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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러시아 최초 올림픽 메달리스트 니콜라이 파닌-콜로멘킨
분류기타
국가 러시아
날짜2021-04-16
조회수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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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올림픽위원회의 탄생과 올림픽 참가 역사의 시작 

러시아는 역대 올림픽 메달 성적 최상위권에 속하는 스포츠 강국이다. 국가올림픽위원회가 설립된 1911년 이후로 러시아 선수들은 국제무대에서 엄청난 성과를 거두며 냉전 시대에 요구되었던 정치적 목적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고, 스포츠 분야에서 러시아인들의 기량과 명성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역대 올림픽 메달 집계 현황을 보면, 러시아는 동계 8회, 하계 7회 우승국으로, 각각 1회, 15회 우승을 거머쥐었던 미국에 이어 세계 2위를 기록하고 있다. 러시아는 하계 종목 중 레슬링, 육상, 펜싱, 체조와 동계 종목 스키, 피겨스케이팅, 바이애슬론에서 두각을 보여왔으며, 러시아 제국의 시절부터 소비에트 시대를 거쳐 오늘날까지 총 1581개의 메달(금메달 592개, 은메달 500개, 동메달 489개)을 확보했다.

이러한 성과는 국가올림픽위원회의 공식 출범 이후, 아마추어 스포츠를 육성하고 종목별 단체를 체계적으로 지도·감독할 수 있었던 덕분이었으나, 올림픽 역사 초기 러시아에서 이와 같은 체육기구의 설립은 결코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1896년 제1회 아테네올림픽이 치러졌던 당시부터 올림픽위원회가 설립된 1911년까지 총 세 차례의 시도와 좌절이 있었다.

첫 번째 시도는 러시아 황실 육군부대 소속 알렉세이 부토프스키(А. Бутовский) 장군에 의해 이루어졌다. 1892년 프랑스 여행길에 올랐던 그는 올림픽 부흥 운동을 시작해 국제올림픽위원회(IOC)를 창설한 피에르 드 쿠베르탱(Pierre de Coubertin)을 만난 바 있다. 쿠베르탱은 부토프스키에게 러시아 선수들의 올림픽 참가를 위해 IOC에 가입할 것을 제안했고, 부토프스키는 1894년 6월 개최된 파리 국제회의에서 쿠베르탱의 호명을 받아 IOC의 회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그렇게 그는 13명의 국제 올림픽 위원회 최초 구성원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러시아 내 국가올림픽위원회 설립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부토프스키는 쿠베르탱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러시아 사회는 체육에 대해 무관심합니다. 우리 언론은 체육 문제를 다루는 데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국가올림픽위원회 설립에 대한 희망을 저버리지 않고 있습니다.”(1895년 2월 16일, 쿠베르탱에게 보낸 서한 中)
 

이와 같은 편지의 내용을 볼 때, 당시 러시아 사회에서 체육기구 설립이 순조로이 진행되지 않았음을, 러시아 선수들의 올림픽 진출에 국가적 차원의 지원과 응원이 전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이듬해에 개최된 1896년 아테네올림픽 본선에는 단 한명의 러시아 선수도 진출하지 못했지만, 부토프스키는 IOC 위원 자격으로 아테네로 향했다. 그는 아테네에서 올림픽 현장을 몸소 경험하며 향후 자신이 고국 땅에 돌아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히 인식했다고 한다.


<1894년 4월 10일 개최된 올림픽위원회 국제회의>
위. 겝하르트(독일), 구트-야콥스키(체코), 케메니(헝가리), 발크(스위스)
아래. 비켈라스(그리스), 쿠베르탱(프랑스), 부토프스키(러시아)



<쿠베르탱과 부토프스키 10루블 기념주화, 1993년>


국가올림픽위원회를 설립하려는 두 번째 시도를 감행한 인물은 부토프스키의 동료이자 아테네올림픽 예선전에 참가했던 유일한 러시아 선수 니콜라이 리테르(Н. Риттер)였다. 리테르는 올림픽 참가에 필요한 여행경비 마련을 위해 <키예프랴닌Киевлянин> 신문 특파원으로 일할 정도로 열정이 넘치던 선수였다. 아테네에 도착한 그는 레슬링, 사격, 펜싱 종목에 출전하기 위해 올림픽 사무국에 신청서를 제출했다. 예선전이 끝난 뒤 그가 서신을 통해 “러시아인은 거의 없습니다. 움직이는 표적 사격과 레슬링에서 테스트를 통과했습니다. 모든 총알이 표적을 명중했고 레슬링에서도 경쟁자들을 이겼습니다.”라며 자신감을 피력했으나, 편지 내용과 달리, 정작 본선 대회에는 참가하지 않았다고 한다. 올림픽 이후 리테르는 러시아에 돌아와 올림픽 홍보에 열정을 쏟았다. 그는 신문과 잡지에 올림픽 관련 기사를 쓰거나 강의를 하며 신체 단련의 중요성과 1896 아테네올림픽의 이모저모를 페테르부르크 시민들에게 전했다. 또한 1897년 2월, 리테르는 올림픽 관련 부서 신설과 체육위원회 설립을 위해 정부기관에 청원서를 제출했으나, 그의 프로젝트는 재정적 문제로 인해 거부되고 말았다.

리테르의 시도가 무산된 지 반년가량 흐른 1897년 10월 27일, 올림픽을 통해 러시아 선수들을 단결시키려는 세 번째 시도는 페테르부르크의 알렉세이 레베데프(А. Лебедев)에 의해 이루어졌다. 레베데프를 중심으로 모인 10개의 스포츠 협회 대표들은 1900년 파리에서 열릴 올림픽에 러시아 선수들의 참여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 당시 단체 및 개별 후보자 선발 프로그램 관련 논의는 1년 넘게 이어졌고, 공정한 선수 선발을 위해 투표를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국가의 지원이 부재한 상황에서 러시아 선수들은 파리올림픽 참가에 의의를 두었을 뿐, 의미 있는 성과를 보여주지는 못했다.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이 흐르고 난 1911년 3월 16일, 러시아 수상인명구조협회가 위치한 페테르부르크 사도바야 거리 어느 저택에서 러시아 내 34개 스포츠 협회 대표들이 모였다. 올림픽위원회를 창설하기 위한 오랜 시도와 노력이 성공의 결실을 이루는 순간을 드디어 맞이하게 된 것이었다. 올림픽위원회 초대 의장으로는 슬라브 언어학자 뱌체슬라프 스레즈네프스키(В. Срезневский)가 취임했다. 그는 곧 올림픽위원회 헌장을 마련했고, 1912년 5월 17일, 러시아 제국은 이를 승인했다. 이는 러시아의 올림픽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기념비적 순간이었다.

한편, 비교적 늦은 시기인 1912년에야 올림픽위원회가 설립되었지만, 그때까지 러시아 메달리스트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러시아가 최초로 올림픽에 참가한 것은 1900년의 일로, 율리안 미쇼(Ю. Мишо)와 표트르 자코보르(П. Заковорот)가 파리올림픽 펜싱 종목에 참가한 바 있으며, 1908년 런던올림픽에서는 러시아 선수가 처음으로 메달을 획득했다.


러시아 피겨스케이팅의 선구자 파닌-콜로멘킨 

현대 피겨스케이팅은 1860년대 중반 미국의 잭슨 헤인즈(Jackson Haines)가 발레에 기반을 둔 예술적 동작을 고안하면서 그 기초가 다져졌으며, 국제 스포츠계에서 피겨스케이팅이 정식 종목으로 인정받은 것은 1891년 제1회 유럽피겨선수권대회가 개최된 이후부터다. 그 후 1892년에는 국제빙상경기연맹(ISU)이 결성되었고, 1896년 제1회 세계피겨선수권대회가 페테르부르크 유수포프 정원에서 개최되었다. 그리고 20세기 들어서는 피겨스케이팅이 올림픽 역사에 처음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이는 1908년에 개최된 제4회 런던 하계올림픽에 처음 등장했고, 1924년에는 동계올림픽이 창설되면서 동계종목의 꽃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처럼 피겨스케이팅의 올림픽 역사가 갓 시작되던 무렵 러시아의 잠재력을 보여준 선수가 있었다. 바로 니콜라이 파닌-콜로멘코(Н. Панин-Коломенкин)다. 그는 올림픽에 출전하기 전인 1903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세계 챔피언 울리히 살코우(Ulich Salchow)에 이어 2위를 차지하기도 했고, 1904년과 1908년 두 차례 유럽선수권대회에서 은메달과 동메달을 획득한 바 있는 소련 피겨의 선구자였다. 그렇다면 오늘날 피겨스케이팅의 선구자이자 러시아 올림픽의 상징이 된 그의 업적을 보자.


<러시아 최초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파닌-콜로멘킨> 


파닌-콜로멘킨은 20세가 되던 1891년, 페테르부르크 피겨스케이팅의 메카 유수포프 정원에서 스케이트를 타기 시작했다. 당시 페테르부르크 요트클럽에서 비공식 세계 챔피언으로 언급되고 있던 알렉세이 레베데프의 지도하에 스케이팅 기술을 습득했고, 1901년 러시아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해 ‘러시아 최초의 피겨 스케이터’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1903년에는 페테르부르크 스케이팅 애호가 협회가 조직한 세계선수권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서 파닌-콜로멘킨은 세계 유명 선수들과 경쟁해야 했는데, 향후 꽤 오랜 시간 동안 그의 경쟁자로 존재했던 울리히 살코우를 처음 대면하게 된 것도 이때였다. 사실 스웨덴 출신의 살코우는 ‘한쪽 다리를 사용해 뒤로 돌아 점프한 후, 공중에서 회전하고 다른 쪽 다리로 착지’해 연기를 이어나가는 기술을 고안해낸 인물로, 이 동작이 오늘날 ‘살코우 점프(Salchow jump)’라는 이름으로 남아있을 만큼 그는 피겨스케이팅 분야에서는 역사적 인물이기도 하다. 파닌은 살코우와의 첫 만남에서부터 패배해 2위에 머물었는데, 이러한 결과는 신예 선수였던 파닌의 경력과 기량을 고려할 때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살코우와의 만남과 패배, 생각보다 저조했던 성적은 파닌으로 하여금 스케이팅 기술연구와 연습에 매진토록 하는 자극제가 되었다. 약 5년의 시간이 흘러 1908년 2월, 페테르부르크에서 세계 최고의 피겨 스케이터들이 참가한 대회가 열렸다. 그때 파닌-콜로멘킨의 기량은 전과 비교할 때 월등히 향상되어 있었고, 그 당시 이미 7번의 세계 챔피언을 거머쥔 살코우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동년 10월, 역사상 처음으로 피겨스케이팅이 올림픽 프로그램에 이름을 올린 제4회 런던올림픽이 개최되었다. 아르헨티나, 영국, 스웨덴, 러시아, 독일, 미국 등 6개국을 대표하는 21명의 선수가 런던에 도착해 남녀 싱글, 스페셜 피겨, 페어 스케이팅의 분야에서 고난도의 기술을 보여주었다. 파닌이 출전했던 남자 싱글 쇼트 부문 경기에서 그는 살코우에게 1위를 내어주고 2위를 기록했는데, 파닌은 이와 같은 결과에 승복하지 않았다. 다섯 명의 심사위원 중 가장 낮은 점수를 준 위원들이 스웨덴 출신이라거나 울리히의 오랜 친구였다는 사실을 근거로 이 결과를 편파판정으로 간주했으며, 결국 부당한 판정에 대한 항의의 차원으로 프리 부문에서 기권했다.(실제로 스위스 출신 심사위원 휴겔(Г. Хюгель)은 살코우와 개인적인 친분을 맺고 있었고, 영국 국적의 심사자 그레나디어(Х. Гренадер)는 스웨덴 출신이었다.) 다음 날 파닌은 ‘스페셜 피겨(Special figure)’ 부문에 출전했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피겨스케이팅의 구성 요소였던 ‘스페셜 피겨’는 오늘날 사라진 종목으로 컴펄서리 피겨(Compulsory figure)와 유사하게 예술성보다는 기술성에 초점을 두는 부문이다. 선수는 얼음 위에서 하나의 스케이트 날로 자신이 고안한 정교한 패턴이나 무늬를 표현해야 하는데, 이 디자인에는 장미, 별 등과 같은 정교한 장식이 포함되었다. 여기에서 240점 만점에 219점을 받은 파닌은 삼사위원단의 만장일치로 살코우를 제치고 금메달 획득했다!


“파닌(러시아)은 난이도 높은 패턴을 아름답고 가볍게 구현했으며, 자신의 라이벌들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그는 수학적 정밀성의 측면에서 가장 완벽한 그림을 얼음 위에 조각했다.” (제4회 올림픽 결과 보고서 中)


<좌. 런던올림픽에서 선보였던 스페셜 피겨 패턴 / 우. 파닌-콜로멘킨의 초상>


1908년 이후 파닌은 피겨선수로서 올림픽에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코치로서 후학양성과 학자로서 피겨스케이팅 교육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우선 레닌그라드 체육연구소에 피겨스케이팅 분과를 개설했다. 그는 해당 분야 전문가들과 교사들을 고용해 소비에트 피겨스케이팅의 과학적이고 실용적인 기반을 만들었다. 특히 그는 선수뿐 아니라 트레이너 양성의 중요성을 인식했는데, 그 결과 소련 국가대표팀을 이끌었던 이고르 모스크빈(И. Москвин), 타마라 모스크비나(Т. Москвина), 알렉세이 미쉰(А.Н. Мишин)등의 유능한 트레이너들을 배출할 수 있었다. 그렇게 다져진 소련 피겨스케이팅은 1920년대 이후 유리 젤도비치(Ю. Зельдович), 나탈리아 븨콥스카야(Н. Быковская), 표트르 오를로프(П. Орлов), 삼손 글랴제르(С. Глязер), 콘스탄틴 리하레프 (К. Лихарев), 타치야나 그라나트키나(Т. Гранаткина) 등 수많은 피겨 스타들을 배출해냈으며, 오늘날까지도 러시아는 올림픽 무대에서 좋은 성과를 내고 있다.

러시아 최초의 올림픽 메달리스트, 동·하계 올림픽에 모두 출전했던 선수, 러시아 국가대표 피겨선수이자 국가대표 사격선수! 이는 모두 파닌-콜로멘킨의 업적을 설명해주는 수식어들이며, 이러한 이력을 볼 때 그가 지금까지도 러시아인들의 기억 속에 ‘최초이자 최고의 올림픽 스타’로 남아있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선수로서 남긴 업적을 떠나, 러시아 피겨 발전의 초석을 마련했다는 점이 그가 남긴 진정한 업적이 아닐까 한다. 훌륭한 선수를 육성하고 배출하는 일, 그 선수들을 보살피고 훈련하는 훌륭한 트레이너들을 육성하는 일에 몰두했던 그가 이 모든 일들을 체계화하기 위해 설립한 피겨 전문기관은 러시아 피겨스케이팅의 가파른 성장을 가능케 했던 파닌의 위대한 유산일 것이다. 이처럼 파닌에서 시작된 러시아 피겨스케이팅 역사는 파닌이 남긴 유산과 함께 쉼 없는 도약으로 이어져 왔으며, 어느덧 그 역사를 시작한지 100년이 넘은 오늘날까지도 러시아는 피겨스케이팅의 최강국이라는 위상을 확고히 하고 있다.


<좌. 파닌-콜로멘킨 50루블 주화, 1993년 / 우. 파닌-콜로멘킨 우표,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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