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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문화로(文化路)
제목팬데믹의 희생자, 러시아 무성영화의 슈퍼스타 베라 홀로드나야
분류영화
국가 러시아
날짜2020-10-16
조회수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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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 코로나 바이러스(COVID-19, 코로나19)사태로 미국과 유럽에서 희생자들이 속출하고 있는 가운데, 러시아에서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팬데믹으로 사망하였다. 러시아 코로나사망자 중에는 문화예술인들도 포함되었는데, 지난 6월 코미디언 겸 작가인 아나톨리 투루슈킨(Анатолий Трушкин)이 7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타스통신을 통해서 전해진 소식에 따르면, 한 달 동안 병원에서 입원하여 집중치료를 받았던 아나톨리 투루슈킨은 사망하기 2주 전부터 병세가 악화된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 문화계에서 팬데믹으로 유명을 달리한 예술인들 중에서 가장 안타까운 사연을 가진 인물은 러시아 격동기 시대 불꽃같은 인생을 살다간 제정 러시아의 ‘스크린의 여왕’, 무성 영화계의 슈퍼스타였던 베라 홀로드나야(Вера Холодная)이다. ‘소비에트의 그레타 가르보’로 통하던 홀로드나야는 아주 짧은 시간에 러시아 영화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서 눈부신 경력을 쌓았지만, 그 당시 전 세계인구의 약 5%를 죽게 만든 ‘스페인 독감’으로 허무하게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그녀는 러시아 무성영화시대의 비극의 상징이다. 

<베라 홀로드나야(1893-1919)>


전격적인 배우 데뷔와 실패, 그리고 반전

연기파 배우 이반 모주힌(Иван Мозжухин)과 함께 ‘러시아 무성영화의 스타 배우와 전설적 인물 중 최고봉을 차지한’ 홀로드나야는 1893년 폴타바에서 학식 있고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시를 낭송하고, 때로는 아마추어 연극 공연에 참여하기도 한 홀로드나야는 예술적인 감각과 재능을 어느 정도 소유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 예술적 능력은 어린 시절 발레를 통하여 살짝 발현되었지만, 정상적인 학업과정을 거쳐 고등학교를 졸업 할 것을 요구한 할머니의 고집으로 예술적 재능의 꽃도 피워보지 못한 채 모스크바의 볼쇼이 극장 산하 발레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 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홀로드나야는 젊은 변호사 블라디미르 할로드니 (Владимир Холодный)를 만나, 짧은 교제기간을 거쳐 결혼까지 골인했다. 그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경주용 자동차를 운전하였던 할로드니는 러시아 최초의 스포츠 신문을 발행할 만큼 가장 진보 된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또한 그는 문화적, 사회적 활동도 왕성하게 하여 사교의 폭이 아주 넓은 편이었는데, 문화계의 그의 지인 중에는 시인 콘슨탄틴 발몬트, 안드레이 벨르이 작가 레오니드 안드레예프가 있었다. 그런데 할로드니는 좋은 남편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는 가정에 대한 책임감보다 국가적인 문제에 더 열정적이었기 때문에 홀로드나야에게는 그의 이름 그대로 ‘차가운’ 존재였다. 홀로드나야의 남편은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자원입대를 선택하게 되는데, 남편의 탈가정적인 이러한 결정은 홀로드나야에게는 끔찍한 불행을 가져다주었다. 왜냐하면 남편이 전장에 간 이후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았던 홀로드나야는 두 명의 딸(한명은 입양함)과 자신의 어린 여동생을 홀로 돌봐야 했기 때문이었다. 남편의 대승적 결정의 후폭풍으로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홀로드나야가 선택한 것이 바로 그 당시 많은 에스트라다 예인들이 뛰어들었던 영화였으니, 스크린에서 엄청난 성공을 한 홀로드나야 입장에서는 남편에게 고마움을 가져야 하는지 인생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가 없다. 


<베라 홀로드나야와 그녀의 남편>


홀로드나야가 영화배우로 전격 데뷔하는 계기는 제정러시아와 소비에트 시기영화배우와 작곡가로 활동했던 알렉산드르 베르틴스키(Александр Вертинский)의 제안 때문이었다. 그는 연기활동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된 홀로드나야를 스크린 데뷔 테스트를 거쳐 영화에 입문하게 도와주었다. 이것에 대해서 베르틴스키는 회고록에서 홀로드나야를 자신이 영화세계로 인도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베르틴스키는 홀로드나야의 독특한 아름다움이 영화에서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의 예언의 실현은 험난한 과정을 거치면서 이루어졌다. 사실 러시아 격동기 시절 에스트라다 가수, 무용수 및 연극배우들은 새롭고 혁명적인 예술인 영화로 전향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런데 그 길의 여정이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연극배우들은 많은 돈을 벌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영화판에서 활동을 꺼려했는데, 무엇보다도 에스트라다 가수나 연극배우가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무기인 목소리를 스크린에서는 들려주지 않아서 영화 쪽에서 실패할 확률이 컸기 때문이었다.

홀로드나야의 첫 영화는 블라디미르 가르진(Владимир Гардин)이 감독한 영화 <안나 카레니나>(Анна Каренина)였는데, 이 무성영화에서 홀로드나야는 단역으로 출연했다. 이 데뷔영화에서 전직 무용수인 홀로드나야의 연기는 정말로 처참할 정도로 형편없어서, 영화판에서는 그녀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낙인이 찍혀버렸다. 그래서 영화 관계자들은 홀로드나야와 정식 계약을 체결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인생은 새옹지마라고 했던가? 급작스러운 반전이 일어났다. 그 반전의 날개 짓은 홀로드나야와 알렉산드르 한존코프(Александр Ханжонков) 영화 스튜디오의 감독 예브게니 바우에르(Евгений Бауэр)의 만남에서 시작되었다. 이 감독은 배우 알렉산드르 베르틴스키가 그랬던 것처럼, ‘창백한 얼굴과 커다란 눈’을 가진 홀로드나야의 아름다움 속에 내재된 지극히 청초한 단순함을 발견했고, 그러한 백치미가 러시아 민중을 스크린으로 이끌 ‘황금 알을 낳는 거위’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영화 <승리한 사랑의 노래>의 베라 홀로드나야>


바우에르 감독은 홀로드나야에게 영화 <승리한 사랑의 노래>(«Песнь торжествующей любви)의 주요 역할 중 하나를 맡겼는데, 이 영화가 소위 말하는 대박을 터트렸다. 물론 바우에르 감독은 연기력이 그렇게 뛰어나지 않은 홀로드나야를 위해서 물밑 작업으로 그녀의 단점을 숨기고 장점을 스크린을 통해 발산하게 하는 마법을 연출했다. 그래서 이 영화 대박의 일등공신은 바우에르 감독이었다. 그리고 <승리한 사랑의 노래>는 무성영화시대의 명제인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다’를 더욱 확신하게 만들었는데, 만일에 이것이 과장된 표현이라면 적어도 ‘감독’의 개인기가 영화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깨닫게 한 영화라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승리 한 사랑의 노래>로 홀로드나야는 말 그대로 뜨게 되었는데, 자고 일어나보니 러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여자 배우가 되었다. 대사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녀의 믿을 수 없는 마성이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환호하게 만들었다. <승리한 사랑의 노래>에 이어서, 연달아 출시된 홀로드나야의 영화는 대박행진을 계속했는데, 이 시기에 홀로드나야는 러시아에서 가장 대중적이고 유명한 여배우가 되었다.

홀로드나야가 출연한 영화는 1년에 최대 16편이 될 정도로 그녀의 인기는 최절정에 달했는데, 사정이 이러하다보니 그녀가 주연한 영화들이 여러 영화관에서 동시에 상영되는 이례적인 현상까지 벌어졌다. 홀로드나야의 성공이 더해지면 더 해 질수록 그녀의 영화가 상연되는 영화관은 관객에 의해 아수라장이 되는 해괴한 일도 자주 일어났다.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는 그녀의 광팬에 의해 자행된 소동(?)이 남긴 후유증으로 부서진 창문, 경첩에서 찢겨진 문을 목도하는 것은 지극히 흔한 광경이었다. 심할 경우에는 흥분한 관객들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기마경찰까지 등장할 정도였다고 하니, 홀로드나야에 대한 일부 러시아 관객들의 과도한 관심은 그 당시 영화관계자들까지 엄청 당황하게 한 것도 사실이다. 한존코프 영화 스튜디오 소속으로 감독 바우에르와의 그렇게 길지 않는 시간에 제작된 영화로 ‘연기 경험도 없이 영화에 뛰어 들었던 슬픈 눈을 가진’ 홀로드나야는 그 당시로서는 드문 슈퍼스타가 되어 한 시기를 풍미했다. 여배우로서의 홀로드나야의 정점은 1916년 영화 <삶을 위한 삶>(Жизнь за жизнь)의 여주인공 역할을 맡은 것이었다.  

<영화 <삶을 위한 삶>의 포스터>

러시아 대중을 열광하게 한 홀로드나야의 마법은 그녀의 단순한 아름다움이 스크린에서 맡은 정형화된 형상과 교묘하게 맞아 떨어지면서 발휘된 것이었다. 즉, ‘더러운 돈과 호화로운 레스토랑, 사치스런 샴페인, 피크닉, 밤새 흔들리며 질주하는 고급자동차, 비극으로 끝나는 금지된 사랑’ 이라는 영화의 중요한 서사와 분위기가 홀로드나야와의 결합을 통해 창조된 스크린속의 형상이 대중들의 뇌리에서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고 살아 있는 생명처럼, 대중들의 삶에 생기를 불어넣으면서, 그녀의 마술은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최고의 영역으로 비상하였다. 또한 영화이외에 홀로드나야가 자발적으로 선행한 자선 활동과 군인과 그 가족을 돕는 기금 참여 콘서트에 정기적인 참여도 ‘홀로드나야 신화’를 만드는데 도움이 되었다. 러시아의 군인들은 홀로드나야를 ‘그들의 베라’라고 부르며 우상화했다.


스페인 독감과 죽음

러시아 무성영화의 뮤즈로 떠오른 홀로드나야를 잡기위해서 드미트리 하리토노프(Дмитрий Харитонов)의 영화 스튜디오 사장 하리토노프는 엄청난 금액을 지불했는데, 홀로드나야를 키워준 한존코프 영화스튜디오와 계약을 해지하고 자신의 스튜디오 소속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소문에는 한존코프영화사가 홀로드나야에게 지불했던 기존금액의 10배를 배팅했다는 이야기까지 돌았다. 결과적으로는 하리토노프는 홀로드나야와의 계약을 성사시켰지만,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고 정국이 격동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역사적 시간은 그의 편에 서 있지 않았다. 물론 소비에트 정부가 홀로드나야를 매우 잘 대해주었고, 하리토노프도 이 비상상황으로부터 홀로드나야가 피해를 입지 않기를 바랐지만, 그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 하든지 투자한 금액을 회수해야 하는 하리토노프는 그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고, 영화촬영을 계속해야만 했다. 그래서 임시방편으로 하리토노프가 생각한 장소가 프랑스가 점령한 오데사였는데, 홀로드나야는 같은 스튜디오 소속의 영화인들과 그곳으로 이동했다. 1918~1919년 오데사의 지방정부는 변덕이 심했지만, 영화 촬영은 멈추지 않았다. 홀로드나야는 출연하는 신작 영화뿐만 아니라, 촬영 중간 중간에 짬을 내어서 진행한 적십자 자선 행사도 오데사에서 큰 뉴스가 되었다. 당연히 오데사 체류기간 동안 홀로드나야 주변에는 많은 숭배자들이 모여들었다. 그들 중에는 오데사를 점령한 프랑스군대의 장군들, 오데사의 군사 총독, 프랑스 영사 및 볼셰비키의 비밀 요원들도 포함되었다.  


<오데사에 있는 베라 홀로드나야의 조각상>


홀로드나야가 스페인 독감에 감염되어 증세가 나타난 날은 1919년 2월이었다. 스페인 독감은 18개월 만에 세계 인구의 최대 5%를 희생시킨 엄청난 규모의 팬데믹이었다. 홀로드나야가 스페인 독감에 걸리자, 그 당시 오데사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치료와 고급의약품등이 제공되었고 가장 유능한 교수 및 의사들이 그녀의 치료를 위해 노력을 하였다. ‘스크린의 여왕’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였다. 그리고 그녀의 치료를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녀의 팬들은 아픈 홀로드나야를 지키기 위해 매서운 추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집 입구에서 24시간 그녀를 지키는 것으로서 그녀의 완치를 염원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헛된 것이었다. 홀로드나야는 당시 격렬하게 전파되고 있었던 스페인 독감에 감염된 지 3일도 되지 않는, 1919년 2월 16일 사망했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겨우 25살이었는데, 영화배우로서 최고의 전성기에 이국땅에서 유명을 달리한 홀로드나야는 러시아 무성 영화의 뮤즈로 영원히 남았다.

사실 홀로드나야는 이 비극적인 죽음을 피할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러시아로부터 오데사로 피신할 당시 홀로드나야는 최고의 인기를 구가할 시기여서, 해외의 영화사로부터 초청을 자주 받았다. ‘찢어지고 만신창이가 된 러시아를 버리고 떠나는 것은 고통스럽고 심지어 범죄’라고 생각한 홀로드나야는 이 초청들을 거절했다고 하니, 부드럽고 온화한 성격에 가려진 홀로드나야의 러시아에 대한 견고한 사랑이 드러나는 일화이다. 그래서 러시아 민중은 지금까지도 홀로드나야의 허망한 죽음을 더욱 더 비극적이고 안타깝게 여기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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