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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문화로(文化路)
제목성인이 된 러시아 군주들: 블라디미르 대공과 황제 니콜라이 2세
분류역사
국가 러시아
날짜2020-10-05
조회수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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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이 성인, 혹은 성자로 불리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어진 왕’, ‘덕이 많은 임금’이라는 의미에서 ‘성군’이라는 명칭이 간혹 사용되기도 하지만, ‘성군’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성스러운 임금’으로 읽어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 정도로 정치인이 혹은 한 나라를 다스리는 제왕이 ‘성인’으로 추대되는 일은 매우 드물다. 그런데 그 ‘어려운 일’을 한 번도 아닌 꽤 여러차례에 걸쳐서 해낸 나라가 바로 러시아이다.

러시아에도, 좀 더 정확이 말하자면 고대 러시아 왕국 ‘키예프 공국’ 또는 ‘키예프 루시’에도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성군’이 있었으니 바로 ‘현자 야로슬라프(Ярослав Мудрый)’로 더 잘 알려진 키예프 공국의 대공 ‘야로슬라프 1세’이다. 역사적 기록에 따르자면, 야로슬라프 1세, 즉 ‘야로슬라프 무드르이’는 형제 간의 피비린내 나는 소위 왕자의 난을 거쳐서 왕위를 차지한 왕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정쟁의 한 가운데에 ‘보리스’와 ‘글렙’ 형제와 이 삼형제의 아버지인 ‘블라디미르 대공(블라디미르 1세)’이 있다.

블라디미르 대공의 경우, 잘 알려져있듯이 콘스탄티노플에서 동방 정교를 도입하여 당시 키예프 루시의 국교로 선포한 공로가 있다. 하지만 블라디미로 대공 역시, 자신의 막내 아들 야로슬라프 1세에 결코 뒤지지 않을 만큼 형재들과 치열한 권력 다툼을 벌였고, 그 결과 키예프 루시의 정권을 잡았다. 하지만 ‘형제들의 살육’이라는 커다란 주홍글씨를 뒤로 하고 블라디미르 대공은 세례와 더불어 ‘바실리’라는 새로운 기독교식 이름을 얻게 되었고, 나중에는 ‘성인’으로 시성되기에 이른다.

블라디미르 대공의 이름 앞에 붙는 여러가지 수식어를 좀 더 정확히 따져보면 ‘성인’과 더불어 ‘사도’라는 단어를 발견하게 된다. 즉 성인으로서 블라디미르 대공에 대한 정식 명칭은 ‘성스러운 사도 블라디미르 대공(святой равноапостольный князь Владимир)’이 된다. 이미 성자 ‘일라리온’의 “교리와 은총에 관한 이야기(Слово о Законе и благодати)”라는 저술에서 블라디미르 대공은 이미 “통치자 중에 거하는 사도”, 성 콘스탄틴과 “유사한 인물”로 명명되고 있다. 실제로 블라디미르 대공에게 부여된 ‘사도’의 권위는 그 의미가 남다르다. 그리고 바로 이 ‘사도’의 직분으로 말미암아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이나 일부 한정적인 지역에 기독교를 전파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전 러시아가 기독교를 수용하도록 만든 그의 공이 더욱 명확하게 조명된다.  


<블라디미르 대공의 세례식, 바스네초프 作>

그런데 블라디미르 대공이 사후 성인으로 인정된 후,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기도를 하기 시작하는데, 그 이유가 참으로 순박하기 그지 없다. 블라디미르 대공의 사후, 일반 민중들은 성 블라디미르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을 위해 여러모로 청원도 올리고 힘을 써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특별히 여러 병증에서 낫게 해주길, 지금보다 삶이 더 나아지길 구하는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주지하다시피, 블라디미르 대공의 기독교 수용에는 정치적 혹은 문화적 의도가 다분히 깔려있었다. 이교 우상을 없애고 유일신 체재를 확립함으로써 이를 정치적 단합과 왕권강화를 위한 기반으로 사용하고자 했으며, 기독교 수용을 통한 유럽문화로의 편입을 지향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대 러시아 왕국 내에 유일신 체제를 도입한 블라디미르 대공의 죽음 이후, 일반 민중들이 그에게 나름 ‘대리 청원’을 시도하게 되면서, 우상을 없애고자 했던 블라디미르 대공 스스로 또 다른 우상이 되어버리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실제로 몇몇 고대 문헌에서 블라디미르 대공을 ‘붉은 태양’으로 지칭한 경우도 상당히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어쩌면 블라디미르 대공은 기존의 다신교와 유일신 종교 간의 선택의 기로에 놓인 시기에 스스로 이교신과 기독교 유일신 간의 줄다리기를 벌인 인물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블라디미르 대공이 처음 권력을 잡았을 때, 그는 누구보다도 신들에 대한 의식을 중요하게 여긴 인물 중 하나였으며 정치적으로도 매우 잔인하고 혹독한 인물이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 이후, 그는 누구보다도 더 적극적으로 이교신상을 파괴하는 것에 앞장서며 진두지휘를 해 나갔고, 과거에 자신이 세웠던 신을 스스로 끌어내려서 드네프로 강속으로 가차없이 던져버렸다. 이런 이유때문인지 몰라도, 민중에게 그는 여전히 ‘붉은 태양’이자 ‘성스러운 사도’라는 이중직함으로 각인되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과 별개로 블라디미르 대공은 여전히 정치인으로서, 또 군주로서 러시아 최초로 성인으로 시성된 인물로, 지금까지도 그의 이콘은 수많은 정교 의식과 예배당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러시아인들은 매년 7월 28일을 ‘루시 세례의 날’로 기념하며 다양한 행사를 진행하는데, 이 날은 키예프 루시가 정교를 수용한 기념비적인 날이자, 동시에 ‘성스러운 사도 블라디미르 대공’을 기리는 날이기도 하다. 


<‘루시 세례의 날’ 행사 장면> 


블라디미르 대공의 여러 아들 중 성인으로 시성된 2명의 아들이 있으니, 바로 보리스와 글렙이다. 잘 알려진 바처럼, 이들 두 형제는 또 다른 형제의 폭력에 대해 비폭력주의적 태도로 맞선 ‘수난자’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모스크바에 있는 크렘린 내 사원광장에 위치한 ‘그라노비타야 궁전(Грановитая палата)’의 동쪽 벽에는 블라디미르 대공과 그의 여러 아들이 함께 앉아있는 모습을 묘사한 벽화가 자리하고 있다. 벽화의 가장 좌측에 다른 여러명의 아들과 구분되는 3명의 인물이 위치하고 있는데, 별다른 설명이 따라붙지 않아도 대번에 이들이 블라디미르 대공과 그의 아들 보리스와 글렙이라는 점을 알아챌 수 있다. 이들 머리 뒤에 위치한 후광이 세속적 삶을 살았던 나머지 아들들과 구별되는 ‘성인’의 위상을 드러낸다. 흥미롭게도 벽화 속 블라디미르 대공의 아들은 보리스와 글렙을 포함하여 총12명인데, 흡사 성서 속 그리스도와 12제자를 연상시키며, 블라디미르 대공의 성인으로서의 위상을 강화시키는 장치처럼 작용한다. 


<블라디미르 대공과 아들들>


그런데 이들 ‘수난자’ 성인 형제의 이미지에 다소 간의 의문을 품게 하는 하나의 회화 작품이 있는데, 바로 라부슈킨(А.П. Рабушкин)이 그린 <공후의 심판: 노브고로드 회의에서 무당을 죽이는 글렙 공후>라는 그림이 바로 그것이다. 


<공후의 심판: 노브고로드 회의에서 무당을 죽이는 글렙 공후> 


그림 속 글렙 공후는 상당히 권위적이면서도 경직된 표정을 짓고 있다. 이는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는 수난자의 이미지, 형이 보낸 자객의 칼을 거부하지 않고 스스로 나가서 자객을 맞이했다는 상상 속 글렙의 모습과는 사뭇 달라보인다. 라부슈킨의 그림만 놓고 보자면 글렙 공후의 모습은 오히려 매우 단호하고도 가차없는 권력자 형상에 더 가깝다. 글렙 공후 뒤쪽에 서있는 십자가를 든 주교, 그리고 공후와 주교를 에워싼 수많은 호위무사의 모습은 ‘신의 이름으로 이단을 처단한다’는 종교적 폭력의 논리를 정당화시키는 듯 하다. 이는 정교를 국교로 선포한 뒤에 이교 신상을 드네프르 강물에 던져버렸던 자신의 부친 블라디미르 대공의 행보를 뛰어넘는 한결 더 단호한 처사라 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라부슈킨의 그림이 성상화 계열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그라노비타야 궁전 벽화 속에 등장하는 후광이 있는 글렙 공후의 모습과 비교해 볼 때 라부슈킨 작품 속 글렙 공후의 모습은 여전히 낯설게 느껴진다.

20세기 이후 러시아 군주들 중에 성인으로 등극한 또 한명의 황제가 있는데, 바로 러시아의 마지막 활제 니콜라이 2세이다. 그 역시 일부 볼세비키들의 성마른 결정에 의해 일가족이 몰살당하고 그 유해조차 어디에 묻혔는지 한동안 알려지지 않았다.

니콜라이 2세에 대한 평가는 대부분 내성적이며 선한 자였으나 군주로서의 자질은 부족했던 인물이라는 것에 초점이 맞춰지곤 한다. 하지만 다수의 문헌에서 이와 상반되는 평가도 많이 발견된다. 니콜라이 2세는 선친의 열정적인 교육열에 힘입어 어린 시절부터 여러가지 외국어에 능통했으며, 종종 교사들을 당혹스럽게 만들만큼 영어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니콜라이 2세에게는 언어적 자질 뿐만 아니라, 해당 외국어 국가의 습관과 태도 역시 완벽하게 익혔다. 황태자의 교육을 담당했던 거의 모든 사람들이 황태자가 러시아인이 아닌 영국인이라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라며 입이 마르게 칭찬할 정도였다니, 그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유럽의 지식과 문화를 수용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유럽식 언어와 문화 교육은 그에게 남다른 사교적 자질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해주었다. 또한 황제는 매우 독실한 정교회 신자이기도 했다.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도유식, 세로프 作>


이러한 긍정적인 측면과 달리 유약한 성품으로만 알려져왔던 니콜라이 2세의 성정 이면에는 ‘독선적 전제 군주’로서의 잠재적 기질도 다소 존재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선한 성품과 독선적 기질, 고집스러움은 얼핏 공존하기 힘든 자질로 비춰질 수도 있지만, 한 인간으로서 니콜라이 2세와 러시아 황제라는 공인으로서 니콜라이 2세를 분리해서 생각한다면 얼핏 이해가 가능할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특별히 황태자 시절 군장교로 복무한 경험은 그의 성격의 또 다른 한 축을 형성하게 만든 계기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가장 먼저 알아챈 사람은 다름아닌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활동했던 화가 세로프(В. Серов)였다. 세로프의 초상은 레핀이 그린 니콜라이 2세의 모습과 사뭇 다르다. 


<니콜라이 2세의 의전 초상, 레핀 作>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초상, 세로프 作> 


레핀의 작품은 니콜라이 2세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제작된 것이다. 레핀의 작품 속에서 살짝 찌푸린 미간과 대비되어 보이는 선량하고 기름한 눈매를 지닌 니콜라이 2세의 모습은 그가 지닌 불안한 내면과 유약한 성정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즉위 당시부터 ‘준비되지 않은 군주’라는 자책성 발언을 되풀이했던 니콜라이 2세의 초조함은 다른 러시아 황제 초상에서 관찰되는 위엄과 권위, 당당함과 달리 다소 위축되고 경직된 형태로 그려진 모습을 통해서도 고스란히 전달된다. 심지어 황제는 자신의 손조차 어디에 두어야 할 지 모른 채 갈팡질팡 하고 있는 모양새이다.

세로프의 작품에서는 이와 또 다른 황제의 내면이 드러나 있다. 세로프의 붓끝에서 묘사된 니콜라이 2세의 모습은 레핀의 작품과는 또다른 불안감을 내비춰보인다. 알려진 바와같이, 세로프는 인간의 내면과 심리를 귀신같이 꿰뚫어보는 시선을 가진 것으로 유명했다. 심지어 몇몇 이들은 세로프에게 초상화를 의뢰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라는 말까지 할 정도였다. 그리고 인물에 대한 세로프의 날카로운 통찰력은 황제의 초상화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작품 속 황제의 형상은 그 윤곽이 뚜렷하거나 정돈되지 않고 마치 아직 완성되지 않은 작품처럼 흐트러진 윤곽으로 처리되어 있다. 이러한 윤곽처리로 인하여 황제의 어깨 부분은 마치 들썩이는 듯한 모양새를 갖추며 그의 불안한 내면을 간접적으로 반영해내고 있다. 황제에게 부여된 색채 역시 어두운 쟂빛으로 가득하다. 레핀이 그린 초상화 역시 다소 가라앉은 색조가 지배적이나, 불안감보다는 차분함을 전달해주는 것과 상당히 대조적이다. 황제의 눈빛 역시 찌푸린 미간으로 인하여 다소 신경질적으로 비춰지긴 하지만, 나름 희미한 미소의 여운을 느낄 수 있었던 레핀의 작품과 달리, 세로프 작품 속 니콜라이 2세의 표정은 어딘지 멍하면서도 결단이 선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총명함과 선량함은 온데간데 없고, 뜻모를 고집스러움만이 남겨진 모습이다. 이와 관련하여 죽음을 얼마 남겨놓지 않고 있던 어느날, 세로프는 자신의 붓끝에서 탄생한 회색 제복을 입은 황제의 시선을 두고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한다. 

“저런 눈동자는 오직 폭군이나 압제자에게만 나타나곤 하지. 정말로 저 눈빛 속에서 1월 9일의 총격의 그림자를 읽어낼 수 없단 말인가?” 

이와 관련하여 올랜도 파이지스는 “니콜라이 2세가 러시아 제국의 황제가 아닌 영국의 국왕이었다면, 모두에게 사랑을 받는 모범적 군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을 것이다”라는 평을 내리기도 했다. 올랜도 파이지스의 의견에 따르자면, 니콜라이 2세는 고상한 인품과 뛰어난 사교술, 유럽문화에 대한 폭넓은 지식 등 입헌 군주제 국가의 이상적 군주로서의 자질을 모두 갖추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그가 통치한 나라는 당시 입헌 군주제를 실시하고 있던 영국이 아닌 전제왕권을 휘두르는 러시아였기에, 니콜라이 2세는 황제의 긍정적 자질을 펼쳐보일 기회도 없이 무능하고 유약한 군주의 낙인이 찍힌 채 역사 속으로 사라져갔다는 것이다.

하지만 황제를 둘러싸고 있던 불변의 조건, 즉 ‘러시아’라는 태생적으로 주어지고 스스로 벗어날 수 없었던 주변적 상황 외에도, 당시 니콜라이 2세가 보여줬던 군주로서의 자질과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자질 간의 불일치 역시 그의 통치와 삶에 불행한 그림자를 드리우게 되는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니콜라이 2세는 즉위 초부터 현실과 이상의 괴리라는 모순 속에서 헤메이고 있었다. 그는 선량한 개인적 성품에 근거하여 형성된 이상 속에 존재하는 ‘만민의 아버지로서 황제’, 그리고 선친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하여 준비없이 즉위한 황제라는 부담을 덜어내기 위한 자기방어적 기제로서 현실 속에 실재하는 ‘강인한 군주’를 동시에 지향했다. 니콜라이 2세의 이러한 모순적 지향은 그가 즉위 후 처음으로 행한 공식 연설 속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나는 민중의 행복을 위해 모든 힘을 쏟아부으면서, 아직도 잊을 수 없는 돌아가신 선왕이 하셨듯이, 전제정치의 원칙을 지속적으로 굳건히 수호해나갈 것이란 점을 모두가 알아주기 바라는 바이다.” 

하지만 결국 이러한 황제의 유약하면서도 이중적인 태도는 자신은 물론 자신의 가족 모두가 몰살되는 비극으로 이끄는 단초가 되었다. 러일전쟁과 1차 대전 연합국 참전으로 인하여 이미 나라 안팍으로 권위와 신뢰를 모두 상실한 니콜라이 2세는 2월 혁명과 동시에 폐위된 황제는 자신의 가족과 더불어 토볼스크에 연금되었고, 이듬해 볼셰비키 당원들이 발사한 무차별 사격에 의해 사망하게 된다. 소수의 급진적 성향을 지닌 볼셰비키에 의한 황제 일가의 몰살은 볼셰비키 내부에서도 상당히 많은 잡음을 자아냈다. 볼셰비키 측에서도 황제일가 사살에 대한 소문을 전적으로 부인했는데, 재판도 없이 황제 일가를 무단 처형하고, 심지어 시신을 불태워 암매장한 사건은 자신들이 생각하기에도 명분없는 폭력 행위에 불과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황제 니콜라이 2세 일가의 처형에 가담했던 자들은 책임자 유롭스키를 제외한 전원이 모두 볼셰비키 정권의 정점을 형성했던 스탈린에 의해 모두 숙청당했다. 그리고 황제 일가의 어처구니 없는 처형에 대한 동정 여론에 힘입어, 지난 2000년에 러시아 정교회는 황제 일가 모두 보리스와 글렙과 마찬가지로 ‘폭력적 행위에 대해 비폭력으로 대응한 수난자’로 간주하며 이들을 성인으로 시성했다.


<성인으로 시성된 순교자 황제 일가를 그린 성상화>


황제 일가의 시성과 별개로 2008년 10월에는 러시아 대법원에서 황제와 그 일가가 부당한 정치적 탄압을 받고 희생되었다는 판결을 내림으로써 비로소 이들에 대한 정치적 복권 역시 완성되었다.

하지만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와 그 일가의 정치적 복권은 그동안 단절되었던 제국 러시아와 소비에트 공화국, 그리고 포스트 소비에트 시기의 러시아 간의 역사적 흐름를 복원시키기 위한 정치적 합의이자, 동시에 하나의 러시아를 만들기 위한 다분히 정책적인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는 점 역시 간과하지 말고 상기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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