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K(인문한국) 사업단 홈페이지

HK(인문한국) 사업단

웹진 문화로(文化路) 내용 시작

웹진 문화로(文化路)
제목로마노프 왕조의 흑역사 파벨 1세 (1): 미하일로프스키 성과 파벨 1세의 살해
분류역사
국가 러시아
날짜2020-11-16
조회수569
첨부파일

전격적으로 서구화를 단행하여 오늘날 러시아의 기틀을 다진 표트르대제의 동상을 러시아의 주요 도시에서 보는 것은 흔한 일이다. 특히 ‘서구로 향한 창, 유럽으로 향한 창’을 표방하고 계획적으로 건설된 모던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가면 말을 탄 표트르대제의 동상들을 시내에서 볼 수 있다. 그 동상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프랑스의 유명 조각가 팔코네(Étienne-Maurice Falconet)가 만든 ‘청동의 기사’(Медный всадник)이다. 1782년 네바강둑의 원로원 광장에 건설된 청동의 기사는 러시아의 문학의 국부인 푸시킨의 장시 <청동의 기사>가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대표하는 신화 및 상징적인 기호가 되었다.’

‘청동의 기사’상의 주문자는 표트르 3세에게 시집온 몰락한 독일 가문의 공주였던 예카테리나 2세. 그녀는 러시아 역사의 찌질한 황제의 대표주자인 ‘표트르 3세’를 폐위하고 종국에는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궁정쿠테타로 정권을 탈취한 무서운 여장부였다. 이런 철의 여인의 의지가 담긴 ‘예카테리나 2세가 표트르 1세에게’ 라는 문장이 ‘청동의 기사’상을 받치고 있는 하단의 커다란 화강암 덩어리 왼쪽과 오른쪽에 각각 라틴어(Petro Primo Catharina Secunda)와 러시아어로(Петру перьвому Екатерина вторая) 새겨져 있다. 아마도 과거 어두운 역사를 가진 러시아를 문명의 빛으로 ‘멋진 신세계’로 이끌겠다는 일종의 러시아 국민들에게 호소하는 짤막한 계몽 개혁 선언문으로 해석할 수 있다. 쉽게 말하면 윤리적인 측면에서 남편을 죽인 악처-이방인 독일 공주의 악한 행위를 망각하게 만들고 러시아를 좋은 곳으로 인도하는 유토피아(?) 구축자로 자신을 광고한 것이다. 하여튼 역사적 보물인 ‘청동의 기사’는 만든 지 238여년이 지난 현재 페테르부르크 시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유물로, 작스(ЗАГС, 결혼등록소)에서 갓 식을 올린 청춘남녀들이 도심나들이 이벤트를 하면서 가장 먼저 찾는 명소이다. 새 인생의 출발점에 선 커플에게는 미래의 행운과 복을 가져다 줄 수도 있는 ‘도깨비방망이’ 같은 동상인데, 그래서 청동의 기마상 주위에는 행복하게 평생 해로 할 것을 기원하는 신혼부부들이 깨뜨린 샴페인 잔의 무수한 파편들을 쉽게 발견 할 수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소재 청동의 기사상>

미하일로프스키 성과 표트르 대제의 동상

그런데 푸시킨의 시에서 명칭을 빌려 쓴 ‘청동의 기사’상의 유명세에 가려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말 탄 표트르 대제의 동상이 페테르부르크에 또 하나 존재하는데, 이 청동의 기마상은 예카테리나2세의 아들인 황제 파벨 1세가 살해당한 비운의 역사적 현장 미하일로프스키 성(Михайловский замок) 앞에 세워져 있다. 이 성은 고대도시 모스크바에서 서구화의 전진기지로 정해진 페테르부르크로 수도를 이전한 지 몇 년 뒤 황제의 소박한 거처로 마련한 여름궁전(Летний дворец)과 이 도시의 중심거리 ‘넵스키대로’를 가로지르는 3개의 운하 중 판탄카(Фонтанка)와 모이카(Мойка)의 합류지점에 자리를 잡고 있다. 1796년 어머니인 예카테리나 2세가 죽고 난 뒤 유언장을 비밀스럽게 고쳤는지, 아니면 왕위 계승자로 낙점한다는 예카테리나 2세의 유언이 실제로 있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자신의 어머니에 이어서 황제가 된 파벨 1세는 즉위하자마자 평생의 트라우마가 된 아버지 ‘표트르 3세의 살인’에 관련된 귀족들을 색출해서 ‘복수혈전’을 단행한다. 네메시스가 재림한 듯, 광폭하고 지저분하게 진행된 보복, 그리고 그 후폭풍인 궁전 쿠데타를 두려워한 파벨 1세의 ‘아버지 같이 죽을 수 없다’는 결연한(?) 의지와 신비한 신탁이 결합하면서 탄생한 건물이 바로 미하일로프스키 성이다. 이 건물은 주거용 궁전이라기보다는 요새로 보는 것이 더 맞을 정도로 미로처럼 만들어졌다. 그래서 이 건물을 부를 때 러시아어 ’замок‘사용하는데, 원래 이단어의 의미는 ‘성, 궁전’이지만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뜻은 중세 유럽의 봉건 영주의 요새화 된 거주지이다. 


<미하일로프스키 성(Михайловский замок)>


1716년 표트르 대제의 명령으로 이탈리아 건축가 겸 조각가 카를로 라스트렐리가 8년여 동안 심혈을 기울어 만든 미하일로프스키 성의 표트르대제의 동상은 영원한 숙적 스웨덴을 상대로 벌인 북방 전쟁의 역사적 승리와 발틱해의 해상권을 장악한 표트르 대제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런데 표트르 대제가 1725년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이 동상은 마지막 단계에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결국은 이 동상은 지정된 장소에 세워지지 못한 채, 세간의 뇌리에서 잊혀졌다. 그런데 반전드라마가 펼쳐졌는데, 연출자는 파벨 1세였다. 러시아 역사의 찌질한 황제 2호인 빠벨 1세가 기획한 ‘미하일로프스키 성’의 축조 과정에서 성 앞을 장식하는 기념물로 정해져 부활하게 되었다. 그리고 파벨 1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동상 기단에 새길 ‘증손자가 증조부께(Прадеду-правнк)라는 문장도 하사했다. 그런데 죽은 증조부인 표트르 대제는 파벨 1세의 자신을 향한 충심과 상찬이 별로 달갑지 않았던지, 증손자의 비극적 운명을 막지는 못했다. 겨울 궁전을 버리고 내부 인테리어도 제대로 완성되지 않은 미하일로프스키 성으로 도망치듯 이주 한 지 지 40일 만에, 파벨 1세는 아버지 표트르 3세처럼 비극적으로 살해당했다. 


<미하일로프스키 성 앞에 위치한 표트르 대제 동상>


미하일로프스키 성과 파벨1세의 죽음

파벨 1세의 살해는 자신의 아버지인 표트르 3세의 죽음보다 더욱 더 처참하고 끔찍한 사건이다. 왜냐하면 표트르 3세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은 그의 부인인 예카테리나 2세인데, 황실 부부라는 관계는 워낙 정략적인데다, 부부는 피를 나눈 관계도 아니고, 흔히 이야기 하듯 ‘님’은 언제든지 ‘남’보다 못한 원수 같은 존재가 될 수 있어서, 표트르 3세의 비극적 죽음은 그렇게 충격적이지 않다. 물론 충격 완화의 일등공신은 표트르 3세의 ‘이해 불가한 엽기적이고 황당한 정치행위’를 지목하는 역사가도 있다. 그러나 파벨 1세의 죽음은 인륜을 저버린 사건이었는데, 즉 아들이 아버지의 죽음에 관여한 ‘아바마마 시해’였다. ‘당시 황태자였던 알렉산드르 1세가 아버지인 파벨 1세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것은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궁중에서 벌어진 암살 음모에 파벨 1세의 법적 상속자인 알렉산드르 1세가 연루되었다는 소문이 끊임없이 나돌았다.’ 적어도 아버지의 살해를 방조했다는 것은 확실하다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주장이다. 이러한 패륜적인 사건 때문인지, 아니면 입에 담기에 불편한 ‘존속살해’라는 역사적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거주자들의 허약한 심리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이 성의 새로운 건물주인 중앙군사기술학교(육군공병학교로도 부름) 졸업생들의 증언에 따르면, 미하일로프스키 성 전체는 항상 웬지 모르는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한다. 파벨 1세가 살해당한 후 로마노프 황실가족이 버린 이 성은 기술자성(Инженерный)을 거쳐, 1819년부터 중앙군사기술학교(Главный инженерный училища)로 재탄생 하였다. 러시아의 대문호 미하일 도스토옙스키도 이 학교의 졸업생 중의 한명이다. 


<빠벨 1세(좌)와 표트르 3세(우)>


미하일로프스키 성을 둘러싼 신비한 전설

파벨 1세의 죽음 이후, 미하일로프스키 성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축조된 성 및 궁전 중에서 가장 신비로운 장소 중 하나가 되었는데, 이 성을 둘러싼 많은 전설과 신화가 많이 양산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신화 중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이야기는 아래의 3가지 정도이다. 첫 번째는 이 성의 이름과 관련이 있다. 1797년 야심한 밤에 이 궁전내부를 지키는 병사 앞에 광채에 둘러싸인 대천사 미하일이 현현하여 신의 의지, 즉 <대천사 미하일 이름으로 이곳에 정교식 성당을 건축하라>라는 메시지가 황제 파벨 1세에게 전달되었다. 자신을 향해 올 수 있는 귀족들의 보복의 칼날을 피할 방법을 찾고 있던 황제는 당연히 서둘러 신의 의지를 실행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는데, 불행하게도 신의 의지는 파벨 1세의 개인적인 변덕에 의해서 수정되어졌다. 4년 후 성당으로 지여져야 할 대지에는 호화로우면서 미로 같은 복잡한 내부의 형식을 갖춘 요새-별장형 궁전이 탄생했다. 신의 의지를 거역한 세속의 건축물이 지어졌지만, 이 성에 붙여진 이름은 신의 뜻을 따라 대천사인 미하일의 이름을 붙였다. 파벨 1세가 신의 의지를 의식적으로 거부했던, 자신의 안위를 걱정해서 어쩔 수 없이 지키지 않았든, 결과는 신을 노하게 만들 것은 확실한 것 같다. 성이 건축된 이후, 1801년 2월 1일에 이 거주지에서 ‘집들이’를 한 파벨 1세는 1801년 3월 11일 밤과 12일 새벽 사이에 자신의 침대에서 교살 당했다.

두 번째 전설은, 섬뜩한 예언으로 파벨 1세의 죽음의 미스터리에 관한 것이다. 황제가 죽기 몇 달 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유로지비가 나타나서, ‘미하일로프스키 성의 정면에 새겨진 성경격언에 사용된 알파벳 숫자만큼 파벨1세는 살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미하일로프스키 정면의 윗부분에 새겨진 문장의 내용은 ‘당신의 집은 오랫동안 여호와의 성처럼 될 것이다’(ДОМУ ТВОЕМУ ПОДОБАЕТЪ СВЯТЫНЯ ГОСПОДНЯ ВЪ ДОЛГОТУ ДНЕЙ)였는데, 이 문장 안에는 47개의 러시아 알파벳이 들어있다. 파벨 1세의 사망소식을 듣고 흥분하여 성으로 달려온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민들은 그 내용을 구성하고 있는 러시아어 알파벳을 세기 시작했는데, 정확하게 1754년생인 파벨1세의 생존기간과 같은 숫자 47이 나왔다. 파벨 1세가 살해된 1801년 당시 그의 나이는 47살이었다. 원래 청동으로 만든 이 문장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스몰리니 수도원의 부활성당을 위해 만들어졌다. 그 다음에는 성 이삭 대성당으로 옮겨진 문장은 파벨 1세의 시대에 미하일로프스키 성으로 이전되었다. 


<미하일로프스키 성에 새겨진 문장>


세 번째 전설은 죽은 파벨 1세의 유령에 관한 것인데, 니콜라이 레스코프(Н.С. Лесков)의 단편 소설 <기술자성의 유령>에 나올 정도로 이 유령의 존재는 많은 사람들에게 흥미로운 전설이었다. 파벨 1세의 동시대 사람들은 예카테리나 2세의 아들의 온전하지 않는 정신 상태를 알고 있었는데, 이러한 영적인 미숙함과 음모의 희생양이 된 것에 대한 억울함 의 해소 차원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황제는 죽음 후에 자신의 영지를 단순하게 방치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차르 유령은 처음에는 성을 경비하는 수비대 병사들에게 보이기 시작했고, 그 다음에는 성의 일부 신하나 몇몇 하인들의 눈에까지 들어왔다. 그리고 유령이 출현하는 횟수가 늘어남에 따라, 그 유령에게 의례적으로 하는 아침 인사 <좋은 아침입니다, 각하!>도 점차 황폐화되어가는 성의 빈 홀에 울려 퍼지는 숫자도 늘어났다. 파벨 1세의 살해라는 역사적 사실이 망자의 보상심리가 작동하는 전설의 고향 같은 이야기로 재탄생한 것이었다. 이 전설을 중앙군사기술학교의 선배 생도들이 어린 후배 생도들을 겁주거나, 위협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사용하였다고 하니, 유령이 되어 미하일로프스키 성으로 귀환한 망자 파벨 1세의 의도는 성공한 것인가? 

 

목록

웹진 문화로(文化路) 내용 끝

TOP

저작권 표시 및 연락처

06974 서울특별시 동작구 흑석로 84 법학관(303관) 1420호 / E-mail: fsicau@cau.ac.kr / TEL: 02-820-6355 / FAX: 02-822-00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