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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영화 ‘운명의 아이러니, 혹은 목욕 잘 하셨나요!’를 통해서 본 러시아 도시 풍경의 역사
분류영화
국가 러시아
날짜2020-07-16
조회수7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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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매년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보기 싫어도 봐야 하는 영화가 있으니 바로 ‘나홀로 집에’ 시리즈이다. ‘나홀로 집에’ 시리즈는 어느덧 1탄부터 5탄에 이르는 일련의 후속작을 배출해내면서 나름 미국을 대표하는 ‘시즌 영화’로 자리매김했다. 이에 버금가는 러시아 영화가 있으니, 바로 ‘운명의 아이러니’ 시리즈와 ‘욜키’ 시리즈이다.

2018년 ‘최후의 욜키(Елки Последние)’라는 비장미 넘치는 제목을 내세워 무려 8탄의 시리즈를 완성해 낸 ‘욜키’ 시리즈에 비해, ‘운명의 아이러니’는 2007년 출시된 ‘운명의 아이러니. 속편(Ирония судьбы. Продолжение)’ 이후 또 다른 후속작에 대한 소식은 없다. 이러한 아쉬움을 달래듯, 2015년에 소위 ‘발리우드’로 불리는 인도 영화계에서 ‘난 새해가 좋아(I Love NY)’라는 인도식 리메이크 버전을 출시했고, 러시아 관객에게도 소개되었다. 발리우드식 ‘운명의 아이러니’에 대한 러시아 관객의 반응은 반반이었다. 높은 평점을 준 관객들은 대부분 원작을 헤치지 않는 선에서 인도식으로 재구성된 설정이 재미있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별 1개~3개에 해당하는 다소 박한 점수를 준 관객들의 경우, 원작의 스토리만 그대로 옮겨왔을 뿐, 러시아만의 특수성을 제대로 반영해내지 못했다는 의견을 남겼다. 참고로 인도식 리메이크 버전에서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시카고와 뉴욕으로 뒤바뀜되었다.

어쨌거나 아마도 이들이 말하는 ‘러시아만의 특수성’으로 인하여, 1975년에 제작된 ‘운명의 아이러니, 혹은 목욕 잘 하셨나요! (Ирония судьбы, или С легким паром!)’가 출시된 지 45년도 더 지난 현재에 이르기까지 러시아인들로부터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는게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 ‘러시아만의 특수성’을 만들어 낸 일등 공신은 바로 어느 도시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레닌 거리’, 어느 도시에서나 마주칠 수 있는 동일한 형태의 집들이라는 점을 굳이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1975년 작 ‘운명의 아이러니’는 비탈리 페스코프(В. Песков)의 솜씨로 완성된 애니메이션을 통해 당시 소비에트 주거환경의 특수성과 더불어, 각 행정부서에 만연했던 소비에트적 관료주의를 상당히 강도높은 수위로 풍자하며 꽤나 직설적인 연출로 시작된다. 




<최초 건축 도면 (左) / 최초 불허 도면 (中) / 최종 허가 도면 (右)> 

영화는 매우 야심차게 소비에트 도시 곳곳에 세워질 새로운 건축도면을 그려내는 설계사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설계도면을 완성한 남자는 매우 즐거운 표정으로 도면을 들고 해당 관청에 허가를 맡으러 들어가지만, 설계 도면에 반대하는 건 아니지만 도면 양 옆에 그려진 장식물을 모두 떼라는 조건부 승인을 받게 된다. 당황한 설계자는 도면을 들고 이 부서 저 부서를 연신 들락대지만, 도면에 수없이 많은 도장이 찍힐때마다 원본은 점차 변질되고 훼손되더니 결국 남는 것은 네모난 성냥갑 모양의 건물이다. 마침내 ‘허가함(Разрешаю)’이라는 도장을 받은 도면 속에서 어느덧 원본의 이미지는 사라져 버린지 오래이다. 대신 관객의 눈에는 무수한 도장과 부서장들의 사인과 더불어 영화에서 말하는 소위 ‘전형적인 집(типовая квартира)’, 혹은 ‘규격화 된 집’ 형태만 덩그라니 놓여있는 모습만 들어오게 된다. 그 이후 사막에까지 똑같은 형태의 네모난 성냥갑 집이 마구잡이로 지어지면서 마치 안드레이 플라토노프의 작품에서 언급되는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들의 집’의 완성을 암시하는 듯한 애니메이션이 깔리며 본격적인 영화가 시작된다. ‘성냥곽 네모집’에 대한 풍자는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후에도 계속된다.

“예전에 사람들은 낯선 도시에 가게 되면, 길 잃은 외톨이가 된 기분을 느끼곤 했죠. 자기 주변으로 모든 것이 다 낯설기만 했으니까요. 다른 집, 다른 거리, 다른 삶... 하지만 이젠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누군가 어떤 낯선 도시에 가게 되더라도, 마치 자기 집에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되니까요. 우리 조상들은 어느 정도로 불합리한 일을 겪었을까요? 그들은 건설 프로젝트가 진행될 때마다 괴로움에 시달렸죠. 하지만 이젠 모든 도시에 <로케트>라는 ‘전형적인 극장’이 세워지고, 그 영화관 안에서 ‘전형적인 예술 영화’를 감상하게 되었죠. 거리 명칭도 다양함으로 구분되지 않아요. ‘제1정원거리(1-я Садовая улица)’, ‘제2근교길(2-я Загородная улица)’, ‘제3공장거리(3-я Фабричная улица)’, ‘제1공원길(1-я Парковая улица)’, ‘제2산업길(2-я Индустриальная улица)’, ‘제3건설자거리(3-я улица Строителей)’! 정말이지 아름답지 않습니까? 보기 좋은 색으로 칠한 ‘전형적인’ 형태의 똑같은 계단 난간, ‘표준적인’ 가구들이 놓인 ‘전형적인’ 아파트들, 특색없는 대문에는 ‘전형적인’ 자물쇠가 박혀있죠...”

영화 제작 시기가 소비에트 정권이 본격적인 침체기에 접어든 1970년대 이후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당시 소련방 TV 및 라디오 방송부처 국가위원회의 주문으로 제작된 영화의 도입부가 이런 식으로 전개되고, 또 그것이 심의를 통과했다는 점이 마냥 신기할 따름이다. 


               
                                <영화 속 1970년대 모스크바 ‘체르무시키(Чермушки)’ 지역의 모습>

영화 속 배경이 되는 지역은 소위 ‘유고-자파드나야’로 불리는 모스크바 남서쪽 지역이다. 이 지역은 모스크바 붉은 선이 통과하는 지역이기도 하다. 예전에는 지역명과 동일한 ‘유고-자파드나야’ 역이 최종 종착지였지만, 점점 그 외연을 넓혀가는 모스크바 지하철 공사 덕분에 현재 붉은 선 라인의 남서쪽 방향으로 ‘트로파료보(Тропарево)’, ‘루먄체보(Румянцеов)’, ‘살라리예보(Саларьево)’ 등 총 3개의 역이 더 늘어난 상태이며, 앞으로도 ‘필라토프 루그(Филатов Луг)’, ‘프로크쉬노(Прокшино)’, ‘올리호바야(Ольховая)’, ‘코무나르카(Коммунарка)’ 등 4개의 역이 더 신설, 연장될 예정이다.

영화와 실제 배경과의 차이를 짚어보는 것도 이 영화를 감상하는 또 다른 포인트가 된다. 영화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좀 더 구체적인 지역은 다름아닌 ‘건설자 거리’, 정확히 말하면 ‘제3건설자거리’이다. 모스크바에 위치한 ‘제3건설자 거리’는 1958년도부터 존재했다. 하지만 해당 거리는 1963년도에 레닌의 여동생 이름을 딴 ‘마리야 울리야노바 거리(улица Марии Ульяновой)’로 명칭이 변경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영화가 제작된 1975년에 ‘제3건설자 거리’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 곳이 되어버린 것이다.

비록 ‘제3건설자 거리’는 명칭을 바꾸어 ‘마리야 울리야노바 거리’로 재탄생되었지만, 그 흔적이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다. ‘마리야 울리야노바 거리’, 즉 과거의 ‘제3건설자거리’ 옆의 옆 구역에는 현재까지도 존재하는 ‘건설자 거리’가 위치해있다. 모스크바 남서쪽 지역 지도를 펼쳐보면 베르나드스키 대로와 레닌 대로가 마치 사다리 틀처럼 ‘마리야 울리야노바 거리’를 감싸는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그 옆으로 ‘크룹스카야 거리’와 ‘건설자 거리’가 ‘마리야 울리야노바 거리’와 사이좋게 나란히 배치되어 마치 사다리 난간과 같은 모양새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영화 속 ‘건설자 거리’ (左) / 현재의 ‘건설자 거리’ (右)>

여기서 현실과 영화 간의 차이점이 또 하나 확인된다. 현재 모스크바에 위치한 ‘건설자 거리’의 모습은 영화 ‘운명의 아이러니’에 등장하는 ‘건설자 거리’와 그 위치나 생김새가 전혀 다르다는 점이다. 영화 속 주인공 제냐가 새로 이사간 집은 정확히 모스크바 지하철 남서쪽 라인을 대표하는 ‘유고-자파드나야’ 전철역에서 남쪽으로 좀 더 내려가면 만날 수 있는 ‘대천사 미하일 교회(Церковь Архагела Михаила)’ 부근이다. 영화 초반에 화면 전체를 통해 그 모습을 드러내는 교회와 그 주변 풍경이 이를 뒷받침 해준다. 


<영화 도입부에 나오는 ‘대천사 미하일 교회’ (모스크바 트로파뇨보 지역)>

‘제3건설자거리’가 ‘마리야 울리야노바 거리’로 개명된 것을 감안하더라도, 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 제냐의 동네와 현실 속 ‘건설자 거리’는 서로서로 멀어도 꽤 먼 곳에 위치해있다. 게다가 기록에 따르면, 영화 속에 등장하는 제냐의 주거 지역과 아파트 동은(‘제3건설자거리, 25번동)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서둘러 지어올린 고층 아파트가 아니라, 1960년대 흐루쇼프가 소위 ’전 소비에트 국민에게 아파트 보급‘을 달성할 목적으로 역시 부랴부랴 지어올린 5층짜리 보급형 주택 ’흐루쇼프카‘가 위치한 지역이었다. 실제로 2015년도까지 ’마리야 울리야노바 거리(구 ‘제3건설자 거리)’에 자리해있던 나름 정겨운 모습의 흐루쇼프카는 어느새 도시정비사업의 일환으로 모두 사라져버리고, 지금은 당시 흐루쇼프카에 거주했던 주민들이 영화 ‘운명의 아이러니’ 촬영장소 기념 현판을 보관하고 있다. 현판의 틀을 이루고 있는 서류가방과 그 옆으로 삐죽하니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러시아식 사우나용 자작나무 가지가 인상적이다.

 
 
<영화 ‘운명의 아이러니’ 촬영 장소 기념 현판>

다른 한편으로 눈길을 끄는 점은 최근 얼마 전까지만해도 상트페테르부르크 지역, 소비에트 시절에는 레닌그라드로 불렸던 구 수도에 ‘제3건설자 거리’라는 이름을 가진 도로는 아예 존재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1955년에서 1962년 사이에 페테르부르크 내에도 ‘건설자 거리’라는 명칭의 도로 2개가 부설되었지만, 현재는 모두 ‘복시토고르스카야(Бокситогорская)’와 ‘마리네스코(Маринеско)’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그러던 중, 2016년도에 ‘보스토치니(Восточный)’ 우주비행장 건설의 일환으로 페테르부르크 내에도 마침내 ‘제3건설자거리’라는 명칭의 도로가 등장하게 된다. 해당 도로는 ‘운명의 아이러니’를 연출한 라쟈노프 감독을 기리는 의미에서 만들어졌으며, 바로 그런 이유로 인하여 자연스럽게 ‘제1건설자거리’, ‘제2건설자거리’가 존재하지 않는 점도 매우 주목할만 하다. 결국 영화 ‘운명의 아이러니’에 존재하는 ‘제3건설자 거리, 25동 아파트’는 화면 속에만 존재하고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지리’로 남겨지게 되었다. 아마도 바로 그런 연유로 인하여 이 영화가 출시되었던 해에, 영화를 감상한 브레쥐네프가 감독을 향한 비난이나 쓴소리를 쏟아내지 않고, 오히려 영화 속 일화를 나름 ‘반면교사’ 삼아 ‘소비에트 중흥기’를 건설하자는 연설을 외쳤는지도 모르겠다. 1981년에 개최된 제26차 소비에트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브레쥐네프는 라쟈노프 감독의 ‘운명의 아이러니’를 예시로 들어 다음과 같이 소비에트 도시 건설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 연설한 바 있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아름다움과 훌륭한 취향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올림픽 경기장, 그리고 과거의 걸작을 새롭게 탄생시킨 모스크바의 몇몇 거주지, 레닌그라드의 새로운 건축 앙상블, 알마타와 빌뉴스, 나보이와 기타 다른 도시의 새로운 건축물들은 모두 하나같이 우리의 자랑거리입니다. 그렇지만 도시건설은 여전히 거대한 예술적 표현성과 다양성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운명의 아이러니 속) 영화 주인공이 겪은 이야기에서처럼 운명의 아이러니에 의해 다른 도시에 가게 되었을 때, 그곳에서 자신의 집이나 아파트를 다른 것들과 구분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지는 일이 없도록 말입니다.”

적어도 현대 모스크바 거리를 기준으로 봤을 때, 아마도 브레쥐네프의 바램은 어느 정도 현실화 된 것 같다. 여전히 모스크바 외곽에는 벽돌색 타일, 하늘색 타일을 붙인 고층아파트와 스탈린 양식의 저층 주택들이 눈에 띄지만, 도심쪽에는 그야말로 형형색색의 개성을 지닌 다양한 건축물들이 조명과 더불어 과거와 모스크바 곳곳을 장식하며 모스크바의 과거와 현재를 반추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스크바와 페테르부르크 외곽은 여전히 비슷비슷한 무채색의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아마도 더 이상 그 어떤 제냐도 모스크바의 건설자 거리에 위치한 어느 아파트의 키를 페테르부르크 건설자 거리에 있는 아파트 자물통 속에 자연스럽게 꽂을 수 없을 정도로, 두 도시의 모습은 그야말로 변해도 한참 변했다. 과연 10년 후에 이들 두 도시는 또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까...? 10년쯤 후에는 두 도시 모습이 또 어떻게 달라져있을 지 한 번씩 주기적으로 체크해보는 것도 러시아를 대표하는 두 도시의 발전상과 역사를 짚어보는데 분명 도움이 될 것으로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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