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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작가 가이토 가즈다노프의 독특한 이력들
분류문학
국가 러시아
날짜2021-08-16
조회수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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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발생한 러시아 혁명이 원인이 되어 형성된 러시아 디아스포라 문학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는 1933년 러시아에서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이반 부닌이다. 그는 베를린과 프라하, 그리고 마지막에 파리를 거점으로 형성된 유럽 내 러시아 디아스포라 공동체의 정신적 지주이면서 ‘1차 망명물결 구세대 작가’의 상징이었다. 부닌을 포함한 구세대 작가들은 동시기 고국을 함께 탈주한 신세대 작가들과는 소원하게 지냈다. 특히 구세대 작가들은 러시아 사실주의 전통의 준수를 외면한 신세대 작가들을 문학적 ‘미생’으로 여겼기 때문에, 그들은 전통적인 러시아 문학을 기반으로 하는 올바른(?) 창작적 내용과 형식을 신세대들에게 전파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불임의 세대’들을 가르치는 시도를 하였다.

신세대 작가들의 작품의 창작적 역량에 대한 구세대들의 의구심과 공개적 폄하에도 불구하고 몇몇 신세대 작가들은 구세대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흥미로운 것은 부닌 같은 영향력 있는 구세대 작가들이 나름 문학적 내공이 깊은 신세대 작가들을 평가하면서 그들의 이름을 거명하곤 했는데, 그들이 언급하는 순서에 따른 ‘신세대 리스트’가 디아스포라 공동체내에서 신세대 작가들의 문학적 위상의 인정 혹은 문학적 성과를 판단하는 근거가 되었다는 것이다.


<가이토 가즈다노프와 블라지미르 나보코프>
(출처: https://yandex.ru/)


1937년 베오그라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반 부닌은 러시아 디아스포라 문학의 신세대 작가들을 몇 명 언급하였는데, 블라디미르 씨린(Владимир Сирин), 가이토 가즈다노프(Гайто Газданов), 니나 베르베로바( Н.Н.Берберова)의 순서로 이름을 거론했다. 일반적으로 러시아 디아스포라 문학 역사에서 신세대를 대표하는 작가는 당연히 나보코프인데, 그의 문학적 위상의 무게감은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구세대들도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사실은 ‘신세대 리스트’에 가즈다노프가 나보코프에 이어 지속적으로 2위를 차지하였다는 것이다.
 

신세대 작가의 선두주자 나보코프와 가즈다노프

러시아 디아스포라 공동체내에서 나보코프와 가즈다노프는 신세대 중에서 문학적 성과를 인정받은 몇 안 되는 작가였지만, 두 신진 작가는 모든 면에서 정반대의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러시아 디아스포라 작가들은 대부분 출신 성분이 귀족들이었는데, 그중에서 가장 혈통이 우수한 가문 출신은 디아스포라 문학의 왕좌를 차지한 나보코프였다. 이미 알려진 대로 나보코프는 명망 있는 집안의 아주 부유한 사업가의 혼합된 가족의 후손이었다. 초기 망명지인 영국에서 캠브리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우아한 귀족 나보코프는 혁명 후 시기 뿐만 아니라 혹독한 디아스포라 시기에도 자신이 속했던 사회 계급에 머물렀던 작가였다. 반면에 나보코프의 사회적 계급에 철저하게 반대편에 서 있었던 인물이 바로 가즈다노프였다. 그는 평범한 민중계급 출신이었는데, 그의 할아버지는 산에서 내려온 오세티야(Осетия)혈통을 가진 거친 생활에 익숙한 주먹 출신이었고(가즈다노프가 자신의 작품에서도 언급했듯이) 자신을 러시아인으로 생각한 작가의 아버지는 영세한 사업가였다. 


<가이토 가즈다노프>
(출처: https://yandex.ru/)


10월 혁명 발발 직후 부친이 있던 크림반도에서 잠시나마 평온한 시간을 보낸 이후, 1919년 4월 배를 타고 조국 러시아를 떠난 나보코프와는 다르게 가즈다노프는 1919년 여름 자신이 수학한 김나지움을 떠나 내전에 참여하였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고작 열다섯 살 반이었다. 그런데 가즈다노프의 출생 배경과 그가 자라온 환경을 고려하면, 가즈다노프는 당연히 내전에서 적군에 가담했어야 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의 선택은 백군이었다. 이러한 그의 선택은 우리를 약간 당황스럽게 하지만, 가즈다노프가 평생 비정치적인 인물이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그의 선택을 이해할 수도 있다. 특히 그의 자전적 소설 <클레르의 저녁>(Вечер у Клэр)에서 <지원병들이 전쟁에서 패하고 승리할지에 대한 생각은 나에게 관심이 없었다. 나는 전쟁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새롭고 미지에 대한 것에 대한 열정은 모두 동일했다. 나는 백군에 입대했는데, 내가 살았던 지역에 그들이 있었고, 그렇게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그 당시 키슬로보츠크(Кисловодск)가 붉은 군대에 의해 점령되었다면 나는 아마도 붉은 군대에 입대했을 것이다>라는 문장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가즈다노프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내전의 참여가 이데올로기를 위한 투쟁의 한 방법이기 보다는 전쟁의 실체 접근에 대한 호기심의 발로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이토 가즈다노프의 부모님>
(출처: https://yandex.ru/)


작가와 어머니, 그리고 막심고리키

내전에 가담하기 위해서 가즈다노프는 평소 가족들 중에서 가장 애착을 가졌던 어머니와 작별을 해야 했다. 헤어질 당시만 해도 그 이별의 순간이 서로에게 마지막 이 될 줄은 두 모자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가이다노프의 내전 참여는 어머니에게는 큰 충격이었고, 그래서 그녀는 아들에게 집에 머물 기를 간곡히 요청했다. 그러나 전쟁에 참전하기 위한 가이다노프의 의지는 확고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 곁을 떠나기 위해 그의 16년 동안의 모든 잔인함이 필요했다고 어느 글에서 그 당시의 안타까운 심정을 밝히고 있다. 그 슬픈 1919년 여름 저녁에 작별 인사를 한 후 어머니와 아들은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가혹한 운명을 겪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망명 후 1920-1930년대에 가즈다노프는 어머니와 서신을 교환할 수 있었다. 내전이 끝난 후 가즈다노프의 어머니는 블라다카프카즈(Владикавказ)로 돌아와 교육 기관에서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가즈다노프는 어머니를 위해 그의 초기 단편들을 보냈고 그녀도 그의 첫 번째 소설을 읽었다.

가즈다노프의 어머니는 1939년에 사망하게 되는데, 어머니가 사망하기기 전에 가즈다노프는 러시아로 돌아가 어머니를 만나고자하는 희망으로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시도했지만 결과는 좋지가 않았다. 우리는 디아스포라 문학 역사에서 디아스포라 생활 중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소련으로 향한 작가들의 인생이 그렇게 순탄하게 흘러가지 않았다는 것을 마리야 츠베타예바(М.И.Цветаева)를 통해 이미 알고 있지만, 가즈다노프의 러시아로의 귀환 시도는 마리나 츠베타예바 귀환 전에 일어난 일이이었고, 게다가 디아스포라 초기에 망명지에서 러시아로 돌아가서 알렉세이 톨스토이(А.Н. Толстой)처럼 비교적 순탄하게 인생을 산 작가도 있었다. 그래서 가이다노프는 고국으로의 귀환에 대해 그렇게 거부감은 없었던 것 같다.

러시아 밖에 한동안 머물렀던 가즈다노프가 공산화된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그에게 도움을 주는 영향력 있는 인물이 필요했는데, 그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막심고리키였다. 가즈다노프와 막심고리키의 사적인 인연이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확실하게 알려진 사실은 없지만, 아마도 가즈다노프의 첫 번째 작품 <클레르의 저녁>이 그 가교 역할을 한 것 같다. 가즈다노프는 이미 1930년대에 디아스포라 사회에서 작가적 명성을 획득했다. 가즈다노프의 첫 번째 장편소설 <클레르의 저녁>이 파리에서 출판되었는데, 이 작품은 러시아 디아스포라 신세대의 문학에서 하나의 기념비적인 작품이 되었다. 게오르기 아다모비치(Г.В. Адамович)는 신세대 작가의 소설을 평가할 때 아주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이반 부닌이 <클레르의 저녁>의 문체의 화려함을 높게 평가하면서 이 작품의 출판을 승인했다고 회상했다. 그리고 <클레르의 저녁>은 소련의 막심고리키와 같은 문학 거장들에 의해서도 주목을 받았다.

소련에서 작가로서의 자신에 대한 평가가 그렇게 비우호적이지 않다는 것을 감지한 가이다노프는 러시아 디아스포라 공동체에 널리 퍼져 있는 규칙까지 위반하면서 자신의 작품 <클레르의 저녁>을 막심 고리키에게 보냈다. 책을 받은 막심 고리키는 “아주 기쁜 마음으로, 심지어는 즐기는 마음으로 이 책을 읽었습니다. 나는 독서를 많이 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기쁨은 아주 드물게 나에게 일어납니다. 당신은 재능이 있는 작가입니다”라고 적은 아주 친근하면서도 우호적인 답장을 가이다노프에게 보내면서, 이 두 명의 작가는 ‘소련귀환’이라는 예민한 문제까지도 부탁하는 긴밀한 관계로 이어지게 되었다.

실제로 가즈다노프는 고국으로의 귀환에 대한 도움을 1935년 고리키에게 요청했지만 1936년 고리키가 사망하게 되면서 이러한 부탁은 실현될 수 가 없었다. 그리고 사망하기 전까지 당시 고리키가 가즈다노프를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었는지, 혹은 실제로 무슨 도움의 행위를 했는지 알려진 것은 없다. 결과적으로 파리 주재 소련 영사관을 통해서 요청한 가즈다노프의 귀국 허가를 소련은 거부했다.
 

파리의 택시드라이버 가즈다노프의 레지스탕스 참여

가즈다노프는 러시아를 떠나 서구로 향하면서 전형적인 디아스포라 루트중의 하나인 ‘크림반도-이스탄불-소피아-파리’통해 서구로 망명했다. 망명한 국가의 모든 장소가 가즈다노프의 기억 속에서 중요한 추억으로 자리 잡고 있겠지만, 그가 오랫동안 살았던 프랑스 파리는 그에게 특별한 의미의 망명 도시였다.

가즈다노프는 1923년에 파리로 이주하여 대부분의 다아스포라의 삶을 그곳에서 보냈는데, 항구의 선박 짐꾼으로 파리에서의 고단한 삶을 시작했다. 파리에서의 첫 5년 동안 가즈다노프는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항만노동자, 기관차의 세차원, 시트로엥 자동차 공장의 자물쇠 제조공, 프랑스어와 러시아어를 가르치는 선생 등 많은 직업을 가졌는데, 그만큼 디아스포라 시기 가즈다노프는 파리에서 경제적으로 아주 힘든 삶을 연명했다. 특히 가즈다노프의 디아스포라 삶 중에서 가장 처참한 시기는 거리의 보도나 지하철역에서 잠을 자는 부랑자의 신세로 전락한 1925년에서 1926년 사이의 겨울이었다. 이러한 참담한 경제적 빈곤을 벗어나기 위해 러시아 디아스포라 공동체의 지인들에게 원조를 요청할 수 있었으나 그의 자존심이 그 어떠한 도움도 받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가즈다노프는 거의 25년 동안(1928-1952)동안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서 파리에서 야간 택시 드라이버로 일했다. 이러한 그의 경험은 그의 베스트셀러 <밤의 길>(Ночные дороги, 1941)에 투영되어 있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파리의 밑바닥 이야기를 독자에게 전하고 있다. 가즈다노프는 2차 세계 대전 이후, 그의 대표작 <부처의 귀환>(Возвращение Будды)이 큰 성공을 거두고 나서야 택시 드라이버 일을 그만두었다.


<가이토 가즈다노프와 아내>
(출처: https://yandex.ru/)


1936년 가즈다노프는 그리스 혈통을 가진 오데사 출신의 파이나 드미트리예브나 람자키(Фаина Дмитриевна Ламзаки)와 결혼했다. 특이하게도 가즈다노프는 미래의 아내가 될 여인의 얼굴에서 충성심과 신뢰성을 발견하였는데, 그녀의 이러한 장점은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가즈다노프에게 닥친 새로운 시련을 이겨내는데 엄청난 도움이 되었다. 독일 나치의 파리 점령 기간 동안 가즈다노프 부부는 파리에 남아서 저항 운동에 합류하여 프랑스에서 작전 중인 소련 레지스탕스 여단의 일원으로 파시즘에 맞서 싸웠다. 또한 이 저항 기간 동안 가즈다노프 부부는 마르크 슬로님을 포함하여 여러 러시아 디아스포라 문학인들의 목숨을 구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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