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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문화로(文化路)
제목소츠 아티스트 A. 코솔라포프에 대하여
분류회화
국가 러시아
날짜2020-07-16
조회수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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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 양식과 결별하고 고전적 양식을 따랐던 소비에트 리얼리즘과 진보적 양식을 끊임없이 개발해왔던 포스트모더니즘 사이에서 탄생한 소츠 아트(Соц-Арт)는 블라디미르 파페르늬(В. Паперныи)̆가 비탈리 코마르(В. Комар), 알렉산드르 멜라미드(А. Меламид)의 작품을 ‘소비에트식 팝아트(советский поп-арт)’로 규정하면서부터 그 역사를 시작했다. 러시아 미술사에 새로운 경향을 탄생시킨 주역 코마르는 소츠 아트라는 용어가 탄생된 역사적 순간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바직 파페르늬가 소츠 아트 작품을 처음 본 1972년, 우리 스튜디오에 들러 ‘이는 소비에트식 팝아트이며, 우리 모두는 이를 오랫동안 기다려왔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소츠 아트를 단순히 상품 광고가 아닌 이데올로기의 선전, 즉 ‘소비에트식 팝아트’라는 의미로 이해했습니다. 우리는 앉아서 이런 대화들을 나누었고, 새로운 예술 양식에 이름을 붙이기 위해 함께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공산주의 예술이라는 의미에서 콤아트(комарт)를 제안했던 것 같습니다.” 

1972년, 코마르와 멜라미드가 모스크바의 어느 아파트에서 ‘소비에트 팝아트’라는 주제로 처음 전시회를 개최한 이후, ‘소츠 아트라는 용어가 탄생되었고, 이는 곧 예술 용어 사전에 수록되었으며, 소비에트 예술계의 새로운 현상’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 시기부터는 수많은 소츠 아티스트들이 탄생했는데, 알렉산드르 코솔라포프(А. Косолапов), 드미트리 프리고프(Д. Пригов), 로스티슬라프 레베데프(Р. Лебедев), 레오니드 소코프(Л. Соков), 보리스 오를로프(Б. Орлов) 등은 1970-1990년대를 대표하는 소츠 아티스트들이다. 그중 코솔라포프는 <레닌-코카콜라Lenin-Coca-Cola>(1982), <말보로-말레비치Малевич-Мальборо>(1985)와 같은 유명 작품들을 남겨 현존하는 세계 100대 화가 목록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알렉산드르 코솔라포프>

알렉산드르 코솔라포프는 소련이 나치의 침공에 맞서 대조국전쟁을 치르고 있었던 1943년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내내 모스크바에서 성장한 그는 1950년, 소련 미술아카데미 산하 리쩨이에 입학해 1961년까지 미술을 공부했다. 그가 오랜 시간 미술 연구와 창작을 함께 했던 예술비평가 예브게니 바라바노프(Е. Барабанов), 전후 러시아 비공식 회화의 선두주자 레오니드 소코프, 블라디미르 얀킬레프스키(В. Янкилевскии) 등은 그가 유년 시절 리쩨이에 만난 동료들이었다. 졸업 후인 1962년, 코솔라포프는 당시에도 징병제를 운영하고 있던 소련 정부의 부름을 받고 군대에 입대했고, 군복무를 마치고 난 1968년에는 다시금 그림 공부를 이어가기 위해 모스크바 스트로가노프 산업미술학교의 동상 조각 학부에 들어갔다. 그런데 코솔라포프가 예술가의 길을 가고자 선택했던 이 학교는 소련 사회에서도 가장 이데올로기적 성향이 강한 예술학교 중 하나였다. 그곳은 정부의 요구대로 소비에트 리얼리즘 시스템을 성실히 지탱해줄 화가들이나 디자이너들을 양성하는 곳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이 학교 출신 화가들은 대체로 안정적인 수입을 보장받았다고 하는데, 이는 학교가 지향했던 교육 방식이 화가의 개인적 이념이나 예술적 실천, 성취 등과는 별개로 소비에트 국가를 위한 충직한 일꾼으로서 정치 참여적 미술 작품들을 생산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자신만의 창작세계를 구축하는 대신 국가와 사회가 요구하는 사회주의 미술의 테두리 안에서 작품 활동을 이어가며 생계를 유지했다. 이 시기 코솔라포프가 교제했던 친구들 중 유명 인사로는 쇼스타코비치(Д. Шостакович), 불가코프(М. Булгаков), 타라소프(А. Тарасов) 등 모스크바 시내를 장식하는 많은 기념비들을 작업하며 지금까지도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게오르기 프란굴랸(Г. Франгулян), 소츠 아트라는 독자적 양식을 탄생시킨 코마르와 멜라미드, 오를로프 등이 있다. 

한편 당시 그를 지도했던 스승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 미하일 라리오노프(М. Ларионов), 나탈리아 곤차로바(Н. Гончарова)와 두터운 친분관계를 맺고 있던 사울 라비노비치(С. Рабинович)였다. 1927년부터 1939년까지 약 12년 간 프랑스에서 활동한 경험이 있던 라비노비치는 앙투안 부르델(Antoine Bourdelle), 샤를 데스피오(Charles Despiau)와 같은 로뎅(Auguste Rodin)의 제자들과 함께 작업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이처럼 많은 해외 활동 경험을 가진 스승을 만난 덕분일까. 코솔라포프는 일찍이 유럽 및 미국 건축사, 회화사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다. 또한 그가 얻은 것은 단지 지식뿐만이 아니었다. 세계 미술계의 어제와 오늘, 흐름과 동향을 이해한 그는 당시 국제 예술 활동의 중요성을 인식했던 소수의 소비에트 화가들 중 한 명이 되었다. 스승의 곁을 떠난 후, 그는 1975년까지 소련 조각가 예술 재단에서 공원 조각 디자인 업무를 담당했으나, 이 시기에 그는 서구 현대미술을 공부했고, 미국 예술잡지들을 탐독했다. 외국서적 전문 도서관에서 예술비평 잡지 읽기에 몰두했으며, 트레챠코프 갤러리를 찾아 러시아 아방가르드를 섭렵했다. 이와 같은 현대 미술 공부는 그때까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테두리 안에서 맴돌고 있던 코솔라포프의 창작 세계에 강력한 자극제가 되었다.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반,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작업과 소비에트 예술가들과의 협력 작업을 동시에 진행했다. 1969년부터 1971년까지 스트로가노프 미술학교 재학 시절부터 동료였던 소코프, 오를로프와 함께 작업실을 공유하며 활동을 전개했다. 이들은 당이 주도하는 조직에 가담하지 않은 채 조각 언어를 통한 예술적 아이디어를 구상했으며, 점차 소련 비공식 미술계의 대표화가들로 자리매김해갔다. 이 시기에 코솔라포프가 남긴 작품들로는 <고기분쇄기Мясорубка>(1972), <오로라호Аврора>(1974), <카즈벡-북쪽-파도Казбек-Север-Прибой>(1973) 등이 있다.




<고기 분쇄기, 1972 (左) / 카즈벡-북쪽-파도, 1973 (右)>

1973년에는 코솔라포프가 본인 삶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꼽는 일이 일어났다. 바로 코마르와 멜라미드의 <소츠 아트> 전시회에 작가로서 참여하게 된 일이었다. 코마르와 멜라미드는 1967년 <파랑새> 카페에서 회고주의전을, 1972년에는 모스크바의 이즈마일로프스키 공원에서 <소츠 아트> 전시회를 개최한 바 있는 소츠 아트의 선두주자들이었다. 이 두 차례의 전시회를 통해 그들은 대중에게 점차 인지도를 쌓아가고 있었지만, <소츠 아트> 전시는 그들로 하여금 소비에트 예술가 협회로부터 사회주의 리얼리즘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게 된 원인으로 작용했다. 결국 그들은 러시아 당국에 의해 활동 중지 명령을 당했고, 비공식 미술가 그룹에 합류해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73년, 코마르와 멜라미드는 또 한 번의 <소츠 아트> 전시를 기획했다. 그리고 여기에 코솔라포프가 초대되었다. 비록 전시장 섭외에 실패해 73년 전시회는 무산되고 말았지만, 그 준비 과정에서 코솔라포프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적 표현방식과 팝아트를 결합하여 새로운 예술 양식을 탄생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했다. 

코솔라포프는 미국으로 활동의 근거지를 옮기기 전까지(1972~1974년) 개인 활동에 전념했다. 그의 작업 방식은 서구 팝아트를 기반으로 한 그만의 예술적 실험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첫 번째 개인전은 1974년 모스크바 ‘쿠즈네츠키 모스트’ 근처에 위치한 전시장에서 개최되었다. 특히나 이 시기는 코솔라포프가 화가로서의 독자적 예술성을 본격적으로 형성해 가기 시작할 무렵이었는데, 그는 뒤샹(Marcel Duchamp)과 워홀(Andy Warhol)로 대표되는 다다와 팝아트에 관심을 가졌고, 특히 뉴욕 미술가들과 행보를 같이 했던 스웨덴 팝 아티스트 클래스 올덴버그(Claes Oldenburg)의 정신을 이어받아 ‘대량생산’, ‘패스트푸드 문화’, ‘평범한 대상의 신격화’, ‘신격화 된 대상의 탈신격화’라는 이슈들을 고민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그가 내놓은 작품들로는 판지와 합판을 활용한 <공부해라, 아들아Учись сынок>(1973)을 비롯해, <오로라호Аврора>(1973), <코카콜라-크바스Кока-кола-квас>(1975) 등이 있다. (이 작품들은 1990년 개최된 <다른 예술. 모스크바 1956-1976(Другое искусство. Москва 1956-1976)> 전시회를 통해 러시아인들에게도 공개되었다.)



<공부해라 아들아, 1973 (左) / 코카콜라-크바스, 1975 (右)>

이처럼 코솔라포프의 예술적 지향성이 변화했음에도, 소련 사회는 그에게 혁명 지도자, 집단 농장, 노동자와 노동 영웅들의 기념비 조각을 끊임없이 요구했고, 결국 그는 팝아트의 고향이자 많은 소비에트 예술가들이 망명지로 선택했던 뉴욕으로 이주했다. 1975년의 일이었다. 코솔라포프는 러시아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고국을 떠날 당시를 회상하며 “소련에서는 개인의 예술적 비전을 생각하거나 실현할 수 있다는 희망을 지니기 어려웠습니다. 나는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로 출국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머물지 않고 미국으로 향했습니다. 미국에서는 나를 깨닫고, 내 예술이 나가야할 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라고 말한 바 있다.(VOGUE, 2017년 11월 27일 인터뷰 中) 이렇게 예술의 자유를 찾아 코솔라포프는 가족들과 함께 미국으로 향했다. 생물학자였던 그의 아내는 곧 일자리를 찾았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다. 코솔라포프는 아내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자신의 시간을 오롯이 예술 창작에 할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생활고에 시달리지 않았다고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가 소비에트 사회보다 자유롭다는 사실을 몸소 체험했으나, 자기 전공 분야로는 미국 시장에서 버텨내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전략적으로 전공분야가 아닌 다른 분야로 창작 방향을 완전히 전환해야 함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훗날 그는 “미국 정착기, 모든 면에서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우선, 나는 영어를 몰랐습니다. 지금도 미국에서 42년을 살고 있지만 나의 영어 실력은 보잘 것 없습니다(картонный). 둘째, 미국에서 동상 조각가가 개인 창작 활동을 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코솔라포프는 자신의 전공인 동상 제작이 미국 시장에서 수요가 적은 장르임을 곧 파악했고, 그림을 그리기로 결정했다. 그는 모스크바를 떠나기 직전, 코마르, 멜라미드와 함께 했던 새로운 예술적 경험을 살려 그간 관심분야에 머물고 있던 팝아트를 업으로 삼아 새로운 예술가 인생을 개척하기로 마음먹었다. 코솔라포프는 대기업 브랜드의 광고 포스터가 창출해내는 시각적 효과를 면밀히 분석하기 시작했고, 얼마 후 냉전기 러시아를 대표하는 콜라주 <레닌-코카콜라>를 탄생시켰다. 직사각형 붉은 캔버스에 잡지에서 오려낸 레닌의 초상화가 얹어졌고, 코카콜라 회사 로고와 함께 <It’s the Real Thing>이라는 코카콜라의 표어가 붙여졌다.

열정과 권력의 색 ‘빨강’은 소비에트 연방 국기에 채색되었던 색이자 사회주의 이념을 상징하는 색이다. 괴테(J.W. Goethe)가 빨강을 ‘색채의 왕’이라 부른 이유는 열정, 권위, 공포, 위험, 사랑, 흥분 등 여러 가지 추상적인 연상을 유도하는 이 색채의 기능 때문일 것이다. 이와 더불어 붉은 색은 ‘노동자의 피와 땀’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이는 사회주의 국가 전반에서 좌익 이념을 표현하는 색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빨강색이 이와는 전혀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용된 사례가 있었다. 바로 코카콜라의 로고였다. 톡 쏘는 시원한 맛이 코카콜라의 미각적 자극으로 우리에게 기억된다면, 시각적으로는 곡선형의 병 모양과 빨간색 로고가 선명한 이미지로 우리를 자극한다. 수많은 음료들이 놓여있는 마트 진열대에서 코카콜라가 유독 소비자의 눈에 띠는 이유는 바로 강렬함을 품은 코카콜라의 컬러 때문일 수 있으면, 코카콜라 회사 역시 제품이 세계 시장에 소개된 즈음은 1920년대 이후로 지금껏 이를 더욱 각인시키기 위해 다양한 마케팅을 진행해왔다. 코카콜라 디자인 총괄 담당자 제임스 서머빌(James Sommerville) 부사장이 “맛 그 자체가 코카콜라의 첫 번째 비밀 레시피라면, 코카콜라 레드는 두 번째 비밀 레시피”라고 말한 바 있듯이, 미국 음료를 대표하는 코카콜라의 빨강색은 자본주의 미국, 미국 사람들의 식음료 문화를 상징하는 색이다. 흥미로운 점은, 코솔라포프는 <레닌- 코카콜라>에서 사회주의 선전선동의 색과 자본주의 대표기업의 색으로서 빨강색이 지니는 양면적 상징성을 하나의 캔버스 안에 담아냈다는 것이다. 또한 소비에트 선전 포스터에 빈번히 등장했던 지도자로서의 레닌과 나란히 배치된 코카콜라의 광고 문구, 이 결합은 조화롭지 못한 이미지의 중첩이며, 대립하는 체제의 상징적 의미는 붉은색 화폭 안에서 더욱 강렬한 인상을 전달한다. 


<레닌-코카콜라, 1982>

1981년부터 1986년까지 코솔라포프는 우르반(В. Урбан), 투피칀(В. Тупицын) 등과 함께 예술가 그룹 ‘카지미르의 열정(Страсти по Казимиру)’을 조직해 활동했다. 이 그룹은 1982년 뉴욕 첼시의 더 키친(The Kitchen)에서 <소련 공산당 제27차 당대회> 퍼포먼스 행사를 개최했는데, 코솔라포프는 퍼포먼스의 일환으로 <레닌-코카콜라>를 도시 곳곳에 장식했다. 또한 그는 1979년부터 셸코프스키(И. Шелковскии)̆, 시도로프(А. Сидоров)를 도와 현대 비공식 예술, 문학, 철학을 다루었던 <아-야(А-Я)> 잡지의 뉴욕대표이자 공동 편집자로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그는 이 잡지를 통해 <레닌-코카콜라> 엽서를 발행하기도 했다. 이러한 연유로 코솔라포프는 코카콜라 회사와 저작권 관련 법적 문제를 겪기도 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무엇보다 이 작품을 바라보는 미국의 시선이 러시아의 시선과 전혀 달랐다는 점이다. 대중문화와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패러디한 이 그림은 이데올로기 선전물에 지친 소비에트인들에게는 소비에트 사회 비판의 메시지로 읽혔다면, 코카콜라 측은 코솔라포프의 의도를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선전하려는 정치적 행위로 보았다. 코솔라포프는 코카콜라를 이용해 소비에트 사상을 선전한다는 비판에 대해 자본주의 상품을 광고 한 사람은 자신이 아닌 바로 레닌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그와 동시에 코카콜라 측은 화가가 코카콜라 고유의 로고를 불법 도용한 것으로 간주했고, 저작권을 침해했다는 이유로 고발조치를 취했다. 이 분쟁이 실제 법정 다툼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이로 인해 뉴욕 타임스 스퀘어에 배너를 만들고자 했던 그의 기획은 좌절되고 말았다. 그러나 2017년 코솔라포프는 이 논란이 자신에게 특별한 경험을 선사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그가 말한 특별한 경험이란 바로 <아-야> 잡지를 통해 엽서가 발행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 대통령 고문이 <레닌-코카콜라> 엽서를 백악관으로 가져가 레이건 대통령 책상위에 놓아두었던 일화였다. 이와 같은 에피소드를 볼 때, 코솔라포프의 <레닌-코카콜라>는 1980년대 초반 미술계뿐만 아니라 미국 사회 전반에서 큰 이슈가 되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코솔라포프는 그 후로도 ‘대립되는 이미지의 극적 결합’, ‘신화적 이미지의 탈신화화’라는 작업 방식을 꾸준히 고수하며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창작 세계를 넓혀 갔다. 그가 남긴 작품 중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중첩을 드러내는 그림들로는 <말레비치-말보로>, <Thwip!Твип!>(1985), <몰로토프의 칵테일Коктейль Молотова>(1990) 등이 있으며, 이 작품들 역시 엽서, 기념품, 포스터 등으로 제작되어 판매되기도 했다.


   
                                    <말레비치 말보로, 1985 (左) / 몰로토프의 칵테일, 1990 (右)>


<맥레닌Мак Ленин>(1991)이 창작되었던 1991년, 오랫동안 철의 장막 속에 머물고 있던 소련은 해체되기에 이르렀고, 서방 세계와의 교류를 시작했다. 코솔라포프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러시아와 미국을 오가며 지속적인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가장 최근 개최된 전시로는 2017년 뉴욕, 베를린, 모스크바 전시가 있으며, 그는 구 냉전체제의 양 극단에 위치했던 국가들을 종횡무진 누비며 오늘날 세계 화단에서 소츠 아트를 대표하는 화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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