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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러시아 SF 소설의 선구자 알렉산드르 벨라예프(2)
분류문학
국가 러시아
날짜2021-09-16
조회수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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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에서 1920년대 유토피아적 분위기에 가장 잘 어울리는 실험소설로 등장한 공상과학소설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알렉산드르 벨랴예프(А.Р. Беляев/1884-1942)는 대표작 <도웰 교수의 머리>(Голова профессора Доуэля)등 17편의 장편 소설을 포함하여 총 70 편 이상의 공상과학 작품을 창작했다. 그는 공상과학 소설이 러시아에서 희귀한 창작물로 여겨졌던 시기에 미래를 아주 명료하게 예측하는 픽션으로 생계를 꾸린 능력 있는 소설가였다. 특히 공상과학 장르에 전적으로 헌신하여 독창적이고 선구적인 아이디어, 신비로운 소설에서 보여준 환상적 미래로 러시아 문학사에서 건설적인 공헌을 하였다. 그래서 이러한 공적을 인정하여 벨랴예프를 ‘러시아의 쥘 베른’이라고 칭송하였다.  

<알렉산드르 벨랴예프>
(출처: https://yandex.ru/)

벨랴예프는 현대 러시아 문학에서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지만 개인적인 인생은 그렇게 순탄하게 흘러가지는 않았다. 특히 어린 시절부터 죽음은 항상 그의 곁에 있었다. 그의 두 명의 동생들의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것이 벨랴예프가 최초로 겪은 불행이었다. 여동생 니나는 어린 시절 육종으로 사망했고, 수의학 학생이었던 바실리는 배를 타다 익사했다. 그리고 아동시기 황당한 모험심에 의해서 기인된 육체적 마비(질병)가 청년이후의 그의 삶을 옥죄면서, 그는 비극적인 인생을 살았다. 


벨랴예프의 특이한 전기적 경력 : 성직자, 변호사, 작가

벨랴예프는 러시아 스몰렌스크에서 정교회 성직자의 가족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벨랴예프의 아버지는 아들이 성직자가 되기를 바라서, 아들을 1894년 신학교에 보냈다. 1895년 졸업 후, 벨랴예프는 상급학교인 스몰렌스크 신학교에 편입하였다. 인생이 원래 생각한대로 흘러가진 않듯, 1901년 6월 벨랴예프는 신학교를 졸업했지만 사제가 되지는 않았고 오히려 반대로 그는 확신에 찬 무신론자가 되었다.

청소년 시기 벨랴예프는 예술을 좋아했는데, 음악과 사진은 그의 감성적인 성장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특히 어린 시절부터 매료된 음악은 거의 독학하다시피해서 배웠는데도, 바이올린, 피아노 연주는 수준급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특이하게도 벨랴예프는 장시간 동안 음악을 연주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에게 있어서 또 다른 재미는 사진이었는데, 사진에 대한 취미는 10대 후반에 ‘입체 투영 램프’의 발명까지 이어졌다. 1901년 8월 벨랴예프는 스몰렌스크 드라마극장과 계약을 맺었고, 1902년 3월까지 다수의 연극에도 출연했다. 


<스몰렌스크 드라마 극장>
(출처: https://yandex.ru/)


성직자가 되기를 바란 아버지의 희망과는 반대로, 1902년 6월 벨랴예프는 야로슬라프에 있는 <데미도프법률학교>에 입학했고, 1909년까지 이 학교에서 법률을 공부했다. 물론 7년간 계속 공부한 것은 아니었고, 1905년 1차 러시아 혁명시기 때는 고향으로 돌아와서 음악과 연극관련 일을 하였다. 벨랴예프는 서커스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했으며 음악 평론가로서 지역일간지에 비평도 게재하였다. 특히 1905년 1차 러시아 혁명과 관련하여, 혁명 기간 동안 벨랴예프는 모스크바 학생들의 바리케이트 건설에 참여했으며 사회주의 혁명가 그룹과 계속 접촉했다. 이러한 활동의 후폭풍으로 혁명이후 벨랴예프는 제정러시아 비밀경찰의 감시를 받았다.

1909년 6월 벨랴예프는 법률학교를 졸업 한 후 스몰렌스크로 돌아와 법률 업무를 시작했다. 1914년 6월 변호사가 된 벨랴예프는 능력 있는 변호사로 명성을 얻게 되었는데, 그에게는 단골 고객이 많았다. 동시에 벨랴예프는 일주일에 여섯 번 발행되는 <스몰렌스크 통보>의 별지 문학섹션의 글을 담당하면서 추가적인 수입도 얻었다. 1911년부터는 <스몰렌스크 통보>와 벨랴예프와의 협력은 안정적이고 정기적으로 이루어졌는데, 연극 및 음악 초연에 대한 비평, 사회 및 문학 생활에 대한 에세이에 대한 보고서 형태였다. 1910년부터 1913년까지 벨랴예프는 <스몰렌스크 통보>신문의 정식 직원으로 유럽 여행에 대한 연극 리뷰와 여행 에세이를 썼다. 그리고 1913-1915년에는 <스몰렌스크 통보> 편집담당 비서로도 일했다.

1911년에 부유한 목재상 슈쿤진을 위한 변호를 맡으면서 벨랴예프는 거액의 돈을 만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이때부터 벨랴예프는 한동안 물질적 풍요를 누렸다. 그는 좋은 아파트를 빌려 가구를 마련했고, 좋은 그림을 구입했고, 집안에 도서관을 겸비한 서재도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1913년 3월 말 벨랴예프는 프랑스, ​​이탈리아, 로마, 베니스, 나폴리, 피렌체, 제노바를 여행했다. 이 여행에서 벨랴예프는 어린 시절에 꿈꾸었던 비행을 직접 경험 할 수 있었는데, 수상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았다. 이 유럽 여행에 대한 감상 스케치는 <스몰렌스크 통보>에 실렸다.
 

벨랴예프의 치명적인 질병과 작품 활동

어린 시절 자신이 만든 수제 글라이더를 이용하여 하늘을 나는 실험에서 입은 치명적인 육체적 손상은 그의 나이 29살에 하지마비를 동반한 ‘척추뼈 결핵’까지 이어졌다. 이 병으로 인하여 벨랴예프는 거의 6년 동안 병자로 침대에 드러누워 있었다. 더군다나 6년 중에서 3년은 아예 몸의 반 정도를 석고깁스(코르셋)를 차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1921년 여름, 정부가 설립한 과학자 및 작가를 위한 휴양소에서 작가가 항상 차고 다녔던 석고 코르셋은 셀룰로이드로 대체되었다. 그리고 1922년에는 혼신의 노력으로 드디어 병마에서 벗어나 일상적인 삶으로 복귀하였다. 벨랴예프는 크림반도의 얄타의 한 정부관련 기관에서 걷고 일할 수 있었는데, 범죄 수사부서의 조사관으로 고용되어 사진 연구소까지 만들었다. 그러나 얄타에서의 경제적인 상황은 매우 어려웠는데, 이 시기 벨랴예프는 두 번째 결혼을 한 상태였다. 자신을 버린 비정한 첫 번째 아내 안나를 잊고, 새 출발을 선택한 벨랴예프는 1921년 12월에 그는 마르가르타와 가정을 이루었다.

경제적 상황의 악화는 일단 친구의 도움으로 아내와 함께 1923년 모스크바로 이사하여 법률가로 일하게 되면서 급한 불을 껐는데, 다른 쪽에서 불행한 일이 시작되었다. 회복을 보여 가던 육체적 질병이 다시 재발한 것이었다. 또다시 기약 없는 치료가 시작되었다. 1929년 9월에 작가는 우중충한 날씨가 길게 이어져 심리적-육체적 고통을 가중시키는 페테르부르크(당시 레닌그라드)를 떠나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기후가 다소 좋은 키예프로 이사했다. 새로운 도시에서의 다소 평온한 생활은 1931년에 그의 여섯 살 난 첫째 딸 류드밀라가 뇌막염으로 사망하면서 짧게 끝났다. 설상가상으로 벨랴예프의 몸은 점점 굳어져 가는 비극적인 환경에서, 둘째 딸 스베틀라나가 구루병까지 걸렸다. 정말로 벨랴예프에게는 참담한 시간이었다.

1931년에 벨랴예프와 그의 가족은 레닌그라드로 다시 돌아왔는데, 키예프의 출판사가 러시아어가 아니라 우크라이나어로만 원고를 받겠다는 결정이 작가를 러시아로 귀환하게 만들었다. 러시아어로 작품을 창작하여 원고료로 생활을 영위한 벨랴예프였기에 더 이상 우크라이나에 있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레닌그라드 귀환 후, 다행히도 벨랴예프의 건강 상태가 좋아졌다. 그는 혼자의 힘으로 작업도 하고 원고를 들고 출판사에도 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육체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호전된 상황은 역시 오래가지는 못했는데, 이제는 소련 정부의 공상과학소설을 대하는 공식적인 태도에서 문제가 발생하였다. 공산당 고위관료들은 공상과학 소설을 사회주의 체제에 이질적인 요소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이 장르의 작품 출판은 사실상 중단되었다. 벨랴예프는 집단 농장에 관한 글을 쓰라는 제안을 받았지만, 그는 농촌 생활에 익숙하지 않고 자신의 장르를 포기하고 싶지 않다며 소련 정부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벨랴예프는 또다시 생계를 이어가는 일을 찾아 무르만스크로 떠났다. 그곳에서 법률 고문으로 직업을 찾으려고 했지만 상황이 여의지 않아서 고향으로 다시 돌아 왔다. 이러한 이주와 귀환의 반복된 과정에서 그의 육체적 고통과 경제적 어려움은 더욱더 가중되었지만 벨랴예프는 절망에 굴복하지 않고 미래의 공상과학 소설의 창작을 위해 의학을 포함한 과학에 대한 지식을 쌓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벨랴예프의 작품 <양서류 인간>>
(출처: https://yandex.ru/)


<양서류 인간>(Человек-амфибия)과 장기이식

벨랴예프의 대표작은 <도웰 교수의 머리>, <양서류인간>(Человек-амфибия), <아리엘>(Ариэль), <게츠의 별>(Звезда КЭЦ), 얼굴을 잃어버린 남자(Человек, потерявший лицо)>등이다. 그 중 <양서류인간>은 벨랴예프의 걸작으로서 과학과 예술을 적절하게 결합(미래 스쿠버 장비와 장기이식)하여 두 영역의 눈부신 조합이 잘 이루어진 작품이다. 이 소설에서 벨랴예프는 프랑스인 자크 이브꾸스또(Jacques-Yves Cousteau)와 에밀 까냥(Emile Gagnon)이 1943년에 세상에 소개한 압축 공기에 개방 호흡 시스템을 갖춘 인공 폐 및 스쿠버 장비의 발명을 예견하고 있는데, 벨랴예프는 비록 허구이긴 하지만 바다에서도 숨을 쉬면서 살 수 있는 방식을 <양서류 인간>의 인공 아가미가 있는 물고기의 존재를 통해 구현하고 있다. <양서류 인간>에서 천재 의사 살바토르 교수는 어린 상어의 아가미를 이식하여 말기 질환을 앓는 아이를 치료한다. 장기 이식은 이론적으로는 기원전 2000년 이집트에 장기이식과 관련된 신화가 있고, 기원전 700년 인도에서도 자기 조직을 이식해 코 성형수술을 한 기록도 남아있지만, 1928년에 의사가 아닌 소설가가 장기이식이라는 주제를 소설에 이식시켜서 서사를 진행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러시아에서 장기이식은 의사 보로노이가 혈관을 이어주는 수술 기술이 확립되고 신장이식수술을 세계에서 최초로 집도하면서 일반인들의 관심이 대상이 되었는데, 그때가 1936년이었다. 소설 <양서류 인간>은 1920년대 말에 나온 공상과학소설이니, 벨랴예프의 미래에 대한 직관력과 의학적 지식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양서류 인간>에서 벨랴예프는 동시대의 어떤 의사나 과학자들보다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과학적 진보를 훨씬 더 깊이 들여다보고 있다.

 

<영상화된 벨랴예프의 작품 <아리엘>>
(출처: https://yandex.ru/)


벨랴예프의 말년과 비극적인 죽음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였을 때, 벨랴예프는 큰 수술을 받았기 때문에 소련 정부의 대피 제안을 거부했다. 이 당시 벨랴예프는 몸을 거의 움직일 수 없는 환자였으며, 먹고 씻을 때만 일어났다. 파시스트 과학자들의 실패한 세균 전쟁에 관한 환상적인 이야기 <흑사병>(Чёрная смерть)을 집필하고 있었던 벨랴예프는 전쟁으로 인하여 이 작품을 출판하는 데는 끝내 실패했다. 그는 원고를 <붉은 별>신문과 레닌그라드 잡지에 보냈지만 작품 출판을 거부당했다.

벨랴예프가 그 당시 몇 년간 가족과 함께 살았던 페테르부르크 근교 도시 푸시킨시는 1941년 9월 나치에 의해서 점령당했다. 벨랴예프는 이 기간 동안 자신이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것에 대해서 공상과학 소설 <세계 뇌우>(мировая гроза)를 통해 독자와 가족에게 간접적으로 알리고 있다. 그리고 그 절망적인 시기, 벨랴예프는 어린 시절의 동경의 대상이었던 하늘로의 비행을 구현한, 그의 가장 가슴 아픈 에피소드가 들어있는 작품 <아리엘>(Ариэль)을 창작했다. <아리엘>은 벨랴예프의 전기적인 부분이 들어 있는 작품으로 평가되는데, 동시에 <세계 뇌우>처럼 이 작품에서도 벨랴예프는 그의 죽음을 예측하고 동시에 그가 아리엘처럼 이 세상에서 어떻게 비상하는지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다.

벨랴예프는 1942년 1월에 사망했다. 비극적이게도 사실상 굶어 죽은 러시아 최초의 공상과학 소설가 벨랴예프는 다른 수천 명의 불행한 레닌그라드인들처럼 공동묘지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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