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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문화로(文化路)
제목러시아 최초의 영화 상영과 극장
분류영화
국가 러시아
날짜2021-04-16
조회수417
첨부파일

영화사에서 처음으로 내러티브가 있는 14분 길이의 흑백무성영화 <달나라 여행>을 만들어서 극영화의 아버지로 평가받는 프랑스 영화감독 조르주 멜리에스. 그는 1895년 12월 28일 뤼미에르 형제가 ‘그랑 카페’에서 영화(정확하게 말하면 단순한 움직임이 있는 활동사진이지만 이 글에서는 ‘영화’의 의미로 사용)를 시네마토그라프를 이용하여 인류 최초로 상업적으로 상영할 때 1프랑의 표를 구입해서 감상(?)한 33명의 관객 중에 한명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직업이 마술사였던 멜리에스는 화면에 펼쳐지는 <기차의 도착>을 보고 “다른 관객과 함께 나는 자그마한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죠 그때, 말이 짐수레를 끌며 우리 앞으로 다가오기 시작했고, 또 다른 기차들과 사람들이 그 뒤를 이어오는 것을 보고 나는 입을 다물었습니다. 곧 거리 전체가 살아 움직이고 있었어요. 우리는 모두 깜짝 놀라 입을 벌린 채 거기에 앉아 있었지요”라고 소감을 표현했다. 이 같은 경험을 계기로 영화에 대한 흥미와 막강한 파급력을 예견하고 멜리에스는 마술사를 접고 영화판에 뛰어 들었다.


<조르주 멜리에스>


1896년 니즈니노보고로드 세계박람회에서 뤼미에르 형제의 <기차의 도착>을 본 작가 막심고리키도 영화를 처음 접했던 조르주 멜리에스처럼 기존의 개념과는 전혀 다른 혁신적이고 혁명적인 새로운 예술을 보고 놀라움과 흥분이 가득했다. 막심고리키는 이날의 인상을 <니즈니노브고로드 신문>에 “시네마토그라프는 움직이는 사진입니다. 전등 한 뭉치를 큰 화면에 던져 어두운 방에 놓으면 화면의 캔버스에 큰 사진이 나타납니다”라고 영화를 본 소감을 소개하면서 “놀라운 독창성을 고려할 때 이 발명은 확실히 널리 보급” 될 것으로 예감했다. 막심고리키의 예상은 옳은 것으로 판명되었는데, 러시아 대도시의 영화 상영은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하였고, 값싼 오락이 점차로 개발, 진화하여 거대한 시장이 러시아에 형성될 것으로 확신한 미래의 러시아의 영화 사업가들은 영화 제작과 영화관 건설 사업에 뛰어 들었다. 사실 막심고리키가 새롭고 혁신적인 예술인 영화를 처음으로 본 러시아 사람은 아니었다. 러시아에서 영화를 가장 처음으로 접한 이들은 당시 제정러시아의 수도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민들이었다.

러시아 영화의 시작: 아쿠바리움 극장

19세기 말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그 당시 유행을 선도했던 도시 파리보다 모던한 면에서 뒤처지지 않았다. 상기했듯이 파리의 <그랑 카페>에서 프랑스 관객들은 뤼미에르 형제의 전설적인 기차 도착에 충격을 받았는데, 그 이듬해 봄 최초의 영화 촬영 및 영사장치인 시네마토그라프는 이미 러시아에 도입되었다. 뤼미에르 형제의 발명품은 파리보다 5개월 정도 늦은 시점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선보였는데, 기술적 진보와 당시 혁신의 상징인 시네마토그라프가 연출하는 활동사진을 보는 것은 멋스러운 스타일을 즐겼던 세계시민적인 성향을 가진 페테르부르크의 시민들(대부분 귀족들이지만)로서는 당연한 문화적인 행사였을 수도 있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아쿠바리움(1896년)>


러시아에서의 최초의 영화 상영은 1896년 5월 4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세련된 장소 중 하나인 <아쿠바리움(Аквариум) 정원 극장>에서 열렸다(러시아는 이날을 러시아 영화역사에서 러시아 영화의 시작일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러시아에서 ‘영화의 해’로 지정된 2016년에 재개관된 ‘렌필름’ 기념식도 러시아 영화상영 120주년 기념일인 5월4일에 진행되었다). <아쿠바리움 극장>에서 상연한 영화는 뤼미에르 형제 팀이 제작한 <기차의 도착>, <물 뿌리는 소년> 등이었다. 상영시간은 두 번의 휴식 포함해서 30분을 넘지 않았는데, 이날 선보인 영화중에서 <기차의 도착>은 러시아 관객들 사이에서 충격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이 날의 영화 상영을 본 관객들 중에서 어린아이들이 포함되어 있어서 <기차의 도착>이 상영되었을 때 기관차가 청중으로 바로 돌진하는 느낌을 받은 관객들의 전체 공포지수는 높았을 것이다. 당연히 그 당시 러시아 관객들은 조르주 멜리에스처럼 엄청난 크기와 속도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열차의 애니메이션 이미지를 심리적으로 인식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원래 <아쿠바리움 극장>은 견학과 강의를 기본 프로그램을 하는 거대한 수족관 복합체(현대 해양 수족관과 같은)를 만들려고 했는데, 극장건설로 계획은 변경되었다. 결국 유리로 된 아름다운 건물의 주요 거주자는 물고기가 아니라 사람들이 되었다. 당시 가장 유행하였던 에스트라다 공연을 보면서 음식을 즐길 수 있는 ‘레스토랑형 극장’으로 개관한 <아쿠바리움 극장>은 유명뮤지션들이 공연하였다. 특히 이 극장에서 리나 카발에르(Лина Кавальер)같은 오페라와 오페레타 스타들도 공연을 하였다.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 상영도 단독으로 이루어지 않고 극장의 인기 오페레타 <알프레드 파샤>(Альфред-паша)의 중간휴식시간에 관객들에게 보여주었다. 


<최초의 영화상영관 아쿠바리움의 역사적 유적>


영화가 상영된 <아쿠바리움 극장>의 개관은 1896년이었는데, 영화관은 단독 건물로 만든 것은 아니고 당시 넵스키 거리 46번지 유명 상품을 구입 할 수 있는 빠사쥐(Пассаж)건물 안에 있었다. 이 빠사쥐 건물은 페테르부르크의 유명 백화점 ‘가스치니 드보르(Гостиний двор)’의 맞은편 건물에 위치하였다. 달리 말하면 <아쿠바리움 극장>은 밀집된 도시 개발로 고골의 <넵스키 대로>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아주 화려한 상점들 및 미용실 등에 포위되어 있었다. 다른 건물에 세는 사는 형식으로 영업을 시작한 아쿠바리움은 자신을 둘러싼 화려한 건물의 위세에 눌려 존재감을 얻기도 전에 극장으로서의 생명을 잃어버린 결과를 가지고 왔다. 넵스키 거리의 다양한 외관을 가진 수많은 건물들 사이에서 존재감을 상실한 <아쿠바리움 극장>은 러시아 최초의 영화 상영 장소라는 역사적 가치를 잃어버렸다. 그리고 극장은 빠르게 파산했다. 그 이후 <아쿠바리움 극장>은 1907년 첫 번째 미인 콘테스트 중 하나 인 “가을 미녀 전시회‘등의 이벤트 행사가 열렸는가 하면, 1912년에는 러시아 최초의 인공 스케이트장이 이 극장의 한 켠에 개장되기도 하면서 심한 부침을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의 <렌필름> (Ленфильм)이 들어오기 전까지 아쿠바리움의 놀이동산은 1923년까지 존재했다. 놀라운 우연의 일치로 상트페테르부르크 영화의 요람은 영화 산업의 첫 번째 기관 중 하나인 <렌필름>을 탄생 시켰다.
 

모스크바 최초의 영화관

최초의 모스크바 영화관은 1897년 12월 26일에 붉은 광장의 굼백화점(ГУМ) 내부에 문을 연 <일렉트릭 극장>(Электрический театр)이다. 이 영화관은 오후 2시부터 11시까지 영업했는데, 1시간 반 마다 영화를 상영했다. <일렉트릭 극장>은 영화를 되감는 동안 서비스로 들려준 축음기의 음향, 극장을 장식한 아름답고 풍부한 장식과 부드러운 안락의자로 러시아에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새롭게 탄생한 예술의 장르를 고급적인 분위기와 편안한 상태에서 관람하는 대가는 엄청났다. <일렉트릭 극장>극장의 표 가격은 좌석의 위치에 따라 달랐다. 스크린과 제일 가까운 첫 번째 줄의 좌석의 경우 가격은 약 1루블 10코페이카, 두 번째 및 세 번째 줄의 좌석은 75코페이카, 그 외 다른 모든 좌석은 55 코페이카였다. 그 당시 모스크바 노동자의 급여는 한 달에 35 루블이었고, 프랑스 바게트 비용은 5코페이카였다. 현재 우리나라의 화폐가치를 대비해서 설명하면, 예를 들어 서울 거주 직장인의 평균임금을 300만원이라고 계산하면, 영화관 1회 방문 비용으로 1인당 약 10만 원 정도 지불해야 된다는 계산이 나오니, 정말로 미친 가격이었다.
  

<일렉트릭 극장이 위치한 모스크바 굼백화점>


20세기 초기의 러시아 영화관의 풍경들

러시아에서 ‘극장에서의 영화 상영과 영화 감상’은 새로운 유행으로 대도시 위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이미 1913년에 러시아에는 1,412개의 영화관이 만들어졌다. 그 중 134개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67개는 모스크바에 있었다. 영화는 계속 해외에서 수입되었지만, 러시아 영화는 이미 20세기 초에 러시아 대중들에게 확실한 여가로 결실을 맺었다. 영화 티켓 가격이 고가였지만 영화는 특히 모든 연령대의 어린이들이 즐겨 찾는 엔터테인먼트 장소가 되었다. 러시아 학생들은 마치 환상 속으로 들어가는 효과를 주는 영화감상의 비용을 마련하기 위하여 아침을 굶기도 했는데, 이 방법은 그나마 건전한 것이었다. <활동사진>을 보기 위해 수업을 빠지는 것은 영화광-학생들에게는 당연한 것이었고, 심지어 영화표를 사기 위해 일부 학생들은 거리에서 돈을 훔치기도 했다. 1911년 모스크바 극장대표자 회의에서 극장소유자들은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영화관 방문자의 약 40%가 어린이라는 통계를 공유했다.

1910년대 초 러시아 대도시의 모든 주민들에게 상설영화관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영화가 어린 학생들에 끼치는 부정적인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20세기 초 러시아에서는 영화에 대한 검열이 존재하지 않아서, 도덕적이고 관점에서 선을 넘은 영화의 내용은 종종 위험 수준까지 도달했다. 살인, 절도 등 모든 종류의 범죄 요소는 물론 심지어 포르노 요소까지 영화 속으로 들어왔다. 즉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요소가 영화의 주요 주제가 되면서 제정 러시아 정부에서 영화상영시 어린 관객들의 출입을 금지하려는 시도가 있었는데, 모스크바 및 페테르부르크 소재 영화관에서는 어느 정도 출입제한이 지켜졌다. 그러나 지방의 영화관은 상대적으로 이러한 규제에서 자유로웠다. 그러다 보니 어린 관객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지방영화관으로 원정영화관람을 가는 경우가 많았다. 지방 도시 대부분의 영화관에서는 모든 콘텐츠의 영화를 어린아이들까지 침착하게(?) 시청 할 수 있었다.

영화가 인기 여가로 확산되면서 영화를 보려는 관람객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남에 따라 20세기 초의 러시아의 영화관에서는 상당한 불편함이 관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영화도입시기만 해도 비교적 쾌적한 수준을 가진 극장이 많이 개관했지만, 영화를 보려는 관객이 늘어나면서 후발주자로 만들어진 극장의 관객 홀은 비좁고 통풍이 잘 안되었다. 여기에 영사기가가 매우 빨리 가열되어 극장 내부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답답했다. 이러한 불편한 영화관람 환경을 더욱 더 열악하게 만든 것은 ‘입석관람권’의 도입이었다. 당시 영화관 경영자들은 좌석 수에 눈을 돌리고 좌석 가격보다 낮은 가격에 ‘입석’표를 팔았는데, 관객은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이 들어와서 영화관 홀은 사람들로 미어터졌다.

영화극장의 엄청난 과밀화는 또 다른 문제를 야기했는데, 극장에서의 소매치기의 전성기를 가져다 준 것이었다. 대부분 어린이로 이루어진 전문 소매치기단에게는 영화극장에서의 돈은 너무나 쉬운 작업의 정석이 되었다. 이러한 영화관의 소매치기의 폐해는 그 당시 신문에서도 지적되었는데, <옴스크 소식>(Омский вестник)은 “영화관에서 타인의 재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주머니를 청소하는 것에 대한 방문객들의 끊임없는 불만으로 행정부는 ‘주머니를 관리 하십시오’라는 명판을 영화관 내부 벽에 걸도록 행정 조치했다. 그리고 영화 관람객은 자신의 지갑을 손에 꼭 쥐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극장의 과밀함과 혼잡성을 이용한 범죄에서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라고 기사를 적고 있다.


<카미유 세르프>


러시아 최초의 영화상영 기획자 카미유 세르프

러시아에서 최초로 영화 상영을 기획한 인물은 프랑스인 카미유 세르프였는데, 뤼미에르 형제 회사에서 일했던 카메라맨이었다. 카미유 세르프는 프랑스에서 시네마토그라프를 통해 영화를 시연한지 5개월 후인 1896년 5월 4일에 그의 조수와 함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다. 그는 도착 한 날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아쿠바리움 극장>에서 영화를 상영했다. 그리고 러시아에서의 영화 상영은 5월 6일 장소를 모스크바로 옮겨서 솔로드니코프 극장에서 계속되었다. 같은 해 5월 26일에는 영화의 사업성을 확신한 러시아 기업가들은 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쥐 여름 극장에서 첫 번째 공개 쇼를 열었고, 6월 말에는 유명한 니즈니노브고로드 박람회의 명소들 사이에서 시네마토그라프가 등장했다.

카미유 세르프는 러시아 영화사에서 최초의 영화의 제작자로도 이름을 올렸다. 그가 만든 영화는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 행사였는데, 러시아 영화사에서 최초의 영화(다큐멘터리)로 평가 받았다. 카미유 세르프와 그의 조수들은 총 4일 동안 이 영화를 촬영했는데, 영화 속에 등장하는 니콜라이 2세는 자신의 일기에 영화에 대하여 ‘흥미롭다, 우수하다, 웃기다’라는 형용어로 영화에 대한 우호적인 감정을 적고 있다. 카미유 세르프가 촬영한 대관식 축하 행사는 1896년 7월 말 러시아에서 상영되었으며 대중들 사이에서 특별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1896년 7월 25일<모스크바 통보>와 1896년 7월 26일의 <모스크바 신문>의 기사에 따르면, 이 영화가 상연된 극장에서 관객들은 황제 폐하의 영상을 다시 보여 달라고 소란스럽게 요구했고, 러시아 국가를 두 번이나 불렀다. 또한 영상을 본 관객들은 그들이 본 스크린 뒤에 무엇이 있는지, 움직이는 활동사진의 어떤 악마적인 힘이 작용하고 있는지에 대해 설왕설래가 많았다고 신문에서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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