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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러시아 샹송과 음유시인 미하일 크루그
분류음악
국가 러시아
날짜2021-05-17
조회수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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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프랑스의 대중가요를 의미하는 샹송(Chanson)은 예술의 나라로 일컬어지는 프랑스의 국가 이미지, 그리고 부드러운 프랑스어의 발음과 억양으로 전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역사적으로, 11세기 ‘트루바두르(troubadour)’로 불렸던 남프랑스 음유시인들과 12세기 ‘트루베르(trouvere)’로 불렸던 북프랑스 음유시인들이 자신들의 시에 선율을 붙여 부르기 시작한 것이 샹송의 시초였으나, 19세기 말에는 샹송이 프랑스 카바레와 같은 유흥시설에서 공연되는 노래로 인식되기도 했다. 20세기에 접어들어서는 샹송이 유럽 다른 나라들의 음악적 색채들을 흡수한 결과 보다 다양화된 경향성을 보이게 되었고, 곧 프랑스 대중음악 무대의 중심으로 옮겨져 왔다. 그때부터 오늘날까지 샹송은 다른 무엇보다 ‘가사의 내용과 표현’을 강조한 일종의 시적 감성의 노래로서 프랑스 음악 문화를 상징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과연 프랑스 전통의 대중음악 샹송은 러시아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

사실 연관성이 별로 없다! 러시아 샹송은 1990년대에 들어 처음 등장했다. 러시아에서 미하일 크루그(М. Круг)의 음악처럼 범죄나 교도소 수감자들을 모티프로 한 구슬프고 서정적인 노래가 인기를 구가하게 되면서 라디오를 비롯한 대중매체들은 이를 샹송이라 칭했고, 음악 공연계에서 이를 사업 마케팅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부터 ‘러시아 샹송’이라는 독특한 장르가 탄생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러시아 샹송이 등장한 지 20여년이 흐른 오늘날 기타 반주에 시적 감성의 음악들이 러시아 샹송이라 불리고 있으며, 다양한 주제와 스타일의 음악을 노래하고 연주하는 수많은 러시아 샹송 뮤지션들이 존재하고 있다.

초기 러시아 샹송의 주요 경향성은 죄수들의 노래, 수감자들의 노래, 범죄와 관련된 노래 등이었다. 죄수들의 노래는 집시 로맨스가 가미된 유대인 클레즈머(klezmer)에 음악적으로 뿌리를 두고 있다. 당시 소련에는 많은 유대인 수감자들이 존재했고, 따라서 범죄 관련 전문 용어 중 상당수의 단어들은 동부유럽 출신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이디쉬어(Yiddish)’에서 비롯되었다. 즉 전통적인 유대인 음악의 멜로디와 하모니가 이러한 범죄 노래의 기초가 되었고 볼 수 있으며, 러시아에서 이러한 음악적 색채를 보여준 대표 음악가로는, 사랑하는 이들과 분리된 죄수들의 감정적 공허와 절망을 묘사한 가수, 마초들의 사랑을 노래한 가수, 미하일 크루그를 들 수 있다. 


<러시아 샹송 가수들>


음유시인 미하일 크루그 

훗날 미하일 크루그라는 이름으로 명성을 떨친 미하일 보로비요프(М. Воробьёв)는 1962년 4월 7일 트베리 근교 모로조프스키 고로도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엔지니어였고, 어머니는 회계사였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좋아했는데, 그가 가장 존경했던 음악가는 불라트 오쿠자바(Б. Окуджава)와 함께 20세기 러시아 최고의 음유시인으로 불리는 블라디미르 븨소츠키(В. Высоцкий)였다. 븨소츠키는 억눌린 인민들의 삶에 대한 분노와 독재체제에 대한 비판을 담아낸 저항가요 700여곡을 탄생시킨 인물로, 그는 어린 미하일에게 음악에 대한 동경을 심어준 예술적 이정표가 되었다고 한다. 이렇듯 븨소츠키의 노래에 심취했던 미하일은 11세가 되어 부모님으로부터 기타를 선물 받아 처음으로 악기를 접했다. 븨소츠키 음악에 대한 열정이 컸던 만큼 그는 기타 연주법을 빠르게 익혔고 14세 경 첫 번째 노래를 작곡했다. 아드의 음악적 재능을 보았던 부모님은 미하일을 음악 학교에 보내 아코디언 연주를 배우도록 지원했지만 반년 만에 수업은 중단되었다. 클래식 교육은 미하일에게 지루한 시간이었으므로, 그는 종종 수업을 건너뛰었는가 하면, 공부보다는 축구와 같은 운동에 더욱 관심을 보였다. 학교를 졸업한 후, 청년이 된 미하일은 자동차 정비사가 되기 위해 전문학교에 입학했다. 여느 청년들의 관심사가 그렇듯, 그 역시 자동차에 매료되어 있던 터라 정비 기술들을 비교적 쉽게 습득했으나, 군대에 입대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정비사로서의 희망을 접었다. 군복무를 마친 미하일은 운전사가 되었다. 유제품 회사에서 배송 업무를 담당했고 1987년에는 운전사로서 가장 높은 위치에 오를 수 있었다. 입사 10년 차가 되던 해에는 업무 능력을 인정받아 폴리테크닉 연구소로 파견되기도 했다. 그러나 사무직에 권태로움을 느낀 그는 곧 연구소를 박차고 나와 운전사의 위치로 다시금 돌아왔다.

연구소에서 그가 얻은 것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연구소에서 근무하는 동안 음악에 대한 미하일의 열정은 더욱 커져만 갔고, 그즈음 훗날 그의 첫 번째 아내가 된 스베틀라나를 만났다. 당시 스베틀라나는 보로비요프의 첫 번째 프로듀서였다. 그녀는 미하일의 의상들을 손수 제작했는가 하면, 그로 하여금 다양한 공연과 음악 대회에 참가하도록 해 음악가로서의 경험 축적에 힘썼다. 이러한 스베틀라나의 지원으로 미하일의 나이 25세가 되던 1987년, 그는 <아프가니스탄에 대하여Про Афганистан>라는 곡으로 음악 경연에 참가해 첫 번째 우승을 거머쥐게 되었다. 그 후에는 작가음악축제 심사위원장을 맡고 있던 음유시인 예브게니 클랴취킨(Е. Клячкин)의 권유로 작곡을 시작했다. 바라비요프가 미하일 크루그라는 가명을 사용하게 된 시기도 이때부터다. 클랴취킨처럼 그의 재능을 알아본 러시아 음악계의 많은 인사들은 그의 활동을 응원했고, 곧 생애 첫 앨범 <트베르스카야 거리들Тверские улицы>을 비공식 발표했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던 1988년, 그는 스베틀라나와의 결혼에 골인했고, 곧 드미트리라는 이름의 아들도 태어났다. 그러나 3년이 지난 1991년, 크루그를 둘러싼 숱한 염문으로 스베틀라나와는 결별하게 된다.


<미하일 크루그의 소년시절(좌) / 첫 번째 부인 스베틀라나와 크루그(우)>


그즈음 크루그는 <까쨔Катя> 라는 두 번째 앨범과 제목이 부재한 세 번째 앨범을 제작하기도 했다. 이는 비록 공식적으로 대중에 알려지지 못했으나, 그럼에도 이 앨범 수록곡들은 비공식 루트, 즉 불법적 경로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날이 갈수록 이는 대중의 사랑을 크게 받으며 인기를 구가해갔고, 주옥같은 수록곡들은 차기 앨범에서 공식 발표되었다.

그의 첫 번째 공식앨범이 세상에 나온 시기는 1994년이다. <지간-리몬Жиган-Лимон>이라는 타이틀의 앨범은 그의 운명을 바꿔놓은 전환점이 되었다. 앨범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앨범은 다수의 범죄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다. 미하일 크루그의 음악적 특징 중 하나가 된 ‘범죄(Блатная)’ 주제는 첫 공식 앨범에서부터 줄곧 사용되었지만, 그는 교도소에 가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가사 속에 등장하는 모든 속어 표현들은 소련 정부기관 내무인민위원회(НКВД) 사전에서 따온 것들이었다. 이 음악에 대해 일부의 음악가들은 크루그가 범죄 환경을 지나치게 낭만화하고 있다는 비난을 서슴치 않았다.
 

“그의 노래, 특히 초기 노래 속 서정적 영웅은 주로 도둑, 강도, 매춘부다. 한마디로 범죄로 얼룩진 과거를 살았거나 현재를 살고있는 사람들이다.”

기사 <미하일 크루그의 살인 버전Версия убийства Михаила Круга> 中


그럼에도 그의 노래는 대중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다. 그의 인기는 1995년 <음유시인 미하일 크루그Бард Михаил Круг>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제작될 정도였고, 이는 1999년 쿨투라(Телеканал Культура)라는 방송 채널에서 방영되기도 했다. 그의 명성은 해외로까지 뻗어나갔다. 1997년 이후로는 미국, 유럽, 이스라엘의 여러 도시들을 여행하며 해외 팬들을 활발히 만났다. 그뿐 아니라 그의 음악 세계의 주요 모티프가 되었던 교도소를 방문해 자선콘서트를 선보였다. 사회와 분리된 채 절망에 빠진 그들의 삶과 정서를 서정적 멜로디로 노래하며 수감자들의 깊은 공감을 얻어냈다. 이와 같은 행보를 이어가던 크루그는 1998년부터 각종 음악상을 수상하기 시작했다. 98 러시아 샹송 후보 대회에서 오베이션 상(Овация)을 수상했고, 1999년 1월에는 <러시아 샹송Русский Шансон>대회에서 2위를 차지했다. 또한 동년 4월에는 다시 한 번 오베이션 상을, 11월에는 TV음악 프로그램 <뮤직 링Музыкальный ринг>에서 우승을 거머쥐기도 했다.


<미하일 크루그의 앨범 자켓>


노래처럼: 미하일 크루그의 죽음 

각종 대회에서 상을 휩쓸며 러시아 최고의 음유시인으로 입지를 다진 크루그는 2002년 6월 30일 밤, 돌연 사망했다. 괴한의 습격으로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채 병원으로 후송했으나 사망하고 만 것이다. 당시 집안에는 크루그의 모친, 두 번째 부인 이리나, 세 명의 아이들이 있었다. 사건은 자정 즈음 일어났다. 두 명의 괴한이 복면을 쓴 채 침입해 부인 이리나를 공격했고, 아내의 비명 소리를 들은 크루그가 뛰쳐나와 범인과 마주쳤다. 그리고 그 순간 크루그는 괴한들의 총에 맞았다. 가슴을 관통한 총알은 폐와 위를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손상시켰고, 결국 몇 시간이 채 되지 않아 크루그는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

크루그의 장례식이 있은 지 40일 후, 그의 죽음을 추모하는 대규모 콘서트가 모스크바에서 개최되었다. 스탠드는 그를 사랑했던 관객들로 가득 메워졌고, 무대 위에서는 많은 아티스트들이 그의 노래를 소리 높여 불렀다. 콘서트에 참여한 관객들은 자신이 불렀던 노래가사처럼 살다 떠난 크루그의 슬픈 죽음에 눈물로 애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크루그의 팬과 지인, 가족들은 기념비 건립을 위한 기금을 마련했으나, 쉽게 진행되지 않았다. 트베리 시는 오랫동안 예술가의 동상 설치에 소극적이었던 터였고, 트베리의 많은 지식인들은 크루그의 동상 건립에 반대 의사를 밝혔다. 반대파는 크루그 음악의 저속성을 지적했는데, 즉 크루그의 노래들이 다양한 범죄들을 묘사하고 있기에 예술로 보기 어렵다는 견해와 그가 남긴 업적이 사망 이후 지나치게 과대평가되고 있다는 견해가 그들 사이에서 팽배했다.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크루그가 사망한지 5년이 되던 2007년 6월, 그의 동상이 트베리 도심의 라디셰프 불바르에 세워졌다. 그리고 오늘날 기타를 양다리 앞에 두고 벤치에 앉아있는 크루그 동상은 관광객들에게는 기념사진 촬영을 위한 명소로, 크루그의 팬들에게는 그의 음악을 추억할 수 있는 기억의 장소로 기능하고 있다.


<미하일 크루그의 묘(좌) / 라디셰프 불바르의 미하일 크루그 동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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