따피예프의 작품 <마지막 인사>(Последний поклон), <내가 없는 사진>(Фотография, на которой меня нет), <분홍색 갈기가 달린 말>(Конь с розовой гривой> 등의 기초를 형성하고 있다.
 

전쟁의 참전과 부상, 그리고 결혼

2차 세계대전이 한창 진행 중이었을 때 아스따피예프는 철도 학교 학생으로 수업을 듣고 있었지만 전쟁의 메아리는 그가 거주한 크라스노야르스크까지 들렸다. 사실 이 시베리아 지역은 전쟁 당시 전장은 아니었지만 전쟁의 공포를 피해 피난 온 러시아의 유럽 지역의 주민들이 몰려들면서 전쟁의 혼돈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또한 크라스노야르스크는 후방의 병참기지 역할을 수행하면서 군사물자도 생산하였다. 평소 전쟁을 총격전, 백병전 등 직접적인 전투의 형태로 알고 있었던 아스따피예프도 실제적 전투행위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크라스노야르스크 지역의 어디에서나 전쟁이 돌아다니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크라스노야르스크의 일상에 침투한 전쟁이 모든 주민들에게 자신의 생명을 걸고 싸울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도 감지했다. 그래서 아스따피예프는 철도 학교의 동료 학생들과 함께 후방에 머물 기를 거부하고, 대신 전투가 이루어지고 있는 전방으로 자원해서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2차 세계대전 시기의 아스따피예프>
(출처: https://yandex.ru/)


1942년 말 첫 번째 전투에 참가한 아스따피예프는 부상으로 전투를 수행 할 수 없었던 1944년까지 정찰병, 운전병, 연락병 등 여러 보직을 변경하면서 전쟁을 용감하게 치렀다.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조국을 지키고자 한 희생정신과 헌신을 인정받아 아스따피예프는 전쟁 중에 '붉은 별'훈장을 포함하여 총 4번의 전쟁공로상을 받았다. 그러나 아스따피예프는 1944년 가을 폴란드 도시 두클라지역에서의 전투에서 부상을 입으면서 2년간에 걸친 전투를 수행하는 전방생활을 마감하게 된다. 부상 치료를 위하여 병원에서 몇 달을 보낸 후, 아스따피예프는 우크라이나 전선의 후방 부대로 배치되었다. 이 비전투 부대에서 아스따피예프는 감격적인 2차 세계대전의 승리와 조우했고, 평생의 반려자인 미래의 아내인 간호사 마리아 코르야키나도 만났다. 그들은 전쟁 직후인 1945년 10월 26일에 결혼해서, 아내의 고향 페름지역의 추소바(Чусова)로 이사했다.

상이군인 아스따피예프 작가가 되다

전쟁에서 부상을 당한 아스따피예프는 육체적으로 힘든 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전후 첫 몇 년 동안 역무원, 자물쇠 제조공, 소시지 공장의 경비, 구멍가게 판매원 등과 같은 비육체적인 보조 작업자 역할을 하는 직업을 전전했다. 그때 그의 나이가 20대 초반이었으니, 혈기 왕성한 젊은이가 잉여인간이 된 것 같은 무료한 삶에 얼마나 빨리 지쳐갔겠는가! 이 당시 그가 느꼈던 삶에 대한 절망감은 그의 작품 <유쾌한 병사>(Веселый солдат)를 통하여 ‘부상으로 오른쪽 눈을 실명한 군인. 부상으로 인하여 기차 좌석 편성원으로 일한 노동자, 슈콜라에서 6학년 까지만 교육을 받은 평범한 노동자인 내가 무엇을 알 수 있었겠는가?’라고 표출되고 있다. 결국 아스따피예프 그러한 삶을 견디지 못하고 아내와 이별을 하면서까지 고향 시베리아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는 곧 가족에게 돌아왔다. 1947년 아스따피예프에는 부부는 딸 리지야를 낳았지만, 이 어린 생명은 6개월밖에 살지 못했다. 딸의 죽음은 가족의 불화를 더욱 더 악화시켰고 아스따피예프는 두 번째로 추소바를 떠났는데, 아내로부터의 첫 번째 이탈보다 더 많은 시간(6개월)을 고향에서 혼자 지냈다.

고향에서 어느 정도 심리적으로 안정을 찾은 아스따피예프는 둘째 딸 이리나가 출생한 후 가족 곁으로 돌아왔고, 협동조합에서 정비공으로 일하면서 고등학교도 마쳤다. 1950년에 이들 부부는 아들 안드레이를 낳았다. 이제 모든 것이 정상적인 삶의 궤도로 복귀하는 듯해 보였던 그 시기, 아스따피예프의 개인적인 삶도 지역 신문에서 주도한 ‘문학인의 모임’에 참여하면서 밝은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이 모임의 동료들은 작가에게 첫 번째 소설 작품을 쓰도록 영감을 준 사람들이었다. 1951년 그의 첫 번째 작품 단편 <시민인간>(Гражданский человек)이 지역 신문 <추소바의 노동자>에 실렸다. 그리고 아스따피예프는 <추소바의 노동자>의 기자로 일하면서, 동시에 작가로 향하는 쉽지 않는 여정에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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