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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러시아 사실주의 미술의 거장 레핀의 <뻬나트>
분류회화
국가 러시아
날짜2020-06-01
조회수5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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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적으로 1712~1917년까지 제정러시아의 수도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핀란드만의 하류의 삼각지에 건설된 도시였다. 그 도시의 북부해안을 따라서 펼쳐지는 숲과 해변의 광경은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것 같이 아름답다. 1870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헬싱키까지 철도가 건설 된 후, 이 해안을 따라 세련된 여름 별장과 휴양 단지가 건설되기 시작했다.  러시아 사실주의의 국보급 화가 일리야 레핀(И.Е.Репин, 1844-1930)도 핀란드 만을 따라 형성된 아담한 시골 마을인 현재의 <레삐노>(Репино/과거에는 쿠아칼(Куоккал)이라 불림)에서 2헥타르의 땅을 사들였다. <레삐노>는 황실미술아카데미(Императорская Академия художеств)의 교수였던 레핀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출퇴근이 용이한 뛰어난 접근성이 큰 장점으로 꼽히는 지역이었다. 동시에 <레삐노>는 조용함과 고요함으로 고독을 즐기는 최적의 장소라는 점에서도 이 뛰어난 예술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레핀은 구입한 영지에 <뻬나트>(«Пенаты)라고 불리는 자신만의 예술적인 거대한 공간을 만들었는데, ‘뻬나트’는 고대 로마신화에 등장하는 가정에 있는 ‘아궁이신’으로서, 레핀이 직접 이름을 붙였다. <뻬나트>영지에 2층으로 된 집을 건설한 레핀은 죽을 때까지 이곳에서 30년간 살았는데, 특히 1907년 레핀이 미술아카데미의 교수직을 거부 한 후 그는 거의 <뻬나트>를 떠나지 않았다. 이 영지의 집을 포함한 <뻬나트> 전체는 현재 매년 약 4 만 명의 관람객이 방문하는 아주 유명한 박물관 복합체(박물관+산책로를 포함한 자연적 공간+레핀의 무덤)로서, 세계 유네스코 재단이 지정한 세계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뻬나트'의 레핀의 집(박물관)>


<뻬나트>의 역사와 의미

현재 박물관의 소장품 전시관으로 사용되는 <뻬나트>에 만들어진 집은 처음에는 1층으로 만들어졌는데, 사용하다 보니 작품을 그려야 하는 미술가의 작업과 일에 적합하지 않았다. 그래서 수년이 걸린 확장공사를 거쳐, 발코니, 베란다 및 지붕이 가미된  2층짜리 큰집으로 변했다. 재미있게도 이 집의 확장공사는 무계획으로 진행되었는데, 그때그때 공간의 목적에 따라 레핀의 직감적인 의견으로 건설되었다. 따라서 이 집은  다소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는데, 모더니즘적 형태와 고대 러시아 목조 건축의 특징이 결합되어있다. 다행이(?) 집의 내부로 많은 빛이 들어오고 환기는 정말 잘 된다고 한다. 이 집에서 1930년도에 사망한 레핀은 <뻬나트>의 영지에 묻혔는데, 관람객은 집을 지나 조그만 오솔길을 따라서 올라가면 레핀의 무덤을 볼 수 있다.

<뻬나트>는 역사의 수레바퀴에 짓눌려 많은 곡절을 겪었다. 1917년 혁명이후, 이곳은 다시 핀란드 공화국에 편입되었는데, 1922년 이래 <뻬나트>의 실제 소유주는 레핀의 장녀인 베라(В.И.Репина)가 되었다. 소비에트 정부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레핀은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으며, <뻬나트>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시기에 살아남았다. 레핀의 사망이후, 그의 가족들은 헬싱키로 대피하면서 화가의 고문서와 그림들을 핀란드로 가져갔다. 한동안 문이 닫힌 <뻬나트>는 1940년에 다시 문을 열었지만 오래 가지 못했는데,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 때문이었다. 전쟁 중 <뻬나트>는 영지 전체가 화마에 사라지는 참담한 상황을 맞이했는데, 천만 다행으로 전쟁 초기에 <뻬나트>에 남겨진 그림 및 일상 물품, 가구 중 일부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예술 아카데미로 옮겨졌다


<'뻬나트'의 정문>

 
2차 세계대전 후, <뻬나트>는 복원작업을 거쳐 1962년 6월 24일에 다시 문을 열었다. 복원은 어렵게 구해진 건물의 부분과 사진을 기초로 하여 진행되었다. 복원 공사 중 초기 <뻬나트> 건설에 사용되었던 일부 가구를 잃어 버려, 난관에 빠진 경우가 있었는데, 어쩔 수 없이 19세기 말 당시의 외형이 비슷한 가구들로 대체되었다. 이렇게 해서 총 10개의 방이 복원되었는데, 원래 상태로 되돌려 진 것은 아니었다. 아쉽게도 보존된 사진 등의 고증자료가 없어서 복원되지 못한 방들이 남아 있었는데, 그 공간들은 박물관의 전시실과 박물관을 관리하는 직원의 사무실로 개조되었다. 사실 1900년대 초의 <뻬나트> 사무실은 레핀의 영지에서 가장 늦게 증축된 장소였는데, 레핀에게는 아주 중요한 공간이었다. 이 방은 예술가가 <뻬나트>에서 체류한 기간 동안 이루어진 작업과 개인적 삶에 대한 회고의 필요성을 느꼈을 때 추가로 만들어 졌는데, 이 방에서 인생 말년에 레핀은 손님들에게 자신의  삶에 대한 다양한 에피소드를 이야기하곤 했다.

1903년 레핀의 가족이 이 영지에서 영구적으로 살기 시작했을 때, 이 영지는 레핀과 그 가족들의 부단한 노력을 통해 기묘하지만 멋진 집, 영지 전체를 낭만적인 분위기로 재현하는데 일조한 조그만 오솔길, 연못 등을 만들어서 <뻬나트> 전체를 아름다운 공원으로 탈바꿈시켰다. 특히 레핀은 자신의 <뻬나트>로 들어오는 정문 건설에  엄청 신경을 써,  그 동화의 나라로 입장하는 분위기를 자아내는 나무 울타리 형태로 문을 만든 것은 유명한 일화다. 육체노동을 좋아했던 레핀은 자주 <뻬나트>의 연못을 만들기 위해 땅을 파거나 이 영지의 나무에서 떨어지는 낙엽을 쓸면서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박물관의 소장품 중에서 노동하는 레핀의 사진을 볼 수 있다. 또한 레핀이 노동할 때 사용한 지팡이와 삽도 현재 박물관에 소장되어, 직접 눈으로 확인 할 수가 있다.

현재 <뻬나트>에는 복제품을 포함한 레핀의 그림 526점, 기념 항목 579개를 포함하여 총 1,099개의 전시물이 잘 정돈되어 전시되고 있다. 박물관에 진열된 전시물을 통해 관람객은  러시아의 역사에 몰입할 수 있을 뿐 만 아니라 레핀의 성격, 라이프 스타일, 레핀의 가족 및 지인에 대해서도 잘 알 수 있다. 관람객은 또한 마치 시간을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레핀의 영지에 손님으로 초대받아, 위대한 예술가의 일상적인 삶과 조우하면서, 그 위대한 예술가가 예찬한 전원의 삶을 느낄 수 있는 기회도 얻고 있다. 이러한 특별한 감상은 다른 박물관에서 찾을 수 없는 <뻬나트> 영지의 또 다른 가치이다.

<뻬나트>의 수요일 모임

19세기 사실주의 예술을 대표하는 화가이자 인물화의 명장인 레핀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44km 떨어진 <레피노>마을에 살았다는 사실은 동시대에 제정러시아의 수도에 살았던 시민들에게는 행운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메트로폴리탄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는 공간속으로, 러시아 미술 역사상 가장 재능 있고 성공적인 화가였던 레핀이 30년 동안 예술혼을 불태운 <뻬나트>로 ‘핀란드역’에서 전동기차를 타면 약 30분 만에 갈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동열차를 타고 가면서 만나는 아름다운 러시아의 자연, 창밖을 통해 무성한 나무들로 둘러싸인 풍요로운 숲을 보는 것은 대도시에 사는 사람이 쉽게 얻을 수 없는 또 다른 축복이었다. 매주 수요일마다 이 행복한 기분을 느끼면서 ‘레피노’역에 내려, <뻬나트>로 가서 레핀과 그의 가족, 그가 작업하는 환경을 볼 수 있었다. 당시 레핀가족들은 수요일 오후 3시부터 지인 및 이웃은 물론 낯선 사람에게조차 <뻬나트>를 개방하였다.  

<뻬나트>의 ‘수요일모임’은 레핀의 두 번째 부인 나탈리아 노르드만 (Н.Б. Нордман/1863-1914)이 관리하였다. 나탈리아는 그 당시 여성치곤 보기 드물게 톡톡 튀는 인물이었다. 채식주의자에 겨울에는 모피도 입지 않았던 나탈리아는 <뻬나트>에 해군 제독으로 경력을 마친 그녀의 아버지의 깃발을 보존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탈리아는 해군에서 엿 볼 수 있는 정연한 질서가 영지에서 유지되도록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수요일에 손님을 그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신호로 안드례에프의 깃발을 올렸다. 나중에 이 깃발은 ‘페나트’라고 적힌 파란색 천으로 대체되었는데, 현재 박물관의 현관 오른쪽 복도에 소장되어 있어서 관람객은 이 파란 깃발을 직접 볼 수 있다.


<'뻬나트'의 수요모임 깃발>


특별한 취향을 가진 나탈리아답게 ‘수요일모임’에 아주 특별하게 손님들을 맞이했는데, 이곳을 방문하는 손님이 스스로 모든 것을 하는 ‘자발적 노동’의 개념이 도입되었다. 그녀는 평소에 사람들의 노동을 착취하는 것을 창피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레핀의 영지를 방문하는 손님들은 <레피노>역에서 <뻬나트>까지 시종의 도움 없이 스스로 찾아 와야 했다.  그리고 겨우겨우 힘들게 <뻬나트>를 찾아온 손님들은 창이 있는 작고 밝은 집의 현관에서 하녀나 문지기의 도움 없이 외투를 벗어야 했다. 왜냐하면 현관 입구에 포스터가 하나 붙어 있었는데, 거기에 <자발적 노동. 코트를 벗고 덧신을 신는다. 식당 문을 직접 여세요. 거기에 재미있고 더 강하게 치세요>라고 적혀있었기 때문이었다.

나탈리아가 1909년 파리에서 가지고 온 대나무로 만든 스탠드의 창문에 달려 있는 청동으로 만든  접시모양의 초인종을 손님들이 강하게 치게 되면 <뻬나트>의 안주인은 손님들이 도착한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방식의 ‘자발적 노동’은 <뻬나트>의 상징이 되었다. 이 ‘수요일모임’에 자주 방문하는 사람 중에 화려하고 재치 있는 입담을 자랑하는 레핀의 친구이자 이웃인 코르노 추곱스키(К.И.Чуковский)가 회상한 것처럼, 레핀은 ‘그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는 것을 증오했으며, 그의 외투를 들어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도 재수 없어 했다.’ <뻬나트>현관으로 들어온 손님들은 일반적으로 현관과 이어진 작은 식당 (현재는 현관을 볼 수 있는 전시실)으로 이동하면서, ‘자발적 노동’의 규율에 따라서, 식당문도 직접 열어야 했다. 이 식당에서 <뻬나트>의 안주인은 수요일을 제외하고 점심식사를 하였다.

    
<뻬나트>의  주요 소장품들

박물관의 관람에서 제일 중요한 전시관은 <뻬나트>의 집에 마련된 첫 3개의 방이다. 이 방들은 초기 건설 당시의 환경과 가구들을 원래대로 배치하였지만, 아쉽게도 내부 장식은 복원되지 않았다. 이 방들에 전시된 다큐멘터리 자료들을 통해 관람객은 레핀의 삶과 창작의 세계를 엿볼 수 있다. 특히 박물관에 소장된 복제된 그림들 중,  황실 아카데미에서  금메달을 수상한 <야이로의 딸의 부활>(Воскрешение дочери Иаира)의 그림부터 시작하여 레핀의 전체 경력을 추적 할 수 있는 <쿠르스크 현의 십자가 행렬>(Крестный ход в Курской губерни), <볼가 강의 배 끄는 인부들>(Бурлаки на Волг),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Не ждали), <국무원 회의>(Заседание Государственного совета)와 같은 가장 중요한 작품들도 관람객은 감상할 수 있다.

 

<'뻬나트'의 박물관 내부>

 
박물관의 첫 번째 방에서 관람객은 전시물을 통해 예술가 레핀의 형성과정에 대해 알게 된다. 레핀은 황실아카데미에서 공부하면서, ‘뛰어난 화가이자 탁월한 미술비평가’였던 이반 크람스코이(И.Н.Крамской)의 제자가 되었다. 크람스코이는 1870년에 민족주의 비평가 블라지미르 스타소프(В.В.Стасов)와 함께 ‘이동전람파’를 결성하였는데, 이 유파는 ‘보통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보여줌으로써 사회적 관심을 사회정의 대한 요구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예술가의 의무’라고 설파하는 화가들의 공동체였다. 레핀은 1874년에 <이동전람파>의 회원이 되었으며, 그의 작품은 이 사실주의 유파의 관심의 초점이 되었다. 레핀은 역사적 사건과 일상을 화폭에 담는 장르에서 러시아미술사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길 정도로 명작을 많이 남겼으며, 동시에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 러시아 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초상화의 대가였다. 작가, 과학자, 비평가, 작곡가등 러시아 사회의 각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레핀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부탁했는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레프 톨스토이(Л.Н. Толстой),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М.П. Мусоргский), 바실리 수리코프(В.И. Суриков), 스타소프,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А.К. Глазунов)등이 있다. 레핀은 초상화 작업을 할 때 모델이 되는 인물의 정확한 개인적 특성이 드러나게 표현했다.
 


<초상화 '무소르그스키'>

세 개의 방을 연결하는 복도에도 많은 전시품이 진열되어 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복도 한 쪽 귀퉁이에  서 있는 옷걸이인데,  레핀의 남성용 웃옷, 모자와 ‘렘브란트식’의 푸른 베레모가 걸려 있다. 흥미 있는 것은 옷걸이에 걸린 예술가의 웃옷은 레핀을 찍은 많은 사진들에서 볼 수 있고, 조각가 마트베이 마니제르(М.Г.Манизер)에 위해서 만들어진 이 옷을 입은 레핀의 흉상은 <레피노>마을의 중심지와 레핀의 고향인 추구에프(Чугуев)에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복도의 창문 옆에는 나무로 된 궤가 놓여 있는데, 레핀은 1920년대에 하녀 민 라우탄넨(Мин Лаутанен)에게 결혼 선물로 이 오래된 장방형의 상자를 주었다. 이 궤는 1962년 핀란드에서 <페나트>로 되돌아왔다. 복도에 걸려 있는 거울의 맞은편에는 모직 식탁보로 덮인 상자 안에 가방이 있는데, 그 속에는 레핀이 <뻬나트>를 떠나 여행을 할  때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화가에게 필요한 모든 물건들이 보관 되어 있다. 이 낡은 가죽 가방은 레핀에게는 아주 소중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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