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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문화로(文化路)
제목소비에트 역사를 함께한 굼(ГУМ)
분류역사
국가 러시아
날짜2021-07-02
조회수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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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광장은, 이곳이 중세 시기 매매와 흥정을 뜻하는 ‘토르그(Торг)’로 불렸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모스크바 역사 속에서 상업지로서 활발히 기능했던 장소였다. 육지와 수로가 교차하는 이곳의 위치는 많은 상인들을 매료시켰고, 매년 부활절이 다가올 때면 거대한 인파가 북적이는 대규모 시장이 열렸다. 모스크바 사람들은 이곳에서 각종 음식 재료와 수공예품 등을 구입했으며, 점차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시장은 무역소와 상점이 즐비한 상가들로 변모해 갔다. 구체적으로는 세 개의 상업단지가 형성되어 있었는데, 붉은 광장에는 현재 굼이 위치하는 상부 상업 구역(Верхние торговые ряды)과 바실리 사원과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중부 상업 구역(Средние торговые ряды), 현재는 흔적조차 사라진 하부 상업 구역(Нижние торговые ряды)이 그것이다. 그리고 과거 상부 상업 구역라고 불렸던 장소가 굼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고 있는 오늘날, 도심 한가운데 존재했던 모스크바 대규모 상업지의 흔적과 기억은 아호트늬 랴드(Охотный ряд)라는 지하철역의 이름으로 보존되고 있다.

모스크바 일린카 거리와 니콜스카야 거리로 이어지는 곳에서 물품 거래가 시작된 것은 300-400년 전부터였다. 베토슈늬 도로를 따라 처음 형성된 상업 구역은 보리스 고두노프 통치 기간에 지어졌고, 예카테리나 2세 시대에는 건축가 자코모 크바렌기(Giacomo Quarenghi)가 고전주의 양식으로 상부 상업 구역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그리고 1812년 화재 이후 유명 러시아 건축가 오십 보베(О.И. Бове)가 설계한 상부 상업 구역이 붉은 광장에 새로이 세워졌는데, 아름다운 외관을 자랑한 이곳 내부에는 수많은 상점이 줄지어 있었다. 그러나 완공된 지 반세기도 지나지 않은 19세기 후반, 건물은 이미 낡을 대로 낡아버렸고 쇼핑센터는 또 한 번의 재정비를 필요로 했다. 그곳 상인들은 재건축을 시 당국에 의뢰했으며, 결국 1888년 건축물은 비상 정비구역으로 선포되었다. 곧 상가에 입점해 있던 점포들이 해체됨과 동시에 새로운 건축물 건립을 위한 공모전이 시행되었다.


<1886년 상부 상업구역의 모습> 
(출처: https://tunnel.ru/)


지금으로부터 133년 전인 1888년 11월 27일, 모스크바 중심부 붉은 광장에 대규모 쇼핑몰을 건립하기 위한 디자인 공모전이 개최되었다. 대회 참가를 위한 프로젝트에 건축가들은 주최 측의 세 가지 요구 사항을 충족시켜야 했는데, 이는 바로 ‘합리성’과 ‘경제성’, 그리고 ‘건축적 조화’였다.(이는 반드시 러시아 양식의 건축물이어야 하며, 붉은색 석탑의 역사박물관과 조화를 이뤄야 했다.) 모스크바, 페테르부르크, 니즈니 노브고로드, 오데사, 심지어 베를린 출신의 건축가 등 내로라하는 거장 23명이 새로이 탄생될 건축물의 비전을 발표하며 경쟁에 참여했고, 그들이 제출한 프로젝트는 역사박물관 내 세 개의 홀에 배치되었다. 여기에서 1위를 차지하는 건축가의 프로젝트는 실제 쇼핑센터 건축에 적용될 예정이었으며, 따라서 예술 아카데미, 정부 건설기관, 기술위원회, 건축단체 소속 심사위원들로 구성된 특별위원회가 각별한 노력을 기울여 선정했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날 러시아 모더니즘 거장으로 불리는 페테르부르크 건축가 알렉산드르 포메란쩨프(А. Померанцев)가 <모스크바 상인Московскому купечеству>이라는 표어를 내걸어 출품한 작품이 1등으로 선정되었다. 그에게는 상금 6천 루블이 수여되었고, 해당 프로젝트는 알렉산드르 3세에 의해 승인되었다. (2등은 화가 로만 클레인(Р. Клейн)에게, 3등은 폴리테크닉 박물관 건축에 참여한 오스트리아 출신 작가 어거스트 웨버(А. Вебер)에게 돌아갔다.)

<1990년 상업 아케이드 공사현장>
(출처: https://tunnel.ru/)


그 이듬해 포메란쩨프는 상부 상업구역의 재건을 시작했다. 이 건물은 겉으로는 작은 탑으로 조각된 다양한 외관의 요소와 기발한 형태로 옛날 러시아를 연상시키지만, 그 내부는 시대를 앞선 혁신적인 것이었다. 하나의 유리 지붕 아래 들어선 거리들, 여기에 개별 상점들이 통합된, 이는 유럽식 백화점의 원리에 따라 세워진 최초의 상점 중 하나였으며, 다시 말해, 전형적인 서양식 건축물에 러시아식 장식이 결합된 새로운 유형의 건축물이었다. 그와 함께 엔지니어 블라디미르 슈호프(В. Шухов)가 굼의 현대적인 기술과 장비를 모두 담당했는데, 마치 노천 상점가의 느낌을 자아내는 유리 돔 지붕이 바로 그의 작품이었다. 당대 최고의 발명가이자 혁신가였던 슈호프는 역대 뛰어난 러시아 엔지니어 100인 목록에 포함된 인물 중 하나로, 상부 상업구역의 지붕 건설에 혁신적인 접근 방식을 사용했다. 그는 케이블 타이의 아치형 구조로 지붕의 무게를 줄였으며, 건물 외관 뒤에 8개의 돔을 숨겼다. 철제가 아닌 유리가 다량 사용된 결과 천장의 무게는 가벼워졌지만, 바닥을 짓는 데는 819톤의 금속이 사용되었다. 또한 여기에는 당시 존재했던 최첨단 기술들이 모두 적용되기도 했다. 난방 및 환기 시스템, 지하수와 하수도 시설, 자체 제설기 및 물품 운송을 위한 미니 철도, 가스 조명, 자체 발전소까지 설치되어 있었으니, 당시로서는 그야말로 최신식 첨단 기술과 설비가 집약된 건축물이었다는 것은 당연하다. 이렇게 약 2만 장의 유리와 800여 톤의 금속 구조물, 최첨단 시설이 압도하는 굼 백화점은 약 3년에 걸친 공사 끝에 1893년 오픈되어 드디어 그 역사를 시작했으며, 그 후부터 러시아 심장부를 구성하는 상징적 건축물로서 지금까지도 인기와 명성을 얻고 있다.


<건축가 알렉산드르 포메란쩨프와 굼>
(출처: https://366days.ru/)


한편 건축물의 구조를 보면,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지상 3개 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던 굼의 1층과 2층은 상업용 시설로 사용되었고, 3층은 사무실로 구성되어 있었다. 도매상점은 지하에 위치했고, 1층에는 상점 외에도 미용실, 은행, 아틀리에, 레스토랑 등이 위치해 있었다. 특히 러시아 최고 쇼핑센터답게 상점들이 대규모 단지를 이루고 있었는데, 19세기 후반 상인으로 이름을 떨쳤던 사포즈니코프 형제(А. и В. Сапожниковы)는 이곳에서 실크 직물을 취급했고, 아브리코소프가(Абрикосовы)는 제과점은 운영했으며, 미하일 칼라쉬니코프(М. Калашников)는 고급 시계와 향수를 판매했다. 특히 직물를 취급했던 지라르도프스키 의류 판매점(Жирардовская мануфактура)은 가장 높은 매출을 기록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당시 모스크바 부유계층 사람들은 1만 5천 루블이라는 거금을 지불하며 혼인 지참금 세트를 이곳에서 구입했다고 한다. 그밖에도 최고의 제품들을 판매했던 유명 상인들, 모로조프가(Морозовы), 브로카르(Брокар), 에이넴(Эйнем), 찐델(Циндель), 프로호로프가(Прохоровы)의 상점을 비롯한 약 1000-1200개의 크고 작은 매장들이 운영되었다.

또한 1905년부터는 굼에서 요식업도 성행을 이루었다. 상인 표트르 마르티야노프(П. Мартьянов)는 건축가 이바노프 쉬츠(Иванов-Шиц)를 고용해 이곳에 크고 웅장한 규모의 레스토랑을 오픈했는데, 식당 이름은 자신의 이름을 따 <마르티야늬치Мартьяныч>로 지었다.(그러나 10월 혁명 이후, 러시아 제국 시절 명성을 떨쳤던 고급 상점이나 레스토랑들이 러시아에서 철수하고 유럽으로 망명할 당시 <마르티야늬치> 레스토랑 역시 러시아를 떠났다. 그 후 동명의 레스토랑은 파리 몽마르트 지역에 새로이 문을 열어 파리의 맛집으로 등극했고, 그 인기에 힘입어 1920년대에는 중국 하얼빈에 분점이 오픈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다양한 시설들이 한데 모여 상인과 구매자의 편의성을 두루 확보한 새로운 형태의 모스크바 쇼핑 아케이드는 상업을 위한 단순한 거래 장소라기보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마주할 수 있는 비즈니스 복합 센터의 원형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10월 혁명 이후, 소비에트 시대에 접어들어 활발한 거래가 이루어졌던 상점들은 모두 문을 닫았다. 상부 상업구역의 호화로운 건물에서 더 이상 거래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인민위원회는 시골에서 곡물을 직접 공수해 노동자들의 굶주림을 해결했다. 그리고 빈 건물은 교육 인민위원회에 넘겨졌다. 점차 시간이 흐르자 볼셰비키는 내전이 국가의 망가진 경제를 더욱 심연으로 몰아넣을 뿐이라 판단했다. 1921년 3월, 신경제 정책이 시작되며 모스크바는 다시금 부활하기 시작했고, 그와 동시에 소비에트 사회에 적합한 모습으로 탈바꿈된 굼도 다시금 문을 열었다. 새로 오픈한 상점들이 가장 먼저 했던 일은 과거의 브랜드를 바꾸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마야콥스키(В. Маяковский)와 로드첸코(А. Родченко)가 깊이 관여했다. 유럽식 아르누보 양식을 닮았던 과거 상점의 모습은 커다란 소비에트 슬로건이 적혀있는 포스터들로 장식되었다. 당시 마야콥스키가 포스터를 담당했다고 하는데, “여성을 위한 모든 것은 오직 굼에만 있습니다. 이는 의심과 생각의 여지가 없습니다.(Нет места сомненью и думе - все для женщины только в ГУМе)”, “가격에 대해 불평할 필요가 없습니다. 청년 당원들이여, 굼으로! 노동자들이여, 굼으로! (Нечего на цены плакаться - в ГУМ, комсомольцы, в ГУМ, рабфаковцы!)”, “가장 업무적이고 가장 신중한 사람은 굼에서 모제르 시계를 구입합니다(Самый деловой, аккуратный самый в ГУМе обзаведись мозеровскими часами)”와 같은 슬로건들은 변화된 쇼핑 공간에서 소비에트 방문객들을 맞이했다.


<소비에트 시대 굼의 모습>
(출처: https://tunnel.ru/)


그러던 1920년대 말, 소련 경제에 새로운 동력을 불어넣었던 네프 정책이 폐지되었고, 그 후 정권을 잡은 스탈린은 단일국가의 집단화와 산업화, 사회주의 건설을 향한 점진적인 단계들을 밟아 나갔다. 통일성이 지배하게 된 새로운 사회는 화려한 진열장이 즐비하고 아방가르드적 실험에 매혹된 굼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았다. 1930년에 쇼핑센터는 다시금 폐쇄되었고, 빈 건물에 국가 기관들이 자리를 잡았다.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ВЦИК) 부서와 인민내무위원회(НКВД)가 크렘린에서 굼으로 이전했다.

굼 백화점의 철거와 관련하여, 1935년 새로운 모스크바 프로젝트를 구상했던 알렉세이 슈세프(А. Щусев)는 “모스크바에는 굼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레닌의 묘가 위치한 붉은 광장은 너무 협소하기 때문에 대중 시위가 통과 할 수 있도록 굼을 희생하여 공간을 확장해야합니다.”라고 언급하며 굼의 철폐를 주장했다. 물론 스탈린은 그의 입장을 지지했다. 스탈린의 계획 속에서 붉은 광장과 굼이 위치한 모스크바 중심부는 보행자가 아닌 시위대를 위해 설계된 기념비적인 장소였다. 스탈린이 계획한 ‘이상적인 모스크바’ 프로젝트에는, 크렘린에서 볼쇼이 극장 건물, 루뱐스카야 광장, 그리고 당시 구식 건물들의 철거가 예정되어 있었던 먀스니츠카야 거리를 통과하여 사하로프 도로로 가는 길까지의 확장이 구상되어 있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굼은 철거의 위기를 모면하고 생명을 이어갈 수 있었는데, 이는 당시 유적이 철거되면서 파괴된 자랴지예(Зарядье) 지역에 고층 빌딩을 건설하는 또 다른 프로젝트가 우선적으로 시행되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굼의 철거 위기는 1947년에 찾아왔다. 굼은 조국 전쟁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거대 프로젝트를 실행하기 위해 희생되어야 할 첫 번째 대상이었다. 굼뿐만 아니라 굼과 인접하여 위치한 구식 건축물 역사박물관도 굼과 함께 해야 할 운명이었다. 굼과 역사박물관의 자리에는 스탈린을 위한 연단과 행진을 위한 공간, 스탈린의 기념비가 세워질 예정이었다. 물론 이 스탈린의 프로젝트는 실행되지 않았고, 오늘날 역사 속에서 “붉은 광장에 대한 암살 시도покушением на Красную площадь”라고 불리고 있다.

이 시기와 관련하여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1920년대부터 1953년까지 굼의 3층에 모스크바 시민을 위한 주거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굼에는 주택 문제 해결의 일환으로 22가구의 숙식을 위한 460 평방미터의 공동주거시설 공간이 배정되었다. 그러나 소박한 아파트 내부에는 별도의 배관과 주방이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심지어 수도나 가스 시설도 마련되어 있지 않았던 터라 거주자들은 굼 내부의 공중 화장실을 사용해야 했다. 그들은 등유 스토브를 사용해 요리를 하고, 요리에 물이 필요할 때면 공중 화장실에서 물을 길어와 사용해야 할 정도로 열악한 주거환경에 적응해야 했다.(그러나 당시 기록을 보면, 사람들은 새 아파트를 정부로부터 제공 받았음에도, 크렘린과의 근접성, 모스크바의 중심부라는 지리적 이점 때문에 다른 지역으로 이사하기를 거부했다고 한다.)

모스크바는 마침내 스탈린 사후에야 다시금 꽃을 피웠다. 아나스타스 미코얀(А. Микоян)은 굼을 유럽과 미국의 백화점을 모델로 한 모범 쇼핑센터로 전환하려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1953년 12월, 스탈린 시대 소련 내무인민위원회(НКВД СССР)의 수장으로서 대규모 숙청을 주도한 라브렌티 베리야(Л. Берия)가 처형 된 바로 다음날, 굼은 모스크바 주민들 앞에 새로이 등장했다. 미국 타임지는 “이는 메이시스(Macy’s), 짐블스(Gimbels), 시어즈 로벅(Sears, Roebuck and Company), 울워스(Woolworth), A&P에 대한 모스크바의 대응이다. 이 백화점은 소련 언론에 의해 소련에서 가장 크고 가장 훌륭한 것으로 발표되었다.”라고 언급하면서, 미국 독자들에게 아름다워진 모스크바의 모습을 소개했다.

 

<오늘날 굼의 모습>
(출처: https://moscowsteps.com/(左), https://new-retail.ru/(右))


1985년에 등장한 고르바초프 정권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에 따라 굼에서 개인 상점이 부활하기 시작하여 서구 기업과 협력하는 상점이 진출했다. 옐친의 시대인 1990년 굼은 법인화되었으며, 1993년에는 예고르 가이다르 등에 의한 급진적인 경제개혁 노선에 따라 민영화되었다. 또한 붉은 광장에 인접한 과거의 입구가 다시 개방되어 굼은 러시아 혁명 이전의 모습으로 회귀했다. 2005년부터 현재까지는 러시아의 명품 유통 그룹 보스코(Bosco)가 대주주로서 경영권을 가지고 있으며, 약 200여개의 점포가 운영되고 있다. 이렇게 굼은 오늘날 소비에트 시대를 함께했던 역사적 현장에 현대적인 쇼핑 시설과 엔터테인먼트 단지를 형성했으며, 풍부한 역사와 현대성을 보존하며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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