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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문화로(文化路)
제목러시아 주얼리 아트: 금빛 찬란했던 그 역사
분류전통문화
국가 러시아
날짜2020-12-16
조회수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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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인류 사회 속에서 지속적으로 진화를 거듭해 온 것이 실생활 속 쓰임에 중점을 둔 공예라고 한다면, 그 공예 중에서도 외적 아름다움을 극대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발전해온 분야가 바로 귀금속공예다. 주얼리 아트는, 7000년의 역사를 이어오는 동안 때로는 개인의 사회적 신분을 노출하거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때로는 사랑과 죽음을 기리는 감정표현의 수단으로, 때로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어 왔다. 지금까지 세계 각지에서 발굴된 장신구 유물들의 양과 종류를 볼 때, 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예나 지금이나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으로 인간 삶 깊숙이 자리매김해 온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는 러시아에서도 마찬가지인데, 귀금속공예는 러시아인들에게 민족의 자부심으로 여겨질 만큼, 러시아 선조들의 창의적 아이디어와 경험이 녹아들어 있는 작품들은 셀 수 없이 많이 존재한다.

러시아 귀금속 공예는 그리스도교 수용 이후 그리스, 아르메니아, 스칸디나비아 등 많은 문화권의 영향을 받아왔다. 이처럼 외부의 강력한 영향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장인들은 자신들의 개성, 양식, 기법, 언어를 고안해냈고, 돌과 금속이라는 형태 없는 무생물에 러시아의 영혼을 한껏 불어넣었다. 이러한 이유로 현재 박물관과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러시아 귀금속 예술품은 지금껏 우리들에게 예술적 상상력을 발휘토록 하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가치는 더욱 높게 평가되고 있다.


11-12세기, 고대 러시아의 귀금속공예

오늘날 러시아 귀금속공예와 보석의 역사는 매우 다양한 갈래로 연구되고 있다. 귀금속공예의 진화를 논의할 때, 이는 지역, 학파, 양식, 재료, 기술 등 이를 둘러싼 다양한 문제들과의 상호연관성 속에서 다루어지는 한편, 사회·문화적 변화와의 유기적 상관관계 역시 그 논의의 대상에 포함되고 있다. 때문에 이와 관련한 연구는 학자들 사이에서 러시아 역사 연구와 동일시되고 있을 만큼 방대한 작업이 될 수밖에 없다. 이처럼 귀금속공예와 관련한 다양한 논의가 현재진행형이지만, 이와 관련하여 고고학자들이 오늘날까지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바가 있다. 바로 귀금속이 고대 러시아인들에게 이중적 의미를 지닌 물건으로 존재했다는 점이다. 한편으로 고대인들은 특정 장식품을 몸에 지님으로써 해당 사회 내에서 자신이 누리는 지위를 표출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장식품 안에 보이지 않는 악령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주는 주술적 의미가 담겨 있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된 스키타이 시대의 유물들, 예컨대 청동과 구리로 제작된 반지, 목걸이, 펜던트 등 다양한 장식품들에는 그들이 믿어 왔던 대상들의 고유한 문양이 정교하게 수놓아져 있다.

7세기는 러시아 공예 역사에서 급진적인 전환점이 시작된 시기로, 이때는 무엇보다 공예 분야의 다양화와 공예품 생산량의 증가가 급격하게 이루어졌다. 공예품은 이제 일상적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러시아인들의 미적 만족도를 충족시키기 위한 일종의 사치품으로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에게 러시아 최초의 귀금속공예 도시로 알려진 키예프와 체르니고프에서는 금을 다루는 기술이 발전하기 시작한다.

키예프 제품의 특징으로는 순수한 금이 아닌 ‘금을 주성분으로 하는 합금’을 사용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으나, 사실 이 시기 작품들은 독창성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 키예프 장인들은 비잔틴에서 들여온 제품을 복제하는 데 더욱 특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가령 비잔틴 보석상이 각 제품에 대해 원본 그림과 무늬를 만든 경우, 키예프 장인들은 주로 그림과 엠보싱의 틀을 본뜨는 작업을 했다. 이러한 복제기술 습득은 공예기술이 상당히 발달해 있던 비잔틴식 기법을 이해하고 자기화하기 위한 효과적인 학습의 과정이었다. 또한 비잔틴 양식을 선호했던 당시 러시아 귀족들의 취향과 요구는 키예프 장인들의 실력 향상에 큰 도움이 되기도 했다. 이렇게 주얼리 아트를 발전시킨 11세기 키예프 시대는 러시아 귀금속공예의 최초 전성기로 볼 수 있다. 그 당시 다양한 종류의 제품들이 제작되었는데, 특히 여성 머리 장식에 사용되는 콜트(колт), 랴스나(рясна) 등과 같은 펜던트, 가슴팍 장식을 위한 목걸이의 일종인 바르믜(бармы), 손목에서부터 팔꿈치를 보호하는 나루치(наручи), 여성들을 위한 팔찌(браслет) 등이 인기를 끌었다. 12세기에는 기하학적 패턴 양식이 출현했다. 비잔틴 모델을 모방해 만들어진 일반적인 콜트 이외에도 키예프 장인들은 광선, 원형 또는 곡물의 형태로 장식된 별 모양의 콜트를 제작하기도 했다.


<11세기 키예프 지역에서 생산된 콜트와 팔찌>


한편 러시아에서 갓 시작된 귀금속 예술은 비잔티움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으나, 그와 동시에 인근에 위치한 러시아 도시의 다른 공예 제품들(에나멜 공예나 철기 공예)이 키예프에 이미 들어와 있었다는 점 역시 주목할 만하다. 여러 귀금속공예 연구자들은 비잔틴 공예가 키예프에 미친 영향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11세기 러시아 장인들이 이미 금속가공 주조 공법, 보석 세공법, 에나멜 제작법과 같은 여러 종류의 공예에 능숙했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한다.


12-15세기, 랴잔과 블라디미르 귀금속공예

러시아 귀금속 장신구가 키예프에서만 생산되었던 것은 아니다. 랴잔과 블라디미르는 키예프의 뒤를 이어 귀금속 장신구로 유명세를 얻었다. 특징적인 부분은 블라디미르와 랴잔 공예가들은 금과 은을 동시에 사용하는 방식을 선호했다는 것이며, 덕분에 그들은 매우 독창적인 작품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 블라디미르 금제품은 매우 정교한 기술로 제작되었다. 장인들은 민무늬 금제품에 복잡한 무늬나 선을 새기는 공법을 습득했는데, 이는 당시 고도의 섬세함을 필요로 하는, 그때까지 키예프에서는 사용된 바 없는 특수한 기술이었다. 블라디미르 장인들이 이 기술을 어디에서 어떻게 배웠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명확히 밝혀진 바 없지만, 이 기법이 우라르투 왕국과 카프카즈 지역에서 오랫동안 사용된 기법임을 고려할 때 해당 지역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한편 랴잔의 귀금속공예는 이전 제품에 비해 높은 완성도를 자랑했다. 랴잔 장인들이 생산한 콜트와 바르믜는 대부분의 경우 다채로운 보석과 진주로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보통 세 가지 색상이 사용되었으며, 장식은 양면으로 이루어져 입체감이 돋보였다. 무늬 역시 매우 복잡한 형태를 띠었는데, 이에 대해 슬라브 문화를 연구하는 고고학자 보리스 릐바코프(Б.А. Рыбаков)는 랴잔의 장식이 무의미한 패턴들의 조합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고대 예술가의 관점에서 조직된 다양한 픽토그램들의 결합’이라며 미적 완성도를 높이 평가했다. 또한 랴잔 귀금속의 일부 제품에서는 에나멜이 보석보다 중요하게 다루어져 제품 구조에서 지배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당시 에나멜의 비용은 원석의 가격만큼이나 높았다는 사실을 미루어 볼 때, 랴잔 공예가들의 애나멜 사용이 비용 절감의 차원이라기보다 작품 안에 색채의 다양성을 부여하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에나멜은 금속의 효과와 스테인드글라스의 효과를 동시에 나타낼 만큼 다양하고 화려한 컬러감을 가진다.) 


<13세기, 랴잔에서 생산된 콜트>


16-18세기 페테르부르크 주얼리 패션

16-17세기 주얼리 장식은 금, 은과 함께 다채로운 보석으로 장식되어 고급스러움과 화려함을 특징으로 했고, 이를 찾은 주요 고객은 황실, 보야르, 교회였다고 한다. 이 시기 주얼리에 사용된 보석들로는 진주, 루비, 핑크-전기석, 체리-가넷, 블루 사파이어 등을 들 수 있다. 에메랄드는 이집트와 페르시아에서, 에메랄드를 제외한 대부분의 보석은 중국, 인도,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공수해왔다. 따라서 당시 러시아 내에는 보석 광산이 존재하지 않았으나, 황실과 귀족들은 다채로운 각종 보석들을 소유할 수 있었다. 일례로 이 시대를 지배했던 이반 4세는 산호, 에메랄드, 루비, 진주, 사파이어 등 값비싼 보석을 다량 소유했으며, 그가 두 번째 아내 마리야 템류코브나(М. Темрюковна)에게 진귀한 보석과 진주로 장식된 키카(кика, 기혼 여성의 머리장식)를 3kg 중량의 황금 접시에 담아 선물했다는 사실 또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반 뇌제가 영국 대사 고르세이에게 보물을 보여주다
Иван Грозный показывает сокровища английскому послу Горсею>, А.Д. 리토브첸코 作, 1875.


18세기 표트르 대제 집권 시기, 러시아는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급변의 시기를 맞았다. 러시아는 서구의 혁신에 합류하여 유럽식 국가로 재건되었고, 그와 같은 변화는 주얼리 아트에도 적용되었다. 18세기 ‘금, 은 세공(серебряное и золотое дело)’라는 러시아 단어가 ‘귀금속ювелир’이라는 유럽식 용어로 대체되었고, 보석 장신구들은 러시아 문화예술계의 새로운 트랜드로 등장했다. 또한 1700년, 표트르 대제의 의복 개혁 이후 러시아인들의 새로운 의상에는 그에 걸맞은 새로운 장신구가 필요했으며, 이때 티아라, 커프스, 브로치, 버클 등이 러시아에 등장했다. 유럽인들 일상에서 보편화되어 있던 이 모든 장신구들은 러시아인들에게 새로운 아이템으로 여겨졌고, 곧 화려한 유럽식 커스튬 주얼리가 러시아 패션계를 지배하는 트랜드로 자리를 잡아갔다. 이 시기 주목받았던 재료들은 값비싼 원석들이었다. 그중 다이아몬드가 단연 가장 귀한 대접을 받았고, 그때부터는 크리스탈 세공기술이 발전하게 된다.

한편 표트르 대제의 후원으로 알타이와 우랄 지방에서 광물 매립지가 개발되기도 했다. 그 인근에는 보석 공방도 설립되었으며, 1714년부터 1800년까지 5천 명 이상의 유럽 보석 공예가들이 러시아 제국의 영광을 위해 들어왔다. 모스크바에서만 43명의 금세공 장인과 232명의 은세공 장인이 활동했고, 그중 러시아 보석 공예 발전에 이바지한 인물들로는 프랑스 출신의 장 피에르 아도르(Жан Пьер Адор), 스위스 출신의 이예레미야 포지예(Иеремия Позье), 독일 출신의 요한 샤르프(Иоганн Готтлиб Шарф) 등이 있다. 당시 가장 인기를 끌었던 장신구는 프랑스 양식을 기반으로 한 제품들이었다. 특히 목장식에 사용된 ‘페르무아르(фермуар)’는 물건의 이음매를 연결하는 버클로 세련된 형태를 지녔으며, 체인 형태로 만들어진 ‘샤틀렌(Шатлен)’은 허리나 목 또는 주머니에 매달아 장식 아이템으로 사용했다. 또한 보석과 깃털이 달린 머리 장식은 ‘에그레트(эгрет)’라고 불렸다. 옷을 장식하는 꽃 부톤예르카(бутоньерка)나 크리스탈과 보석으로 제작된 꽃병 ‘포르트부켓(портбукет)’도 인기를 구가했다.


<И. 포지예의 포르트부켓과 왕관, 18세기 중반>


혁명기 이후 러시아 주얼리 아트

19세기 귀금속공예는 대량생산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유행의 급변함에 따라 새로운 주얼리에 대한 요구가 증가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주얼리 생산이 본격화되면서 세공 기술이 급격히 발달했고, 제품의 품질 역시 크게 향상되었다. 무엇보다 제품 크기를 확대하기 위해 ‘할로우 골드(дутое золото)’ 기법이 등장하기도 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 공법이 적용된 제품들은 작품 제작에 사용된 금속의 실제 중량이 적어 저렴한 금액에 판매되었으나, 그에 비해 장식이 커 보이는 시각적 효과를 나타낸 한편, 동일한 금속 중량으로 더 많은 제품들을 생산해낼 수 있었다.

이 시기 인기 제품으로 등극한 아이템은 곤충을 소재로 한 주얼리였다. 파리, 거미, 딱정벌레의 이미지로 장식된 브로치와 팬던트가 등장했고, 이는 보통 금과 크리스탈로 장식되었다. 또한 가닛, 에메랄드, 다이아몬드로 반짝이는 눈이 표현된 뱀 형상의 장신구는 특히 사랑받았다고 한다.

19세기에는 금속과 보석 세공 전문가를 위한 교육 시스템과 전문 회사가 마련되기도 했다. 소규모 워크샵 외에도 옵치니코프(Овчинников), 흘레브니코프(Хлебников), 사지코프(Сазиков), 파베르제(Фаберже)와 같은 러시아의 대형 보석 브랜드가 설립되었다. 이 회사들은 새로운 공법과 기술을 개발하고 재능 있는 아티스트를 고용하여 다양한 스타일의 제품을 생산했다. 또한 개별 구매자의 취향을 반영한 주문제작 방식을 도입해 많은 고객들을 확보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보석의 대량생산은 고품질을 유지하는 데 걸림돌이 되기도 했다. 이 모든 회사들이 보석의 생산량 확대와 기술력 향상, 예술적 완성도를 균형적으로 유지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결국 당시 설립된 많은 브랜드 중 파베르제만이 세 가지 조건을 충족시킨 브랜드로 이름을 알리며 러시아 귀금속 아트계의 선두에 올랐다. 이 회사에서 생산된 제품들로는 보석을 활용한 칼, 담배 케이스, 각종 기념품 보석 장신구 등이며, 파베르제의 수입을 책임진 대표 제품은 장식용 부활절 달걀이었다. 


<카를 파베르제 공장에서 제작된 주얼리 공예>


1917년 혁명 이후 러시아 주얼리 아트는 조금 특별한 길을 걷게 되었다. 많은 보석 브랜드가 새로운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한 대대적인 혁신을 감행했고, 모든 생산 공정을 재설계하기 시작했다. 보석 장식을 주요 업무로 한 파베르제와 동일한 운영방식을 취했던 흘레브니코프 공장은 석세공에 뛰어들었고, 콜리반스키 공장은 러시아 원석 가공 전문 회사로 전환했다. 그리고 20세기 초반까지 러시아 황실의 찬란함을 책임지며 러시아 주얼리 아트를 지배해온 파베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그때부터 러시아 주얼리는 오히려 서유럽에서 유명세를 탔다. 혁명의 결과 이어진 러시아인들의 망명 물결은 유럽 사회에 ‘러시아 스타일(стиль la russe)’의 주얼리를 유포하는 데 일조했다고 볼 수 있다.

파베르제 공장의 폐쇄로 러시아 내부에서는 주얼리 아트가 사양길로 접어든 듯 보였다. 그러나 1930년대 중반, 오랜 정체기를 뒤로하고 코스트로마 귀금속 조합(Костромская ювелирная артель)이 은도금 제품을 소량이나마 생산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러시아 주얼리 산업의 부활을 의미했다. 모스크바, 예카테린부르크,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소규모 작업장이 설립되었고 다른 도시에서도 잇달아 보석 및 귀금속 생산이 재개되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미 귀금속 공예가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이 존재하지 않았다. 보석을 만드는 일은 장인이 아닌 화가나 디자이너들의 몫이었고, 그들은 과거에 생산된 각종 보석 장식품을 그대로 복제하는 데 머물렀다. 러시아에서 귀금속 전문 작가에 의한 보석이 다시금 생산되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중반 무렵이었다. 그때부터 주얼리 아티스트들의 주요 목표는 예술적 표현이 되었으며,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제품 안에 구현하기 위한 기술과 재료들을 개발했다. 그리고 1980-90년대에 이르러 페릭스 쿠즈네초프(Ф. Кузнецов), 겐나디 렌초프(Г. Ленцов), 블라디미르 곤차로프(В. Гончаров), 알렉사드르 카멘스키(А. Каменский)와 같은 소비에트 주얼리 거장들이 탄생되었다.

사실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오늘날까지의 상황을 보면, 러시아 주얼리 산업은 장기적인 침체기에 접어든 듯하다. 러시아 주얼리 산업 규모는 2010년대 들어 꾸준히 50억 달러 내외를 기록하고 있어 우리나라와 비슷한 수준의 규모를 가진다. 러시아가 면적으로 보나 인구수로 보나 우리보다 월등한 나라임을 고려할 때 우리와 비슷한 50억 달러라는 수치는 그리 큰 시장 규모라고 보긴 어렵다.(북미 약 520억 달러, 중국 약 400억 달러, 유럽 약 180억 달러, 일본 약 120억 달러) 그러나 러시아 주얼리 아트의 역사 속에서 장인들 스스로 몇 차례의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전성기를 만들어 냈듯이, 곧 다가올 미래에 다시 한 번 러시아가 주얼리 아트의 찬란한 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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