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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문화로(文化路)
제목디아스포라와 작가 보리스 자이체프
분류문학
국가 러시아
날짜2020-07-31
조회수5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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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집을 버리고 새로운 창작의 공간을 찾아 머나먼 이국땅에서 디아스포라 삶을 살았던 러시아 작가 보리스 자이체프(Б.К.Зайцев, 1881-1972)는 자신의 삶이 끝날 때까지 소비에트 정권과 어떠한 타협도 하지 않았던 강골 예술가였다. 그는 1917년 혁명을 일으킨 볼셰비즘을 공개적으로 비난한 대담한 작가였는데, 1917년 12월 모스크바의 언론인과 작가들이 만든 신문 <자유의 말>을 통해 기고한 ‘억압은 자유로운 언어를 질식 시킨다’와 루나차르스키(А.Луначарскийу)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에서 자이체프는 볼셰비즘을 공개적으로 거부했다. 그리고 망명의 길을 선택했다.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등의 타국에서의 망명생활동안 자이체프는 러시아 정교회 세계관을 통하여, 러시아 문화의 영적 기초를 새롭게 재발견하고 인식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자이체프의 소비에트에 대한 거부는 독특한 신학적 투쟁의 작품의 창작으로 이어져 <승리자>(Побежденный,1925), <막심고리키(기념일을 맞이하여)>(Максим Горький (К юбилею), 1932)등과 같은 의미 있는 작품이 발간되었다.


<보리스 자이체프>

낯선 곳에서의 낮아진 자존감과 외로움의 고통에 타국에서의 이방인 삶은 힘들었지만 디아스포라 기간 동안 자이체프는 자신의 선택을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오히려 처절한 절망적 시기에 창조적 생명력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문학적 역사를 써내려간 자이체프는 디아스포라 작가로서의 의미를 ‘창작적 자유 획득’으로서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는 러시아 밖에서 살면서 러시아의 삶, 러시아인의 독특한 기질, 러시아의 정교회 성자들이 추구한 러시아적인 것과, 그들이 사랑한 것에 대하여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자이체프의 서구로의 망명은 그에게 종교적 열망이 가득한 러시아를 공산화시켜, 결국 황폐화시켜 버린 볼셰비키에 대한 부정적 평가와 망명예술가들의 올바른 선택의 역사적 정당성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에 대한 창작의 시간을 선사한 반전의 기회였다. 그래서 자이체프는 러시아를 벗어나면서 한번쯤은 가슴속 밑바닥에 품었을 만한 증오 대신 작가로서의 소명에 대한 믿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명감은 자이체프에게 행동하는 지식인이 되게 하였고 디아스포라적 의식과 고통을 선의 형태로 표현하게 만들었다. 특히 초기 망명지인 독일 베를린에서 자이체프는 농도가 짙은 문학적 삶을 살았는데, 러시아 작가 및 언론인 연합 부회장으로 선출되었고, 동시에 베를린에서 발행되는 신문 <시대>(Дни)와 파리에서 인쇄되는 잡지 <러시아의 의지>(Воля России)와 공동 작업을 했다. 또한 1923년 9월부터 12월까지 자이체프는 이탈리아의 슬래브연구가인 로카토의 초청을 받아 이탈리아를 방문했고, 이탈리아의 로마의 동유럽연구소에서 강연을 했다.

소비에트가 망친 러시아 전통 문화의 복원을 위해서 순수한 러시아, 정교에 대한 열망과 믿음이 가득한 자이체프가 드미트리 메레쥐콥스키(Д.Мережковски)와 지나이다 기삐우스((З.Н. Гиппиус)가 창립한 문학-철학학회 <녹색램프>(Зеленая лампа)에 회원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파리의 기삐우스의 부부 집에서 문학 및 철학을 토론하는 일요일 모임이 확대해서 만들어진 <녹색램프>는 종교, 러시아, 인류의 이상에 대한 믿음으로 가득한 디아스포라 단체였기 때문이었다. 자이체프와 드미트리 메레쥐콥스키와의 친분은 1904년경부터 시작되었는데, 이 시기에 자이체프는 저명한 사상가 니콜라이 베르쟈예프(Н.Бердяв), 상징주의 이론가 겸 작가인 바체슬라프 이바노프(Вяч.Иванов), 상징주의 시인 알렉산드르 블록(А.Блок)과도 알게 되었다. 특히 이바노프와 아주 가깝게 지내서 그의 집을 자주 방문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녹색램프>는 러시아 디아스포라 공동체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녹색램프>의 첫 번째 회의에서 메레쥐콥스키는 ‘우리 램프의 불꽃은 녹색 갓 또는 오히려 녹색 희망을 통해 빛날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녹색램프모임에 정기적으로 참가하면서 자이체프는 문학잡지 <현대수기>의 14번째 호를 발간하였다. 동시에 자이체프는 망명신문 <최신 뉴스>(Последние новости), 신문 <부활>(Возрождение), 1925년 10월부터는 잡지 <종소리>(Перезвоны)에서 편집장으로도 일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사실은 자이체프의 소비에트에 대한 강한 배척은 유럽에서 형성된 러시아 디아스포라 공동체의 몇몇 예술가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특히 러시아 사상가 중에서 유럽인들이 가장 선호한 베르쟈예프와의 러시아에서부터 이어진 친교가 결정적으로 파국을 맞았다. 또한 러시아 디아스포라 공동체의 상징이었고 노벨상을 수상한 이반부닌과도 사소한 의견 충돌이 일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자이체프는 아주 왕성한 활동을 한 문학인으로서 러시아 1차 망명 물결의 ‘구세대’작가 중에서 가장 존경받는 예술인중의 한 명이었다. 망명지에서 자신의 조국에 대한 강렬한 동경을 느꼈던 스트라빈스키가 <네 곡의 러시아의 노래>에서 ‘눈보라와 폭풍이 주의 나라고 가고 있는 길을 막고 있다’라고 언급한 것처럼, 러시아에서 떨어져 나와서 다시는 돌아 갈 수 없게 된 자이체프에게는 그리스도가 있는 곳이 곧 러시아였다. 자이체프에게는 주의 나라로 가는 길을 방해하는 것은 바로 소비에트 러시아였다. 망명으로 고통 받았던 자이체프의 영혼은 2차 세계대전에서의 독일에 대한 승전은 소비에트의 승리가 아니었고 전쟁의 결과는 러시아의 정신적인 부활에 어떠한 기여도 할 수 없고 러시아의 민중에게도 어떠한 자유와 해방도 가져다주지 못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초기 망명지에서 자이체프는 기회가 있을 때 마다 수도원을 방문하곤 했는데, 1927년 4월-5월에 신성한 산으로 알려진 아토스에 위치한 여러 곳의 수도원을 방문하여 정교회의 수도사들을 만났다. 또한 1935년 7월-9월에는 당시 핀란드 영토였던 발람의 수도원을 방문했다. 잘 알려져 있듯이, 고대 발람 수도원은 망명동료작가인 독실한 정교신자였던 이반 슈멜레프(И.С. Шмелёв)가 부인의 요청에 의해 신혼여행을 다녀온 곳이기도 하였다. 신혼여행 당시 슈멜레프 부부는 발람 수도원의 장로 바르나프 게프시만스키(Варнав Гефсиманский)로부터 축복까지 받았는데, 발람 수도원 여행을 소재로 한 작품 <발람의 바위에서. 세상의 경계를 넘어. 여행의 단상>(На скалах Валаама. За гранью мира. Путевые очерки)은 슈멜레프의 첫 번째 창작품이 되었다. 아토스 산과 발람 수도원을 방문하면서 자이체프는 그곳에서 잃어버린 러시아를 느낄 수가 있었다. 


<아토스산의 수도원>

망명 전 자이체프의 문학

자이체프는 1881년에 광석사무소를 관리하는 광업 엔지니어의 아들로 오룔(Орёл)에서 태어났다. 러시아 중부에 위치한 오룔은 자이체프를 포함하여 이반 투르게네프(И.С. Тургенев), 이반 부닌(И.А.Бунин), 니콜라이 레스코프(Н.С.Лесков), 표도르 츄체프(Ф.И.Тютчев), 아파나시 페트(А.А.Фет)등 많은 러시아 작가와 관련이 있는 도시로, 이들 작가들에게 숲으로 둘러싸인 전원도시 오룔은 ‘자연에 대한 감수성과 인지력’을 선물했다. 특히 오룔에서 성장기를 보낸 러시아의 작가들은 독특하고 아름다운 러시아의 자연에 대한 특별한 감성을 습득했으며, 이는 자연에 대한 서정적인 이해력과 인간과 자연의 친화력에 대한 인식을 형성하는 기회가 되었다. 자이체프는 1892-1894년에 고전적인 김나지움에서 공부했지만 실제 졸업은 1898년에 하였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모스크바 기술학교에 입학하였지만 학생 파업위원회 참여로 인하여 신입생 때 학교에서 제적되었다. 1899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광산대학교에 입학하였고, 그 이후 1902년 추가 시험에 합격하여 모스크바 대학교 법학부로 전학하였는데, 1907년 초까지 그 곳에서 공부를 계속했다. 


<오룔 市>

문학청년 자이체프의 작가로서의 데뷔는 그의 나이 20살에 이루어졌는데, 1901년 7월에 첫 작품 <길 위에서>(В дороге)가 한 모스크바의 신문에 기고되었다. 이 첫 작품 출간 이후 문학적 활동도 활발하게 하여, 1902년 작품 <늑대들>(Волки)의 출간 이후 레오니드 안드례예프(Л. Андреев)의 소개로 신사실주의 모임인 <수요일>(Среда)에 들어갔다. 1900년대 초 민주주의적 성향을 가진 자이체프, 고리키, 슈멜레프 등의 작가들은 사회적문제의 토론을 지향하는 작가모임인 <수요일>의 활동에 열심히 참가하였다. 러시아 격동기시기에 일반적으로 작가들의 계층화가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요일> 모임의 작가들은 러시아 문학전통을 계승한 전형적인 ‘지식인’들로 남았다.

망명 전 자이체프의 작품의 경향은 자연주의 아르누보와 우주의 신비와 비밀에 대한 서정적 숭배가 결합되어 있다. 특히 자이체프는 평범한 생활에 대한 신비주의적인 지각과 계급을 초월한 러시아 정교의 휴머니즘 등을 그의 초기 작품의 기조로 삼았다. 그리고 블라디미르 솔로비요프(Вл.Соловьев)에 의해서 인지된 범신론에서 영감을 받은 자이체프의 초기 작품들은 1902년에 만난 이반 부닌(И.Бунин)의 영향도 받았다. 이 초기 창작기간동안 특이하게도 독일 작가 단테를 발견하여, 그의 작품 <신곡>을 러시아어로 번역까지 하였다. 자이체프의 초기의 또 다른 걸작 <성 안토니의 유혹>(Искушение святого Антония)과 <단순한 마음>(Простое сердце)은 작가가 좋아한 국가인 이탈리아의 여행의 결과에서 나온 작품들이다. 젊은 작가의 열정이 반영되어 있는 자이체프의 첫 번째 단행본 <이야기>(Рассказы)은 지나이다 기삐우스로부터 <자이체프를 읽는 것은 슬프지만 우리는 무엇인가를 기다리게 되지요, 여러분 기다림을 가지고 그의 작품을 기대하세요. 그의 언어는 단순하지만 표현력은 거침이 없어요.>라고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1910년대 초 자이체프는 창조적 위기를 겪으면서, 초기의 성공을 이루게 해준 단편 <신화>(Миф, 1906), <사제 크로니트>(Священник Кронид, 1905), 농촌 여인의 운명을 묘사한 중편 《아그라페나 Agrafena》(1908)들은 다듬어지지 않는 거친 언어들이 자주 등장하는 단편 <죽음>(Смерть, 1911), <배우의 행복>(Актерское счастье), 중편 <카산드라>(«Кассандра, 1915)등으로 교체되었다. 


자이체프의 작품 <푸른 별>

자이체프 작가 인생에서 터닝 포인트가 된 작품은 중편 <여행자>(Путники, 1916)와 모스크바의 인텔리의 생활을 주제로 한 <푸른 별>(Голубая звезда, 1916)이다. 이 작품들은 문체적으로 볼 때 1910년대 이후 그의 작품의 특징이 된 조탁되지 않은 언어들로 가득 찬 작품이지만, 서정적인 긴장도 곳곳에서 흘러나오는 작품이다. 자이체프는 이 두 작품(특히 <푸른 별>)으로 작가로서 큰 명성을 얻었다. 툴라 지방의 프리트키노에서 완성된 이 두 작품은 러시아문학이 창조한 전형적인 형상인 일종의 ‘잉여인간’에게 헌정되었다. 자이체프는 작품에서 잉여인간을 인생의 중요한 교차점에서 한 발짝 도 움직일 수 없어 얼어붙고 인생에서(과정이든 결과든) 항상 타인에게 뒤쳐져 내적 침묵을 강요당하는 안타까운 부류지만, 최소한 자신의 존재를 소중한 것으로 여기는 인물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푸른 별>은 자이체프의 작품 중에서 가장 투르게네프적인 것으로 평가 받는 작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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