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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문화로(文化路)
제목빛을 그려낸 러시아의 풍경화가 아르히프 쿠인지(А. Куинджи)에 관하여
분류회화
국가 러시아
날짜2020-08-18
조회수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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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월 말, 정확히는 2019년 1월 27일 오후 6시경, 러시아 국립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에서 보고도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미술관이 문을 닫기까지는 아직 꽤 시간이 남아있는 상태였고, 관람객들도 저마다 자신의 취향에 따라 그림을 감상하고 있었다. 여하튼 아직 백주대낮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사람들이 버젓이 오가는 미술관 관람 시간에, 한 남성이 당시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내에서 특별 전시 중이었던 작품 한 점을 벽에서 떼어내더니 아무렇지도 않은 듯 관람객 사이로 유유히 들고 사라져버린 것이다.

사라진 그림은 다름 아닌 우크라이나 계열 러시아 작가 ‘아르히프 쿠인지’의 <아이-페트리. 크림> 이라는 작품이었다. 이 그림은 본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위치한 ‘러시아 미술관’ 소장작이었다. 그러던 중 특별전을 개최하기 위해 잠시 모스크바로 나들이를 왔다가 이런 봉변을 당하게 된 것이다. 


<아이-페트리. 크림, 쿠인지 作 >


당시 도난 당했던 쿠인지의 작품 <아이-페트리. 크림>은 1898년에서 1908년이라는 약 10여년에 걸쳐 제작되었으며, 정확한 제작년도는 부여되지 않았다. 도난 시점 당시 작품의 추정 감정가는 20만 달러로, 한화로 환산 시 약 2억 3700만원 가량에 해당한다. 그림 크기는 53cmX39cm로 소품에 속하긴 하지만, 그래도 몸에 숨겨서 들고 나갈만한 사이즈는 아니다.

여타 유럽 국가 내에 있는 미술관들이 그러하듯이, 러시아 미술관에도 각 전시관마다 나이 지긋한 할머니 안내인들이 상주해있는데, 이분들마저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문제의 남성이 스스럼없이 미술관 밖으로 작품을 반출했다는 것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주변인들의 증언에 따르자면, 관람객은 물론 직원들 모두 그를 미술관 관계자로 착각했다고는 하지만, 미술관 곳곳에 있는 안내원은 차치하더라도, 밖으로 그림을 들고 나가는 순간 입구를 지키는 경비원들 중 단 한 명도 그를 저지하지 않았다는 점은 상당히 믿기 힘든 일이다. 아마도 경비원들은 이 문제의 대도(?)가 미술관 내에 있는 기념품 점에서 명화 카피본을 한 점 사들고 나가는 줄 알았던 듯싶다.

다행히 그림을 훔쳐 달아난 범인은 그림을 도난당한 다음날 바로 잡혔고, 쿠인지의 작품도 손상없이 바로 회수되었다. 하지만 하필 쿠인지의 작품이 도난당한 날짜가 작가의 생일인 1월 27일과 일치하는 점도 뭔가 석연치 않은 점 중 하나이다.

작품 가격을 올리기 위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화가들 사이에서 오가는 말들 중 하나가 자신의 그림을 도둑맞던지, 혹은 위작이나 모작 논쟁에 휩싸이는 것이라고 한다. 후자는 일종의 노이즈마케팅의 일환이긴 하지만, “베끼니까 더 유명해졌다!”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작품명과 화가의 이름이 대중들 사이에서 오가며 자연스럽게 인지도가 상승하는 효과를 노리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한편 전자의 경우, 말할 필요도 없이 도둑맞을 정도로 ‘대단한’ 그림에 대한 예술적 재평가와 더불어 컬렉터들의 소장 욕구를 끌어올리게 된다.

참고로 국내의 경우 천경자 화백과 이중섭 화백, 박수근 화백의 작품을 둘러싼 원작과 위작을 둘러싼 다양한 논쟁이 지금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다. 그 중 천경자 화백의 경우, 심지어 작가의 생존 당시 이와같은 일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바로 천 화백의 대표작 일련을 구성하는 <여인상> 연작 중 <미인도>에 대해 스스로 ‘위작’ 판정을 내린 사건인데, 이로 인해 당시 미술계가 한반탕 발칵 뒤집혔다.

당시 천 화백은 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기획 전시에 내놓은 <미인도>에 대해 자신의 그림이 아니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천 화백은 <미인도>의 위작 여부를 넘어서, 아예 “나는 해당 그림을 그린 적이 없다!”라고까지 선언했고, 당황한 국립현대미술관 측은 전문 감정위원회에 감정을 의뢰하기에 이른다. 현대미술관 측은 작가 자신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해당 작품에 대한 ‘진품’ 판정을 받아냄으로써 스스로 자신들이 소장한 작품을 ‘진품’으로 결론낸 바 있다. 결국 이 사건을 계기로 천 화백은 절필을 선언한 뒤 미국으로 ‘예술적 망명’을 떠나게 되었고, 2015년 타국에서 생을 마감하며 결국 <미인도>의 진위여부는 영원히 수면 아래로 잠기게 된다. 작가의 사망 이후 가족들에 의해 다시금 가장 기본적인 안료분석에서부터 X레이 투과, 원적외선, 심지어 DNA 분석까지 진행하며 진품 가품 논란이 계속되었지만, 여전히 작품의 진위여부는 오리무중에 빠진 채 국립현대미술관의 불완전한 ‘진품’ 선언과 천경자 화백과 그의 작품을 둘러싼 무성한 이야기만 남겨진 상태이다.

바로 이러한 미술계의 풍토(?)로 인해, 쿠인지의 작품 <아이-페트리. 크림>의 도난 사건 역시 순수한 시각만으로 바라보기 다소 힘든 측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러시아 풍경화를 대표하는 화가로 가장 많이 거론되는 이름은 레비탄, 쉬쉬킨, 사브라소프, 폴레노프 등이며, 쿠인지의 이름은 이들에 비해 언급되는 횟수가 상대적으로 적은 것이 사실이다. 또한 트레티야코프 관계자들이 버젓이 버티고 있던 시각에 그들 사이를 뚫고 유유히 그림을 빼돌린 한 남성에 의해 쿠인지의 이름과 작품에 대한 관심이 새삼 환기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도난당했던 쿠인지 작품이 반환되자 마자, 트레티야코프 갤러리 측은 쿠인지 작품 기획 전시관을 본래 사용하던 전시관보다 더 크고 관람객들이 많이 오가는 쪽으로 옮겼는데, 이는 작품의 도난 방지뿐만 아니라, 트레티야코프 갤러리 관계자가 스스로 밝힌 바처럼 “쿠인지 작품에 대한 관람객들의 관심이 증가한 것에 따른” 자체적 조치였다. 


<아르히프 이바노비치 쿠인지의 초상, 레핀 作, 1877> 


아르히프 이바노비치 쿠인지(Архип Иванович Куинджи, 1842~1910)는 현재 우크라이나의 도네츠크 지역에 해당하는 ‘마리우폴 ’현에서 출생했으며, 부모님은 그리스 이주민이었다. 장화수선공으로 일하면서 가난에 대한 기억만 남겨준 아버지와 어머지를 여윈 뒤, 쿠인지는 친가 삼촌집에서 자라나게 되었다. 다행히 친척들은 쿠인지를 박대하지 않았고, 오히려 쿠인지의 혈연적 기원이라 할 수 있는 그리스어를 배울 기회와 더불어 시립 학교에 다니도록 배려해줬다. 바로 그곳에서 그림에 대한 쿠인지의 재능과 열망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친척들의 배려와 별개로 쿠인지는 여전히 가난이라는 짐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교회 건축 현장과 빵집에서 일하면서 본격적인 생활 전선에 뛰어들게 된다.

여전히 그림에 대한 꿈을 놓지 못했던 쿠인지는 틈틈이 습작을 하곤 했는데, 이를 지켜보던 친구가 크림에서 활동하고 있던 아이바좁스키 문하생으로 들어갈 것을 권하게 된다. 이에 쿠인지는 망설임 없이 아이바좁스키 화실이 있는 크림으로 떠났지만, 그를 기다리던 것은 아이바좁스키의 관심이나 화가가 되기 위한 전문 교육이 아닌 기껏해야 물감을 으깨거나 담장을 칠하는 소소한 일들 뿐이었다. 결국 쿠인지는 고향으로 다시 돌아와서 사진사 보조로 일하기 시작했고, 몇 달 후에는 다시 오데사로 넘어가서 사진사 보조 일을 하게 된다.

이렇듯 얼핏 그저그런 젊은 날의 고생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는 쿠인지의 청년시절 일대기는 그의 작품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쿠인지의 작품에서 이따금 아이바좁스키의 터치가 느껴지는 것은 바로 젊은 시절, 비록 아이바좁스키로부터 직접적인 지도를 받지는 못했지만 어깨너머로 보고 익힌 자신의 마음 속 우상 아이바좁스키의 작품에 대한 무의식적인 오마주의 발현으로 추정된다. 한편 자유자재로 빛을 통해 화폭을 구현해내는 쿠인지의 필치는 가히 ‘러시아의 렘브란트’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뛰어남을 보여주는데, 이는 젊은 시절 그가 꽤 오랜시간에 걸쳐 사진보조사로 일하면서 빛을 연구하고 분석했던 경험이 고스란이 그림으로 투영된 결과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쿠인지의 그림에서 몽환적인 느낌을 발견하긴 힘들다. 오히려 화폭 속에서 빛을 다루는 솜씨가 남달랐던 쿠인지의 그림은 그 특별한 조명 효과로 인하여 이따금 ‘하이퍼리얼리즘’ 계열의 작품 못지않은 현장감과 사실감을 발휘하곤 한다. <달빛 속 이삭성당의 풍경>과 <흑해에서의 고기잡이>와 같은 작품들이 바로 이러한 빛을 통한 쿠인지만의 독특한 ‘하이퍼리얼리즘’을 구사한 대표적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달빛 속 이삭 성당의 풍경, 1869>


<흑해에서의 고기 잡이, 1900>


도난당했던 그의 그림 속에 묘사된 ‘아이-페트리’는 얄타에 위치한 유명한 산들 중 하나로, 본디 그리스어로 ‘성 베드로’를 의미한다. 쿠인지가 자신이 출생한 우크라이나 지역의 농촌과 풍경을 많이 담아내긴 했지만, 자신이 젊은 시절을 보낸 크림 지역과 더불어 카프카즈 지역에 위치한 엘부르스 산도 종종 화폭에 그려내곤 했다. 특별히 ‘아이-페트리’ 산은 그 명칭이 그리스어라는 점에서 쿠인지에게 더욱 특별하게 다가오지 않았나 싶다. ‘아이-페트리’ 산을 둘러싼 어스름한 새벽녘의 공기가, 푸르스름하게 깔린 여명을 뒤로한 밤공기의 촉촉함과 더불어 그대로 느껴지는 듯 하다.

쿠인지의 작품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여러 화가들의 작품이 겹쳐지곤 한다. 화폭 속에서 빛을 다루는 솜씨로 치자면 렘브란트 못지않고, 자작나무를 비롯한 러시아 풍경을 담아내는 솜씨는 러시아의 대표적인 풍경 화가로 익히 알려져있는 쉬쉬킨과 폴레노프, 레비탄에 버금간다. 강과 바다를 비추는 빛을 통해 투명한 물성을 표현하는 솜씨는 아이바좁스키의 풍광을 연상시키고, 마치 물안개가 서린 듯 흐릿하게 풍경을 뭉개놓은 듯한 지점에 이르면 터너의 작품이 떠오르기도 한다. 엘부르스 산을 그려놓은 일련의 시리즈물은 레리흐의 그림과도 닮아있다.


<우크라이나의 저녁, 1878>


쿠인지의 여러 작품 및 연작 중에서도 개인적으로는 ‘우크라이나의 밤’ 시리즈가 마음에 들다. 쿠인지는 자신의 고향인 우크라이나의 저녁을 소재로 일련의 작품을 남겼는데, 그 중에서도 1878년작에 완성된 <우크라이나의 저녁 (Ночь на Украине)>은 우크라이나의 어느 한적한 농촌마을과 마을을 감싼 석양의 붉은 빛, 그리고 그 붉은 기운을 덮는 어스름함을 조화롭게 엮어내며, 마치 눈앞에서 땅거미가 지는 장면이 연출되는 듯한 아련함을 고스란히 전해준다. 


<드네프르 강변의 달밤, 1882, 심페로폴 예술박물관 소장>


한편 쿠인지의 또 다른 대표작 <드네프르 강변의 달밤 (Лунная ночь на Днепре)>의 다양한 원작 버전 중 1882년에 제작된 작품의 경우, 일정한 각도로 빛을 받으면 쿠인지의 성을 암시하는 알파벳 ‘К’가 화폭 중앙에 희미하게 떠오른다고 한다. 현재 이 그림은 심페로폴 예술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인터넷에서 구한 파일을 확대해서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가며 여러 각도에서 유심히 그림을 살펴보니, 확실히 위에서부터 약 2/3 정도에 해당하는 어느 지점에서 어렴풋이 알파벳 ‘К’가 보이는 듯 싶기도 하다. 코로나 상태가 진정 국면에 접어들면, 쿠인지 작품 속에 존재하는 미스테리한 글자 ‘К’의 실물을 영접하고 겸사겸사 ‘아이-페트리’ 산에 올라보기 위해서라도 크림반도를 방문해야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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