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K(인문한국) 사업단 홈페이지

HK(인문한국) 사업단

웹진 문화로(文化路) 내용 시작

웹진 문화로(文化路)
제목러시아 최초의 슈퍼스타 프라스코뱌 젬추고바의 세기의 사랑
분류영화
국가 러시아
날짜2021-01-18
조회수473
첨부파일


18세기 러시아에서 농노출신이 배우가 되는 것은 개천에서 용이 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제정 러시아 시기에 극장에서 활약하는 가수 및 배우의 사회적 계급과 대우는 최악의 수준이어서, 최하층 계층을 벗어나서 무대에서 직업을 찾는다고 해서 신분상승을 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배우가 사망하면 일반인을 매장하는 공동묘지 안에 묻히는 것이 어려웠다는 기록을 보더라도 배우의 직함은 농노의 지위보다 그렇게 낫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노 출신 배우 겸 가수 프라스코뱌 젬추고바(Прасковья Ивановна Жемчугова)는 러시아 극장 역사에 획을 그은 인물이었다. 러시아 문화사를 다루고 있는 <나타샤 댄스>에서도 언급하고 있듯이, 프라스코뱌는 ‘러시아 최초의 진정한 슈퍼스타’였다. 


<프라스코뱌 젬추고바>


제정러시아의 최악의 흙수저인 곱사등이 대장장이의 딸로 태어나서 7살부터 극장과 인연을 맺은 프라스코뱌는 코미디부터 비극까지 다양한 작품에서 항상 새로운 모습을 창조했기 때문에 관객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13살이 되던 해에 출연한 작품 <탈영병>에서 루이자 역할을 너무나 감동적으로 선보인 프라스코뱌는 나이 16살에 이미 극장무대의 정상에 서 있었다. 하급시종의 수다쟁이의 모습에 순수한 영혼을 소유한 비련의 여주인공까지 자유자재로 소화한 프라스코뱌의 연기와 노래는 제정러시아의 로마노프 가문의 왕정 귀족들과 상류층의 극장애호가들을 흥분시켰는데, 그녀의 공연을 보기 위해 황제 파벨 1세, 대주교들까지 그녀의 주 무대가 있는 쿠스코보(Кусково)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특히 어린 소녀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연기에는 진정성이 담겨있었고, 여기에 서정적이고 극적인 소프라노의 목소리가 더해져서 관객들을 매혹시켰다. 쿠스코보의 극장 학교에서 체계적이고 훌륭한 음악 교육을 받은 프라스코뱌는 무대에서 선보인 화려한 연기와 노래 이외에, 외국어를 구사할 능력까지 갖춘 재원이기도 하였다. 물론 단아한 우아함에 밝은 이미지가 더 해져 창조된 그녀의 아름다움 또한 프라스코뱌 신화창조의 중요한 요소였다.

 

<니콜라이 쉐레메테프의 쿠스코보 영지>


예술을 사랑한 낭만주의자 니콜라이 쉐레메테프

신비스럽고 아름다운 동화는 어떤 식으로든 과거에 존재했던 믿을 수 없는 신화 같은 사실에서 탄생한다. 그래서 어린 시절 읽었던 동화의 슈제트가 실존했던 그 누구의 삶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가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고귀한 왕자는 가난하지만 아주 아름다운 소녀와 매혹적인 사랑에 빠지고, 세상의 모든 편견에 침을 뱉고, 대중의 일반적인 취향에 뺨을 때리면서까지 이 인연은 해피앤딩의 결말로 마무리 될 정도로 강력한 것이다, 프라스코뱌 젬추고바라고 하면 오페라 배우로서 전 러시아적으로 명성을 떨쳤지만,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은 동화 같은 세기의 사랑을 장식한 주인공으로도 유명하다. 농노출신이었던 프라스코뱌의 상대는 그녀의 소유자이기도 하였던 제정러시아의 전통적인 귀족가문인 쉐레메테프 집안의 니콜라이 백작(Николай Петрович Шереметьев)이다.

고귀한 기사의 품위를 가진 니콜라이 쉐레메테프는 외모, 성격, 집안 등 부족한 부분이 전혀 없는, 정말로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완벽한 남자로 어마어마한 스펙을 자랑하는 엄친남이었다. 엄청난 부자이기도 한 니콜라이는 예술애호가였는데, 그 대표적인 증거로 그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영지 쿠스코보에 극장을 개관하였다. 이 극장은 전문 예술가 양성을 위해 교육생에게 노래, 안무, 연기, 무대 기술 등 철저한 실습 중심의 교육을 실시하였는데, 극장의 미래의 예술가들로 쉐레메테프 영지내의 특별한 재능이 있는 어린 농노들이 선발되었다. 프라스코뱌도 선발된 어린 농노 중의 한명이었다. 자신의 극장의 교육시스템을 통해 최고의 배우를 길러내고자 하는 니콜라이의 열정은 농노 교육생에게 새롭게 만들어준 성(姓)만 보더라도 짐작 할 수 있었는데, 그는 어린 농노들을 석류석(Гранатова) 금강석(Алмазов), 보석(Бирюзова)등의 단어에서 만들어진 성으로 부르기를 선호했다. 니콜라이는 또한 직접 극장의 공연목록을 선택하고 리허설을 감독하기까지 할 정도로 극장에 강한 애착을 보였다. 이러한 그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니콜라이의 쿠스코보 극장은 러시아 전역에서 유명세를 떨쳤는데, 당연히 이 과정에서 모든 관객의 감탄을 자아내게 만든 프라스코뱌의 연기 및 노래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극장 무대의 프라스코뱌 젬추고바>


니콜라이 백작의 전기에서 한 가지 특징적인 것은 로마노프 왕조의 골칫거리였던 황제 파벨 1세와 친한 사이였다는 것이다. 갑작스럽게 화를 내고 규율적인 태도를 갖고 있어 대부분의 귀족들이 꺼려했기 때문에 니콜라이 쉐레메테프는 파벨과 사이가 좋은 소수의 귀족들 중 한명이었다. 니콜라이가 자란 밀리오나야 거리에 있는 쉐레메테프가 집안 저택은 겨울 궁전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어서, 어린 시절 백작은 자신을 아주 좋아하는 3살 어린 파벨을 자주 찾아가곤 했다. 이렇게 어린 시절부터 왕래가 있어 절친이 된 니콜라이를 파벨 1세는 1782년 황제가 되기 전 자신의 아내와 함께한 비밀 해외여행에 동행시켰다는 역사적 기록이 있고, 세상의 부정적인 시선을 무시하고 니콜라이가 프라스코뱌를 합법적으로 아내로 맞이하기로 한 결정에 영향을 끼친 인물도 파벨 1세였다고 하니, 파벨과 니콜라이는 정말로 친한 친구라 생각을 하며 정말 오래 그 관계를 유지한 것 같다. 생각해보면 로마노프 왕가에서 미숙아로 평가받았던 파벨 1세의 인생에서 프라스코뱌의 도움이 역할을 한 것은 그가 살면서 행한 가장 긍정적인 역할일지도 모른다.


<니콜라이 쉐레메테프>


러시아 상류사회의 금기를 깬 세기의 사랑

감성적이고 순수한 영혼을 가진 프라스코뱌는 아주 관대한 품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프라스코뱌 옆에서 자신의 영혼이 따뜻하게 데워지고 섬세하게 어루만져진다는 느낌을 받았던 니콜라이 백작은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래서 백작의 사회적 지위와 부와 함께 하면서 그녀가 가진 아름다운 외모와 순수한 영혼은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더욱 더 가치를 발휘했다. 이러한 것을 알았던 니콜라이 백작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 할 수 없다면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결혼의 성사는 쉽지가 않았다. 아버지가 죽은 후 니콜라이 백작은 프라스코뱌를 위해 특별히 만든 집에서 그녀와 같이 살게 되면서, 공개적으로 프라스코뱌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표현했다. 단 이러한 공개는 영지 쿠스코보 지역에 한정된 것이었다. 니콜라이 백작의 영지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관계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그들의 사랑에 대해서 곱지 않는 시선으로 보지 않았다. 그 당시 어린 농노 여성을 사랑한 지주의 존재는 전혀 없었던 것이 아니었던 데다가, 프라스코뱌를 의심하는 시샘 섞인 관심은 거의 신성 모독 일 정도로 여겨질 만큼 그녀의 전체 이미지는 너무나 순수했기 때문이었다.

1796년 제위에 오른 파벨1세는 어린 시절 부터 친하게 지냈던 니콜라이 쉐레메테프를 궁정 총책임자인 최고시종으로 임명했다. 백작은 공직에 나아갈 생각이 없었지만 파벨 1세의 요청을 거절 할 수가 없었다. 공직 수행을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니콜라이 백작과 프라스코뱌가 이사해오자, 러시아 귀족 상류층 사회가 동요하기 시작했다. 쉐레메테프 집안 사람들 뿐만 아니라 상류층 귀족들은 농노출신 여배우를 진솔하게 사랑하는 니콜라이 백작을 전혀 이해 할 수가 없었다. 특히 친절하고 미남이면서 거대한 부를 소유한 그가 젊다는 사실은 이러한 몰이해를 분노의 감정으로 치닫게 만들었다.

한편 프라스코뱌는 태생과 사회적 관계가 중요하게 작동하는 제정러시아 수도의 상류층 사교계에서 은밀하게 조롱과 멸시를 받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사교계 생활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자신만의 단조로운 공간을 벗어나지 않은 채 메마른 화초처럼 아름다운 영혼이 시들어 가면서 하루하루를 지냈다. 이 같은 사실을 인지한 백작은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엄청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다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북풍이 그녀의 건강을 약화 시켰고, 결과적으로 무대에서 관객을 휘어잡은 압도적인 무대를 가능하게 만들었던 그녀는 웅장한 목소리도 잃었다. 사실 프라스코뱌는 페테르부르크로 오기 오래전에 백작으로부터 자유를 부여받았지만, 그와 결혼하지 않고 동거하면서 단순한 사실혼 관계로만 지냈다. 이러한 자신의 어정쩡한 위치에 대한 심적 괴로움은 페테르부르크의 숨 막히는 생활과 함께 그녀의 영혼을 산산이 부서지게 하면서 서서히 그녀를 죽이고 있었다. 이것을 잘 알고 있었던 니콜라이 백작은 갓 황제가 된 알렉산드르 1세에게 간청하여, 평생 잊지 못하는 영광스러운 선물을 황제로부터 하사 받았다. 그 선물은 바로 니콜라이 쉐레메테프 백작에게 프라스코뱌와 결혼할 권리를 부여하는 황제의 특별 명령이었다.  


<프라스코뱌와 니콜라이>


프라스코뱌를 태운 어두운 사륜마차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시몬교구 성당 안으로 쏜살같이 미끄러지듯이 들어간다. 곧이어 니콜라이 쉐레메테프 백작이 결혼식 증인 역할을 할 몇 명의 무리와 함께 같은 성당 안으로 주위를 살피면서 입장한다. 1801년 11월 6일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어 세기의 사랑의 결실을 맺은 약간 이상하지만 비밀스럽게 진행된 이들의 결혼식의 풍경이다. 니콜라이 쉐레메테프 백작은 결혼했다는 사실을 그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다. 황제의 승인에도 불구하고 프라스코뱌는 상류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었다는 것을 백작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밀결혼은 2년 후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었을 때 밝혀졌는데, 그들 사이에서 아들 드미트리가 태어났기 때문이었다. 세상에 모든 비밀이 알려진 이후 니콜라이 백작은 미련 없이 자신의 직위를 내던지고 아내와 아들 곁에 끝까지 머물렀다. 이러한 사실은 탐욕스러운 귀족들 및 친척들을 깊은 충격에 빠뜨렸는데, 그들은 니콜라이를 ‘광인’으로 불렀다.

프라스코뱌와 니콜라이의 동화 같은 사랑은, 동화속의 이야기처럼 행복하게 백년해로 한 것은 아니었지만, 같이 했던 날들은 그들에게는 정말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결핵을 가진 프라스코바에게 출산은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다. 아내보다 6년 더 살았던 니콜라이는 프라스코뱌의 의지를 엄격히 따랐는데, 아들을 양육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그리고 백작은 페테르부르크의 알렉산드르 넵스키 수도원의 가족 묘지의 그의 사랑하는 아내 옆에 평범한 판자로 만든 관에 묻혔다. 죽기 전에 니콜라이는 자신이 장례를 최대한 간소하게 치르고, 성대한 장례식에 들어갈 돈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유언했다. 

 

목록

웹진 문화로(文化路) 내용 끝

TOP

저작권 표시 및 연락처

06974 서울특별시 동작구 흑석로 84 법학관(303관) 1420호 / E-mail: fsicau@cau.ac.kr / TEL: 02-820-6355 / FAX: 02-822-00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