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K(인문한국) 사업단 홈페이지

HK(인문한국) 사업단

웹진 문화로(文化路) 내용 시작

웹진 문화로(文化路)
제목러시아 점토공예: 그젤의 부흥과 쇠퇴, 그리고 부활
분류전통문화
국가 러시아
날짜2020-10-16
조회수579
첨부파일


러시아 점토공예 그젤의 기원

새하얀 도자기에 영롱한 코발트블루 색상의 무늬를 입힌 러시아 전통공예품 그젤(гжель). 언뜻 소박하고 단순해 보이지만 나름의 멋이 있어, 오늘날 찻잔, 접시, 그릇 등 식기류뿐 아니라 장식품으로도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원래 그젤은 모스크바 남동쪽, 랴잔 고속도로를 따라 60km 떨어진 지역에 위치한 시골 마을의 이름이며, 이 마을에서 채취된 점토로 생산되는 도자기를 총칭해 그젤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젤 식기>


러시아 문화사에서 그젤이 최초로 언급된 것은 14세기의 일이다. 많은 민속학자들은 모스크바 공국 대공 이반 칼리타(Иван Калита)가 아들에게 남긴 유언장에서 그젤 마을을 처음 언급했던 1339년을 그젤의 기원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로써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젤>이라는 단어를 통해 <жечь>나 <обжигать глину>라는 어휘를 떠올리게 되듯이, 지역 주민들의 주된 생업을 드러내는 이름의 마을이 그 당시에도 이미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고고학자들은 해당 시대 그젤 마을에서 제작된 도자기 공예품을 발굴했고, 유언장 속 그젤이라는 마을 명칭이 도예품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이에 많은 민속학자들은 그젤 마을이 이반 칼리타의 시대를 시작으로 수세기 동안 모스크바 공국 차르에게 상당한 수입을 안겨준 마을 중 하나였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러한 덕분에 그젤 마을에는 농노가 부재했다는 점이다. 그젤 지역 주민들은 모두 도자공예에 종사했고, 공예를 생업으로 삼은 모든 장인들은 황제로부터 자유를 얻었으며, 이로써 마을 전체는 도자 공예 기술 연마와 생산 기술 향상에 전적으로 집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간혹 실력이 출중한 장인들은 황실에 소속되어 도자기 공예가로 이름을 알리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본격적으로 그젤이 만들어지고 보급된 시기는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시대인 17세기부터다. 17세기 초, 황제의 명으로 그젤 지역에서 점토를 채취하기 시작한 것이 새로운 그젤 역사의 출발점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그젤 마을에는 17가지 이상의 점토가 매장되어 있었다. 이는 크게 두 가지 점토로 구분되는데, 하나는 백색 도자기 및 토기 생산용 점토이고, 다른 하나는 마졸리카와 붉은 도자기 제조용으로 사용되는 점토다. 그중 그젤에 사용되는 점토, 즉 백점토는 물리적 특성으로 볼 때 러시아 최고의 품질을 자랑했다. 이에 1663년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황제는 약제 용기 제작을 위해 그젤 마을의 백점토를 모스크바로 가져 오라는 명을 내리게 된다. 1740년대에는 로모노소프(М.В. Ломоносов)와 독일 마그데부르크 대학 유학시절을 함께 했던 그의 동료 비노그라도프(Д.И. Виноградов)가 백점토를 활용한 도자기 제작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로모노소프는 바노그라도프에게 도자기 생산에 그젤 점토를 사용하도록 권장했고, 비노그라도프는 1744년과 1749년 두 차례에 걸쳐 그젤 마을을 방문해 실험용 점토 샘플을 채취해 갔다.

비노그라도프가 그젤 점토를 채취할 수 있게 된 것은 모스크바 상인 그레벤쉬코프 가족 덕분이었다. 당시 모스크바에 거주하고 있던 아파나시 그레벤쉬코프(А. Гребенщиков)는 표트르(Петр), 안드레이(Андрей), 이반(Иван)이라는 이름의 세 아들을 두고 있었다. 아파나시는 점토 분야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고, 세 아들은 도기 제작에 탁월한 점토 생산지가 다름 아닌 그젤 지역이며, 그젤 점토 채취법, 제작법 등의 지식을 아버지로부터 전수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 여제의 최측근이자 조언자였던 귀족 체르카소프(И.А. Черкасов)는 그젤 점토로 황실 도자기 제작이 가능한지의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비노그라도프를 아파나시 그레벤쉬코프에게 보냈다. 아파나시는 황실에서 온 손님들을 그젤 마을로 안내했고, 비노그라도프는 샘플로 두 종류의 점토를 황실로 가져갈 수 있었다. 그 후로는 그젤에서 페테르부르크까지 점토를 실어 나르는 수백 대의 마차 행렬이 이어졌고, 수년에 걸친 실험과 연구 끝에 러시아식 도자기 제작방식은 체계화 되었다. 그렇게 비노그라도프 손에서 탄생된 최초 러시아 도자기 컵은 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 여제에게 선물되었고, 바로 그때부터 러시아 도자기와 황실 도자기의 본격적인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즈음부터는 그젤 점토가 모두 페테르부르크 제약 공장에 할당되어 약제용기 제작 이외의 다른 용도로는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그젤 지역 주민들에게 그것을 사용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이처럼 황실은 비노그라도프의 도자기 제작법을 엄격한 비밀로 유지했으나, 모스크바의 도자기 공장 소유주였던 아파나시의 아들 이반 그레벤쉬코프는 비노그라도프와 비슷한 시기에 도자기 제작법을 발견했다. 그레벤쉬코프 일가는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모스크바 타간타에 작은 공장을 지었고, 자신들이 직접 고안한 패턴이 그려진 아름다운 식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점토는 그젤 주민들로부터 안정적으로 공수받았다. (사실 점토 채취는 꽤나 어려운 일이라고 한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점토는 늪 속 깊숙한 곳에 매장되어 있어 늪지대가 얼어붙은 겨울에만 채굴할 수 있었다.) 그레벤쉬코프 공장에서 만들어진 접시는 오늘날의 그젤 도기와 비교하면 무척이나 무겁고 두꺼운 형태였지만,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적지 않은 돈을 지불하고 앞다투어 식기와 장식품을 구입했다. 이 공장은 1750년대에 전성기를 맞이했고, 1773년까지 도자기 제작을 이어갔다. 그레벤쉬코프 일가는 그젤 도자기 개발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 공장이 화재로 소실되어 제작법은 더 이상 활용될 수 없었고, 그젤 점토는 그 후 수십 년 동안 황실을 위한 공예품의 재료로만 존재했다.


<그레벤쉬코프가 설립한 최초 그젤 공장(左) / 그레벤쉬코프 공장에서 제작된 접시(右)>


그젤의 부흥과 쇠퇴, 그리고 부활
 

그젤 공예의 역사 700년 동안에는 다양한 사건들이 있어왔다. 시대에 따라 대중의 취향과 시장의 요구로 적지 않은 변화의 물결을 겪기도 했지만, 그젤 공예가들은 해를 거듭하면서 도자기 생산을 위한 새로운 기술들을 발견, 습득해 나갔다. 그젤 제작 초기, 그젤 점토는 농민들이 사용하는 도구, 테라코타 도자기, 접시, 건축 재료로 사용되었으나, 곧 점토를 활용한 도자기 생산 기술이 등장하면서 그젤 점토는 도자기 공예를 위한 재료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 그젤 공예는 그 전성기를 맞았다. 1810년에는 최초의 도자기 공장이 탄생했다. 이는 공예가 야콥 바실리예비치(Яков Васильевич)가 그의 두 아들 페렌티(Терентий), 아니심(Анисим)과 함께 노보-하리토노보 마을에 설립했으며, 훗날 그들은 쿠즈네초프(Кузнецов)라는 성을 얻어 오늘날까지도 명성을 떨치고 있는 러시아 전통 공예품 <황실 도자기Фарфоровый король>를 탄생시켰다.

19세기 중반이 되자 그젤 공예가들이 더욱 우수한 품질의 점토를 발견했고, 이는 얇고 견고한 도자기, 차 문화를 즐기기 위한 다구를 생산할 수 있는 토양이 되었다. 그때부터 그젤 도자기의 형태는 더욱 다양해졌고, 유명세도 높아져 갔다. 이 시기에 탄생된 제품들은 <그젤 연합> 박물관뿐만 아니라, 역사박물관, 러시아 박물관, 에르미타쥬 미술관 등 러시아 도심 박물관에 전시되기에 이르렀다. 또한 다양한 종류의 그젤 그릇들은 모스크바, 하리코프, 키예프 등 러시아 주요지역으로 판매되었으며, 도자기의 명성은 아르한겔스크에서 아스트라한까지, 빌노(현 빌뉴스)에서 이르쿠츠크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으로 널리 퍼져나갔다.

한편 19세기 후반, 그젤 그림은 에메랄드그린, 황토색, 갈색에서 단색 코발트블루 색으로 변화하게 된다. 또한 언더 글레이즈와 오버 글레이즈 페인팅의 혼합 기법, 즉 도자기 위에 코발트 패턴을 그리고, 유약 위에 투명 장식을 칠한 다음 금을 칠하는 기법은 그림을 한층 장식적이고 다층적으로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다. 그 당시 그젤 지역에 30여개의 공장이 운영되었고 이 업체들은 쇠퇴기에 접어들었던 19세기 말까지 접시, 수프 그릇, 소스나 버터를 담아내는 그릇 등 여러 제품군들을 대량 생산했다.

그러나 19세기 말에 그젤 마을의 도자기 공예는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1919년 4월, 레닌이 ‘수공예 산업 촉진에 관한 법령’에 서명한 이후 그젤 지역 공예가들은 그젤 공예의 몰락을 막기 위해 결속하기 시작했으나, 혁명 후 대부분의 공장들은 제품생산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젤 산업은 회복되기 시작한 것은 1943년 즈음부터다. 그러나 40여 년의 공백기를 지낸 그젤 공예가 부활하는 과정은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 제작 기법, 특히 페인트와 유약 제조법은 거의 잊혀진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쇠퇴기에도 그젤의 전통을 지키고자 노력했던 몇몇 사람들을 통해 그젤은 차츰 제 모습을 찾아갔다. 특히 스테판 투마노프(С.Г. Туманов)는 수년간의 작업 결과로 도료 및 유약, 도자기용 액체를 입히는 기술을 복원해냈고, 미술 평론가 알렉산드르 살티코프(А.Б. Салтыков)는 그젤의 예술적 전통, 그림 기법, 식기 연구에 몰두했다.


<그젤 식기 제작과정>


1940년대 말이 되자 민속 예술 전시회를 통해 새로운 그젤 제품들이 선보여졌다. 이 전시회에 출품된 작품들은 그젤 본래의 형태, 그림, 색채 등이 과거의 것과 동일한 수준으로 제작된 제품들이었다. 그젤 장인들은 여전히 수작업으로 모든 제품들을 생산했으며, 과거의 것과 유사한 주제의 모티프들은 다채롭게 변형된 장식성을 보여주었다. 그 당시 주목받았던 인물로는 화려한 꽃에 새들이 춤추는 듯한 그림이 수 놓인 화병과 사모바르를 선보인 나탈리아 베사라보바(Н.Н. Бессарабова)를 비롯해, 타티야나 두나셰바(Т. Дунашева), 타티야나 예료미나(Т. Ерёмина)와 같은 장인이 있었다. 또한 1950년대를 지나면서 그젤 공예 분야에는 젊은 인재들이 등장했고 비로소 그젤은 과거의 영광을 되찾아 갔다. 그 시대 그젤 산업을 이끌어갔던 아자로바(Л.П. Азарова), 크비트니츠카야(Н.Б. Квитницкая), 오쿨로바(3.В. Окулова), 아브도닌(В.И. Авдонин) 등 100여 명의 거장들은 오늘날까지 그젤 산업 연합에 소속되어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이들은 각자만의 고유한 양식과 색채로 도자기를 물들이고 있으며, 그 결과 아자로바, 두나셰바, 오쿨로바는 레핀상의 수상자로 이름을 올리는 영광을 얻기도 했다.

특히 1950년대 이후 그젤의 부활에 앞장선 대표적인 인물로는 류드밀라 아자로바가 있다. 도자기 형태에 큰 관심을 기울인 작가로 유명한 아자로바는 뚜껑에 달린 탐스러운 꽃이 우아함을 자아내는 주전자 <꽃들Цветы>를 비롯해 <수탁과 소녀(Девочка с петухами)>, <티타임Чаепитие>, <물고기-고래Рыба-кит>, <여왕-개구리(Царевна-лягушка)>, <회색 늑대-이반 황제(Иван Царевич-серый волк)>와 같은 식물, 동물 등의 형상을 그젤 식기에 묘사했다. 아자로바는 자신만의 창작 노하우를 갖고 있다고 알려져 있기도 하다. 그는 이에 대해 “나는 그젤 도기를 제작할 때 팔걸이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내 손은 언제나 공중에 떠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 그림 안의 선들은 더욱 경쾌하고 명확해집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림 작업 시 팔걸이는 반듯하고 섬세한 선들의 묘사를 위해 미세한 떨림을 방지해주는 역할을 하는 만큼, 팔걸이를 사용하지 않는 그의 작업 방식은 업계에서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라고 한다. 또한 그녀의 오리지널 제품에는 대부분 선명한 주제와 그에 상응한 그림이 존재하며, 이러한 이유로 민속공예 비평가들은 1960년대 그젤 공예의 예술성을 결정지은 인물이 바로 아자로바였다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류드밀라 아자로바의 ‘꽃들’(左) / ‘티타임’(中) / ‘물고기-고래’(右)>


이렇게 전통을 수호함과 동시에 자신만의 예술성을 고수해온 아자로바는 1978년 레핀상과 1990년 노동영웅 메달을 수상했고, 1991년에는 소련인민예술가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선사받기도 했다. 그녀는 2002년까지 48년간 그젤 공장해서 활동해왔고, 그 기간 동안 무려 670여 개의 작품을 탄생시켰다. 그가 참가한 전시회는 63회에 달했으며, 그가 남긴 작품들은 현재 34개의 박물관과 개인 소장자들에 의해 보존되고 있다.

 

목록

웹진 문화로(文化路) 내용 끝

TOP

저작권 표시 및 연락처

06974 서울특별시 동작구 흑석로 84 법학관(303관) 1420호 / E-mail: fsicau@cau.ac.kr / TEL: 02-820-6355 / FAX: 02-822-00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