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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문화로(文化路)
제목두 결혼식 혹은 대관식, 그리고 은닉된 진실
분류회화
국가 러시아
날짜2021-03-02
조회수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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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화가들이 예수의 형상 못지않게 즐겨 찾는 묘사 대상이 있었다. 바로 결혼식 풍경이었다. 


<감옥 속 결혼식 (니콜라이 마트베예프 作, 1890)>


위의 그림 속 풍경은 ‘결혼식’이 아니라 마치 ‘대관식’처럼 보인다. 만일 이 작품의 제목이 <감옥 속 결혼식>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왕위쟁탈전에서 밀려난, 혹은 어떤 세력에 의해 비밀리에 추대 중인 ‘숨겨진 왕’의 은밀한 대관식으로 충분히 오해할만한 장면이다. 그림 속에 묘사된 인물들의 디테일이 결혼식보다는 대관식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그림 속 예비 신랑과 신부는 둘 다 머리에 왕관을 쓰고 있으며, 주례를 맡은 사제는 이들을 축복하고 있다. 심지어 이들 결혼식의 증인 겸 감시자로 신랑과 신부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감옥의 교도관들조차 ‘죄인’을 위협하거나 저지하기 위한 총이나 칼을 전혀 소지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사제들과 더불어 이들 ‘애틋한’ 한 쌍의 결혼식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왕관을 씌워주거나 혹은 안쓰러운 시선으로 신랑과 신부를 지켜보고 있을 따름이다. 빛이 거의 들지 않는 감옥 속 어둠은 오히려 창이 드물게 난 정교회 사원의 분위기를 연출하며, 신랑 신부 앞에 길게 세워진 촛불과 성경책, 그리고 이들 우측에 걸려있는 거대한 이콘 덕분에 사원의 분위기는 배가된다. 만일 창 전체를 두르고 있는 창살이 아니었다면 이곳이 감옥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지나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직 때가 차지 않아 세상에 나설 수는 없지만, 앞으로 세상을 다스리고 이끌어나갈 ‘은밀한’ 왕의 대관식을 묘사한 작품으로 충분히 착각하고도 남을 만하다. 실제로 신랑과 신부의 얼굴은 범죄자보다는 온화한 성품의 지식인에 더 근접한 모습이다. 이를 통해 이들 예비부부가 데카브리스트 봉기 혹은 여러 가지 이유에 의해 유배된 정치 사범이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아마도 사제를 비롯하여 신랑과 신부를 둘러싼 일련의 증인들 역시 공식적으로는 유배되고 감금된 이들 ‘정치 사범’에 적대적일 수 있지만, 이러한 은밀한 곳에서 은밀한 추대에 가담하는 것을 볼 때, 마음속으로는 머지않아 이들이 주역이 되는 새로운 세상을 함께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 곧 식을 마치고 정식으로 부부로 선언을 하게 될 신랑과 신부의 발 역시 예사롭지 않다. 가장 많은 축복을 받아야 하는 결혼식 당일, 신랑과 신부는 모두 맨발로 서 있는 상태이다. 특히 수형자 신분인 신랑의 경우, 발목에는 쇠고랑이 채워져 있고, 그 언저리로 희미하게 핏자국처럼 보이는 흔적이 군데군데 눈에 들어온다. 사제가 걸친 붉은 예복의 긴 옷자락 안감이 신랑의 가슴 언저리에 놓이면서 마치 신랑의 가슴팍이 피에 물든듯한 효과를 자아내고 있다. 이는 신랑과 신부에게 씌워진 왕관의 상징과 더불어 이들이 정당하지 않은 방법에 의해 희생된 인물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신랑·신부의 맨발과 감옥이라는 특별한 공간에서 씌워진 왕관은 맨발에 가시면류관을 쓴 채 ‘유대인의 왕’이라는 표지가 붙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랐던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본디오 빌라도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표지를 십자가에 써 붙임으로써 예수와 유대인을 조롱하며 모욕을 주고자 했다. 이에 한술 더 떠서 예수의 동족이었던 유대인들은 ‘유대인의 왕’이 아닌 ‘자칭’ 유대인의 왕으로 고쳐야 한다며 한바탕 소란까지 피웠다. 그런데 주지하다시피 정작 ‘유대인의 왕’이라는 단어는 곧 오실 ‘구원자로서 메시아’라는 뜻을 품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19세기 중반 이후 개혁과 변혁의 목소리가 높아졌던 러시아의 상황과 러시아 민족 특유의 메시아 사상과의 연계 지점이 발견되며, 작품의 원작자인 마트베예프 역시 액면으로 전달되는 그림의 직접적인 의미와 더불어 그 속에 은닉된 의미를 중첩하면서 <감옥 속 결혼식>이라는 명작을 탄생시킨 것이 아닐지 미루어 짐작해본다.

마트베예프의 <감옥 속 결혼식>이라는 작품은 레핀이 작업한 <니콜라이 2세와 대공녀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의 결혼식>이라는 작품과 비교해 볼 때 그 의미가 더욱 선명하게 살아난다. 


<니콜라이 2세와 대공녀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의 결혼식 (일리야 레핀 作, 1895)>


두 작품의 배경과 주인공은 완전히 다르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상당히 닮아있다. 그림을 다시 한번 찬찬히 살펴보면 두 작품 속에서 닮은 듯 다른 점들이 하나둘씩 눈에 들어온다. 먼저 마트베예프의 <감옥 속 결혼식>에서 맨발로 묘사된 신랑·신부와 달리, 레핀의 작품에서는 가지런히 펼쳐진 하얀색 천 위로 황제 니콜라이 2세와 황후의 구두 신은 발이 빼꼼히 나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감옥에서의 결혼식>에서 예비부부의 우측에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며 상당히 정교하고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던 이콘과 달리,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의 대관식>에서는 이콘이 매우 흐릿한 배경처럼 묘사되어 있다.

<감옥에서의 결혼식>의 경우, 비록 그 규모는 소박하나 ‘대관식’이 연상될 정도의 진중함을 지닌 것에 비해, 레핀의 작품은 ‘기록화’적인 측면이 더 강한 그림처럼 다가온다. 황제와 황후의 결혼식을 축복하는 대주교와 성직자들 역시 배경처럼 존재할 뿐, 성스러움의 기조를 지녔다고 보기엔 힘들다. 게다가 주교를 비롯한 성직자들의 지나치게 화려한 의상은 작품 감상자의 시선을 대관식 당사자인 황제와 황후가 아니라, 오히려 이들에게 왕관을 씌워주는 주교와 일련의 무리에게 집중시키게 만드는 효과를 자아낸다.

황제 부부가 결혼식을 올린 겨울 궁전 내 황실교회는 ‘손으로 그리지 않은 구세주’ 형상을 기념하여 지어진 교회이기도 하다. 하지만 레핀의 작품 속에서 이콘은 거의 지워지다시피 뭉개진 상태로 묘사되어 있다. 해당 교회의 내부 구조를 알거나 방문했던 사람들이 아니라면, 이 교회에 ‘손으로 그리지 않은 구세주’ 이콘을 비롯한 여러 이콘이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지나칠 수도 있는 상황이다. 이콘 뿐만 아니라 레핀이 묘사한 니콜라이 황제 부부의 결혼식 장면은 마치 의도하기라도 한 듯이 빛이 바랜 오래된 프레스코화처럼 전반적으로 인물의 디테일이나 색감이 많이 떨어져 보인다. 게다가 결혼식을 축복하기 위해 모인 대신들과 하객들 역시 황제 부부의 결혼식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듯, 하나같이 황제 부부가 아닌 다른 곳에 시선을 두거나 옆 사람과 잡담을 나누는 등 전반적으로 뭔가 상당히 산만한 분위기가 감지된다.

구도적 측면에서 보더라도, 주교 일행이 화면의 거의 절반 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것에 비해, 작품의 주된 묘사 대상이자 주인공인 황제와 황후가 차지하고 있는 공간은 그 위치가 화면의 중앙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발을 딛고 있는 한 자락 천 조각이 황제 부부에게 주어진 공간의 전부라 해도 될만큼 매우 협소하다. 그나마 그 천 조각마저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에게 두 손이 아닌 한 손으로 왕관을 ‘얹어주고’ 있는 어느 불경한 대신에 의해 침범되고 있다. <감옥에서의 결혼식>에서 교도관들이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받쳐 든 왕관을 신랑과 신부에게 씌워주는 모습과 대조되는 장면이다.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의 결혼식을 기록으로 남긴 또 한 명의 화가는 덴마크 출신의 궁정화가 라우리츠 툭센이다. 그가 묘사한 황제의 결혼식 장면은 레핀과 동일한 시각, 동일한 장면을 묘사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른 느낌을 자아낸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하다. 


<겨울궁전 교회에서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의 결혼식 (라우리츠 툭센 作, 1895)>


툭센의 시각으로 재현된 니콜라이 2세의 결혼식은 고증적인 측면에서 볼 때 훨씬 더 뛰어나다 할 수 있다. 레핀의 작품과 달리 디테일이 상당히 선명하게 살아있으며, 어딘지 모르게 어둡고 산만한 분위기가 감지되는 레핀의 그림과 완전히 다른 화려하고 성대한 결혼식 현장이 느껴진다.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의 결혼까지의 여정은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일단 니콜라이 2세의 부모였던 알렉산드르 3세와 마리야 표도로브나가 미래의 황후이자 황태자비였던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를 썩히 맘에 들어하지 않은 탓에, 니콜라이 2세는 오랜 시간에 걸쳐 자신의 부모를 설득해야만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알렉산드라와 결혼하기 위해서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조건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다름 아닌 정교 신자로의 개종이었다. 하지만 독일 출신의 루터교 신자였던 알렉산드라는 개종을 단호히 거부했다. 정말이지 산 넘어 산인 상황이었다. 다행히도 니콜라이 2세의 오랜 노력에 힘입어 1894년 4월 8일, 황태자와 황태자비는 마침내 약혼식을 거행했지만, 결혼식 날짜는 기약이 없었다.

그러던 중 1888년 10월 어느 날, 니콜라이 2세의 부친이었던 알렉산드르 3세가 타고 가던 열차가 하리코프 부근에서 전복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이 이후로 알렉산드르 3세는 줄곧 허리 통증에 시달렸다. 1894년 1월 무렵, 황제는 고뿔에 들었지만, 치료를 거부한 채 계속 이곳저곳을 돌아다녔고, 결국 폐렴까지 걸리게 되었다. 하지만 이 역시 황제의 행보를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일이 터지고 만다. 1894년 9월, 사냥하던 중에 몸에 이상을 느낀 알렉산드르 3세는 즉시 의사를 궁으로 불러들였고, 급성신장염 진단을 받게 된다. 그는 요양을 위해 크림으로 떠났지만, 병세가 급격하게 악화되면서 쉰 살이 되지 않은 젊은 나이에 급사하게 된다. 그러자 상황은 반전되었다.

황제가 서거한 바로 다음 날인 1894년 10월 21일, 알렉산드라는 즉시 정교로 개종했고, 약 보름이 지난 11월 7일 페트로자보드스크 사원에서 황제 알렉산드르 3세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처음에는 알렉산드르 3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나라 전체가 1년 동안 국상에 잠겨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황위를 비워둘 수 없었기에 니콜라이 2세가 곧바로 즉위했지만, 국상에 따른 예를 갖추기 위해 황제 역시 1년 동안 결혼식을 올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덕분에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는 남편인 니콜라이 2세가 이미 황제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황후가 아닌 황태자비의 신분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상황은 또다시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르 표도로브나에게 손을 들어주었다.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가 개종까지 한 마당에 황제의 옆자리를 계속 비워둘 수만은 없으며, 반드시 배우자가 있어야 하는 황위계승자의 자격을 완벽하게 갖추기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를 러시아 황후로 공식 추대할 필요가 있다는 중론이 모아졌다. 결국 정교에서 예외를 허용하는 길일을 택하여 마침내 황제의 결혼식이 올려졌다. 그 날은 바로 황제의 모친인 황태후 마리야 표도로브나의 탄생일인 11월 14일이었다.

결혼식을 마치고 돌아온 니콜라이 2세는 당일 저녁 다음과 같이 그날의 기록을 남겼다.


“내가 결혼하는 날이다! 다함께 커피를 마시고 난 뒤에 옷을 입으러 갔다. 난 경기병 제복을 입었고, 11시 30분에 미샤와 함께 겨울 궁전으로 갔다. 넵스키 대로 곳곳에 어머니와 알릭스(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가 지나갈 수 있도록 군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말라히토바야 홀(Малахитовая гостиная)’에서 알릭스의 치장이 마무리되는 동안, 우리는 다 함께 ‘아라비아 방’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12시 10분에 내가 결혼한 사람이 되어서 돌아오게 될 대교회(Большая церковь: 겨울 궁전 내에 있던 황실 교회. ‘손으로 그리지 않은 구세주 형상 사원’으로도 불린다.)로의 외출이 시작되었다. 말라야히토바야 홀에 있는 동안 가족들이 보낸 거대한 크기의 은빛 백조가 우리에게 전달되었다. 옷을 갈아입고, 알릭스는 나와 함께 러시아 마구와 마부와 더불어 사륜마차에 올랐다. 우리는 카잔 성당으로 출발했다. 거리에는 군중이 정말 많이 들어찬 탓에 간신히 지나갈 수 있었다! 아니치코프(Аничков: 폰탄카 운하 다리 근처에 위치한 황실 궁전) 궁전으로 들어서는 길목에 황실 근위기마병부대가 마중을 나와있었다. 어머니는 우리 방에서 빵과 소금을 들고 기다리고 계셨다. 저녁 내내 앉아서 전보에 답장을 보냈다. 8시에 점심을 먹었다. 알릭스에게 심한 두통이 와서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니콜라이 2세가 남긴 일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결혼식을 마치고 신접살림을 차릴 집에 도착한 갓 신혼부부를 ‘카라바이’로 불리는 특별한 빵과 소금을 들고 맞이하는 것은 일반인뿐만 아니라 황실에도 동일하게 적용된 전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니콜라이 2세의 일기에는 생략되어 있어서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와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중 누가 더 큰 조각의 빵을 베어 물었을 지 자못 궁금해진다.

신랑과 신부가 들고 있는 초의 위치 또한 눈길을 끈다. <감옥 속 결혼식>을 그린 마트베예프의 작품에서도, 그리고 황제의 결혼식을 화폭에 담은 레핀과 툭센의 작품에서도 모두 신부보다는 신랑이 초를 더 높이 들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러시아인들은 ‘카라바이’의 조각을 더 크게 베어문 자가 앞으로의 결혼 생활에서 주도권을 쥐듯이, 초를 더 높이 들어 올린 쪽이 가정에서 권력 우위를 차지한다고 믿었다. 황제와 황후 역시 ‘카라바이’는 물론 결혼식과 관련된 여러 전통 행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 같다. 어쩌면 오히려 일반 민중에게 모범 사례가 되기 위해서라도 아주 디테일한 부분까지 챙겨서 전통을 더 잘 지켰는지도 모르겠다. 결혼식을 마친 뒤에 신랑과 신부는 한 번에 초를 불어서 꺼야만 했다. 이는 평생을 함께하고 죽음의 순간도 함께 맞이한다는 의미가 담긴 전통 행위이다. 아울러 결혼식에 사용된 초는 첫 아이를 출산할 때까지 잘 보관해 놓아야 했다.

‘황제의 결혼식’이라는 동일한 역사적 순간을 화폭에 담은 두 화가, 레핀과 툭센이 황제의 결혼을 바라보는 방식과 이를 구현해 낸 결과물은 사뭇 다르기 그지없다. 표면적 완성도로만 따지자면 툭센의 그림이 한 수 위로 보인다. 하지만 한 걸음 물러서서 두 화가의 작품을 비교해보면, 레핀의 그림에 나타난 어수선한 분위기, 그리고 자칫 황제를 깎아내리는 것처럼 비칠 수도 있는 다소 불경한 장면이 툭센의 그것과 비교해볼 때 고증적인 측면에서는 다소 떨어질지 몰라도, 레핀의 그림은 어쩌면 당시 니콜라이 2세의 결혼식 즈음에 러시아를 둘러싼 혼란한 상황을 더욱 잘 반영한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레핀은 자신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과 배경을 모두 채도가 낮은 불투명한 물감으로 뿌연 실루엣만 남기듯 묘사하고 있다. 이는 섬세한 고증의 필치와 더불어 채도가 높은 물감을 사용하여 주교 일행과 황제, 황후는 물론, 결혼식이 거행된 대교회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화려한 이콘과 장식들, 하객으로 참석한 주변 인물들의 의상에서부터 각 인물이 지닌 표정 하나하나까지도 또렷하게 짚어내고 있는 툭센의 작품과 비교해 볼 때 상당히 대조적이다.

툭센의 시선으로 재현된 니콜라이 2세의 결혼식은 러시아가 대외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자신들의 모습, 화려하고 여전히 강한 러시아의 이상적 형상이라 할 수 있다. 그에 비해 레핀의 작품은 전반적으로 다소 어두운 색채와 희미한 실루엣이 지배적이다. 심지어 작품의 주인공인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보다 대주교 일행이 더 많은 화면을 점유하면서 주객이 전도된 느낌마저 자아낸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보아 어두운 색조를 바탕으로 모든 인물과 배경이 하나같이 분열되고 소멸해가듯 흐릿하게 묘사된 레핀의 작품은 다분히 암시적이다. 니콜라이 2세의 부친이었던 알렉산드르 3세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더불어 미처 ‘준비되지 않은’ 황제가 황위를 계승하는 것에 대한 불안감, 이에 더하여 황위 계승자로서의 자격을 갖추기 위해 황후 없는 대관식을 치른 후에 결혼을 거행하는 절차의 뒤바뀜에 따른 혼란, 그 혼란을 지켜보는 자들의 무관심과 앞으로 도무지 가늠하기 힘든 러시아 제국의 운명에 대한 화가의 선견지명이 그대로 반영된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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