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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문화로(文化路)
제목'유로비전' 속 R-POP을 찾아서 (1)
분류대중문화
국가 러시아
날짜2020-07-01
조회수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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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비전 송 콘테스트(Eurovision Song Contest; ESC)’는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유럽방송연합회(European Broadcasting Union; EBU)의 회원국들을 대표하는 가수들이 매년 5월 한 데 모여 노래와 퍼포먼스로 자신들만의 끼를 표출하며 기량을 겨루는 가요제 겸 음악축제다.

콘테스트 명칭인 ‘유로비전(Eurovision)’은 1951년 TV 평론가였던 조지 캠피(George Campey)가 영국의 지역 일간지 ‘이브닝 스탠더드(Evening Standard)’에서 처음으로 언급하였다. 원래 유로비전은 유럽의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 간 네트워크를 일컫는 말이었다. 이후 유럽방송연맹에서 프로그램위원회장을 맡고 있던 마르셀 베장송(Marcel Bezençon)이 이탈리아 가요제 ‘산레모 음악 페스티벌(Sanremo Music Festival)’을 모델로 삼아 제안한 유럽 국가들만의 노래 경연대회가 ‘유로비전’이라는 이름을 입게 되었다. 유럽 국가 간의 경쟁을 포맷으로 각 참가국을 대표하는 가수들의 공연이 예선과 결선에 걸쳐 이뤄지고 심사위원과 시청자투표에 따라 순위를 가르게 된다. 우승자를 배출한 나라는 다음 해 가요제의 주체국이 된다.

1956년 스위스 루가노(Lugano)에서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의 첫 시작을 알린 뒤 2019년까지 장장 64년 동안 매해 열리며 유럽 최대의,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가요제로 자리매김하였다. EBU 회원국은 물론이고, 미국, 캐나다, 뉴질랜드 및 중국과 같은 비유럽권 국가에서도 유로비전 가요제를 방송하고 있다. 2000년부터는 인터넷으로도 생중계되고 있다. 그만큼 세계인의 관심과 주목을 받고 있는 가요제 겸 축제인 셈이다. 유럽대륙의 규모 있는 행사답게 스타들의 등용문이자 실력 있는 쟁쟁한 아티스트들을 배출해낸다. 스웨덴 그룹 아바(ABBA)와 스위스 출신 셀린 디온(Celine Dion)도 유로비전 출신들로 각각 1974년, 1988년 우승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2015년부터 사용된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 공식 로고.
가운데 하트 문양에 당해 연도 개최국 국기가 배치된다.>
(출처: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 공식홈페이지)


첫 대회에서는 총 7개국이 참가하여 각각 2곡씩, 총 14곡으로 경쟁을 펼쳤다. 이듬해부터 각 나라에서 한 곡만 출전하도록 규정을 바꿨다. 그 이후 가요제에 참여하는 국가는 꾸준히 알음알음 증가해왔고, 가장 최근에 개최되었던 2019년에는 총 41개국이 참가하게 된다.

러시아는 1994년에 헝가리, 폴란드, 에스토니아 등 여타의 동유럽 국가들과 함께 유로비전에 합류했다. 그해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Dublin)에서 열린 가요제에 러시아 대표로 ‘유디트(Judith)’라는 가명을 사용한 마리야 카츠(Мария Кац, 1973~)가 참가했다. 그녀는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의 ‘유디트’ 이미지에 대한 관심이 커지던 당시 1990년대 유럽의 상황을 십분 활용하여 유로비전 출전 콘셉트를 클림트의 그림 속 여인, 유디트로 설정하게 된다.

그녀는 망토가 붙어있는 옷으로 소소하면서도 여성의 곡선을 살린 퍼포먼스를 펼치며 직접 작사한 발라드곡 <영원한 방랑자(Вечный странник)>를 선보였다. 3분가량 되는 길지 않은 노래에는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는 여성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안정적인 베이스 기타의 선율에 담백하면서도 청량한 그녀의 목소리가 수 놓인다. 그녀는 9위를 차지하는, 첫 대회치고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둔다. 산뜻한 멜로디와 시원하게 뻗어 나가는 그녀의 목소리가 비러시아어권 시청자들에게도 어필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1994년 러시아 대표로 유로비전에 참가한 마리야 카츠>

1994년 당시는 최초의 공산국가이자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겨루는 강국으로 군림해왔던 소련이 해체한 지 3년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으로 붕괴로 인한 충격과 혼란의 여파가 아직 가시지 않은 시기였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러시아인들에게 1990년대는 암흑기로 기억된다. 공산권 ‘빅브라더’였던 소련은 루블화의 폭락과 외채 증가로 경제 침체는 물론 생계형 매춘이 성행하고 치안이 불안정한 나라가 되어 버렸다.

마리아 카츠는 유로비전 참가를 회고하는 인터뷰에서도 당시 상당한 재정 투자가 필요했고, 이로 인한 어려움에 대해 토로하기도 했었다. 이런 어려운 시기 국제무대에서 러시아 노래가 울려 퍼진 것이다. 러시아가 유로비전에 참가한 첫해라 이 가요제 자체에 대한 자국 내 호응이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전 세계를 향해 흘러나오는 마리아 카츠의 울림은 러시아인에게 위로와 위안을 선사했을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유로비전 첫 참가를 뒤로하고 1995년 필립 키르코로프(Филипп Киркоров, 1967~)와 1997년 알라 푸가쵸바(Алла Пугачёва, 1949~)의 참가를 계기로 러시아 본토에서 유로비전 가요제가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다.

필립 키르코로프는 불가리아인 아버지와 러시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필립은 불가리아 바르나(Varna)에서 태어나 줄곧 거기서 살았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 하나로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모스크바로 이주하게 된다. 그는 기티스(ГИТИС, 러시아 공연예술대학) 입학시험에서 낙방하고 러시아 3대 음악원 중 하나인 그네신 국립 음악대학(Российская Академия музыки им. Гнесиных)에서 음악교육을 받으며 예술공연 관련 커리어를 쌓아 갔다. 실은 필립 키르코로프의 아버지도 불가리아의 유명 가수로 그는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의 공연을 따라다니면서 무대에 잠깐씩 등장하기도 했단다. 그가 가수의 꿈을 키우고 음악을 공부한 데에는 타고난 자질도 있었겠지만 음악을 사랑하고 즐기는 이러한 가족 환경도 작용했을 터이다.

필립 키르코로프는 1985년 소련 중앙텔레비전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쉬레 크루그(Шире круг)’에 ‘알료샤(Алёша)’라는 노래를 불가리아어로 부르며 첫 데뷔를 한다. 미국의 그래미 어워즈(Grammy Awards)에 해당하는 러시아 대중음악 분야 음악상 ‘오바찌야(Овация)’에서 1993년, 1994년에 잇달아 ‘올해의 가수상’을, 1995년에는 ‘최고의 가수상’ 수상하며 러시아에서 가수로서의 입지를 다지게 된다. 


<1995년 유로비전에서 공연하는 필립 키르코로프>

그는 유로비전 대회 시작을 불과 2주 앞두고 본인의 출전 소식을 듣게 된다. 당시 러시아 방송관계자들은 유로비전으로 보낼 합당한 가수를 찾을 수 없어 고민하고 있던 찰나 실력도 있고 유럽으로 갈 수 있는 자금 조달이 가능한 필립 키르코로프에게 가요제 참가를 의뢰한 것이다. 어안이 벙벙했을 것이다. 유럽을 대상으로 하는, 전 세계인들이 지켜보는 무대를 한 달도 아닌 2주 만에 준비해야 한다니... 열흘 정도 시간을 앞둔 시점에 노래를, 그것도 좋은 노래를 만들어 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결국 필립 키르코로프는 그의 표현에 따르면 ‘특별히 좋지 않은 노래’인 <화산을 위한 자장가(Колыбельная для вулкана)>로 무대에 선다. 그의 노래는 20개 국가가 경쟁하는 본선에서 17위를 하며 하위권에 머무르게 된다. 필립은 콘테스트 참가 소식을 접하고 공연을 준비하면서 상위권에 들 수 없다는 걸 일찌감치 알았다. 그는 순위권에 들어 수상을 노렸다기보다, 러시아를 대표하여 국제무대에서 그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인정받기 위해서 유로비전 참가를 결정했다고 한다.

필립 키르코로프의 참가 과정을 옆에서 지켜봤던 그의 전(前) 부인인 알라 푸가쵸바는 “그가 승리하지 못한다면 내가 유로비전에 나가서 노래란 어떻게 하는 건지 직접 보여주겠다”고 호언장담한 바 있다. 더블린(Dublin)에서 개최된 유로비전 가요제에 필립 키르코로프와 동행했던 알라 푸가쵸바는 그즈음에 ‘프리마돈나(Prima donna)’라는 노래를 작사·작곡한다. 그녀는 그 곡을 만들면서 남자가수가 부르길 내심 염두에 뒀지만 결국 그녀의 노래가 되었다. 정말로 2년 뒤 알라 푸가쵸바는 ‘프리마돈나’라는 곡으로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 참가한다. 그녀 또한 15위에 그치는, 그다지 눈에 띄는 활약상을 보이진 못했다. 물론 국제무대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세대 차이라고 해야 하나, 그녀의 음악과 스타일이 앞선 필립의 무대와 마찬가지로 유로비전 가요제 주 시청층과 공감대를 형성하기엔 무리였나보다. 


<1997년 유로비전 무대에 선 알라 푸가쵸바>

1977년부터 솔로 가수로서 커리어를 쌓아왔던 알라 푸가쵸바는 더 이상 가수로서 예전처럼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진 않지만, 오디션 프로그램의 심사위원을 맡거나 TV 프로그램의 게스트로 브라운관을 통해 얼굴을 꾸준히 비치는 등 러시아 방송계에서 현재까지도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2012년에 언론매체에서 선정한 <가장 영향력 있는 러시아 여성 100인>에 정치인 발렌티나 마트비엔코(Валентина Матвиенко)에 이어 2위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사실 알라 푸가쵸바의 <백만 송이 장미(Миллион алых роз)>는 심수봉이 우리말로 번안해 부르며 한국에서 큰 사랑을 받았다. 설령 ‘알라 푸가쵸바’라는 러시아 여가수를 모르는 한국인이더라도 이 노래의 멜로디는 낯설지 않을 것이다. 드라마 ‘모래시계’ OST였던 <백학(Журавли)>를 불렀던 드미트리 흐보로스톱스키(Дмитрий Хворостовский)와 마찬가지로 알게 모르게 은연중에 한국인이 알고 있는 러시아 가수이지 않을까 싶다.

참고로 알라 푸가쵸바의 개인사를 덧붙이자면, 네 번째 남편이었던 필립 키르코로프와의 11년 결혼생활의 종지부를 찍고 2011년 27세 연하의 방송인 막심 갈킨(Максим Галкин)과 새 가정을 꾸린다. 현재 그녀는 대리모를 통해 얻은 쌍둥이 딸, 아들과 함께 살고 있다.

이처럼 러시아는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가 시작된 지 40여 년이 지나고 난 1990년대에 후발주자로 참가하기 시작하였다. 유로비전 첫 개최가 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았던 냉전 시기 문화교류를 통한 유럽인들의 화합을 도모했던 것처럼 유로비전 가요제 내 러시아의 데뷔와 참가 또한 소련의 붕괴와 함께 폐쇄적인 국가 이미지에서 벗어나 세계인들과 조화롭게 어우러져 왕래하고 소통하는 길을 닦았다는 점에서 나름의 문화적 전환점이 아니었나 싶다. 20세기 후반 유로비전 속 러시아 가요는 전반적으로 사골국같이 노래의 풍미가 깊고 진한 느낌을 준다. 더군다나 1990년대 후반까지는 자국 언어로 노래를 불러야 하는 규정이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만의 음악적 색채가 더욱 돋보였던 것 같다. 그렇다면 21세기 유로비전에 참가하는 러시아 가수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어떤 노래를 부르는지 다음 편에서 계속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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