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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로마노프 왕가의 흑역사 파벨 1세 (2): 파블로프스크 궁전 앙상블에 대한 소고(小考)
분류역사
국가 러시아
날짜2020-12-16
조회수507
첨부파일


파벨 1세가 살해된 장소인 미하일로프스키 성은 페테르부르크에 건설된 18세기 러시아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건축물로서, 파벨 1세가 거의 접신(?)을 통해서 직접 기획하는 등 건설에 많은 부분을 감독하여 탄생한 암살방지용 요새형태로 만든 곳이어서 더욱더 비극적으로 느껴지는 장소이다. 그런데 페테르부르크의 중심 거리 넵스키에 로마노프 왕조의 ‘골칫덩어리’ 파벨 1세와 관련된 또 하나의 건축물이 웅장하게 서 있는데, 바로 ‘러시아 고전주의 보석 카잔사원’(Казанский собор)이다. 이 사원은 로마에 있는 성 베드로 성당을 모델로 96개의 코린트식 원주 기둥을 사원의 전면에 배치한 건물이다. 원래 이전의 성모 교회 자리에 보다 규모가 큰 카잔 사원 신축 계획이 입안되었고 건축가 보로니힌은 파벨 1 세의 바람에 따라 사원을 설계했다. 로마를 여행하면서 베드로 성당에 깊은 감명을 받은 파벨 1세의 건설명령에 의해서 만들어 졌다. 건축의 동기, 발주를 파벨 1세가 제공했으니 이 사원 이름을 ‘파벨 1세 사원’이라고 할 법 하지만, 이름은 엉뚱하게도 ‘카잔’이다. 현재 사원의 지성소에 걸어둔, 존재를 계시하는 꿈을 통해서 획득한 ‘이콘’의 출처지가 ‘카잔’이었기 때문이었다. 여기까지는 해외여행에서 견문을 넓힌 왕세자의 통 큰 결정으로 이어진 에피소드로 인기 방송 프로그램 ‘서프라이즈’에 나올 만한 흥미 있는 ‘진실 혹은 거짓’ 이야기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파벨 1세가 여행을 가게 된 동기를 고려하면 제정러시아의 흑역사를 다시 끄집어 내야하는 역사적 페이지로 넘어가게 된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카잔사원>


카잔 사원과 파벨1세, 그리고 예카테리나 2세

‘카잔 사원’의 건축 에피소드는 남편 시해 주인공 예카테리나 2세, 그리고 비극적으로 아들의 방조(아주 온화하게 표현해서)하에 교살당한 파벨1세, 이 이 두 모자의 애증의 관계에서 만들어졌다. 역사적 사실에 기초해서 보면, 1762년 유혈 쿠데타의 결과로 권력의 정점에 도달 한 예카테리나 2세는 1772년 왕위 계승에 관한 법률에 의해 규정된 아들이 성인이 된 이후에 권력을 양도한다는 법률을 무시했다. 과하게 욕심 많은 예카테리나 2세가 권력을 아들에게 양보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법적으로 왕세자이면서 자기가 직접 출산한(이것도 확실하지 않지만, 그녀의 남편은 후대를 잇는 중차대한 과업에 전혀 협조하지 않았다)아들을 정적(政敵)으로 대했다. 아마도 아들을 볼 때 마다 자신이 폐위시키고 결국 자신의 정부(情婦)에 의해서 살해된 표트르 3세가 떠올랐을 수도 있는데, 그렇다고 인간이라면 잠시 느꼈을 심적 고통을 제거하고 영원한 권력 구축을 위해 무시무시한 신화속의 주인공 ‘사트르누스’처럼 아들을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누가 파벨 1세의 아버지이든, 자신이 낳은 것은 확실하니, 아들을 세상에서 제거하는 대신 예카테리나 2세는 아들을 자신과의 접촉 기회를 최대한 줄이고, 정치판에서 ‘졸’로 만들어서 해외여행이나 즐기면서 삶을 마감하게 할 생각이었던 같다. 자신의 뒤를 잇는 후사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 ‘알렉산드르’로 이미 마음의 결정을 한 후였다. 그래서 로마로의 여행도 ‘즐겁지 않은 어머니의 입김’이 들어간 이벤트였을 것이다.


<예카테리나 2세 초상화>


찌질한 파벨 1세 입장에서는, 아버지를 죽이고 자신의 자리를 차지한 어머니가 정말 증오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의 이러한 감정을 황제인 어머니에게 솔직하게 표현할 용기도, 정치적 승리를 위한 ‘신의 한수’조차 없었다. 오히려 파벨1세는 왕좌에 오를 때까지 평생 강압적인 망명, 살해를 평생 두려워했고 그럴수록 어머니에 대한 미움은 상대적으로 더욱더 쌓여만 갔다. 1772년에 제정러시아 황제가 되어야 할 파벨1세가 1796년 어머니가 죽고 나서야 왕좌에 오를 수 있었으니, 그 오랜 기간 동안 견뎌야 했던 수모와 실존의 공포가 이해는 될 것 같다.


파블로프스크 궁전과 공원 앙상블

예카테리나 2세와 파벨 1세의 복원될 수 없는 엄청난 불화가 만든 또 다른 건축물이 바로 페테르부르크 근교에 만들어진 ‘파블로프스크 궁전과 공원 앙상블(Павловский дворцово-парковый ансамбль)이다. 이 곳은 상트페테르부르크 교외지역에 위치한 명소 중 레핀의 ’파나트‘와 함께 내가 가장 많이 드나들었던 장소이다. 많이 갈 때는 거의 매주 일요일 마다 가곤했다. 울창한 전나무 숲이 끝없이 이어지고, 곳곳에 오르막과 내리막도 있어 ’겨울 스포츠‘인 크로스컨트리도 즐길 수 있었고, 또한 운치 있는 ’오솔길‘도 있는 180만평의 광활한 자연을 나는 정말 좋아했다. 


<파블로프스크 궁전과 공원 앙상블>


그런데 이실직고 하면, ‘파벨1세’와 관련된 역사적 유적인 이 궁전 복합체를 인지하고 찾아간 것은 아니었다. 이 장소는 아주 우연히 가게 되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잘 아는 여느 사람들처럼, 나에게는 ‘파블로프스크’보다는 푸시킨이 다녔던 ‘귀족학교’가 있고, 2차세계대전시기 퇴각하는 독일군이 미친 듯이 뜯어갔다는 보석 ‘호박’의 화려한 방이 있는 ‘예카테리나 궁전’이 있는 ‘황제마을’(현재의 푸시킨 시)이 도시 외곽의 초고의 명물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한 한국의 지인들과 예카테리나 ‘호박 방’ 구경을 갔었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날 궁전개방은 쉬는 날이었다. 다행이 궁전 앞에 ‘큰 마당’처럼 펼쳐져 있는 공원을 둘러볼 수 있었지만 오후 전체시간을 보낼 수 있는 또 하나의 이벤트가 필요했다. 그래서 지참한 지도를 보니, 이 궁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 역사적 유물이 있었다. 결국 사전에 휴일을 확인 못한 나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서 찾아간 곳이 바로 ‘파블로프스크 궁전과 공원’이었는데, 나의 자연적 취향 감성 포인트와 이 장소가 잘 맞았다. 한마디로 나와 궁합이 맞는 장소였다. 이후 푸시킨 시의 예카테리나 궁전보다 훨씬 자주 들락거렸다. ‘황제의 마을’이 예카테리나 궁전을 품고 있고, 가운데 앙증맞은 호수가 자리 잡고 있는 ‘자연의 쉼터’역할을 할 수 있는 정원도 있어, 화가의 꿈을 가지고 있는 어린 학생들이 찾아와서 습작을 할 정도로 한 폭의 수채화 같은 장소였지만, 생동감을 뿜어내는 촘촘한 자연, 숲으로 둘러싸인 장소인 파블로프스크 궁전 및 공원 앙상블이 인간적으로 더 친밀감이 느껴졌다. 그래서 예카테리나궁전을 보듬고 있는 공원보다는 더 자주 찾아갔었던 것 같다. 이러한 자연친화적인 환경에서 건설된 파블로프스크 궁전 앙상블의 작은 공간, ‘그레시안홀’에서 매주 일요일에 열렸던 ‘작은 음악회’에서 고전 음악을 듣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황제의 마을 궁전과 공원 앙상블>


파블로프스크 궁전과 파벨 1세 동상

궁전이 있는 파블로프스크 마을은 상트페테르부르크 교외 지역 신흥마을로서, 1777년에 슬라뱐카(река Славянка)강에서 파벨 l 세의 소유로 세워졌다.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기술하면, 슬라뱐카 강 유역에 있는 땅은 예카테리나 2세의 취미인 사냥터와 사냥 할 때 잠깐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 있는 지역으로, 예카테리나 2세가 자신의 첫 번째 손자 인 미래 황제 알렉산드르 1 세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하여 아들 파벨 1세와 며느리 마리아 표도로브나(Мария Федоровна)에게 기증하였다. 물론 이러한 선물이 좋은 관계로의 복원의 시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왕세자인 아들에게 현직 황제가 해야 할 의무, 세상에 태어난 손자에 대한 할머니로서의 인간적인 행위로 취한 하나의 행정 조치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사냥터를 하사하긴 했는데, 초기 궁전의 건설의 계획은 여제 자신의 취향이 반영되어있는데다가 초기 계획상의 궁전의 규모는 현재 건설된 모습과는 전혀 다르게 소규모였다. 그래서 조울증 환자처럼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자신의 아버지 표트르 3세처럼 프러시아 군대를 이상하리만큼 좋아할 만큼 군대의 규율적인 태도를 평소의 생활에서 적용한 파벨 1세는, 예카테리나 2세의 요청에 의해 궁전의 건설을 위해 해외에서 초빙된 건축가와 의견의 차이가 항상 발생하였다. 결국 이러한 자주 발생한 의견 충돌은 불화로 발전되어 건축가가 건설을 포기할 정도였다고 한다. 대표적인 건축가가 바로 1779년 예카테리나 2세의 초청으로 러시아로 온 스코틀랜드 건축가 찰스 카메론이다. 이 건축가는 ‘황제의 마을’에서 ‘로마 목욕탕’을 만드는 아이디어를 가지고 러시아에 도착해서, 자신의 주된 일인 ‘황제의 마을’의 건설에 바빴다. 그런데 여기에 새로운 일, 파블로프스크의 궁전 건설까지 맡게 되었다. 당연히 일의 비중에 따라 ‘황제의 마을 건설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했고, 파블로프스크 궁전의 설계는 일반적인 프로젝트 설계도안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 궁전계획이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던 파벨 1세와 사사건건 의견 충돌이 있었는데, 특히 1786년 이후 카메론은 파벨 1세와의 끊임없는 불화로 인해 자발적으로 파업을 했다. 이러한 불쾌한 과정 이후, 1796년 11월 드디어 황제가 된 파벨 1세는 카메론의 조수였던 이탈리아 건축가 빈센초 브레나를 이 궁전앙상블 건설의 수석 건축가로 임명하였다. 당연히 이 브레나는 궁전을 더 웅장하게 만들려는 파벨1세의 ’고견‘을 충심으로 건설 프로젝트에 반영했다.

파블로프스크 건축 앙상블이 세워진 공원은 유럽에서 가장 넓은 공간을 갖고 있는데, 그 대지의 가장자리 슬로뱐크강의 두 강둑을 따라 건축된 것이 파블로프스크 궁전이다. 이 궁전은 거대한 앙상블의 정수로서 파벨 1세의 황제의 여름 거주지였다. 이 궁전과 공원을 만드는데 약 50년이 걸렸다고 하니, 모순적이게도 파벨1세의 존재의 무한한 가벼움이 이 건축물에서는 한없는 무거움으로 작용한 것 같다. 하긴 ‘모든 모순 중에서 무거운 것 - 가벼운 것의 모순이 가장 신비롭고 가장 미묘한 모순’이라고 밀란 쿤테라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이야기 하지 않았던가!

나는 보통 파블로프스크를 방문 할 때는 완행열차를 타고 <파블로프스크>역에 내려서, 역 안에 있는 카페에서 점심 식사를 해결한다. 그리고 바로 역 바로 앞에 있는 정문을 통해 궁전 앙상블로 들어가는데, 울창한 숲의 한 켠에 터전을 마련한 다람쥐들이 이 공원을 방문하는 나를 반겨주는데, 이 슬기로운 다람쥐들은 이곳을 방문하는 관람객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먹이를 줄 것을 요구하는 듯이 사람들 앞을 얼쩡거린다. 이 귀여운 다람쥐들을 뒤로하고, 울창한 나무숲을 따라 30분 정도 산책을 하면 궁전에 도착하는데, 궁전 내부 관람을 하기 전에 매번 나의 시선을 끄는 것이 궁전 앞에 당당하게(?) 세워진 파벨1세의 동상이다. 


<파블로프스크 궁전과 파벨 1세 동상>


파벨 1세가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한 71년이 지난 1872년 청동으로 만들어진 동상. 왜 그의 후손들이 동상을 세우지 않았겠는가! 그의 아들 4명 중 첫째와 셋째, 즉 알렉산드르와 니콜라이가 제정러시아의 황제가 되었으니, 그들의 후손들이 파벨 1세의 동상을 만든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나는 매번 이 반원형으로 된 우아한 궁전에 들어갈 때 마다 마주치게 되는 이 동상! 이 동상을 볼 때마다 만감이 교차하였는데, 그것은 인간에 대한 연민, 인간의 추악한 민낯을 보는 슬픈 감정이었다. 지지리도 못난 로마노프 황가의 미숙아에 대한 인간적인 연민, 표트르 3세-예카테리나 2세-파벨 1세-알렉산드르 1세 로 연결되는 권력을 향한 채워지지 않는 욕망 보는 것 같아 항상 기분이 개운하지 않았다.

파벨 1세가 살해당한 뒤, 미하일로프스키 성을 버리고 이 곳, 파블로프스크 궁전에 은둔한 그의 부인 마리아 표도로브나, 아들 2명을 황제로 키워낸 그녀의 인생은 행복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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