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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슬기로운 결혼생활: 소비에트 시절 결혼식 풍경을 엿보다
분류지역문화
국가 러시아
날짜2020-12-01
조회수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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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과 달리 요즘에는 ‘스몰 웨딩’이 유행이라 결혼식 규모나 소위 ‘예식 전 의전’이 많이 간소화된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올해는 코로나 확산세로 인하여 결혼식 규모가 한층 더 축소되거나 아예 예식 일정 자체를 한참 뒤로 늦춘 커플들도 많은 듯싶다.

결혼이라는 행사 자체가 지금의 예식문화와 비교해 볼 때 ‘의전’으로서의 의미가 한층 더 강했던 시절, 한 때 예비 신랑이 결혼을 앞두고 통과해야 하는 가장 큰 관문 중 하나가 바로 ‘웨딩 촬영’이었던 적이 있었다. 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당시 한참 모던한 카페들이 들어서 있던 압구정동이나 청담동, 혹은 홍대 피카소 거리 근처를 지나다 보면 여기저기에서 촬영에 열중하고 있는 예비 신혼부부를 심심치 않게 목격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거리 한가운데에서 신부들은 다소 수줍어 보이는 표정을 보이다가도 이내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행복에 가득한 예비신부의 모습을 가감 없이 드러내곤 했다. 처음에는 쭈뼛거리며 어색한 웃음을 짓던 예비 신랑도 시간이 좀 지나고 나면 내가 언제 그랬냐는 듯 대부분 촬영팀의 지시에 맞춰 꽤 괜찮은 포즈를 만들어내곤 했다. 촬영 당일 메이크업을 받기 위해 꼭두새벽부터 샵으로 출동하여 하루 온종일 진행되는 빡빡한 일정으로 인해, 촬영이 끝나고 난 뒤 간혹 어떤 예비 신랑과 신부 커플은 몸살을 앓았다는 후문도 들려온다. 지금도 예식 전에 소소하게 지인들과 모여서 앨범 촬영을 진행하긴 하지만, 연예인 촬영 부럽지 않을 정도로 최신식 촬영 장비를 갖춘 촬영기사와 스텝은 물론이요, 전담 코디와 메이크업 팀까지 거느리고 서울 시내 소위 ‘뷰 맛집’을 찾아다니는 일은 보기 힘든 진풍경이 되었다. 웨딩촬영이 대부분 야외가 아닌 스튜디오 촬영으로 전환된 탓도 있겠지만, ‘스몰 웨딩’과 실속을 추구하는 현 2030 세대의 현실 감각도 크게 작용한 듯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식보다 웨딩 촬영할 때가 더 재미있고 행복했다”라는 의견에는 다들 공감하는 눈치이다.

이러한 한국의 결혼문화와 비교해 볼 때 과거 소비에트 시절의 결혼문화는 소박하다 못 해 상당히 무미건조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물론 소비에트 중·후반기를 지나 포스트소비에트 시기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러시아의 결혼문화 역시 상당히 화려해졌다. 과거의 결혼식 전통이 부활하고, 형식적인 결혼신고 수준에 머물렀던 결혼식 문화는 점차 화려한 연회를 동반하는 하나의 축제문화로 자리매김하기에 이르렀다. 햇살이 꽤 뜨거운 여름은 물론, 영하 20도의 추위에도 불구하고 순백색의 웨딩드레스를 차려입은 채 모스크바와 페테르부르크의 화려한 배경을 뒤에 업고 포즈를 취한 행복한 표정의 신랑과 신부를 향해 연신 플래시를 터뜨리는 장면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러한 현대의 러시아 결혼문화보다는 다소 ‘낯선’ 소비에트 시절의 결혼문화가 좀 더 눈길을 끈다.


<현대 러시아 결혼식 풍경>


소비에트 시절 초기 결혼문화는 말 그대로 ‘무미건조’한 형식적 결혼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10월 혁명 이후 내전을 겪으면서 혼란한 시기를 보내서일까? 초기 소비에트 시절 정말로 ‘사랑해서, 사랑에 의한, 사랑을 위한’ 결혼은 매우 드물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의견이다. 물론 정말로 사랑에 의한 결혼을 통해 부부의 연을 맺은 젊은 신혼부부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현실은 사랑보다는 ‘필요’에 의한 결혼이 더 지배적이었다고 한다.

당시 소비에트 정부는 부부를 소위 국가의 기반을 이루는 ‘사회 구성의 기본 세포(ячейка общества)’로 간주하여 무상 아파트를 더 빨리 취득할 길을 열어줬다고 한다.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기숙사 한쪽에 놓인 구석방이나 ‘코무날카’로 불리는 공공주택이 주어지는 것이 전부였으며, 그나마도 얻기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심지어 혼인하지 않은 사람들은 취직도 힘들었고, 해외여행 허가를 받아내는 일은 하늘의 별따기와 맞먹는 일이었다. 혹시라도 아직 결혼신고를 하지 않은 남녀가 호텔에 투숙한 것이 발각되기라도 한다면 밤 11시에도 가차 없이 쫓아냈으며, 혼자 사는 것도 서러운 판에 독신 남성(!)에게는 소위 독신세에 해당하는 ‘홀아비 세’까지 거둬갔다니, 하루라도 빨리 결혼을 하지 않으면 그야말로 인생이 피곤해질 수밖에 없는 시절이었던 것 같다.

1917년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러시아인들은 전통적으로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겸사겸사 교회에서 결혼신고도 했다. 일반적으로 ‘종교 결혼식’ 혹은 ‘교회 결혼식’이라고 하면, 혁명 이전에 러시아 교회에서 치러졌던 전통적인 형태의 결혼식을 지칭한다. 혁명 직후 기존의 ‘교회 결혼식’을 대체하여 소위 ‘시민 결혼식’이라는 것이 등장했는데, 이는 혁명 이후 설립된 신분등록기관인 ‘작스’에서 혼인신고와 함께 진행된 결혼 서약식을 일컫는 것이었다. 혁명 이후 가족의 의미 역시 친족, 혈연의 의미보다는 새로운 사회 건설이라는 동일한 이상과 생각을 가진 집단으로 변질되었으며, 소비에트의 미래 일꾼이 될 아동교육 역시 이제는 가족이 아닌 국가 차원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가족은 아이들의 독립적인 인격 형성에 부정적인 영향만 끼치는 해로운 집단이었고, 국가는 이를 바로 잡아야 할 ‘역사적’ 사명감에 사로잡혀 전통적 의미의 가족을 해체하고, 전 세계가 하나 되는 새로운 가족 구성에 돌입하게 된다. 하지만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가족의 해체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비록 국가에서 인정하지 않았고 암암리에 행해진 종교에 대한 탄압으로 인해 더 이상 ‘교회 결혼식’을 치르진 못했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인식 속에는 ‘시민 결혼식’이라는 용어가 낯설게 여겨졌고, 심지어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시민 결혼식’을 두고 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동거’ 형태로 취급하기에 이른다. 


<‘작스’에서 혼인신고 중인 부부>


혁명 이후 종교시설을 통해 이루어진 혼인신고는 법적 효력을 상실하게 된다. 교회를 비롯한 종교시설은 더 이상 가족인증 기관의 역할을 할 수 없었고, 새로이 성립된 소비에트 정부가 그 역할을 가로채갔다. 그리고 1917년 12월 18일 자로 ‘시민 결혼, 아동 및 신분증 대장 관리에 관한 법령’이 발표된 이후, ‘작스(ЗАГС)’라는 약어로 지칭되곤 하는 일종의 신분등록사무소가 설립되었다. 소비에트 시절에는 바로 이 ‘작스’에서 시민들의 출생 및 사망신고는 물론 혼인신고까지도 모두 관장했다.

이듬해인 1918년 9월에는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ВЦИК)’ 회의에서 ‘신분증 및 결혼, 가족, 후견인 권리에 관한 법규’가 수용되었는데, 이 법에 따르면 오로지 “‘작스’에서 등록을 마친 시민 결혼식만이 부부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인정받으며, 기존처럼 종교시설이나 종교 의례, 혹은 종교인이 관장하여 진행된 결혼은 정해진 절차에 따라 작스에서 혼인신고를 하지 않을 경우, 부부로서 그 어떤 권리나 의무도 인정받지못한다”. 이처럼 문서에서는 ‘작스’에 신고를 마치기만 하면, 마치 기존의 ‘교회 결혼식’을 행해도 되는 것처럼 적어놨지만, 실질적으로 기존의 ‘종교 행위’를 동반한 전통 결혼식은 폐기처분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결혼과 관련된 전통적인 종교적 의례를 일절 거부하는 ‘시민 결혼식’은 ‘붉은 결혼식(красная свадьба)’이라는 명칭으로도 통용되었다. ‘붉은 결혼식’이라는 명칭은 초창기 소비에트 정부에서 활동한 여성운동가이자 소비에트 정부에서 최초의 여성 장관을 지낸 알렉산드라 콜론타이(Александра Колонтай)에 의해 탄생되었다. 그녀와 결혼한 파벨 디벤코(Павел Дыбенко)는 당시 해군 인민위원 직책을 맡고 있었으며, 사랑에 빠진 이 두 연인은 소비에트 국가 신분증 대장에 가장 최초로 혼인신고 기록을 남긴 인물이 되었다. 처음에는 콜론타이의 남편이 될 디벤코가 결혼식을 올리는 것은 과거로 회귀에 불과하다며 결혼식 자체를 거부했지만, 콜론타이는 모두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며, 부도덕한 혐의를 받고 자신들을 지켜보는 적들에게 중상모략의 빌미를 줄 필요가 없다면서, 전통 결혼식이 아닌 소비에트 스타일의 ‘붉은 결혼식’ 즉 ‘시민 결혼식’을 올리자며 그를 설득하기에 이른다. 이때가 바로 신분증 대장 관리 및 새로운 결혼 관련 법령이 발표되기 바로 한 달 전인 1917년 11월이었다. 콜론타이에 의해 명명되고 실행된 ‘붉은 결혼식’에서는 기존에 존재했던 결혼식 전통이 모두 거부되었다. ‘작스’에서 진행되는 ‘붉은 결혼식’에는 하얀 드레스도, 부모님의 축복도, 언약의 징표인 반지 교환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붉은 천’으로 씌워진 혼인신고용 책상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와 파벨 디벤코>


‘작스’에서 결혼식을 관장하는 관료는 주례를 대신하여 신혼부부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이 좋은 시기에 신랑 000 군과 신부 000 양은 (신랑과 신랑의 이름을 부름) 서로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레닌 당이 이끄는 우리 조국의 평화로운 하늘 아래에서 소비에트 시민은 공산주의 미래를 향한 밝은 길을 걸어 나갑니다. 여기 두 분, 우리 민중의 자녀, 민중의 희망이자 미래인 당신들은 오늘 결혼 관계를 맺게 됩니다. 청년 시대는 과거로 남겨지고, 책임감 있는 가정생활의 시간이 앞에 놓여있습니다.

고결한 사회적 의무를 수행해나가는 국가를 대표하는 이의 자격으로 아래의 질문에 대답해 주시기를 청하는 바입니다.

신부 000 양, 당신은 평생 신랑 000 군의 진정한 친구가 될 준비가 되었습니까?”

“네.”

“신랑 000 군, 당신은 평생 신부 000 양의 진정한 친구가 될 준비가 되었습니까?”

“네.”

일반적인 결혼선언문 양식과 유사해 보이지만, 남편이나 아내가 아닌 ‘친구’가 될 준비가 되었냐고 묻는 것이 인상적이다. 이상의 질의 응답을 마친 후에 신랑과 신부는 ‘작스’의 혼인 담당 공무원 앞에서 다음과 같은 서약을 선언한다.

“우리는 소비에트 조국의 법을 마주하고, 부모님과 친구, 그리고 동지들 앞에서 배우자로서, 가족의 창시자로서, 가문의 후계자로서, 우리 국가의 선과 소비에트 민중의 불멸과 개인의 행복의 이름으로 우리가 함께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는 바입니다.”

이처럼 거창한 선언이 선포되기까지의 과정 역시 녹록하지만은 않았다. 전통적인 결혼식이 아닌 소비에트식 결혼식이 공식화된 이후 누군가 일단 결혼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결혼식 예정일보다 최소 2~3달 전에 ‘작스’를 방문해서 결혼 의사를 밝혀야 했다. 예정일보다 몇 달 더 일찍 ‘작스’를 방문해야 하는 이유 중 하나는 길게 늘어선 혼인 대기자 순서를 조금이라고 줄여보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더 중요한 목적은 바로 신혼살림을 마련하는 데 필요한 특별증서를 교부받는 것에 있었다.

‘작스’를 방문한 예비부부와 이들의 결혼식 증인에게는 소위 ‘초대장’으로 불리는 특별증서가 발급되었는데, 이는 예비부부를 위해 정부 차원에서 마련해주는 일종의 혼수 지원자금과도 같은 것이었다. 결혼 물품 구입허가서와 다름없는 이 ‘특별 초대장’을 들고 상점을 방문한 예비 부부는 신혼살림을 위한 다양한 물건을 구매할 수 있었다. 또한 결혼식을 마친 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작스’에서 결혼신고식을 마친 뒤 부부의 연이 성립됨과 동시에 신혼부부에게는 물론이요, 이들의 혼인서약식 증인을 섰던 사람들에게도 침대 시트와 이불커버, 베갯잇 각 2장씩과 식탁보 1장, 수건 4장을 무상으로 지급되었다. ‘특별 초대장’은 말 그대로 평소에 일반 배급표나 물품구매권만으로는 구입이 불가능한 ‘특별한’ 물건을 살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마법의 ‘프리패스’와 같은 것이었다. 또한 무상으로 지급되는 물건들도 당시에는 꽤 귀한 품목에 속했기에, 젊은이들은 한 때 서로 앞다퉈 결혼식 증인을 서겠다며 나서곤 했다는 후문도 들려온다. 


<‘작스’에서 교부된 결혼 물품 구입허가서> 


1950년대와 60년대까지만 해도 결혼식 피로연은 대부분 집에서 행해지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가족 친지 및 친한 지인들을 초대하여 소박한 형태로 진행되었다. 농촌에서는 집안이 아닌 마을 한가운데에 커다란 상을 차려놓고 잔치를 벌이는 형태로 결혼식 피로연이 진행되었다.

세계 제2차대전이 끝났는지 얼마 되지 않은 탓에 소비에트 전역에 물자가 풍족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런 이유로 예비신부의 부모들은 결혼식이 거행되기 거의 일 년 전부터 마을 잔칫상에 놓일 과자와 간식거리를 차곡차곡 모아나갔다. 오랜 기간에 걸쳐 모은 과자와 주전부리는 시간이 너무 지나서 잘 깨물어지지 않을 만큼 딱딱하게 굳어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동네에서 누군가 결혼하는 날은 여느 축젯날 못지않게 아이들이 목을 뺀 채 손꼽아 기다리는 날 중 하나가 되었다. 예식을 치른 신랑과 신부는 마을에서 마련한 화물 트럭 뒷자리에 나란히 앉아서 트럭을 뒤따라오는 아이들에게 지난 일 년간 신부의 부모님이 차곡차곡 모아온 과자를 아이들에게 흩뿌리면서 동네를 순회하곤 했다.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결혼식이 있는 날을 축제로 여겼는데, 바로 이날 각 가정마다 비밀스럽게 마련해 둔 지하창고의 맥주를 마음껏 마실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60년대 말까지 소비에트 시절의 결혼식은 한편으로는 기존의 전통에서 벗어나 어딘지 모르게 필요에 의해 의전처럼 행해진 다분히 형식적인 측면도 존재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규모는 다소 소박하지만 나름대로 저마다의 낭만과 추억이 담긴 마을 잔치의 일환으로 명맥을 유지해나갔다. 그러다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결혼식 형태가 점점 더 진화되기 시작했으며, 피로연 역시 현대의 결혼피로연 못지않게 나름대로 그 시절의 상황에 맞춘 가장 화려한 방식으로 진행되면서 일종의 축제문화처럼 자리잡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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