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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슬기로운 결혼생활 (2): 전후 소비에트 결혼식 풍경을 엿보다
분류지역문화
국가 러시아
날짜2021-01-04
조회수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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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이후의 러시아에서 결혼은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결혼은 신 앞에서 두 명의 남녀가 언약하는 종교적 의례로서의 의미와 가치를 상실했고, 행정기관에서 서류에 서명하고 마무리되는 형식적인 절차로 남겨지게 된다. 정교 국가였던 러시아에서 결혼과 가족을 인증하는 주체가 이제는 신이나 교회가 아닌 ‘정부’가 되어버린 것이다. 결혼식 명칭도 ‘시민 결혼식(гражданский брак)’, 혹은 ‘붉은 결혼식(красные свадьба)’으로 변경되었고, 결혼 서약을 맹세하던 십자가와 교회 제단은 레닌의 흉상과 밋밋한 행정용 탁상과 의자로 대체되었다. 소비에트 사회 속에서 가족이란 사랑하는 사람들이 삶을 함께하기로 약속하며 이룬 공동체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 건설이라는 공통의 목표와 사상을 가진 동지들의 결합에 불과했다. 이러한 상황은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될 무렵까지 지속되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어느 정도 일상으로의 복귀가 가능해진 1950년대 말이 되어서야 소위 ‘시민 의례(гражданские обряды)’라는 것이 도입되었다. ‘시민 의례’는 말 그대로 결혼식을 결혼식답게 만들어주는 일련의 절차와도 같은 것이었다. 소비에트 연방 성립 직후 소위 ‘붉은 결혼식’이 결혼식의 표준으로 여겨지던 시절에는 신부를 위한 웨딩드레스는 물론, 신부용 부케조차 들 수 없었다. 모든 의례가 서명 하나로 대체되며 모든 것이 간소화된 마당에 결혼식 하객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민 의례’가 도입된 1950년대 말 무렵 드디어 결혼식 당일 신부도 신부답게, 검소하지만 나름 소박한 꾸밈을 거쳐 신부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고, 면사포만 겨우 머리에 얹었던 예전의 모습과 달리, 하얀 예복을 차려입기 시작했다. 행여 결혼식에 아이들이 참석이라도 할라치면, “반드시 교복을 갖춰 입어야 한다”라는 원칙도 생겨났다. 가족 친지와 친구들에게 “우리 결혼했어요!”라고 수줍게 공표하는 의미에서 신랑·신부가 함께 준비한 소소한 선물을 돌리는 일도 종종 있었다.


<‘결혼 궁전’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신혼부부>


소비에트 시절 결혼식에 있어서 획기적인 전환점이 된 시기는 바로 1959년이다. 이 해에 현재의 페테르부르크, 즉 소비에트 시절 레닌그라드로 불린 도시의 ‘영국 강변도로(Английская набережная)’ 부근에 ‘결혼 궁전(Дворец бракосочетания)’이 개관했다. 1917년 이전까지 이 궁전은 대공작 안드레이 로마노프(А. Романов)의 저택이었다. 1959년 11월 1일 낮 12시 정각에 ‘결혼 궁전’에서 예식을 올린 첫 번째 커플이 탄생했다. 이들은 무려 멘델스존(!)의 결혼행진곡에 맞춰서 ‘결혼 궁전’에 입장했다. ‘작스(ЗАГС)’에서 근무하는 관리가 주례를 서고, 인민위원들이 축하를 건넸다. 하지만 여전히 결혼식의 소박함은 지속되었다. 신랑과 신부 각자 하나씩 예물 반지를 마련하여 교환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으며, 2명이 하나를 겨우 마련해서 증표처럼 내놓곤 했다. 심지어 그것도 여의치 않을 경우, 결혼식 하루 전날 지인을 찾아가 결혼식 하루 동안 반지를 대여했다가 식을 마친 후에 바로 돌려주는 일도 허다했다. 


<결혼 예식용으로 인기를 누린 최고의 차량 ‘차이카’>

1960년대에는 신부를 결혼식장이나 결혼식 등록장소인 ‘작스’까지 차로 에스코트하는 유행이 생겨났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스크비치(Москвич)’ 차량을 이용했지만, 좀 산다는 집 자제들 사이에서는 검은색 ‘차이카(Чайка)’와 ‘볼가(Волга)’가 예식용 차량으로 인기가 높았다. 하지만 이 차들은 한때 소위 ‘검은 까마귀’로 불리며 한밤중에 소리소문없이 숙청대상자를 호출해 갔던 공포의 상징물로 악명을 떨치기도 했다. 혼인신고를 하려고 ‘작스’에 가기 위해 대부분 두 대의 차량이 준비되었는데, 이 두 대의 차량은 일명 ‘결혼 열차(свадебный поезд)’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보통은 ‘작스’로 가는 앞쪽 차량에 신랑이 탑승하고, 뒤쪽 차량에는 신부가 탑승하곤 했다. 혼인신고를 마친 후에는 이미 결혼식 행렬 제일 앞쪽에 신랑·신부가 증인들과 나란히 한 차량에 타고 도심 관람에 나서곤 했다. 


<트랙터를 타고 결혼식장으로 가는 농촌의 신부>

농촌에서는 이따금 트랙터에 신부를 태워서 결혼식 장소로 데려가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 다소 낯설긴 하지만, 농촌에서는 농사를 짓는 집단의 일원으로서, 또 앞으로 새로운 집단의 일원을 만들어줄 신부를 나름 대접하여 모셔가는 흔치 않은 풍경이었다. 이때 트랙터 위에 올라탄 신부는 여성 콜호스 원들의 부러운 눈길을 온몸에 받으면서 전체 콜호스 원들의 에스코트 속에 결혼식장까지 갔다.

1964년에는 결혼식을 앞두고 혼인신고를 하기에 앞서 한 달 동안 나름 ‘숙고’를 위한 기간이 법적으로 주어졌고, 결혼식 증인 제도도 도입되었다. 결혼식 증인은 신랑과 신부 양측에서 한 명씩 데려와야 했고, 결혼식에 입회하여 증인 서명을 하는 일은 이제 곧 부부가 될 한 쌍의 남녀에게 그들의 사랑을 법적으로 확인하고 보증한다는 것을 뜻하기에, 다들 결혼식 증인을 맡는 일을 대단한 영광으로 간주하곤 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결혼식 증인이 되기 위한 자격 역시 상당히 까다로웠다. 신랑 또는 신부와 혈연관계가 있는 친척은 결혼식 증인이 될 수 없었으며, 이미 결혼한 사람 역시 증인이 될 수 없었다. 결혼식 당일 증인들은 금장으로 글씨가 새겨진 붉은 색 또는 흰색 축하용 리본을 둘러야만 했는데, 그 모양새가 다소 우스꽝스럽긴 했어도 나름 증인의 자격을 부여하는 상징이었기에, 증인들은 다들 자랑스럽게 기꺼이 자신의 몸에 리본을 둘렀다. 


<증인 리본을 두르고 신랑·신부 옆에서 사진을 찍는 결혼식 증인들>

이즈음 결혼식을 올린 뒤에 이틀 동안 피로연을 여는 전통이 생겨났으며, 피로연을 위해 신부는 2벌의 예식 의복을 마련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순수함을 상징하는 ‘하얀색’ 웨딩드레스를 차려입은 예비 신부는 소위 ‘미스코리아’ 스타일로 알려진 한껏 부풀린 머리에 바닥까지 끌리는 긴 면사포를 쓰고 결혼식장에 들어갔다. 면사포는 신부의 수줍은 얼굴을 가리는 역할 뿐만 아니라, 결혼을 앞둔 예비 신랑과 신부의 헤어짐을 막아주는 의미도 지녔던 것으로 전해진다. 결혼식 신부를 식장까지 에스코트했던 ‘볼가’와 ‘차이카’는 리본과 인형으로 한껏 꾸며져 결혼식 분위기를 더했고, 결혼식을 마친 신혼부부는 차를 타고 도심을 순회하며 결혼식을 위해 주어진 ‘특별 휴가’를 만끽했다. ‘작스’에서 혼인신고를 마친 신혼부부가 ‘무명용사의 묘’에 들려서 헌화하는 전통도 이 무렵 즈음에 생겨났다. 


<짧은 면사포와 무릎길이 웨딩드레스를 입은 1970년대 신부의 모습>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소비에트 결혼식 풍경은 더욱 현대적인 모습을 갖추며 풍성하게 채워져 나갔다. 신부의 웨딩드레스 길이는 무릎까지 깡똥하게 올라가고, 면사포 길이 역시 어깨높이로 짧아지더니, 어느 순간 아예 쪽지듯 틀어 올린 신부용 올림머리 언저리에서 살랑일 정도로 짧아지게 된다. 신랑은 대부분 진한 색 정장을 차려입고, 가슴 언저리에 부토니에르를 꽂아 새신랑임을 입증했다.

하객들과 더불어 예식 사진을 공식적으로 남기는 일도 결혼식 통과 의례처럼 굳어졌다. 다만 솜씨 좋은 사진사를 구하는 일은 여전히 쉽지 않았다. 혹시라도 신랑·신부 주변에 사진기를 가지고 있거나, 사진기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이 있다면야 큰 걱정이 없었지만, 아직은 고가의 물건에 속했던 사진기를 가진 지인을 찾는 일 역시 만만치는 않았다. 그래서 대부분 ‘작스’에 상주하는 사진사에게 어느 정도의 금액을 지불하고 예식 사진을 맡기곤 했는데, 이들이 찍어주는 사진의 품질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신랑·신부가 ‘결혼 궁전’에 입장할 때 울려 퍼지는 멘델스존의 결혼행진곡은 무료로 연주됐지만,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녹음기에서 흘러나왔지만, 금전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결혼식과 피로연을 위해 돈을 주고 악사를 부르기도 했다. 


<1970년대 결혼식 피로연 장면>

결혼식 피로연은 보통 레스토랑을 대여하거나 신랑·신부의 집에서 열리곤 했고, 일반적으로 하객 수는 100명을 거뜬히 넘기곤 했다. 레스토랑에서 피로연을 열게 되면, 1인당 접대비가 식대를 포함하여 총 20루블에서 25루블가량 되었는데, 이는 당시 한 가족의 일주일 식비에 해당하는 꽤 큰 금액이었기에, 대부분의 사람은 집에서 피로연을 열곤 했다. 


<신부 인형으로 장식한 예식용 차량 ‘차이카’ (1970년대 중반)>
 

예식용 차량에 더 힘을 주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 즈음이다. 예식용 차량은 보통 실크 리본과 풍선을 둘러 장식했고, 웨딩드레스를 차려입은 신부 인형을 차량 앞머리에 달아서 그 화룡점정을 찍었다. 이 때 차에 부착하는 신부 인형은 보통 신부가 실제로 어린 시절에 가지고 놀았던 인형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런데 신부 인형을 차량에 부착하는 일은 소비에트 시절에 갑자기 생겨난 관습이 아니라, 고대 러시아의 전통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고대 러시아 전통에서 유래된 신혼부부를 위한 부적용 인형>

고대 러시아인들은 사람 모양을 본떠서 만든 형상이 인간의 운명에 영향력을 발휘한다고 믿었다. 물론 이는 러시아인들에게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민간 전통이기도 하다. 하지만 인간의 형상을 본 따 만든 인형은 대부분 저주나 음해를 위한 나쁜 의미로 사용되곤 했는데, 러시아의 경우, 특이하게도 보호의 의미를 담아 신랑·신부를 위한 부적용 인형을 만들었다는 점이 상당히 이색적이다. 이 부적용 인형은 신랑·신부가 집을 떠나는 순간 그들의 행복을 시기하며 눈을 흘기는 나쁜 영과 마법사의 저주로부터 젊은 신혼부부를 보호할 목적으로 제작되었다.

소비에트 시기에 일명 ‘결혼 열차’로 명명된 신랑·신부를 태운 축하 차량 행렬 역시 고대 러시아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고대 러시아인들은 신붓집을 나서는 신랑·신부를 달구지나 수레에 태워 배웅하곤 했는데, 이때 수레 행렬에는 달구지 3대 이상이 포함되어야 하고, 달구지 숫자는 반드시 짝수가 아닌 홀수로 맞춰야만 했다. 아마도 나쁜 영이나 귀신이 달구지 숫자를 세다가 짝이 안 맞아서 자꾸 세고 또 세다가 신랑·신부에 대한 생각을 까맣게 잊게 만드는 전략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수레는 현대의 예식 차량이 리본과 풍선, 인형으로 장식되듯이, 화려한 색상을 지닌 다양한 장식품들로 꾸며졌다. 수레를 끄는 말의 갈기에 달린 방울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면서 이제 막 결혼식을 올린 신랑·신부를 축하했으며, 동시에 그들을 시기하는 나쁜 영을 내쫓는 역할을 했다. 수레를 끄는 말에 채워진 마구 아래쪽에는 나쁜 영과 마법사의 저주로부터 신랑·신부를 보호해 줄 ‘부적용 인형’을 매달았다. 행렬이 걷는 모습 또한 예사롭지 않았는데, 역시 나쁜 기운들로부터 방금 언약을 맺고 새롭게 가족이 된 젊은 부부를 보호할 요량으로 갈지자 대열로 이리저리 구불거리면서 행렬을 이어나갔다. 행렬의 마지막에 선 사람들은 길에 난 신랑·신부 행렬의 흔적을 빗자루로 지우고, 동시에 신혼부부를 지켜줄 통나무를 비롯한 다양한 장애물을 곳곳에 설치하면서 따라갔다고 한다. 또한 고대 러시아 몇몇 지역에서는 이렇게 만든 한 쌍의 부적 인형을 가족에게 행복과 번영을 안겨다 주는 좋은 상징으로 여겨서 신접살림을 꾸리기 위해 길을 떠나는 신혼부부의 수레에 단단히 묶어서 보냈다고 전해진다. 신혼부부와 함께 집을 나선 이 부적 인형들은 평생 자신이 따라나선 부부의 집에 머물며 그들의 수호신 역할을 했다.

이렇게 행복한 결혼생활을 위한 다양한 의식과 의례를 비롯한 몇몇 슬기로운(!) 예방책들은 후일 러시아를 거쳐 소비에트 시대는 물론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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