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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문화로(文化路)
제목러시아 최초의 인쇄소와 인쇄술의 도입
분류역사
국가 러시아
날짜2021-08-16
조회수140
첨부파일



15세기 중반, 독일의 요하네스 구텐베르크(J. Gutenberg)가 최초로 볼록판 인쇄를 시작한 이래로 이탈리아의 금속 오목판인쇄 원리, 독일의 석판 인쇄원리 등이 점차 개발되었고, 인류는 마침내 오랜 시간 동안 이어져 온 필사본의 시대에서 벗어나 간본(刊本) 혹은 판본(版本)의 시대를 맞이했다. 인쇄술의 발달은 인류사 전반에 걸쳐 굵직한 변혁을 일으킨 원동력이 되었으므로, 이는 세계 문화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서구 유럽사회에서 인쇄술의 발달과 보급은 사회 전반을 뒤바꾼 대대적인 개혁의 시발점이 되었다. 정치적으로는 절대왕권의 사회가 시민사회로 이행되는 출발점이 되어주었고, 문화적으로는 교육의 보편화, 나아가서는 종교개혁과 문예부흥의 문을 활짝 열어주기도 했다. 


<니콜스카야 거리에 위치한 러시아 최초의 인쇄소, 1563년>
(출처: https://infourok.ru)


이처럼 유럽의 근대화를 촉진시킨 인쇄술이 러시아에 들어온 것은 16세기 중반 무렵이었다. 최초의 러시아 인쇄소는 1553년 이반 뇌제의 명으로 설립되었는데, 차르는 1526년부터 1542년까지 노브고로드 대주교를 지냈던 마카리(Макарий)와 함께 인쇄술을 도입해 필사본의 결함을 개선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차르가 인쇄술을 도입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당시 문맹자들이었던 많은 서기관들의 잦은 실수로 성경 필사본에 오류가 상당히 많았던 이유에서였다. 이러한 성서의 오류는 텍스트의 불일치라는 일차적인 문제뿐 아니라, 나아가서는 종교계의 분열, 이단의 출현과 같은 심각한 사회적 문제들을 초래했다. 게다가 책을 만들고 소비하는 것은 거의 대부분 교회의 몫이었다. 따라서 성직자만이 아니라 일반 러시아 대중들에게 독서를 장려하고 국민의 문맹률을 개선하기 위해서도 인쇄기술의 도입이 반드시 필요했다. 이처럼 당시 러시아 사회에서 책에 대한 필요성은 지속적으로 증가했으나, 귀한 대접을 받던 책은 매우 값비싼 것이었기에 대중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것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16세기 중반, 러시아 영토는 단일 국가로 통합되었으며 카잔과 아스트라한이 정복되었다. 타타르인들이 거주해왔던 광활한 대평원은 이제 모스크바 차르의 통치 아래 놓이게 되었다. 차르는 이들의 언어와 전통문화 등을 규제하는 한편, 기독교를 통해 중앙 집중식 권력을 강화하고자 했다. 또한 여기에서 무엇보다 성서와 복음의 유포가 실질적인 정복을 위한 효과적인 방법론으로 인식했다. 더욱이나 이반 뇌제는 당대 최고의 웅변가이자 작가로 불리던 인물로서 독서와 도서 수집을 매우 즐겼다고 한다. 이반 뇌제 도서관에 보존되고 있던 책 목록에는 800권 이상의 진귀한 그리스어, 라틴어 및 고대 동양 책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이를 포함한 보유 서적 전체 규모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큰 개인 도서관으로 여겨졌을 만큼 대단했다고 한다.


<이반 뇌제의 도서관>
(출처: https://suharewa.ru)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이유로, 1563년 이반 뇌제는 “이제부터 거룩한 책들이 의롭게” 될 수 있도록 “황실 국고로 건물을 세우고, 인쇄 사업을 건설하도록” 명령했다. 인쇄소 건축물은 니콜로-그레체스키 수도원과 인접해 있던 니콜스카야 거리에 지어졌고, 이는 러시아 최초의 인쇄소(печатный двор)로 이름 붙여졌다. 당시 황제와 마카리 대주교는 활판 인쇄술에 정통한 대가를 찾기 시작했다. 이즈음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국왕은 러시아어로 번역된 수천 부의 인쇄 성경을 제안하고자 이반 뇌제에게 서기관을 보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대가는 러시아가 루터교를 수용하는 것이었기에 러시아는 덴마크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황제는 모스크바에서 재능 있는 인쇄기술자 이반 표도로프(И. Федоров)와 표트르 므스티슬라베츠(П. Мстиславец)를 찾을 수 있었다. 모스크바 출신의 표도로프는 크렘린에 존재했던 니콜라 고스툰스키 교회(Церковь Николы Гостунского) 성당의 부제(副祭)를 역임한 인물로, 마카리 대주교와 꽤나 가까운 측근이었다. 리투아니아 출신 표트르 므스티슬라베츠는 표도로프의 친구이자 동료였다. 인쇄기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지역 출신의 기술자들은 그리스 출신 수도사 막심 그렉(Максим Грек)을 만나면서 많은 지식들을 습득할 수 있었고, 그가 베니스에서 가져온 다양한 책들을 두루 경험할 수 있었다. (수도사 막심 그렉은 정교회 작가이자 번역가, 신학자로 활동했으며, 16세기 러시아 책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 파리, 피렌체, 베니스의 대학에서 공부를 마친 이후, 수도사 서약을 통해 아토스에 정착한 이력이 있었다. 1518년, 그는 그리스어와 라틴어에 능통한 인물이 필요했던 바실리 대공의 요청으로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그 후 막심 그렉은 모스크바에서 번역과 감수 업무를 주로 담당해왔으며, 서기관들에게 그리스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그 당시 막심 그렉은 러시아 지성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대단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와의 교류를 위해 러시아내에서 가장 훌륭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그의 주변에 모여들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는 얼마 후 이단으로 고발되어 파문을 당했고, 수도원의 감독 하에 남은 삶을 보냈다.) 


<이반 표도로프(左) / 표트르 므스티슬라베츠(中) / 막심 그렉(右)>
(출처: https://infourok.ru, https://pravlife.org/ru)


<러시아 최초 <사도행전> 인쇄본>
(출처: https://printcollege.ru)


이 인쇄소에서 발간된 최초의 책, 보다 엄밀히 말하면 인쇄소의 이름을 내걸고 나온 최초의 서적은 <사도행전(Апостол)>이었고, 이는 표도로프와 므스티슬라베츠에 의해 1564년에 출판되었다. (그 이전 시기, 즉1550-1560년대에 인쇄되었던 서적들은 출판정보가 부재했던 터라 ‘익명’이라는 제목으로 분류되었고, 오늘날에는 표도로프 이전 시대에 제작된 7권의 서적이 보존되고 있다.) 인쇄 서적이 러시아 사회에 처음 등장한 시기, 필사 업무를 담당하고 있던 서기관들 사이에서 격렬한 항의가 빗발쳤다. 그들은 이 획기적인 신기술이 그들의 일자리와 수입을 박탈할 수 있다는 사실에 두려워했던 터였다. 대중의 불안과 불만은 1568년 결국 인쇄소가 화염에 휩싸이면서 해소되었고, 표도로프와 므스티슬라베츠는 모스크바를 떠났다. 1571년에는 화재로 불타버린 인쇄소의 자리에 새 건물이 올라갔고, 인쇄소는 알렉산드롭스카야 마을로 이전되었다. 그러나 새로이 설립된 인쇄소 역시 1611년 화염에 휩싸였고, 작업장은 크렘린 이주를 거쳐 1619년 복합 단지로 재건되었다. 일곱 대의 인쇄기가 새로운 석조 건물로 옮겨졌고 크렘린의 인쇄소 직원 80명이 이주했다. 이 시기에 제작된 서적들 표도로프와 므스티슬라베츠가 발명한 두 가지 글꼴로 제작되었으나, 출판물 어디에도 이 두 조각가의 이름은 남아 있지 않다. 조각가로서 처음으로 책 속에 이름을 남긴 인쇄기술자는 안드로닉 네베자(А. Невежа)로, 그는 1597년 버전 <사도행전>의 루카복음에 자신의 서명을 새겨 넣었다.

1642-1645년에 건축가 트레필 샤루틴(Т. Шарутин)과 이반 네베로프(И. Неверов)는 1613년 즉위한 미하일 표도로비치 황제의 명에 따라 니콜스카야 거리와 마주하는 곳에 인쇄소로 사용될 2층짜리 석조 건축물을 세웠고, 곧이어 그곳에서 출판된 책들을 보관할 도서관도 지었다.(1626년 또 한 차례의 화재로 잿더미가 된 이후 재건축 됨.) 새로이 탄생된 건물의 탑은 쌍두 독수리로 장식되었으며, 출입문은 구세주 성당 및 트로이츠키 성당의 것과 유사했다. 건축물의 정문 위에는 사자와 유니콘의 이미지가 새겨져 있었다. 당시 대중들 사이에서 이 엠블럼이 영국의 국장이라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한때 이 건물이 영국 대사의 소유였으나, 영국이 찰스 1세를 처형했다는 소식에 분노한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황제가 이 건물을 빼앗았다는 소문이었다. 그러나 19세기 고고학자 바실리 루먄쩨프(В. Румянцев)는 유니콘이 전제 권력의 상징으로 이반 뇌제의 인장에서 발견된 바 있으며, 사자와 유니콘은 러시아 황실의 건축물과 왕좌에서도 발견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17세기 인쇄소 풍경(左) / 19세기 인쇄소 풍경(右)>
(출처: https://zen.yandex.ru)


<16-17세기 인쇄소 풍경>
(출처: https://en.ppt-online.org)
 

한편, 이곳에서의 책 출판은 항상 차르의 칙령에 따라 이루어졌으므로, 이는 차르의 인쇄소라고 불렸다. 인쇄 후 도서의 권 당 가격이 책정되었는데, 황제가 가격을 정하면 그 후에야 책이 대중들에게 판매될 수 있었다. 이러한 제도는 1653년 차르 칙령에 의해 인쇄소가 정교회의 소유로 이전될 때까지 존재했다. 그때부터 니콘 총대주교는 인쇄소의 관리자가 되었고 새로이 발간되는 책의 제작과 판매에 관한 법령을 독자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되었다. 1681년에는 총대주교 요아킴(Иоаким)의 법령에 따라 인쇄소에는 ‘수도사제 티모페이의 인쇄학교(Типографская школа иеромонаха Тимофея)’라는 명칭의 그리스식 학교가 세워졌으며, 이는 오늘날 러시아 최초의 직업학교로 간주되고 있다.

인쇄소가 존재하는 동안 정교회 예배 서적들과 복음서, 시편 모음집, 기도모음집 등의 도서들이 출간되었고, 1702년부터는 러시아 최초의 신문 <베도모스티Ведомости>가 이곳에서 발행되기 시작했다. 전체적으로 1564년부터 1711년까지 낭독서, 번역서, 교육 문헌 등 약 700여 개의 판본이 인쇄되었으며, 러시아 키릴 자모 판의 양식이 형성된 것 역시 이곳에서였다.

18세기 초, 인쇄소는 종교기관의 일부가 됨에 따라, 1721년에는 러시아 정교회 관리기관인 시노드(Синод) 관할로 이전되었다. 18세기 말경 인쇄소는 해체되었고, 1811-1814년이 되어 건축가 알렉세이 바카레프(А. Бакарев)와 이반 미로노프스키(И.Мироновский)가 설계한 시노달 인쇄소가 그 자리에 들어섰다. 17세기 건축물의 형태를 복원하라는 정부의 지시에 따라 두 건축가 모두 이 프로젝트에서 고딕 모티브를 주로 사용했다. 이들은 고전주의의 법칙에 따라 정면을 구축하면서 유럽 고딕 양식의 모티브를 취했다. 새로운 건물 구조(외벽에 고대 비문이 새겨진 어두운 석판 2개)에 과거의 세부 모티프들, 즉 인쇄소의 상징이었던 해시계, 사자와 유니콘, 러시아 국장 등을 복원했다. 그리고 인쇄소는 3년에 걸친 공사 끝에 1814년 완공되었다. 그 후 100여 년간 러시아 인쇄술의 심장부로 기능해 왔던 시노달 인쇄소는 1917년 폐쇄되어 소비에트 역사기록 보관소로 활용되었으며, 1931년부터는 러시아 국립 인문대학교의 역사 기록 연구소가 이곳에 자리를 잡아 운영하고 있다.


<옛 니콜스카야 인쇄소의 오늘날 풍경>
(출처: https://journal.tinkoff.ru)


오늘날 책은, 누구나 자기 생각과 의견을 표현하고 소통하고 확산시킬 수 있는 논의의 장이자 포럼이며, 우리 사회에서 이것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이유는 여론과 비평, 문학과 예술의 발전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 세계사에서 러시아 문학과 예술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450여 년 전 책을 사랑했던 러시아인들이 인쇄술을 도입하고 인쇄소를 설립한 덕분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오늘날 러시아인들이 오래된 옛 인쇄소를 모스크바에서 꼭 방문해야 할 15개의 역사적 건축물 중 하나로 손꼽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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