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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트페테르부르크에 ‘에르미타주 미술관’과 ‘러시아 미술관’이 있다면, 모스크바에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과 ‘푸시킨 조형미술관’이 있다. 참으로 묘하게도 두 도시에 위치한 미술관의 특징이 상당히 닮아있다. 하나는 상당히 러시아적인 미술관, 다른 하나는 상당히 서유럽적인 화풍의 작품들을 모아놓은 미술관이다. 굳이 강조하지 않더라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러시아 미술관’과 모스크바의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이 전자에 해당한다면, ‘에르미타주 미술관’과 ‘푸시킨 조형미술관’은 후자에 속한다는 점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들 미술관 중 다소 특이한 경력을 가지고 있는 미술관이 있으니, 바로 ‘푸시킨 조형미술관’이다. 그 특이한 경력은 바로 ‘모사품’들로 채워진 미술관이라는 오명 아닌 오명이다. 한 때 관람객들 사이에서 ‘푸시킨 조형미술관’에 가면 서유럽에서 알아주는 웬만한 작품을 모두 감상할 수 있으나, 진품의 감동은 없고 가품을 통해 전달되는 묘한 느낌만 있을 뿐이라는 말이 돌 정도로, 한 때 복제된 서유럽 조각 작품들이 ‘푸시킨 조형미술관’의 대표 전시품으로 손꼽힌 적이 있었다.
푸시킨 조형미술관은 러시아를 대표하는 시인 마리나 츠베타예바의 아버지인 이반 츠베타예프(Иван Владимирович Цветаев) 교수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모스크바국립대 재직 중이었던 츠베타예프 교수는 교육 프로그램을 다양화시키고 발전시키기 위해 박물관이나 미술관 건립의 필요성을 역설했으며, 당시 뜻을 함께하던 귀족 및 상인들과 힘을 합쳐 미술관 건립을 추진하게 된다. 츠베타예프는 당시 해외로 나가서 미켈란젤로와 다빈치 작품의 실물을 접할 기회가 없었던 젊은 화가들을 위해 모종의 특별한 공간을 만들고자 했고, 그것이 바로 푸시킨 조형미술관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어찌 보면 푸시킨 조형미술관의 전신은 모스크바국립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술관 설립에 대한 청사진부터 시작하여 1대 관장을 지낸 츠베타예프 교수가 모스크바국립대 소속이었으며, 미술관 설립에 관한 그의 아이디어 역시 자신이 재직하던 모스크바대 미술학부 학생들에게 더 나은 교육 환경을 제공해주고픈 열망에서 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푸시킨 조형미술관 초기 전시품 일부는 모스크바국립대 소유의 작품으로 구성되었으며, 개관식 당시 명칭이었던 ‘모스크바왕립대 산하 알렉산더 3세 황제 기념 조형미술관’에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이, ‘모스크바국립대 산하’ 미술관으로 그 역사가 시작되었기에 더욱 그러하다.
<푸시킨 조형미술관 1대 관장 이반 츠베타예프 교수>

<푸시킨 조형미술관 1층 로비에 위치한 조각품 전시실>
물론 이후 피카소와 고흐 작품의 원본을 비롯하여, 혁명 이후 슈킨의 저택에 보관되어 있던 개인소장품이 모두 푸시킨 조형미술관에 배치되면서 원본의 숫자가 점진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동양학자 골레니쉐프(В. Голенищев)는 이집트 컬렉션을 기증했고, 이탈리아 회화 작품 및 18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는 예술품은 외교관 쇼키니(М.Щекиный)의 기증으로 채워졌다. 그 외에도 엘리자베타 표도로브나 공작부인은 르네상스 후기에서 17세기를 풍미한 이탈리아 조각품을 선뜻 기증했으며, 고고학자 보브린스킨(А. Бобринский)는 18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는 프랑스 회화작품을 기증했다. 그 외에도 혁명이후 역사박물관 및 트레티야코프 갤러리에 소장되어 있던 회화 작품이 푸시킨 조형미술관으로 그 소속을 옮겼으며, 이렇게 모아진 회화 작품을 토대로 마침내 한 때 가품 조각들로 가득했던 푸시킨 조형미술관은 진품의 위용을 갖춘 미술관으로 거듭날 준비를 갖추게 되었고, 마침내 1948년 회화 전시실에 배치될 작품 컬렉션이 완성되었다. 현재 푸시킨 조형미술관 내 전시품 숫자는 약 67만점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1898년 8월, 장차 푸시킨 조형미술관으로 모습을 드러낼 건물의 초석을 놓는 착공식이 개최되면서 푸시킨 조형미술관의 역사가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후 무려 14년 동안 미술관 건물 공사가 진행되었으며, 마침내 1912년 5월 31일에 이르러 방문객을 위한 미술관 홀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미술관 명칭에 ‘푸시킨’이라는 이름이 들어온 것은 그 후로도 시간이 꽤 지난 1937년으로, 당시 푸시킨 사망 100주년을 기리며 미술관 명칭에 시인의 이름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니콜라이 2세를 비롯한 황실 일가족도 참여한 푸시킨 조형미술관 개관식 당시, 이반 츠베타예프의 첫째 딸 아나스타시야 츠베타예바는 다음과 같이 개관식의 감동을 술회한 바 있다.
“.. 잔잔한 기쁨이 넘치는 축제였다. 지금 이 순간, 이 강하디 강한 세계가 아빠에게 뭔가를 선물한 것이 아니라, 아빠가 우리 모두에게, 지금 여기 있는 모두에게, 전 러시아에게 그가 설립한 박물관을 선물로 주는 것이다...” (아나스타시야 츠베타예바)
한편 우리에게 더욱 친숙한 첫째 딸 마리나 츠예타예바는 특별히 실물 크기로 그대로 모사 제작되어 세워진 미켈란젤로의 위용에 주목하며 개관식 당일의 감동을 전한 바 있다.
“광활한 푸른 빛 하늘 하래 있는 하얀 박물관의 모습... 모든 것과 모든이들 위에 군림하는 하얀 계단의 모습. 그 계단의 우측으로, 마치 수호자처럼, 인간이 것이 아닌, 그렇다고 신의 것이라고도 할 수 없는, 가히 영웅적이라 할만한 크기의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마리나 츠베타예바)

<푸시킨 조형미술관 내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 실물 복제품>
주지하다시피, 다비드 상은 구약 성서 속 다윗이 돌멩이 하나로 골리앗을 물리치러 나가기 전의 모습을 형상화 한 것으로, 거대 권력에 맞서는 자유와 용기, 인간의 의지를 상징화 한 조각이다. 골리앗을 물리치러 나가기 전에 결전을 다짐했던 다윗은 작고 야무진 모습이었지만, 실제 조각을 통해 형상화 된 다윗의 모습은 마치 골리앗처럼 거대한 형상으로 다가온다. 이러한 다비드 상의 규모는 한편으로는 숭고미를 불러일으키지만, 다른 한편으로 웃지 못할 해프닝을 가져오기도 했다. 바로 영국 황실에 기증된 다비드 상을 둘러싼 에피소드로, 엄청난 규모의 다비드 상과 디테일에 놀란 여왕이 ‘무화과 잎’으로 다비드 상의 불경함을 가리라했다는 이야기이다. 그 후로도 다비드 상이 전시된 미술관에 여왕이 행차라도 한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미술관 관계자들은 재빠르게 다비드 상을 천으로 가리는 해프닝을 연출하곤 했다는 후문이다.
참, 푸시킨이 워낙 러시아를 대표하는 시인이자 작가이다보니, 이곳저곳에 푸시킨의 이름을 붙여놓은 곳이 많다. 특히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그가 지내던 저택이나 심지어 잠시 잠깐 머물러 집필했던 집에 이르기까지 소위 ‘푸시킨 박물관’이라는 표제로 통하는 수많은 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모스크바에 있는 푸시킨 조형미술관의 경우, 바로 인근에 위치해있는 또 다른 푸시킨 박물관으로 인하여 비전공자들과 관광객들에게 종종 혼란 아닌 혼란을 일으키곤 한다. 범인은 바로 푸시킨의 생애와 그의 창작 활동을 위주로 전시가 구성된 ‘푸시킨 문학박물관’이다. 원어로만 표기하자면 ‘푸시킨 박물관(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музей А.С. Пушкина)’이 되기 때문에 혼란은 더욱 가중된다. 덕분에 미술품을 보러왔다가 푸시킨의 생애와 그의 작품을 둘러볼 뜻밖의 기회를 접하기도 하고, 혹은 문학박물관을 방문하려다 애꿎은 미술작품만 잔뜩 감상하고 되돌아가는 웃지 못할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한다.
<푸시킨 (문학) 박물관 전경>

<푸시킨 조형미술관 전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