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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문화로(文化路)
제목지나이다 기삐우스 문학과 러시아 디아스포라
분류문학
국가 러시아
날짜2020-06-16
조회수6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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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문화에서 1890년경부터 1920년경까지 약 30여 년의 기간을 일반적으로 ‘러시아 문화의 르네상스’라고 불렀다. 이 시기에는 종교, 철학, 음악, 미술, 건축, 영화, 발레등과 같은 다양한 장르의 예술들과 인문학이 서로 밀접한 상호 연관을 맺고 있었다. 모더니즘적인 경향 속에서 러시아 문화의 르네상스 시대를 제일 먼저 열었던 인물들은 러시아의 상징주의자들이었는데, 그 중에서 드미트리 메레쥐콥스키(Д.С. Мережковский, 1865-1941)의 아내인 시인 지나이다 기삐우스(З.Н. Гиппиус, 1869-1945)는 파리에 있었던 러시아 망명공동체에서 두 가지 이유로 관심을 받았다. 첫 번째는 러시아를 떠나서 문학 활동을 한 작가들 중에서 시인들은 특정장르의 문학형식을 창조하는 작가들보다 왕성한 활동을 했는데, 그 중심에 디아스포라 상징주의 시인들이 있었다. 콘슨탄틴 발몬트(К.Д.Бальмонт, 1867-1942), 바체슬라프 이바노프(Вяч. Иванов, 1866-1949)와 함께 기삐우스도 그 상징주의 시인의 명단에 포함되었다. 두 번째는 부닌에 대한 영웅숭배적인 성향으로 인해서 주목을 받았다. 1933년 부닌이 러시아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을 때, 기삐우스는 부닌을 ‘망명한 러시아 수상’이라고 평가했다. 물론 기삐우스의 숭배를 넘어 부닌을 신성시하는 러시아 망명객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부닌을 ‘망명자들을 약속의 땅으로 되돌아가도록 이끌 러시아의 모세’로 불렀다.


<지나이다 기삐우스>

기삐우스와 상징주의

독일피가 흐르는 아버지와 예카테린부르크 경찰서장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기삐우스는 러시아문학사에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유명세를 떨쳤다. 첫 번째는 기삐우스의 상징주의 문학적 깊이와 그녀가 다루었던 독특한 주제이다. 프랑스 상징주의와 솔로비요프 철학의 영향을 받은 러시아 상징주의는 기삐우스의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작품으로 인하여 많이 발전했다. 나드손(С. Надсон)의 영향으로 가득 찬 기삐우스의 첫 번째 시들은 <북방통보>(Северный вестник)실렸다. 그리고 1895년 <북방통보>에 실린 기삐우스의 시들이 그녀에게 폭넓은 문학적 명성은 가져다주었는데, 이 결과로 동시대의 러시아 상징주의자들 사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 할 수 있었다. 기삐우스의 체계적이고 미학적인 특성이 잘 드러나는 시집 <광휘>(Сияние, 1938)에서 그녀는 자신의 시를 통해 색, 음성과 이미지 조합에 많은 관심을 쏟아, 영원한 우주의 신비와 고양된 차원으로 도약을 꿈꾸는 미래를 노래했다. 그리고 기삐우스의 문학적인 주제는 영혼에 대한 고양, 종교와 신에 대한 사랑과 헌신 등이었는데, 그녀는 이것을 통해 ‘예술은 단지 영혼으로 정화된 것만 담아야 한다’는 문학적 신념을 보여주었다. 그녀에게 문학은 심오한 영혼의 경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기삐우스는 창조적 예술에 대한 사회적, 이념적인 접근을 배격하고 범우주적인 문화, 영원한 미에 대한 탐구에 치중했다.


남편 드미트리 메레쥐콥스키

두 번째는 종교, 역사, 철학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가진 작가로, 러시아 디아스포라 사회에서 대표적인 지성으로 평가받았던 메레쥐콥스키와 부부였다는 것이다. 폐 질환으로 인해 기쁘우스는 어려서부터 정규적이고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주로 자연이 아름답고 공기가 좋은 얄타와 코카서스에서 어머니와 함께 지냈는데, 그 신선한 대기와 맑은 물로 유명한 그루지야의 바르조미(Боржоми)에서 기삐우스는 1889년에 메레쥐콥스키를 만나서 결혼했다. 이들 두 문학인들의 만남은 영적이고 창조적인 결합으로 평가받으면서, 부부의 인연은 52년 동안 지속되었다. 


<기삐우스의 남편 드미트리 메레쥐콥스키>


페테르부르크의 ‘종교-철학회’

세 번째는 ‘종교-철학회 설립’이다. 상징주의자들 중에서 메레쥐콥스키와 기삐우스는 러시아 사회에 확산되어 있었던 합리주의, 실증주의 철학, 마르크스주의 유물론 철학에서 벗어나 정교적인 관점에서 새로운 종교철학을 세워보려던 인물들이었다. 기삐우스는 20세기 초에 남편 메레쥐콥스키 및 20세기 최고의 비평가중 한명인 철학자 로자노프(В.В. Розанов, 1856-1916)등과 종교 및 철학 회의를 조직 했는데, 토론과 대화를 통해 러시아 정교회와 인텔리겐치아 사이에 존재했던 간극을 줄이는 것이 목적이었다. ‘종교-철학회’는 ‘신성 종무원’의 허락을 받아 1901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만들어졌다. 기삐우스는 ‘종교-철학회’의 종교잡지 <새로운 길>(Новый путь)의 편집자 중의 한 명으로 일했는데, 이 잡지는 ‘종교-철학회’의 회의록 역할 뿐만 아니라 ‘종교-철학회’의 사상적 경향을 드러내는 논문을 간행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종교-철학회’의 만남이 잦을수록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메레쥐콥스키의 아파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상징주의자와 종교 철학자들의 만남의 장소가 되었다는 것이다.

<기삐우스와 메레쥐콥스키>


혁명, 그리고 러시아로부터의 탈출

기삐우스는 1914년 11월 ‘종교-철학회’에서 낭독한 글에서 전쟁은 인류를 멸시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점차로 기삐우스는 ‘정직한 혁명’만이 진정으로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다른 상징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기삐우스는 1917년 2월 혁명 속에서 러시아 민중을 정화하고 러시아에서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위대한 영적인 격변을 보았다. 기삐우스는 이러한 2월 혁명을 통해서 그동안 독재 정권과 부패한 교회에 의해 억압된 인권과 자유로운 종교의식의 해방을 기원했다. 그래서 기삐우스는 2월 혁명의 결과로 형성된 임시정부가 친밀하게 느끼고 있었고 실제로 일부 장관들, 케렌스키(А.Ф. Керенский, 1881-1970)와 사빈코프(Б.В. Савинков, 1879-1925)는 메레쥐콥스키 부부와 개인적으로 관련이 있는 인물이었다.

2월 혁명을 환영한 기삐우스 부부는 그 이후에 온 또 다른 러시아의 변혁인 10월 혁명은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특히 기삐우스는 10월 혁명의 반민주적이고 반국가적인 본질, 즉 폭력적인 ‘쿠데타’에서 볼 수 있는 ‘암흑의 힘’을 본 최초의 지식인들 중 한명이었다. 기삐우스는 10월 혁명의 날을 ‘오, 검고 무섭고 부끄러운 날’이라고 외치면서 10월 혁명 아래 있었던 러시아를 광기에 휩싸인 나라로 자신의 일기에서 묘사했다. 기삐우스와 메레쥐콥스키는 볼셰비키 정부의 전복을 희망했지만, 상황은 이들 부부의 희망처럼 되지 않았다. 이들 부부는 남쪽의 데니킨에서 페트로그라드를 거쳐, 1920년 1월에 폴란드가 점령한 영토를 넘어 민스크에 머물렀다. 백러시아에 있는 동안 이들 부부는 이 지역의 러시아 디아스포라인들을 위해 문학 강의를 했으며 신문 <민스크 통보>(Минский курьер)에 정치 기사를 기고하였다.

기삐우스 부부는 1920년 2월 폴란드 바르샤바로 이주하여 적극적인 정치 활동을 펼쳤는데, 그들에게는 바르샤바에서의 정치 및 문학 활동은 러시아의 자유를 위한 투쟁의 역사적 의미로 가득 차 있었다. 또한 망명 신문 <자유>(Свобода)의 문학부서의 편집자가 되어서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1920년 후반기에 들어가면서 상황은 러시아 디아스포라 문학인들에게 좋지 않게 돌아가고 있었고, 당연히 그들의 사회적 활동과 문학적 활동은 위축되었다. 이 당시에 기삐우스가 경험한 디아스포라 작가의 운명과 작품 창작 및 문학 활동 붕괴는 그녀의 창작 후반기의 작품 주제였는데, 문학-철학적 활동에 참여한 과정과 결과가 기삐우스의 미학적이고 형이상학적 사고 체계와의 상관성을 이 주제를 통하여 충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폴란드에서 운신의 폭이 좁아진 기삐우스와 메레쥐콥스키는 바르샤바를 떠나 파리로 향했다. 그때가 1920년 10월이었다. 기삐우스 부부가 파리에 도착해 공동주택의 문을 열쇠로 열고 들어섰을 때 책, 린넨, 식기 등 모든 것이 제자리에 놓여 있었다. 프랑스 파리로의 귀환은 기쁘우스 부부에게는 제 2의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들처럼, 러시아에서 추방된 많은 러시아 인텔리겐치아들에게는 파리로 가는 것은 자신들이 러시아의 수도 페테르부르크에서 모방했던 오랜 코스모폴리탄적 생활 방식으로 되돌아가는 것과 같았다.


기삐우스와 <녹색램프>

메레쥐콥스키와 기삐우스는 문학-철학학회 <녹색램프>(Зеленая лампа)를 만들었다. ‘녹색’은 기삐우스에게는 종교, 러시아, 인류의 이상에 대한 믿음이었다. <녹색램프>의 시작은 파리의 기삐우스의 부부 집에서 문학 및 철학을 토론하는 일요일 모임이었다. <녹색램프>는 파리 러시아 디아스포라 공동체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녹색램프>의 첫 번째 회의는 1927년 2월 5일 파리에서 러시아 무역 및 산업 연합 건물에서 열렸는데, 메레쥐콥스키는 이 회의에서 ‘우리 램프의 불꽃은 녹색 갓 또는 오히려 녹색 희망을 통해 빛날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학회의 회장은 이바노프(Г. Иванов)가 되었고 즐로빈(Злобин)은 비서가 되었다. 러시아 디아스포라역사에서 <녹색램프> 이름은 자주 등장했다. 1920년대 하얼빈 지역에서 러시아 망명 작가들이 주관하는 예술 모임이 활성화 되고 있을 때, 러시아의 청년 망명객들을 대상으로 조직된 문학 모임의 이름도 바로 <녹색램프>였다. 이 단체는 하얼빈 디아스포라 작가들 중에서 비교적 젊은 세대에 속하는 시인 알렉세이 그릐조프(А.А. Грызов, 필명은 알렉세이 아차이르(Алексей Ачаир)가 주도했는데, 이 <녹색램프>를 주축으로 하여 1926년에 하얼빈 지역 러시아 디아스포라 문학 최대 인기 조직인 <추라예프카>(Чураевка)가 태동되기도 하였다. 


<파리의 ‘녹색램프’의 회원들>

파리의 <녹색 램프>의 모임에서 기삐우스는 소비에트는 진정한 언론의 자유를 배워야한다고 역설하면서, 러시아 망명공동체에는 ‘협소함, 당파성’을 버릴 것을 제안했다. 그리고 기삐우스는 러시아 망명 문학의 주요 과제를 다음과 같은 두 가지로 설정해서 <녹색램프> 회의에서 자주 이야기 하곤 했다. 첫 번째는 ‘고국의 토착 토양에서 분리된 상황에서에서 어떻게 진정한 예술품의 창작이 가능 한가’에 대한 문제였다. 둘째는 ‘추방의 진실과 소비에트 문학에 대한 현명한 접근’이었다. 기삐우스는 자신을 포함한 해외에 거주하는 망명문학가들이 소비에트 문학을 비판 할 때 영리하지 못했음을 인정하면서 피아니스트의 예술적 능력을 판단하기 위해 콘서트에 가서, 피아니스트가 연주를 하는 동안 막 뒤에 총을 든 남자가 ‘이제 왼손 손가락으로!’ 큰 소리로 지시를 내리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함을 강조하면서, 피아니스트의 뒤에 숨어 있는 ‘총을 가진 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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