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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문화로(文化路)
제목노바트(НОВАТ)와 Л. 크루페니나
분류공연예술
국가 러시아
날짜2021-09-16
조회수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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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보시비르스크 국립 오페라 발레 극장 건립 75주년

시베리아의 콜로세움이라 일컬어지는 노보시비르스크 국립 오페라 발레 극장(НОВАТ, 이하 노바트)은 모스크바의 볼쇼이 극장, 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 극장과 더불어 러시아 3대 국립극장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는 곳이다. 총 면적 40,663m², 홀 수용 인원 1,779명으로, 이는 러시아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며, 2005년 리모델링 공사를 완료하여 비교적 현대적인 시설과 장비를 갖추고 있는 곳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2021년 7월 9일 저녁 7시, <Культура.РФ>는 노바트에서 개최된 갈라 콘서트를 생중계했다. 극장 건립 75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의 일환으로 개최된 콘서트에는 러시아를 대표하는 예술 극장 솔리스트들이 대거 참석했다. 볼쇼이 극장, 마린스키 극장, 미하일롭스키 극장 그리고 노바트의 스타들이 무대를 장식했고, 음악 감독 알레브티나 요페(А. Иоффе)의 지휘하에 미하일롭스키 극장 합창단, 어린이 합창단, 노바트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참여했다. 또한 전체 공연은 노바트의 미술감독 블라디미르 케흐만(В. Кехман)이 감독했다.

이 무대에서 가장 주목받았던 공연은 러시아 인민 예술가이자 세계적 발레 거장으로 언급되는 니콜라이 찌스카리제(Н. Цискаридзе)의 공연이었다. 그는 18세기 프랑스 안무가 장 도베르발(Jean Dauberval)의 코믹발레 <고집쟁이 딸Тщетная предосторожность> 중 ‘사보 춤(Танец в сабо)’을 선보였다. 이미 2013년에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한 찌스카리제였기에 그의 무대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은 이들도 꽤 많았다고 한다. 그와 함께 마린스키 발레단의 예카테리나 콘다우로바(Е. Кондаурова)와 로만 벨랴코프(Р. Беляков)는 현대 발레 스타일의 듀엣 춤을 선보였고, 미하일롭스키 극장의 이반 바실례프(И. Васильев), 안젤리나 보론쪼바(А. Воронцова), 아나스타샤 소볼레바(А. Соболева), 빅토르 레베데프(В. Лебедев)도 노바트 무대에 올랐다. 발레뿐 아니라, 오페라 가수들 역시 출연해 기념일을 축하했다. 바실리사 베르잔스카야(В. Бержанская), 알렉세이 젤렌코프(А. Зеленков), 구리 구례프(Г. Гурьев)를 비롯한 노바트의 대표 가수들과 크라스노야르스크 극장의 솔리스트가 출연했다. 웅장한 노바트의 홀에는 감미로운 고전 오페라의 아리아들이 울려 퍼졌고, 솔로, 듀엣, 앙상블 등의 무대가 구성되어 다채로움을 선사했다.


<노바트 건립 75주년 기념 갈라 콘서트 포스터>
(출처: 노바트 트위터)


노바트의 탄생과 초연

노바트의 창립 역사는 옴스크에 ‘시베리아 소비에트 오페라 드라마 극장Сибирский советский театр оперы и драмы’이 개관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10월 혁명 이후, 시베리아 지역에 오페라 하우스를 건립하자는 의견이 한 데 모여 설립된 이 극장은 1920년 11월 1일 보로딘(А. Бородин)의 오페라 <이고르 공нязь Игорь>을 공연하면서 시베리아 내 극장의 탄생을 알렸다. 당시 스태프 522명(오페라 140명, 드라마 117명, 교향악단 70명, 행정 및 관리 직원 185명)으로 구성되었던 이 단체는 러시아 최대 규모의 시립극장이었다. 이듬해인 1921년 8월 30일, 시베리아 혁명 위원회(Сибревком)의 결정으로 극장은 노보니콜라옙스크(현 노보시비르스크)로 이전되었고, 그와 동시에 극장 명칭 역시 ‘시베리아 국립 음악 드라마 극장(Сибгосопера)’으로 변경되었다. 시베리아의 문화예술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지역명을 내건 새로운 예술 단체가 설립되었으나, 이들의 활동을 뒷받침할 만한 보금자리, 즉 극장 건물은 그때까지 마련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1931년 5월 22일, 드디어 시베리아 예술 단체의 근거지가 될 복합문화공간 ‘학문과 문화의 집(ДНиК)’ 건물의 기초 공사가 시작되었다. 동년 9월에는 로비 프레임 공사와 홀의 기초 공사가 완료되었고, 이때 이미 1933년 4월까지 마무리하려던 건설 작업의 30%가 진행된 상황이었다. 따라서 관계자들은 늦어도 1934년까지는 극장 내부 인테리어까지 마무리될 수 있을 것이라 예견했다. 이에 극단은 머지않아 새 무대에 오를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해 1932년부터는 붉은 횃불을 건물 외부에 배치해두었는가 하면, 완공을 기다리며 장기 순회공연을 이어갔다. 그러나 전쟁 발발로 인해 단체의 모든 공연 계획은 무산되었으며, 극장 건물도 완공되지 못했다. 오히려 극장이 오픈할 예정이던 1934년, 당해 연도 시즌을 마무리한 직후 단체는 해산되는 상황을 맞았다.

사실 극장 건립이 무산된 이유 중 하나는 ‘건축 양식의 소비에트화’라는 새로운 지침 때문이기도 했다. 1933년, 모스크바에서 소비에트 궁정 건설 대회가 개최되었는데, 그 후 소비에트 건축 스타일에는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고, 이에 따라 노보시비르스크 극장 건축에도 새로운 양식에 부합하도록 구조물을 변경하는 작업이 필요해졌다. 구성주의 양식은 거부되었고, 현대적 건축 경향이 반영된 양식은 전면 금지되었다. 이로 인해 모스크바와 노보시비르스크에서는 ‘학문과 문화의 집’ 양식 변경을 논의하기 위한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는 소비에트 건축학자 이반 졸토프스키(И. Жолтовский), 그레고리 골쯔(Г. Гольц), 세르게이 체르늬셰프(С. Чернышев), 알렉세이 슈세프(А. Щусев)가 주도했다. 다양한 논의와 의견 수렴 이후, 1933년 6월 5일, ‘학문과 문화의 집’ 건설위원회는 공식적으로 ‘노보시비르스크에 건설 중인 극장의 전면(前面) 구성’을 위한 공모전을 시행했으나, 이 대회의 최종 결과는 발표되지 않았다. 단지 1934년 4월, 소련 공산당 지방 위원회 서기 로베르트 에이헤(Р. Эйхе)가 공모전에 참여했던 고르데예프(Б.А. Гордеев) 그룹의 기획안을 승인했을 뿐이며, 이는 곧 슈세프에게 전달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빅토르 비르켄베르그(В. Биркенберг)와 알렉산드르 쿠로프스키(А. Куровский)가 설계를 담당했고, 노보시비르스크 현장에서는 기획안을 제출했던 고르데예프의 지휘로 작업이 진행되었다. 내부 인테리어 작업에는 예브게니 란세레(Е.Е. Лансере)가 참여했다. 이후 소련은 노보시비르스크 극장 모형을 1937년 파리 만국 박람회의 소련관을 통해 소개했으며, 박람회에 참가한 최고 건축물에 수여하는 그랑프리를 받았다. 


<노보시비르스크 국립 오페라 발레 극장>
(출처: https://zen.yandex.ru/, https://starsity.ru)


시베리아 국립 음악 드라마 극장이 해산된 지 5년 후인 1939년, 노보시비르스크에 오페라 발레단이 새로이 창설되었다. 1939년 1월 15일, РСФСР 인민위원회는 노보시비르스크에 첼랴빈스크 출신 예술가들을 기반으로 하는 오페라 발레단의 창설에 관한 법령을 채택했다. 초대 극장 감독은 1940년 1월 1일 완공 예정이던 극장에서 첫 공연을 개최할 예정이었으나 이듬해 발발한 대조국 전쟁으로 공사 일정은 다시금 연기되었고, 창립 첫해를 톰스크와 이르쿠츠크 순회공연으로 보냈다. 전쟁 기간 동안에는 트레챠코프 미술관, 푸슈킨 박물관, 스몰렌스크 미술관, 노브고로드 박물관 등 소련 내에서 철수한 많은 박물관의 전시물을 보관하는 장소로 활용되었다. 노바트가 실질적으로 노보시비르스크에서 활동하게 된 것은 1944년부터다. 그때까지도 지속된 전쟁으로 혼란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황 속에서 극단은 재편성되었으며, 9월부터는 공연 준비와 연습에 돌입해야 했다. 그리고 1945년 5월 12일, 노르베르트 프리드(Н.Г. Фрид) 연출의 글린카 오페라 <이반 수사닌>으로 첫 번째 시즌의 성대한 막을 올렸고, 뒤이어 발레 <해적>, 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 <스페이드 여왕> 등을 선보였다. 노바트는 우여곡절 끝에 개관한 1945년 이후 오늘날까지 147개의 작품을 선보였고, 매년 5~6편의 초연작품을 제작해왔고, 오페라 18편과 발레 15편을 고정 레퍼토리로 하고 있다.

노보시비르스크 극장의 역사를 함께한 Л. 크루페니나

75여 년이라는 극장의 짧지 않은 역사와 삶을 함께한 발레 거장이 있다. 바로 리디야 크루페니나(Л. Крупенина)다. 그녀는 극장의 간판 무용수로서, 발레학교와 발레단의 교사로서 무려 57년을 노바트와 함께한 인물이다.

크루페니나는 볼쇼이 극장 산하 발레학교를 졸업한 직후인 1947년 8월에 처음 노보시비르스크 땅을 밟았다. 1945년 문을 처음 연 노바트는 그녀가 입단했던 무렵, 이제 막 발레 레퍼토리 구성을 위한 작업을 시작했을 뿐이었다. 그녀를 비롯해 러시아 수도에서 시베리아로 모여든 젊은 무용수들은 당시 유럽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의 무대에 서기 위해 기술 향상을 위한 훈련을 지속해야 했다. 따라서 발레마스터를 비롯한 극장 지도부 인사들은 안무가나 예술가일 뿐만 아니라 무용수들을 보살피는 교육자의 역할을 담당해야 하기도 했다. 수석 안무가를 역임했던 미하일 모이세예프(М. Моисеев)는 크루페니나가 그를 ‘두 번째 아버지’라고 부를 만큼 헌신적으로 그녀를 도왔고, 클래식 발레를 지도했던 클라브디야 살니코바(К. Сальникова)는 그녀의 테크닉과 지구력을 향상시키고자 각별히 노력했다. 이러한 지도부의 보살핌 덕분에 크루페니나는 남들보다 빨리 솔리스트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으며, 그 후로 그녀는 시베리아 발레를 이끄는 최고 스타의 자리에 올랐다. 그녀는 당대 소련 발레 거장 표트르 구세프(П. Гусев) 바실리 바이노넨(В. Вайнонен), 유리 그리고로비치(Ю. Григорович), 올렉 비노그라도프(О. Виноградов), 나탈리야 두딘스카야(Н. Дудинская) 등 소비에트 발레의 핵심 인물들과 협업했으며, 볼쇼이 극장, 크렘린 극장의 무대에도 오를 수 있었다. 그 후 그녀의 재능은 노보시비르스크 발레단의 정기 순회공연으로 이어졌다. 발레단은 월간 투어를 통해 정기적으로 모스크바 시민들을 만났고, 당시 그녀는 클래식 발레와 소비에트 발레를 포함해 30여 개의 작품을 소화했다. <백조의 호수>, <잠자는 미녀>, <신데렐라> 등을 통해 아름답고 우아한 몸짓의 클래식 발레를 선보였는가 하면, <석화>, <붉은 양귀비> 등에 출연해 소비에트 발레의 강렬함을 선보이기도 했다. 


<리디야 크루페니나 (1928-2016)>
(출처: https://zen.yandex.ru, https://sibkray.ru)

33년이라는 시간을 수석무용수로서 노바트와 함께 했다면, 은퇴한 이후 노년기에는 오롯이 발레단과 발레학교의 교사로서 노바트를 위한 삶을 이어갔다. ‘노보시비르스크 국립 안무학교’라는 정식 명칭을 갖는 이 교육기관은 1956년 시베리아 지역 내 오페라 발레 극장의 인력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노바트가 1945년 그 역사를 시작한 이후로 10여 년간 수많은 아티스트들이 이곳에서 활동했으나, 이들은 대부분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소재의 발레학교 출신 무용수들이었다. 노바트 지도부의 입장에서는 타 지역 출신 유명 무용수들을 지속적으로 영입해야 하는 일은 큰 부담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레학교의 설립은 시베리아 전역에서 선발한 영재들을 한 곳에서 교육함으로써 노바트의 인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무용수의 지위를 내려놓고 교육가의 길을 전적으로 걷기 시작한 시기는 1980년부터라고 볼 수 있으나, 교육 활동이 크루페니나에게 낯선 일은 결코 아니었다. 그녀는 무용수로서 전성기를 보내고 있던 1969년부터 발레학교에서 연기 수업을 시작했고, 1973년부터 1980년 사이에는 발레단과 발레학교의 예술감독, 발레 교사를 역임했다. 발레 교사로서 그녀의 활동에 대해 언급하자면, 앞서 언급했듯이, 발레단을 구성하는 무용수들이 서로 다른 발레학교 출신들이었다는 점은 노보시비르스크 극장이 가지는 가장 큰 특징이었다. 개별 발레단과 발레학교는 각각의 특유한 경향성을 가지며, 이곳저곳에서 모여든 무용수들이 한 무대에서 통일된 양식의 춤을 선보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크루페니나는 한 공간에서 펼쳐지는 공연에서 각자가 갖는 ‘스타일의 차이’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보였고, 다양한 스타일의 춤을 통합하는 훈련에 집중했다. 크루페니나는 클래식 발레의 공통 동작에 기반해 팔과 다리, 고갯짓의 섬세한 움직임을 통일시켰고, 군무와 솔리스트가 무대 위에서 유기적으로 조화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했다. 그리고 마침내 안나 자로바(А. Жарова), 안나 찌간코바(А. Цыганкова) 등 노보시비르스크 발레학교가 배출해낸 무용수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는 발레단의 무대는 세계 발레애호가들에게 큰 호응을 받게 되었다. 이 단체는 2002년 공연의 높은 수준을 인정받아 러시아 극장 연합에서 설립한 ‘황금마스크’ 시상식에서 최우수 극장상을 수상했으며, 오늘날 볼쇼이, 마린스키 발레단과 함께 해외 투어를 가장 많이 다니는 단체로 손꼽히고 있다.
 

<2016년 리디야 크루페니나의 모습>
(출처: http://www.kalyagin.ru)


오늘날 노보시비르스크 발레단은 러시아를 대표하는 극장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국내 무대에서도 종종 마주할 수 있는 노보시비르스크 발레단의 공연은 외부와 단절되어 존재했던 소비에트 시기 러시아 발레의 발전 성과를 여실히 보여주는 무대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노보시비르스크 발레단의 급격한 성장세는, 물론 다양한 이유에서 기인하지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많은 스타 무용수를 배출해낸 발레단 산하의 발레학교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보여진다. 오늘날 이 학교는 바가노바 발레학교, 볼쇼이 발레학교, 페름 발레학교와 함께 러시아 정부가 예산을 지원하는 네 곳의 발레학교 중 하나이며, 글린카 음악원과 함께 시베리아 문화의 중심 교육기관으로 노보시비르스크의 영광을 만들어낸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분명한 사실은, 노바트가 지내온 이 모든 역사의 중심에는, 오늘날 볼쇼이와 마린스키라는 거대한 간판에 가려져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발레 거장, 리디야 크루페니나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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