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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문화로(文化路)
제목누구에게 ‘기우는 결혼’인가?
분류회화
국가 러시아
날짜2021-04-01
조회수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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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 푸키레프(В. Пукирев)의 <불평등한 결혼 Неравный барк>은 결혼을 소재로 삼은 러시아 회화 중에서 손꼽히는 작품 중 하나이다. 개인적으로는 <불평등한 결혼>보다는 <기우는 결혼>이라는 번역이 이 작품의 핵심을 좀 더 잘 드러내 준다고 생각한다. 


<기우는 결혼 (Неравный барк)> (В. Пукирев 作, 1862)


결혼이라는 상당히 세속적인 테마를 다루면서도, 동시에 당시 러시아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정면으로 조명하고 있는 이 작품은 이제 갓 학교를 졸업한 풋내기 작가 푸키레프에게 단번에 큰 명성을 안겨다 주었고, 예술원은 그에게 ‘교수’의 직함까지 선사했다.

19세기 중반 이후 러시아 내에서는 소위 ‘거래에 의한’ 결혼이 암암리에 성행했다. 푸키레프의 그림은 이러한 현실을 정면으로 겨냥하고 있다. 그림 속 신부로 등장한 가난한 집 여식은 거의 팔려가다시피 나이 많은 부유한 노인네의 신부가 되어 결혼식장에 들어섰다. 그 대가로 가세가 기울었던 신부의 가문은 다시금 경제적 안정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림 속 신부는 현실을 체념한듯한 얼굴로 자신이 처한 상황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듯하다. 화관을 올린 베일과 순백색의 레이스가 촘촘하게 둘러진 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모습은 순결함을 넘어서서 언뜻 성모마리아의 모습과도 어느 정도 겹쳐지는 듯 하다. 이러한 형상은 그녀의 앞에 위치한 주교의 형상과 대비를 이루며 더욱 부각되고 있다.

대부분 이 그림에서 주목을 받는 인물은 신부와 그녀의 옆에 서 있는 ‘나이든 신랑’이다. 이 작품의 제목이 <기우는 결혼>이라는 점 역시 신랑과 신부를 더욱 주목하게 만드는 요소이다. 실제로 체념에 가까운 순종하는 모습으로 결혼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비춰지는 신부와 이러한 신부의 모습을 지긋이 내려다보는 나이든 신랑의 모습에서 이 결혼이 모종의 계약에 의한 기우는 결혼이라는 점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다. 푸키레프는 러시아 결혼식 전통 중 하나인 신랑과 신부가 든 초를 통해서도 이 결혼이 ‘기우는’ 결혼이라는 점을 넌지시 드러내고 있다. 이미 앞선 몇몇 글에서 신랑과 신부를 환대하는 음식 중 하나인 ‘카라바이’를 누가 더 많이 베어 물었는가, 혹은 결혼식에서 누가 더 높이 초를 들고 있는가를 통해 앞으로 이들 가정에서 누가 주도권을 쥐게 될 것인지를 예측할 수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 그림에서 신부가 든 초의 위치는 턱없이 한참 아래로 떨어져 있으며, 신랑이 든 초는 훨씬 높은 곳에서 타오르고 있다. 이미 시작부터 ‘불평등’하고 ‘기우는’ 결혼 생활이 시작되고 있는 듯 하다.

하지만 정작 이 그림에서 더욱 주목해야 볼 부분이 있으니, 다름 아닌 신부의 손끝이다. 신부는 결혼식 받지를 받아서 끼기 위해 주례를 선 주교를 향하여 조심스럽게 자신의 오른손을 내밀고 있다. 그런데 신부의 앞에 선 주교의 모습은 전혀 성스럽게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진 주교의 형상은 순결함을 상징하는 신부의 하얀 드레스와 극명한 대비를 이루면서, 그 모습이 마치 파우스트에게 거래를 제안하는 메피스토텔레스를 연상시킨다. 무언가를 움켜쥔 듯한 주교의 검은 손은 마치 인간이 갈구하는 욕망을 해결할 열쇠를 숨기고 있는 손처럼 보이고, 그런 검은 주교의 손을 향해 내민 신부의 창백한 손가락은 <천지창조>로 잘 알려진 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에서 유일신과 교감하는 아담의 손가락과 비교된다. 일견 수줍게 비춰지는 신부의 손가락은 마음 속 저 깊은 곳에 그동안 눌려왔던 자신의 숨겨진 욕망을 성취하려는 목적으로 망설임 반 두려움 반의 심정으로 자신의 앞에 선 ‘메피스토텔레스’를 향하는 듯 하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이 작품의 명칭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과연 누구에게 기우는 결혼인가?’ 


<천지창조 (The Creation of Adam)> (미켈란젤로 作, 1508~1512)


표면적으로 볼 때, 이 결혼은 가문을 일으키겠다는 명분 하나로 거의 팔려가다시피 하는 어린 신부 쪽이 기우는 것처럼 보여진다. 한 때 그녀는 수많은 낭만주의 소설과 시를 읊조리면서, 문학 작품 속 낭만적 여주인공의 모습을 자신과 겹쳐보았을 것이다. 지금은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낭만주의 소설에 등장하는 비련의 여주인공으로 자신을 상상하면서 이 자리에 섰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그녀의 앞에 놓인 미래를 알 수 없다. 푸시킨의 ‘두냐’와는 다소 다른 케이스이긴 하지만, 푸키레프의 어린 신부 역시 앞으로 더이상 힘든 걸레질과 가족들 뒷바라지에 시달리지 않고 편안한 귀부인의 삶을 누리게 될 가능성이 훨씬 크다. 남들이 뭐라 손가락질하든, 혹은 질투와 시샘의 눈길을 보내든 말든, 아마도 그녀는 늙은 신랑과 더불어 나름대로 자신만의 행복을 찾아가며 현실에 적응해나가게 될 것이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나이든 신랑이 어린 신부의 눈치를 봐야 할 것이다. 어린 신부가 가진 가장 최대의 무기는 다름 아닌 ‘젊음’이다. 화폭 속에 위치한 다양한 등장인물 중에 유일하게 어린 신부의 얼굴만이 주름살과 흠결 하나 없이 빛나고 있다. 심지어 수줍게 드러난 그녀의 어깨와 두 팔마저 아직까지는 여인의 것이라기보다는 오동통한 어린아이의 것에 더 가깝다. 노령의 신랑은 젊음이라는 가장 큰 무기를 상실한 채, 벌써부터 신부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 그녀는 과연 이 거래를 받아들일 것인가?

자세히 들여다보면, 늙은 신랑의 시선이 머무는 곳 역시 신부의 얼굴이 아니라 신부의 손끝이다. 뿐만 아니라 신랑의 뒤편에 있는 신랑 측 하객들 역시 신부나 결혼식 그 자체에 흥미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다들 신부의 손끝에 시선을 집중하면서, 이 거래를 받아들일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신부의 뒤편에 서있는 신부 측 하객들은 마치 이 결혼을 애써 부인하려는 듯 하나같이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다. 


<기우는 결혼> 부분도

그림 속에 또 하나 주목할 형상이 있는데, 바로 숨겨진(!) 신부들이다. 그 중 한 명은 노령의 신랑 어깨 뒤편에 서서 무섭게 신랑을 노려보고 있다. 지금까지 대부분 이 중년 여성을 ‘기우는 결혼’을 주선한 중매쟁이 정도로만 해석해왔다. 하지만 여성의 머리 위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뭔가 희미한 장식이 얹어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신부의 화관처럼 풍성하지는 않지만, 분명 신부의 것과 유사한 화관이 베일과 함께 이 중년 여인의 머리 위에도 얹혀있다. 신부의 들러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다. 게다가 중년 여인이 입고 있는 의상 역시 마치 신부의 드레스를 시샘하듯 흰색에 가깝다. 하지만 신부의 드레스처럼 화려하게 치장된 것이 아니라 마치 하얀 천을 두루마기처럼 두른 듯 보인다.

또 한 명의 신부는 정말이지 눈을 부릅뜨고 찾아봐야 발견할 수 있다. 또 다른 신부는 바로 주교의 등 뒤에 서 있다. 어둠에 묻혀서 거의 잘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 앞서 살펴본 중년 여인과 유사한 형태의 화관을 머리 위에 얹고 노령의 신랑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만일 이들이 살아있다면, 조강지처를 내치고 어린 신부를 맞이하는 남편을 향해 ‘두고 보자!’라는 다짐을 거듭하면서 치미는 분노를 억누른 채 이 결혼식을 지켜보고 있을 터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들은 어쩌면 이미 현실의 인물이 아닌, 노령의 남편이 이미 저 세상으로 보내버린 다른 세계의 존재일지도 모른다. 이들의 형상이 특별히 더 짙은 어둠에 묻혀있고, 표정 하나하나까지도 섬세하게 잡힌 다른 인물들과 대조적으로 상당히 희미한 윤곽으로 처리된 점 역시 이를 뒷받침해준다. 화폭 속에 존재하는 다양한 인물 중 그 누구도 ‘늙은 신부’로 분하여 그로테스크한 몰골로 결혼식장에 나타난 이들 두 여성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 것 역시 흥미롭다. 이는 이들 두 명의 ‘늙은 신부’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다른’ 존재라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남편을 두고 먼저 저세상으로 간 과거의 신부들은 아직도 솜털이 보송한 어린 신부를 맞이하는 남편을 도저히 두고 볼 수 없었던 것 같다. 혹은 자신들이 버젓이 살아있는데도 뻔뻔한 결혼을 감행한 남편에게 보란 듯, 수치를 무릅쓰고 한달음에 식장에 달려온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서도 또 한 번 질문을 제기하게 된다. ‘과연 이 결혼은 누구에게 수치인가?’ 현세에 남은 전남편의 부인들, 혹은 버젓이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날 갑자기 뒷방살이 신세가 되어버린 부인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신부를 맞이하는 남편의 결혼식장에 화환까지 챙겨쓰고 달려온 조강지처에게 수치인가? 아니면 기울은 가세를 일으킨다는 명분을 앞세워 어린 희생양처럼 결혼식장에 들어왔지만, 정작 우울한 표정 뒤로 경제적으로 보장된 황금빛 미래를 남몰래 기대하고 있는 어리디어린 신부에게 수치인가? 그렇지 않다면 자신의 재력을 무기 삼아 어린 신부를 거래한 부유한 늙은 남편에게 수치인가?

연구자들은 화폭의 가장 오른쪽에 있는 젊은 남자를 작가 푸키레프로 추정하며, 자신의 자화상을 화폭에 담아낸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푸키레프로 추정되는 인물의 옆에 위치하며 화면 밖 관람자를 향해 시선을 건네는 또 다른 인물은 이 작품의 아이디어를 제공한 푸키레프의 친구 표트르 쉬멜코프(П. Шмельков)로 전해진다. 그런데 쉬멜코프의 얼굴은 평생 결혼에 대해 부정적 태도를 취했던 니콜라이 고골과 어딘지 모르게 닮은 구석을 드러내면서 이 작품의 해석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준다.

이 작품은 1863년 페테르부르크에서 처음 전시되기도 전에 이미 푸키레프의 친구이자 컬렉터인 알렉산드르 보리소프가 사들였다. 이후 보리소프는 자신이 작품을 구매한 이래 10년을 살짝 채우지 못한 1871년에 1,500루블을 받고 파벨 트레티야코프에게 이 그림을 넘겼다. 덕분에 암묵적 메세지가 가득한 푸키레프의 명작은 트레티야코프 갤러리 한쪽에 걸린 채 모든 이들에게 선보여지고 있다. 아마도 트레티야코프 역시 그림 속에 은닉된 이러한 비밀스러운 함의를 읽어내고 명작이라 칭찬하면서 그림을 사들인 것이 아닐까 하고 조심스럽게 추측해보면서, 그의 탁월한 안목에 다시 한번 찬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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