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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19세기 러시아 포토그래퍼 세르게이 레비츠키
분류기타
국가 러시아
날짜2021-02-16
조회수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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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알려진 사진의 개념은, ‘사진photography’라는 용어가 그리스어 ‘빛phos'과 ‘그린다graphos'에서 비롯된 합성어이듯이, 물체로부터 반사되는 빛이 렌즈라는 장치를 통해 상을 맺게 하고, 그 상을 화학 처리함으로써 인화지에 고정시킨 것을 말한다. 200년 남짓한 역사를 이어온 동안 사진은 회화와 같은 정통 시각예술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위치에까지 다다랐다. 예술 장르 간의 경계를 허물고 장르의 통합이나 탈장르를 추구하는 융복합 예술이 각광받고 있는 오늘날 여러 갤러리에서 개최되는 전시이나 잡지들을 통해 이는 예술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하며 시각예술의 한 장르로 간주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1839년, 루이 다게르(Louis-Jacques Daguerre)가 발명한 다게레오타입을 통해 사진이라는 매체가 유럽사회에 공식적으로 등장하자마자 곧바로 이러한 지휘를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진은 그 역사를 이어오는 동안 예술 범주로의 진입을 위해 노력해왔으나, 유럽 예술계는 조롱어린 시선을 보내며 끊임없이 거부해왔다. 그 이유는 기록성과 사실성, 즉 사진이라는 매체가 필연적으로 가지는 속성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 대상과 현상을 단시간 내에 정확히 기록하고, 또 매우 정밀한 상으로 재현하는 사진의 속성에는 예술이라면 마땅히 지녀야 할 창작성과 예술가적 정신이 부재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은 포토몽타주, 포토콜라주, 포토 스토리텔링 등 다양한 특수기법과 기술을 앞세워 예술가의 창작세계를 구현하는 예술매체로 오늘날 널리 인정받고 있다.

러시아는 유능한 사진작가들을 많이 배출해낸 국가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작가들로는 소비에트 시기 사회적 문제를 예술적 사진으로 표현했던 블라디미르 뱌트킨(В. Вяткин), 저널리즘에서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퓰리처상을 두 차례나 수상한 알렉산드르 제믈랴니첸코(А. Земляниченко) 등이 있으며, 오늘날에는 보리스 나자렌코(Б. Назаренко), 잘만 슈클랴르(З. Шкляр), 엘레나 체르늬쇼바(Е. Чернышова) 등의 젊은 작가들이 러시아 사진예술의 밝은 미래를 예고하고 있다. 그렇다면 러시아 사진 역사상 기술적 진보의 기초를 다진 인물은 누구인가? 이와 관련하여, 현재 모스크바에 위치한 게르첸 박물관(Дом-музей А.И. Герцена)은 의미 있는 사진전을 진행하고 있다. 뉴스를 통해 알려진 바, 2021년 1월 21부터 시작된 레비츠키 사진展이 3월 12일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러시아 사진의 초기 역사에는 알렉세이 그레코프(А. Греков), 안드레이 칼레닌(А. Карелин) 등 많은 거장들이 존재했으나, 그중 가장 눈에 띠는 인물은 바로 세르게이 레비츠키(С. Левицкий)다. 그의 업적은 러시아학 전공자라면 누구나 익히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되는데, 19세기 후반을 살았던 러시아 작가들의 초상화는 대부분 레비츠키가 찍은 사진을 복제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설령 레비츠키라는 이름이 우리에게 생소하다 할지라도 그가 남긴 사진 만큼은 너무도 익숙할 수밖에 없다.  


<곤차로프, 드루지닌, 네크라소프, 오스트롭스키, 투르게네프, 체르니솁스키>


레비츠키, 카프카즈에서 프리체를 만나다
 

1908년, 세르게이 레비츠키는 가장 오래된 러시아 귀족 가문 출신으로 외교관과 상원의원을 지낸 레프 야코블레프(Л. Яковлев)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일생동안 단 한 번도 혼인을 한 적이 없었던 그의 아버지는 네 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그들은 아버지의 성을 이어받지 못했음에도 위탁아동의 신분으로 아버지의 집에서 함께 지냈다. (흥미로운 사실은, 레프 야코블레프의 동생 이반 야코블레프(И. Яковлев) 역시 알렉산드르(Александр)라는 이름의 사생아를 키웠으며, 아이에게 직접 게르첸(Герцен)이라는 성을 붙여주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세르게이 레비츠키의 사촌동생 알렉산드르 게르첸은 혁명가이자 작가로 활동하며 전제정치에 대한 투쟁에 일생을 바친, 오늘날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바로 그 인물이다.) 비록 자신의 성을 아이들에게 물려주지는 않았지만, 레프 야코블레프는 좋은 아버지로서 역할을 다했다. 자신이 맡아 키우고 있는 자식들 혹은 위탁아동들이 훌륭한 교육을 받고 있는지, 건강상의 문제는 없는지, 성장과정에서 무엇이 필요한지를 살뜰히 살피며 양육에 힘썼다. 아버지의 관심 속에서 자란 세르게이는 1839년, 모스크바 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했고, 20세의 나이에 아버지의 도움으로 러시아 내무부의 권위 있는 직책을 맡게 되었다.


<세르게이 레비츠키 (좌) / 알렉산드르 게르첸 (우)>


같은 해 유럽에서는 사진이 발명되었고, 그는 취미활동으로 사진을 배우고 싶어 했다. 그 당시 유럽에서는 은, 요오드, 수은, 식용 소금과 같은 다양한 시약을 사용해 이미지를 특정 장소에 고정하는 실험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여기에서 중요한 기술 두 가지가 발명되었는데, 이미지를 재현할 수 있는 페이퍼 네거티브를 발명한 영국의 윌리엄 폭스 탤벗과 (William-Fox Talbot)과 구리판에 이미지를 복제한 프랑스의 다게르였다. 이 최초의 사진작가들은 당시 자신의 발명품을 실제로 적용 할 수 있는 방법과 수단을 찾고 있었다. 재정적 후원과 홍보를 위해 여러 기업가들과 논의를 이어가던 다게르는 곧 이기적인 기업가들에 환멸을 느끼게 되었고, 물리학자이자 파리 천문대 책임자였던 도미니크 아라고(Dominique Arago)에게 부탁해 자신의 실험과 기술을 국가 차원에서 지원해줄 것을 부탁했다.

한편 1838년, 페테르부르크 과학 아카데미는 사진을 연구하기 위해 유럽으로 과학자들을 파견했다. 러시아인들이 사진 기술에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라고는 1839년 1월 7일, 다게르의 발명품에 대한 보고서를 서둘러 작성했다. 그리고 동년 5월 23일, 페테르부르크에서 개최된 과학 아카데미 학회에서 화학자 율리 프리체(Ю. Фрицше)가 <일광반사신호 실험에 대하여о гелиографических опытах>라는 보고서를 발표했으며, 여기에서 러시아인들이 탤벗의 방법을 사용하여 제작한 최초의 사진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당시 부유한 계층 사람들 사이에서 화학에 대한 열정은 상당했는데, 야코블레프 가문 역시 그러했다. 레비츠키는 방대한 화학 분야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또 다른 사촌인 알렉세이 야코블레프(А. Яковлев) 역시 열정적인 화학자였다.

1844년, 레비츠키는 카프카즈 미네랄워터 위원회의 서기로 임명되어 출장길에 올랐다. 그런데 파견 인원 중에는 앞서 언급한 바 있는 저명 약제사이자 화학자 율리 프리체가 포함되어 있었다. 독일 드레스덴 출신의 프리체는 1834년에 러시아로 이주해 1840년에는 세계 최초로 아날린 염료를 발명한 인물로, 러시아에서만 60여 편이 넘는 논문을 발표한 권위 있는 화학자였다. 레비츠키가 사진에 큰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프리체는 그에게 사진 촬영을 맡겼다. 그 당시 레비츠키가 촬영한 사진은 후대에 남겨지지 않았지만, 그는 프리체의 지도하에 뺘찌고르스크, 키슬로보츠크의 풍경과 전망을 담아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로마에서 만난 레비츠키와 고골
 

출장에서 돌아온 직후, 레비츠키는 사진에 매료되어 사진작가를 평생의 업으로 삼기로 결심하게 된다. 직장을 그만둔 그는 아내와 함께 유럽 전역을 여행하며 사진업계 인사들과 교류했다. 그는 파리에서 다게르를 만났고, 다게르와 오랫동안 함께 연구를 이어왔던 니엡스(Abel Niépce de Saint-Victor)의 컬러 사진 실험을 관찰했다. 그는 이렇게 당대의 유명 작가들과 함께 연구할 수 있었으며, 소르본에서는 물리학, 화학 등의 강의를 듣기도 했다. 1845년에는 이탈리아 로마에 방문하여 로마 내 러시아인들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 당시 로마에는 예술가, 조각가, 건축가들이 머물며 형성된 <러시아 거류지русская колония>가 존재했다. 로마에 도착한 레비츠키는 특유의 쾌활함으로 단시간에 그곳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했다. 훗날 미술 아카데미 총장이 된 화가 표도르 이오르단(Ф. Иордан)은 “이 무렵 아름답고 젊은 부부가 로마에 도착했습니다. 세르게이 레비츠키와 그의 아내 안나 안토노브나였습니다. 젊고 활기찬 세르게이 르보비치는 모든 사람을 매료시켰고, 그의 옆에는 온유하고 고귀한 아내 안나 안토노브나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로마에 도착한 첫날부터 나는 그들의 친구가 되었고 지금까지 그렇게 남아 있습니다.”라고 회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당시 러시아 미술 아카데미 부회장이었던 표도르 톨스토이(Ф. Толстой) 백작이 곧 로마에 올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로마 내 러시아인들은 그에게 자신들의 단체 사진을 선물하기로 했고, 이 촬영은 다게레오타이프 작가 페로(Perrault)의 작업장 테라스에서 이루어졌다. 이 사진 속에는 러시아 화가, 조각가, 건축가들의 모습이 담겨졌는데, 그중 눈에 띠는 인물은 단연 사진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니콜라이 고골(Н. Гоголь)의 모습이다. 평생 동안 사진 찍기를 싫어했던 고골은 사진사가 자신을 찍으려고 시도할 때면, 카메라를 외면하거나, 간혹 피할 수 없는 경우에는 모자로 얼굴을 가리기 일쑤였다고 한다. 당시 레비츠키는 고골의 개인 사진을 남기기 위해 별도로 포즈를 취하도록 설득해 보기도 했으나, 이러한 그의 요구는 번번이 묵살되었다고 한다. 고골에 관해 전해지는 흥미로운 일화도 있다. 어느 날 레비츠키는 고골과 함께 체르니셰프-크루글리코프(И. Чернышёва-Кругликов) 백작의 집에 초대되었다. 그곳에서 점식 식사를 마친 후 고골이 졸고 있자, 레비츠키는 그 모습을 몰래 카메라에 담았다. 곧 이 사실을 알게 된 고골은 ‘몹시 화가 나서 사진을 없애달라고 단호하게 요구했으나, 백작 부인이 그것을 소유했고, 그 이후로 그녀를 다시 만나지지 못했다.’고 레비츠키는 회상했다. 이토록 사진 촬영에 거부감을 드러냈던 고골이 어떤 이유에서 단체 사진 속에 자신의 얼굴을 남겼는지 알려진 바 없으나, 이 레비츠키의 사진은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유일한 고골의 사진이라는 점에서 더없이 귀중하다. 그 후, 레비츠키 사진 속 고골의 이미지는 단일 인물초상화의 형태로 수차례 확대, 복제되었으며, 훗날 일랴 레핀(И. Репин)이 고골의 초상화를 그릴 당시에도 이 사진이 활용되었다고 한다.


<1945년 로마, 예술가들의 단체사진> 

<고골 확대 사진 (좌) / 레핀의 고골 초상화, 1878 (우)>


레비츠키, 유럽과 러시아를 오가며
 

그 후로도 사진기술과 관련해 알려진 모든 지식을 습득한 레비츠키는 1840년대 중반부터 자신만의 연구를 시작했다. 1847년, 그의 도안을 바탕으로 벨로즈(мехи)를 사용하는 카메라가 제작되어 다양한 형식의 이미지를 촬영할 수 있게 되었고, 그 2년 후인 1849년에 이르러 마침내 그의 다게레오타이프는 파리에서 개최된 산업 전시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그러나 레비츠키는 더 이상 파리에 머물지 않았다. 그때는 이미 프랑스 혁명이 시작된 상황이었고, 위험을 피하기 위해 러시아행을 택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네프스키 대로에 ‘세르게이 레비츠키의 다게레오타이프 사진관’을 설립했다.(훗날 그는 작업 방식을 습식 콜로디온 방식(мокроколлодионный процесс)으로 전환되었고, 이에 따라 스튜디오 명칭은 ‘레비츠키의 광학사진(Светопись Левицкого)’으로 변경되었다.) 이곳은 페테르부르크 문인, 귀족, 황실 가족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투르게네프(И. Тургенев), 톨스토이(Л. Толстой), 오스트롭스키(А. Островский)와 같은 예술가들이 이곳을 찾았으며, 황실 가족들이 레비츠키의 주요 고객이었다고 한다.

1858년, 레비츠키는 다시 프랑스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그는 파리에서 최대 규모의 사진 스튜디오를 설립했는데, 이에 대해, 예술 잡지 <포토그래프>는 “현재 파리 최고의 사진 기관을 소유하고 있는 세르게이 르보비치의 작업은 꽤나 예술적이며 그곳에서의 작업에 압도당한다. 이 기관은 매일 최대 1,500장의 사진을 제작하지만 모든 주문이 충족되지 않는다.”라며 레비츠키의 귀환과 성공을 이야기했다. 이처럼 유럽에서 성공가도를 달린 레비츠키는 1865년이 되어 다시금 페테르부르크에 정착했다.

“레비츠키가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왔다는 사실은 최근 이 지역 사진 업계에 많은 소음을 일으킨 뉴스입니다. 레비츠키가 자신에게 큰 명성을 안겨준 파리를 떠나 마침내 러시아로 돌아왔습니다. 모이카 강변 볼릔스키 거리 모퉁이에 건물을 마련했고, 초상화 작업을 위한 특별관이 있는 웅장한 파빌리온을 여기에 배치했습니다. 말이나 마차 등을 타고 촬영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장소도 있습니다.”

그는 러시아에서도 끊임없는 실험을 이어갔다. 이 시기 그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사진 수정 기술을 완성하고 네거티브 필름의 결함을 수정했다는 것, 그리고 사진 속 등장인물이 ‘둘로 나뉘는’ 콜라주 기법을 고안해 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한 인물이 피아노를 연주하는 동시에 자신의 연주를 듣고 있는, 즉 하나의 사진 안에서 한 명의 인물이 두 가지 행위를 보여주는 방식이다. 이 콜라주 중 가장 유명한 것은 <게르첸 대 게르첸Герцен против Герцена>으로, 사촌 동생 게르첸이 사진 안에서 극적인 논쟁을 벌이는 장면이다. 이러한 이중 인물 사진은 모델과 사진작가에게 엄청난 민첩성을 요구했다. 용액이 마르기 전, 모델은 옷을 갈아입고 포즈를 바꾸어야 했고, 작가는 재빠르게 사진을 찍어야 했다. 전형적인 러시아 혁명가로서 그가 취했던 입장의 양면성을 생생히 표현해낸 이 <게르첸 대 게르첸>은 원래 레비츠키가 사촌에게 줄 기발한 선물로 마련한 것이었으나, 오늘날에는 레비츠키를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로 귀히 여겨지고 있다. 


<게르첸 대 게르첸 (좌) / 니콜라이 1세 (우)>

<황실가족사진: 알렉산드르2세, 알렉산드르3세, 니콜라이2세>


1864년, 레비츠키는 프랑스 나폴레옹 3세의 황실에 초대되었다. 그의 사진 기술을 높이 평가했던 나폴레옹 3세는 그를 초청해 황제와 황실 가족들의 사진 촬영을 요청했던 것이다. 개별 인물 사진과 단체 사진, 황제가 품위 있게 서있는 모습과 근엄하게 앉아 있는 모습, 야외에서 말을 타는 모습과 마차로 이동하는 모습 등을 레비츠키는 필름에 담아냈다. 이렇게 실력을 인정받은 레비츠키는 프랑스 황제의 전속 궁정 사진작가가 되었으며, 러시아로 돌아온 이후에는 러시아 황실 전속 작가로 활동했다. 또한 레비츠키는 4대로 이어지는 로마노프 황실 가족의 모습을 촬영한 유일한 사진작가였다. 1850년대 초반에는 니콜라이 1세의 생생한 모습을 담아냈고, 이후로도 수십 년에 걸쳐 알렉산드르 2세, 알렉산드르 3세, 니콜라이 2세의 모습을 촬영했다.

이처럼 유럽과 러시아를 오가며 활동한 세르게이 레비츠키는 러시아 사진 역사 속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심인물이다. 오늘날 그가 받고 있는 박수는 카메라와 사진 기술의 발전을 위해 한 평생을 헌신한 인물에 대한 찬사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에 못지않은 또 다른 업적은 오늘날 우리가 러시아 역사 속 주요 인물들의 모습을 생생히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을 남겨주었다는 점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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