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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러시아 아동문학의 개척자 꼬르네이 추콥스키
분류문학
국가 러시아
날짜2021-07-16
조회수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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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예술가는 이타적인 삶에는 익숙하지 않다. 우리는 그것을 비난할 필요도 없고, 비난할 자격도 없다. 왜냐하면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우리 보통 사람들도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데에 많은 시간과 열정을 쏟아 붓기 때문이다. 여하튼 자신의 창작에 몰입하는 경향을 가진 예술가들은 오로지 자신에 삶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강해서(물론 다른 성향의 예술가들도 존재하지만) 타인의 삶에 개입하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 더구나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하여 타인을 도와주는 예술가의 선례는 사실 현실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과 그의 묘지>
(출처: https://yandex.ru/)


그런데 도저히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화(逸話)가 1960년대에 소련에서 일어났다. 이 흔하지 않는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은 꼬르네이 추콥스키(К.И.Чуковский, 1882∼1969)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А.И.Солженицын)이었다. 러시아 출신 작가로는 4번째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솔제니친은 일시적으로 창작의 자유가 부여된 해빙기 이후 소련정부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는데, 인내심이 바닥을 행해 치닫고 있었던 소련정부는 솔제니친과 그의 가족들의 신변을 위협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이러한 위협은 극단적인 행동으로 옮겨져 소련 공산정권은 솔체니친에 대한 체포를 단행하였다. 이 절체절명의 시기에 소련 정부의 박해를 피하고자 하는 솔제니친을 자신의 다차에 숨겨준 예술가가 바로 꼬르네이 추콥스키였다.

사실 꼬르네이 추콥스키와 솔제니친의 인연은 ‘다차 피신처 제공’이전부터 있었다. 강제수용소 장기복역 이후, 소설가 길을 걷기 시작한 솔제니친의 찬란한 문학적 성취의 출발점이 된 중편 소설 <이반데니소비치의 하루>(Один день Ивана Денисовича)의 전격적 출판 승인을 이끌어낸 인물 중의 한명도 역시 꼬르네이 추콥스키였다. 솔제니친의 개인적 문학인생에서 변곡점이 된 사건이 일어난 1961년도. 당시 꼬르네이 추콥스키는 국영 출판사 <신세계> 편집장이었던 시인 알렉산드르 트바르토프스키(А.Т.Твардовски)와 함께 공산당 서기장 니키타 흐르시초프(Н.С.Хрущёв)에게 <이반데니소비치의 하루>을 인쇄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도록 설득하였던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꼬르네이 추콥스키가 러시아 출신 마지막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이오시프 브로드스키(И.А.Бродски)에게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는 사실이다. 시인 이오시프 브로드스키가 ‘게으름뱅이이며 기생충’이라는 죄명으로 재판에 회부되었을 때 꼬르네이 추콥스키는 시인 사무일 마르샤크(С.Я.Маршак)와 함께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시인의 석방을 요청하는 편지를 작성하였다.  


<꼬르네이 추콥스키>
(출처: https://yandex.ru/)


비평가 꼬르네이 추콥스키

상기했듯이 꼬르네이 추콥스키는 역대 러시아 출신 노벨 문학상 수상자 5명 중 알렉산드르 솔제니친과 이오시프 브로드스키에게 도움의 손길을 제공한 특이한 개인적 경험을 가진 작가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순수 예술적 잣대로 꼬르네이 추콥스키를 평가하면, 러시아 문학사에서 그는 비평가 및 문학 평론가로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문학평론가로서의 꼬르네이 추콥스키의 최고의 정점은 자신이 가장 선호한 시인 니콜라이 네크라소프(Н.А.Некрасов)에 대한 문학 작업에서 이루어졌다. 꼬르네이 추콥스키는 네크라소프 작품의 재 간행 작업을 하면서 그에 대한 연구 및 비평 글도 창작을 했다. 그 노력의 첫 번째 결실로 1920년대에 네크라소프의 첫 번째 소비에트 컬렉션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출판을 위해 꼬르네이 추콥스키는 상당한 분량의 원고를 수정하고 네크라소프의 작품에 대한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논평을 제공하였다. 특히 1926년에 출판된 꼬르네이 추콥스키의 작품 <네크라소프의 재능>(Мастерство Некрасова)은 대중들의 관심과 인기를 얻으면서 여러 번 재 인쇄되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네크라소프의 재능>의 대중성과 러시아문학사적인 학술적 가치까지 인정받아 꼬르네이 추콥스키는 당시 소련의 최고권위의 레닌 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꼬르네이 추콥스키의 네크라소프 작품의 유지와 발굴에 대한 헌신적인 노력도 기울였는데, 네크라소프의 산문 작품 <찌혼 트로스니코프의 삶과 모험>(Жизнь и похождения Тихона Тросникова)과 섬세한 인간(Тонкий человек)을 발견하여 출판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네크라소프 작품의 보존과 발굴에 대한 꼬르네이 추콥스키의 식지 않는 열정 덕분에 제정러시아 시기 권력의 검열에 의해 금지되었거나 저작권 소유자에 의해 거부된 네크라소프의 시의 상당 부분이 출판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네크라소프 시의 약 4분의 1은 꼬르네이 추콥스키에 의해 발견되면서 세상에 모습이 드러나게 되었다. 


<니콜라이 네크라소프>
(출처: https://yandex.ru/)


아동문학의 창시자 꼬르네이 추콥스키

저널리즘에서 비평가 및 문학 평론가로서 좋은 평가를 받은 꼬르네이 추콥스키의 최고의 문학적 성과는 아동문학 분야에서 이루어졌다. 꼬르네이 추콥스키의 문학사적 공헌은 러시아에서(소련시절 포함)아동문학의 창시자의 한명으로서, 아이들의 심리적 상태를 연구한 아동 전문가로서 연령대별로 아이들에게 적확한 동화 및 동화시를 창작하였다는 것이다. 사실 꼬르네이 추콥스키 이전에 ‘아방가르드 문학그룹 <오베리우>(현실적 예술 협회, Объединение реального искусства)소속 작가들이 약간의 아동 문학 작품을 출판’했던 적은 있었지만, ‘여러 유파와 장르가 공존하는 다양성의 서계로 나아간 현대 러시아 문학에서 소련 및 러시아의 아동문학이 큰 장르로 발전한 것은’ 꼬르네이 추콥스키가 있어서 가능했다. 그의 동화는 한 세기 동안 아이들이 즐겨 찾는 작품 목록 제일 상단에 항상 있었고 그의 작품에 영향을 받아 전문적인 문학의 세계로 진출한 아동들이 있을 정도로 러시아 아동문학분야에서 꼬르네이 추콥스키의 존재감은 거대했다.

아동문학에서 꼬르네이 추콥스키의 또 다른 뛰어난 성과는 유년기 아이들의 심리 분석의 ‘달인’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아동 전문 심리 분석가로서의 어린이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나타난 분야는 창작동화나 시 보다는 자신의 주 전공인 비평이었다. 1907년에 아동 문학 문제를 다루기 시작한 꼬르네이 추콥스키는 1911년 <어린이 잡지에 대해서 어머니에게>(Матерям о детских журналах)라는 제목으로 저서를 출판하였는데, 이 작품에서 그는 당시 어린이 심리를 분석한 인기 아동잡지 <친밀한 언어>(Задушевное слово)속에 드러난 어린아이들의 연령별 특성에 대한 무지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동시에 꼬르네이 추콥스키는 어린이를 위한 동화나 시는 어린이의 심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문학가들이 창작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심지어 그런 작가들이 어린이를 위한 작품을 쓰는 것을 범죄라고 생각했다.

꼬르네이 추콥스키는 어린이들은 자신의 세계와 자신의 논리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위한 창작물을 만들고 싶은 작가는 어린아이의 세계에 빠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가능한 아이들을 빨리 성숙하게 만들어서 진지한 아이들을 양산하게 하는 어린이 창작물의 작가들을 경멸했다. 또한 꼬르네이 추콥스키는 어린이들 각자 나이에 맞지 않거나 자신의 연령에서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을 창작하는 것은 어린이들의 심리에 해롭다고 믿었다. 그러면서 그는 진정한 아동 작가는 아이와 함께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웃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창작의 내용도 아이들에게 웃음을 줄 수 있는 내용을 권장했다. 


<꼬르네이 추콥스키와 그의 동화작품>
(출처: https://yandex.ru/)


꼬르네이 추콥스키의 불우한 어린 시절과 아동문학

꼬르네이 추콥스키는 1882년 3월 31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부유한 의사 집안 임마누엘 레벤손 가문에서 태어났다. 언뜻 보면 축복을 받은 탄생 같지만 현실은 정반대의 것이었는데, 왜냐하면 폴타바출신의 작가의 어머니 예카테리나 오시포브나(Екатерина Осиповна)가 이 레빈슨 집안에서 하녀로 일했기 때문이었다. 즉 꼬르네이 추콥스키의 어머니는 의사 솔로몬 레빈슨(Соломон Левинсон)의 집에서 하인으로 일하면서 그의 아들 엠마누일(Эммануил)과 사랑에 빠진 것이었다. 엄청난 두 사람의 신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함께 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의 결실로 예카테리나는 딸 마리아와 아들 니콜라이를 낳았다.

그러나 불행은 꼬르네이 추콥스키가 세 살이었을 때 시작되었는데, 아들과 며느리의 관계를 과거부터 단호하게 반대했던 작가의 할아버지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든지 며느리 예카테리나 오시포프와 아이들을 거리로 내쫓았다. 꼬르네이 추콥스키의 어머니는 다른 곳에서 집을 빌릴 경제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그녀의 친척들이 살고 있는 오데사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어린 시절의 오데사는 꼬르네이 추콥스키에게는 잿빛 도시였는데, 이러한 사실은의 자서전 <은빛 문장>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는데, 그는 이 자서전을 통해 오데사란 도시를 좋아할 수 없었다고 담담하고 솔직하게 밝히고 있다.

전기를 통해서 알려진 꼬르네이 추콥스키의 어린 시절은 가난과 혼란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이러한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작가의 어머니는 끊임없이 일자리를 찾았지만 경제적 형편은 점점 악화되어만 갔다. 왜냐하면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것이 일상적인 생활이 보장되지 않은 저임금의 세탁부와 재봉사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직업에서 나오는 수입으로는 아이들을 부양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그래서 꼬르네이 추콥스키는 가족을 돕기 위해 어떠한 일도 마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마치 막심 고리키(Максим Горькии)와 블라지미르 막심모프(В.Е.Максимов)가 어린 시절에 전전했던 밑바닥 잡일을 찾아서 노동을 하였다. 설상가상으로 1887년에 러시아는 교육부 장관의 법령으로 출산의 기록이 명백하게 존재하는 아이들만 학교 교육의 혜택을 주도록 권고 하였다. 그래서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출생한 꼬르네이 추콥스키는 교육부장관령에 따라 다니고 있던 학교에서 쫓겨났다. 결국 작가의 출생과 관련된 쓰라린 경험과 어린 시절의 가난에서 받은 심리적 상처는 작가에게 고통을 주었다. 그래서 꼬르네이 추콥스키가 아동문학에 열정을 보인 것은 아마도 자신의 불우한 어린 시절에 경험한 심리적 외상의 무의식적인 치료적 행위일 수도 있다. 2008년도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인 독일계 루마니아 작가 헤르타 뮐러가 어린 시절 겪었던 심리적 고통을 치유하는 과정에서 글쓰기를 선택한 것처럼 꼬르네이 추콥스키도 어린 시절 심리적 영역에 발생한 생채기를 치유할 방법으로서 아동 문학을 활용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꼬르네이 추콥스키의 특별한 동화 작품

꼬르네이 추콥스키는 21살 되던 해에 1903년에 결혼하여서, 네 명의 아이(니콜라이, 리디야, 보리스, 마리야)를 두었다. 그 4남매 중에서 막내딸 마리야는 1931년에 결핵으로 사망하였는데, 마리야는 생전에 병약해서 아픈 날이 상당히 많았다. 이러한 막내딸을 위해서 나온 작품이 첫 번째 동화 <악어>(Крокодил)이다. 이 동화는 줄거리와 등장인물에 대한 섬세한 묘시와 완벽한 서사구조 보다는 사건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사건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이 동화는 초스피드의 흐름 속에 변형되어가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통해 병으로부터 고통을 겪고 있는 막내딸이 한순간이나마 신음하지 않도록 구성하려고 노력하는 부성애가 가득한 작품이다.

꼬르네이 추콥스키의 대표적인 동화 작품은 <모이도뒤르>(Мойдодыр)이다. 이 작품은 1923년 출판 할 당시 소련 아이들 사이에서 대단히 인기가 있었다. 성인의 입장에서 이 작품을 보면, 사실 이 동화의 교화적인 주제(예를 들어, 어린이는 아침과 저녁에 씻어야 한다)는 단순히 보잘 것 없는 것일 수 있다. 그렇지만 어린이에게 해야 하는 것과 금지되는 것에 대한 진지하고 귀여운 논쟁을 이 작품은 어린이의 눈높이에서 재미있게 다루고 있다. <모이도뒤르>를 통해서 작가는 ‘필요/불필요’에 대한 유아들의 첫 번째의 심리적 반응을 정확하게 포착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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