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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러시아의 클래식 음악의 혁신가: 음악천재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분류음악
국가 러시아
날짜2021-06-01
조회수330
첨부파일


2021년은 러시아 클래식 음악의 혁신가이자 음악천재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С.С. Прокофьев 1891-1953)의 탄생 130주년을 맞는 해이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소재한 마린스키 극장은 그의 130번째 생일(서류상: 4월 27일, 실제: 4월 23일)을 기념하며 지난 4월 20일 마린스키 극장과 함께한 프로코피예프의 살아있는 역사적 순간들을 보여주는 온라인 전시 “마린스키 극장에서 프로코피예프(Прокофьев в Мариинском)”를 오픈하였다. 이번 전시에서는 마린스키 극장과 함께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에 소재한 중앙 국립 영화·사진·음악자료보관소(ЦГАКФФД СПб), 러시아예술사연구소(РИИИ), 러시아 국립 문학·예술자료보관소(РГАЛИ)의 예술기록관리전문가들이 협업하여 프로코피예프의 마린스키 극장에서의 작품 활동에 대한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심도 깊게 살펴보았다. 한국처럼 일의 진행 속도가 빠르지 않는 러시아에서 이러한 프로코피예프의 작품 활동에 대한 전시는 오랜 시간 꼼꼼학게 준비한 모습을 전시 곳곳에서 역력히 확인할 수 있다. 작년 코로나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던 그의 탄생 129주년 4월에도 마린스키 극장은 역시 온라인 행사를 준비했다. 마린스키 극장 TV(mariinsky.tv)에서 프로코피예프 생일부터 2주간 프로코피예프 작품들을 온라인으로 스트리밍하는 “프로코피예프 마라톤(Марафон Прокофьева)”이 진행되었는데 아마도 이것은 탄탄생 130주년를 기념한 이번 온라인 전시를 위한 사전 준비작업이 아닐까 추정한다. 오늘은 프로코피예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음악활동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한다.


<프로코피예프 탄생 130주년 기념 온라인 전시 “마린스키 극장에서 프로코피예프” 메인화면>


음악천재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의 유년시절

1891년 우크라이나 도네츠크주 파크로프지역에서 태어난 프로코피예프는 어린 시절 집에서 음악교육을 받았는데 음악에 특별한 재능을 보여 이미 5살의 나이에 피아노곡을 작곡했고, 9살에 오페라를 작곡하기 시작했다. 1902년 러시아 작곡가 세르게이 타네예프(С.И. Танеев, 1856-1915)는 프로코피예프의 어린 시절 작품들을 보고 일찍이 그의 재능을 알아보아, 전문적인 음악교육을 받을 것을 제안했다. 이를 계기로 프로코피예프는 글리에르(Р.М. Глиэрб 1875-1956)에게 개인지도를 받을 수 있었다. 그는 1904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겨와 1914년까지 10년간 상트페테르부르크 컨서바토리에서 림스키-코르사코프(기악), 비톨스(음악형식), 랴도프(작곡), 예시포바(피아노) 등 당대 최고의 음악가들에게 본격적이고 전문적인 음악에 대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프로코피예프는 컨서바토리 재학시절 마린스키 극장을 자주 방문하여 클래식 음악 콘서트, 오페라, 발레 등 다양한 공연들을 섭렵했다. 당시 음악을 전공하는 학생으로서 마린스키 극장의 공연을 보는 일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지만, 공연표를 구하는 일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당시 마린스키 극장은 회원제로 운영되었고, 예외적으로 금요일 공연만 표를 구매하여 볼 수 있었기에 표를 사기위해 오랜 시간 줄을 서야 하는 것은 물론 운이 좋아야 표를 손에 넣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컨서바토리 같은 반에서 공부했고 후에 마린스키 극장 지휘자였던 말코(Н.А. Малько, 1883-1961)를 통해 종종 공연 직전의 총리허설을 볼 수 있었다. 프로코피예프는 1907년 2월 림스키-코르사코프의 “보이지 않는 도시 키테즈와 페르브로니야 아가씨 이야기” 또한 정식 공연이 아닌 초연 전의 총리허설을 보고 크게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이와 더불어 바그너의 4개의 악장극 “니벨룽의 반지” 또한 그의 창작활동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재학당시 그의 음악은 러시아 음악계의 전통에 수용될 수 없을 정도로 불협화음이 많이 사용되었고, 조의 변화가 많고 급진적이었기에 항상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14년 프로코피예프는 그의 졸업공연이자 첫 번째 연주회 훌륭하게 치러내어 최고의 졸업자에게 수여되는 루빈슈테인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게 된다. 그는 작곡가로서 혁신적이고 새로운 스타일의 음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음악적 혁신가로서의 자신만의 독자적인 음악세계를 구축해나간다. 그리고 피아니스트로서 연주회에서 자신이 작곡한 음악을 직접연주하며 청중들의 뜨거운 반응을 받아 호불호가 극명한 작품 활동을 지속했다.


<청년시절의 프로코피예프>


마린스키 극장과 오페라 “도박사”

1916년 5월 11일 프로코피예프는 마린스키 극장과 정식으로 계약을 체결하고, 10월 23일부터 본격적으로 성악가들 그리고 1917년 1월 28일부터는 오케스트라와 공연연습을 시작했다. 당시 알베르트 코우츠(А. Коутс, 1882-1953)는 프로코피예프가 참여한 오케스트라 연습에 지휘자로서 열정적으로 연습을 이끌었다. 그러나 1917년 러시아 제국에서 발발한 2월 혁명과 10월 혁명은 공연예술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마린스키 극장은 이에 직격탄을 맞아, 재정문제에 봉착하게 되었고, 새로운 작품 제작을 위한 자금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프로코피예프가 1915년 말부터 1917년에 걸쳐 도스토예프스키의 동명소설을 모티브로 오페라 “도박사(Игрок)”를 완성했으나 결국 무대에 올릴 수 없게 되자, 프로코피예프는 본인의 작품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러시아를 떠나 미국행을 결심했다. 특히 브세볼로드 메이에르홀드(В.Э. Мейерходьд, 1874-1940)또한 프로코피예프의 재능을 알아보고 미국 또는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이 작품을 무대에 올리고 싶어 했으나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1920년대까지 메이에르홀드와 프로코피예프는 “도박사”를 무대에 올리기 위해 전 세계의 극장에 수소문 한 끝에 1929년 4월 29일 벨기에의 브뤼셀의 드 문트(De Munt) 극장에서 “프랑스어 버전 “Le Joueur”으로 세계초연무대에 올릴 수 있었다. 오페라 “도박사”는 러시아보다는 해외의 무대에서 더 많이 공연되며 프로코피예프의 예술성을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한 반면, 정작 프로코피예프가 몸담았던 마린스키 극장에서는 프로코피예프의 사후에야 비로소 무대화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펼쳐졌다. 마린스키 극장은 프로코피예프가 이 작품을 만든 지 75년이 흐른 1991년이 되어서야 무대에 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5년 후인 1996년에는 이탈리아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과의 협업하여 “도박사”의 새로운 버전을 무대에 올렸다. 이 공연에 참여한 성악가 블라지미르 갈루진(알렉세이 역)과 감독 테무르 체이드제는 이 작품으로 1997년 황금마스크 상을 수상하며, 그 작품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1991년 마린스키 극장 오페라 “도박사” 초연에서 알렉세이(블라지미르 갈루진)와 장군(세르게이 알렉사쉬킨)> 


발레 “돌아온 탕아”와 미하일 바리시니코프

단막발레 “돌아온 탕아(Блудный сын)”는 디아길레프의 발레뤼스의 유럽공연을 위해 프로코피예프와 조지 발란친의 협업으로 탄생한 작품이다. “돌아온 탕아”는 루카복음서 15장에 나오는 내용을 발레화한 작품으로 1929년 5월 21일 프랑스 파리의 테아트르 사라 베른하르트에서 초연되었고, 발레뤼스의 마지막 시즌인 제22회 시즌의 마지막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발레 “돌아온 탕아”는 미하일 바리시니코프(М.Н. Барышников, 1948~ )가 서방세계로 망명하기 전 에스토니아 안무가 마이 무르드마아에게 재안무할 것을 요청했고, 이는 1974년 바리시니코프의 소련에서의 처음이자 마지막 개인공연에서 마지막 공연작품이었다. 바리시니코프는 이 작품에서 당시 안무 스타일과 창작에 대한 소련 정부의 엄격한 제한, 규격화된 레퍼토리 등 소련 발레계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자유에 대한 갈망을 예술적으로 구현할 것을 무르드마아에게 요청했다. 무르드마아는 당대 소련발레계가 허용하는 수준에서 가장 현대적이고 아방가르드적인 안무가였다. 무르드마아의 “돌아온 탕아”1974년 버전은 발란친의 1929년 작품의 큰 틀 안에서 재안무 되었다. 보리스 코흐노의 원작 대본에 충실한 춤의 원리, 기하학적이고 그로테스크적인 동작들의 은유적 표현들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1920년대에 작곡된 프로코피예프의 음악은 여전히 급진적이고 현대적이어서 소련의 관객들이 받아들이기에게는 역부족이었다. 1974년작 “돌아온 탕아”는 당시 레닌그라드에서 최고 인기를 누리던 발레리노 바리시니코프의 차기 공연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던 소련의 관객들과 예술관계자들을 크게 실망시켰다. 그러나 바리시니코프는 이번 공연을 준비하며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더욱 갈망하게 되었다. 이러한 소련 관객들과 전문가들의 혹평에도 소련의 저명한 발레전문가 베라 크라소프스카야(В.М. Красовская, 1915-1999)는 오히려 바리시니코프의 공연을 보고 “그의 예술적 재능이 완성”에 이르렀다고 평가했다. 이번 발레 “돌아온 탕아”는 실제 성경의 내용이 바리시니코프 개인에게 그대로 현실화 된 듯 보인다. 그의 첫 번째 개인 공연의 실패는 바리시니코프를 망명으로 이끈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프로코피예프는 컨서바토리 재학시절 급진적인 음악 스타일로 학교 교수들에게 비판이 대상이되었고, 항상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그럼에도 그는 굴하지 않고 자신만의 독자적인 음악 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그는 무수한 교향곡, 협주곡, 독주곡 등의 음악들을 비롯하여, “도박사(1929)”, “3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1926)”, “전쟁과 평화(1943)” 등 8편의 오페라와 “로미오와 줄리엣(1940)”, “신데렐라(1945)” 등 8편의 발레음악 및 영화음악 등의 작곡하여 러시아 뿐만 아니라 세계 음악사를 넘어 공연예술계에 큰 영향을 미친 대작들을 남겼다. 특히 독창적인 피아노 연주 기법을 개발하고 이를 활용한 피아노 연주곡 작곡하며 피아노를 악기로써 새롭게 재조명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시도와 용기가 항상 우리 인류의 문명을 발전시켜왔고 새로운 예술 사조를 이끌었다. 무언가 기존의 것과 다른 익숙하지 않은 것을 시도한다는 것은 매우 큰 용기가 필요하다. 예상치 못한 팬데믹으로 인해 뉴노멀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21세기 인류가 현재 당면한 위기를 극복하고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하기 위해서는 프로코피예프처럼 기존에 우리에게 익숙하고 당연했던 주변을 낯설게 바라보고 발상의 전환을 해야 할 것이다.


<1974년 발레 “돌아온 탕아”의 마린스키 극장 공연에서 미하일 바리시니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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